한국영상기자협회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영상기자 협회보

NEWS

지속가능경영
  • 태극 여전사, 월드컵 신화를 이루다!
    태극 여전사, 월드컵 신화를 이루다! 지난 7월 28일, 20세 이하 여자월드컵에서 파란을 일으키며 예상외의 성적을 거두고 있는 한국 대표팀의 취재를 위해 급히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0시간여의 비행 끝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고, 다시 자동차로 4시간을 달려 한국 선수단이 머물고 있는 보훔에 도착했다. 보훔은 독일의 북서부 지역의 광공업 도시로 정대세가 속해있는 ‘VfL보훔’으로 유명한 도시이다. 실제로 독일과의 경기가 있던 날, 정대세 선수가 관중석에서 한국팀을 응원했다. 독일과의 경기 전날, 한국 선수들의 동정을 취재하기 위해 숙소로 향했다. 여름비 치고는 적지 않은 양의 비가 내리는 와중에 최인철 감독과 지소연 선수를 비롯한 한국 대표팀을 만날 수 있었다. 주최국 독일과의 경기를 앞두고도 긴장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씩씩하고 자신감 넘쳤다. 같은 피가 흐르는 한국인으로서 동질감을 느꼈다. 월드컵 사상 최초로 4강을 넘어 우승이라는 큰 사고를 칠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들기도 했다. 드디어 독일과의 준결승전, 사실상 결승전과 같은 홈팀과의 경기. 준결승전만 이긴다면 우승도 노려볼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문턱은 높았다. 체격, 체력, 발놀림, 스피드 등 모든 면에서 독일이 우세했다. 거기에 응원열기까지 더해지면서 우리 선수들의 발목을 잡았다. 전후반 60여분 동안 무려 4골을 내주며 독일의 파상 공세에 무너져 가는 듯 했다. 그러나 후반 19분, 날쌘돌이 지소연의 슈팅이 독일의 골문을 갈랐다. 한국팀이 살아있다는 것을 바로 보여준 것이다. 지소연의 골은 3-4위전 승리를 보여주는 복선과 같은 골이었다. 그러나 심판의 종료 휘슬과 함께 전광판에는 5:1의 점수가 보였다. 한국 선수들은 억누르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음을 쏟아냈다. 함께 위로하던 코칭스태프도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선수들을 다시 만난 곳은 다음 경기가 열릴 빌레펠트 경기장이었다. 독일에 지고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던 선수들 얼굴에서 웃음을 찾을 수 있었다. 이 날은 따로 연습 경기를 하지 않고 체조와 달리기로 컨디션을 조율했다. 선수들에게 조금이나마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코팅 스태프의 배려라고 했다. 콜롬비아와의 경기가 열리는 빌레펠트 구장, 3-4위전과 결승전이 함께 열리기 때문에 관중석은 경기 시작 훨씬 전부터 만원이었다. 경기 시작과 함께 주도권을 잡은 한국은 경기 내내 콜롬비아를 몰아 붙였다. 독일전과는 사뭇 달랐다. 모든 것이 한국팀 위주로 돌아갔고, 콜롬비아는 한국팀을 막아내는데 급급했다. 후반 3분, 지소연의 발끝에서 승리를 알리는 쐐기골이 터졌다. 6경기 동안 8골을 뽑아낸 지소연은 득점 2위상인 실버 부츠를 받은데 이어, 기자단 투표에서도 최우수 선수 2위로 뽑히는 영예를 안았다. 우리팀은 깔끔한 경기매너를 보여준 팀에게 주어지는 페어플레이상을 받기도 했다. 세계 3위라는 초유의 성적을 거둔 대표팀이 귀국하는 날, 인천공항 입국장에는 100여명의 취재진이 카메라 플래쉬를 터뜨렸다. 청와대는 대표팀을 초청해 홍보성 이벤트를 진행했고, 경북의 모 지자체장은 지역 출신 선수에게 격려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황무지같은 환경에서 동메달을 딴 선수들과 코칭스태프에게 더 큰 보상도 아깝지 않다. 그러나 일회성, 전시성 행사에 선수들을 불러 사진만 찍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어느덧 기억 속에서 잊혀져버린 동계올림픽의 영웅들을 생각해보면 심히 걱정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월드컵 사상 첫 동메달의 쾌거, 그것은 선수, 코칭스태프, 국민 모두가 하나되어 이룬 노력의 산물이었다. 이 관심이 좀 더 활활 타올라 여자 축구 발전에 이바지했으면 하는 게 개인적인 바람이다. 김태훈 기자 / SBS 영상취재팀
    2010-09-07
  • 손명환 기자 추도사
    보고 싶은 선배. 선배를 좋아하던 이들이 이렇게 많고 선배를 평생 그리워 할 이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선배는 늘 말이 적었습니다. 그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곤 했습니다. 후배들도 싫어하는 일이 있으면 마다하지 않았고, 힘든 취재가 있으면 먼저 나서서 앞장섰습니다. 그러다 보니 몸도 상하고 마음도 피곤했겠지만 선배는 늘 따뜻한 미소로 후배들을 이끌고 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배가 무척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젊은 후배들도 따라가지 못하는 지리산 자락을 산사람처럼 누비고 다니며 무너진 산을 찍고, 버려진 쓰레기들을 찍고, 멧돼지들을 쫓아 다니곤 했습니다. 그러다 몸이 상해 수술까지 하면서도 여전히 힘든 일에 앞장을 섰고 자신보다는 조직을 먼저 생각하고, 후배들을 먼저 생각하고, 또 KNN의 뉴스와 프로그램들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런 선배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카메라를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일은 저희를 너무나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손 선배, 선배의 고향은 언제나 지리산이었습니다. 취재라도 할 일이 있어 그 곳에 가면 선배의 표정은 어린아이처럼 환해졌고, 길을 가다가도 선배를 알아보는 이들에게는 차에서 내려 일일이 인사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제 그 고향 지리산을 선배는 마음껏 오르고 있을 것 같습니다. 친구들과 멱 감던 시내를 지나 토끼며 노루를 쫓던 계곡들, 또 선배의 손길을 기다리는 감나무 밭까지 늘 돌아다니며 잘 있는지 찬찬히 둘러보시겠지요. 선배, 이제는 그렇게 편안히 계십시오. 선배가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던 카메라와 영상들은 이제 우리가 맡겠습니다. 선배, 이제 카메라를 움켜쥐었던 손을 편안히 놓으십시오. 그리고 조금 먼 곳으로 조금 일찍 떠나더라도 우리를 사랑했던 따뜻한 마음과 환한 미소는 거두지 말고 남겨 두시기 바랍니다. 그 대신 먼 훗날 다시 만나면 꼭 선배에게 묻겠습니다. 뭐가 그리 급해서 먼저 떠났는지…. 선배를 사랑하는 후배들이 올립니다. 2010년 8월 13일 선배를 사랑하는 KNN 후배 일동
    2010-08-19
  • 슬픔을 같이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저희 KNN카메라기자 고 손명환 기자는 8월 10일 새벽 4시경, 태풍 "뎬무"취재차 민락동 어촌계에서 취재하던 중 바다에 빠져 119구조대에 구조됐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8월11일 아침 7시 운명했습니다 고인은 사고 당시에도 손에서 카메라를 놓지 않았습니다 8월 13일 아침 9시, 동료들의 슬픔과 오열속에 KNN본사에서 회사장으로 영결식을 마친후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사무실과 편집실을 둘러본뒤 오후 1시경 영락공원에 고인을  모셔놓고 범어사에서 이뤄진 49제를 위한 반혼제를 마치고 내려왔습니다 협회장님이하 각계각층에서 빈소를 찾아 주셨고 모든분들께서 물심양면으로 배려해주신 덕분으로 고인의 마지막 가시는길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슬픔을 같이 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 2010. 8. 15 영상제작팀 올림.
    2010-08-15
  • 고 손명환 기자 빈소에 다녀왔습니다.
    고 손명환 기자 빈소가 있는 부산의료원 영안실에 부산 문화방송 보도국 국장님 ,장기홍 영상취재팀장과 함께 보도국을 대표해서 먼저 다녀왔습니다. 오후 4시 경 도착했는데 겨우 빈소가 마련되었습니다. 아들을 잃은  노모가 목 놓아 울고 계셨고 두 딸과 막내인 아들은 그냥 멍하니 정신을 놓고 현실인지 꿈인지 모르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었는데... 목이 메여서 말이 나오지 않아 초등학생인듯한 아들만 조용히  안아주었습니다. 부산지역 기자들도 속속 문상을 왔고 부산 지역신문사 사진기자회, 진주, 부산문화방송,한국방송 등 타사가 보낸들의 화환들이 보였습니다. 한국기자협회장도 방문하기로 했다고 하네요.. knn영상취재팀장을 비롯한 팀원들이 반갑게 맞이 해주셨지만  충격과 슬픔에 말씀들이 없어서 ...... 마음은 있지만 올수 없는 분들은 아는 영상기자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전화나 문자가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2010-08-11
  • 손명환기자의 순직을 바라보며.....
    손명환 기자의 순직을 바라보며..... 힘들 정도로 질긴 무더위에 태풍이 온다기에 조금 기다려졌습니다. 오늘도  부산 경남지역엔 비바람이 아침부터 더 세게 몰아칩니다. 어제부터  잠도 오지않고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어제 아침 일찍 손명환 기자의 사고 소식을 듣고 절망하다가  호흡은 한다는 소식에 간절히 기도 했습니다 .제발  무사하기를  .. 오늘  아침 잠도 오지 않고 해서  일찍 출근해서 바다로 태풍 취재를 혼자 나갔습니다..사무실에 있으면 더 슬프고 힘들 것 같아서... 마침 대구 문화방송 마승락 선배의가  전화왔습니다. 어떻게 되었고 ..사실이냐고. 참았는데 ..갑자기 울음이 나올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지역사 일이지만 정말 자기 일처럼 걱정 해주고 위로 해주는 선배가 고마웠습니다.. 잠시 당시 기억을 더듬어 보겠습니다 .월요일 ,어제는 제 숙직근무였습니다. 폭우와 낙뢰로 지하철이 운행 정지되는 일이 있어 사고 역에서 밤 12시경에 우연히 만났습니다. 평소 같으면 인사도 하고  서로 짧은 격려도 하는데 그날따라 태풍 스케치 하는라 짧게 손만 흔들고 총총히 사라졌습니다.. 그 게  마지막이 될지는  정말 몰랐습니다. 다음날 새벽 광안리 수변에서 태풍 취재하다가 그만 파도에 휩쓸려서 ....119구조대에 의해서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이미 위중한 상태 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항상 우리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최대한 그 위험을 줄이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자신이 소속된 회사마다 제각각 상황이 다르고 시스템도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디오맨 문제는논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디오맨 문제는 영상기자의 안전의 문제고 생사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1인 1오디오맨이 정착된 회사가  KBS,MBC,SBS 본사 및 주요 지역사 정도이고 대다수 지역 민방 및 뉴스 전문 체널은 오디오맨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지역 민방 중 제일 규모가 크고 수익이 좋다는 KNN을 보면 부산지역에 8의 영상기자가 있는데 4명의 오디오이 낮에는 근무하고 야간 숙직시엔 기사님의 도움을 받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다행히 ,어쩌면 당연하지만  부산MBC, KBS부산은 1인 1오디오맨이 정착되어 있어서 현장에서 KNN 만날때 마다 안전에 대해 걱정하고 고민하고 했었습니다. 실제로 몇년  전 폭우취재 때에도 영상기자가   오디오맨없이 취재하다 맨홀에 빠져서 입원하는 등 안전사고 의 위험성이 제기되었는데 ....결국 이런 큰 사고 까지 발생하니까 더욱더  마음이 아프고 답답합니다. 사람의 생사는 하늘의 뜻이라고 하지만 예견되는 위험을 없애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닐까요... 카메라기자 협회도 영상기자들의 안전을 위한 조치와 노력이 좀 더 필요하다고 봅니다..손명환 기자의 순직은  나의 일이며 모든 동료들에게도 올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글의 쓰는 동안에 대구 경북 카메라기자회에서 전화가 왔네요 ..마음을 전하겠다면 계좌번호을 물어 왔습니다 .따뜻한 위로의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손명환 영상기자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도 손명환기자의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동료로 기억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아이들에게 이야기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고  손명환 기자의 명복을 빌며 ...회원님들의 따뜻한 관심도 감사합니다. 부산 문화방송 이윤성 올림
    2010-08-11
  • 2010 남아공 월드컵, 한국 축구 가능성 보여줘
    2010 남아공 월드컵 인천에서 두바이를 경유해 24시간 만에 도착한 요하네스버그는 서울보다는 조금 서늘한 날씨였다. 낮엔 반팔 차림도 가능하지만 저녁이면 쌀쌀해졌다. 그래도 겨울이라기보다는 늦가을정도로 구름 한 점 없는 파란하늘에 태양이 눈부셔 선글라스를 껴야했지만 땀이 나지 않아서 좋았다. 개막식전 북한과 나이지리아 평가전을 요하네스버그 인근 빈민촌 안에 있는 탬비사지역에서 개최했다.  안 그래도 불안한데... 일단 현지 흑인기사와 함께 미니버스로 내비게이션에도 나오지 않는 경기장으로 출발했다. 2시간이 지나 결국 현지 경찰의 도움으로 마쿨롱 경기장에 도착했다. 경기장은 벌써 마을 입구에서부터 길게 늘어선 줄로 휘감겨있었다. 도저히 국제적 경기가 열릴 것 같지 않은 빈민촌에선 입구에 즐비한 사람들과 경찰들이 입장권을 확인하며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구경하러온 관중은 3만 명이 넘는데 1만6천장의 입장권을 판매했으니 당연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몰려든 사람들에 밀려 정문이 열렸고 밀려드는 인파에 넘어지고, 깔려서 부상자가 속출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그리고 경기 중엔 관중석 난간이 파손되어 경기가 중단되는 사태까지 발생했지만 경기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2:2 무승부) 며칠 후 북한팀 공개훈련 및 기자회견 취재차 도착한 탬비사에서는 같은 Korea라는 이유로 북한축구에 대한 평가와 정대세선수에 관한 질문을 외신으로부터 많이 받았다. 나도 북한 팀을 취재 온 기자인데, 북한팀 공식기자회견이 끝나고도 많은 시간동안 외신들의 질문공세를 받은 나는 지칠 정도였다.   요하네스버그에서 1600Km가 넘는 거리로 비행기로는 1시간 40분 정도로 소요되는 포트엘리자베스는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씨였다. 호수를 끼고 있는 넬슨만델라 베이 스타디움은 아름다워보였다. 한국의 예선 첫 경기인 그리스전 경기 당일 매일 구름이 잔뜩 껴 있던 하늘은 모처럼 파란하늘에 동그란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올라오고 있었다. 너무도 동그란 태양을 한참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벅에서 차량으로 18시간 만에 도착한 교민들은 꽹과리와 태극기를 앞세우고 붉은악마응원단과 함께 넬슨만델라 베이 경기장을 향해 현지인들의 박수를 받으며 대한민국의 12번째 선수로서 향하고 있었다. 비록 필드는 아니었지만 선수들 보다 더 많은 열정을 쏟아냈다. 전반 7분 이정수의 골에 환호하던 관중들은 4만 7천이 입장하는 경기장을 붉은악마로 만들어 버렸다. 웅웅거리던 부부젤라 소리도 꽹과리 가락에 맞춰 대한민국을 응원했다. 51분 박지성이 골이 터지면서 경기장은 승부를 떠나 모두가 하나가 되었다. 침묵하던 그리스 응원단도, 16강을 간절히 바라던 대한민국 응원단도 서로를 위해 모두 함성을 질렀다. 종료 휘슬이 울리자 경기장은 한국의 홈구장이 되었다. 꽹과리를 앞세운 농악대와 그 뒤를 따르는 흑백의 물결들... 경기장 앞에서 한바탕 놀고 호수를 끼고 행군을 시작했다. 이 순간 포트엘리자베스는 한국이었고,  희망의 땅이 되었다. 도착 후 갑자기 추워진 요하네스버그가 얼마나 추웠던지 쫄쪼리와 장갑을 껴입어야 할 정도로 엄청 추웠다. IBC내에서는 얼음이 얼었다.  우리는 따뜻한 남쪽나라라고 하지만 여기는 북쪽으로 가야 따뜻해진다. 남반부와 북반부의 차이일까? 낮은 언덕이 몇 개있는 사커 시티 주변은 스탠딩을 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한국 8시가 낮1시 위치에 따라 다르지만 가까운 스탠딩 포인트는 항상 역광이었다. 해는 경기장 우측에서 좌측으로 졌다. 차를 타고 나가면 되는데 주위엔 사커시티가 잘 보이는 거리엔 높은 건물이 없었다. 언덕조차도 찾기 힘든 평지는 여기가 정말 해발 1700m 고지인가 했다. 오후 5시면 어두워져 버린다.   8만8천명이 모인 경기장은 아르헨티나의 파란색으로 물들었다. 5층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한국응원단은 너무 초라해 보였다. 관중석 좌우로 나눠져 있고 가끔 중간 중간 빨간 티셔츠가 섞여있었다. 입구에서 무료로 나눠준 붉은 티셔츠를 입고 있는 외국인도 가끔 보였다.   경기장에서는 벌떼소리(웅웅)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경기장에 들어선 태극전사들도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한국 팀은 어처구니없이 실점을 당했다. 한국응원단의 허탈한 모습과 환호하는 아르헨티나 응원단을 번갈아 보여주는 전광판을 부셔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운하루였다.  사커시티는 말 그대로 악몽의 현장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16강을 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나이지라아를 이기거나, 이기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비기면 되 모든 국민의 소원인 원정 16강의 희망은 있었다. 우리는 그런 희망을 품고 더반으로 향했다. 더반은 남아공화국에서 제일 따뜻한 곳으로, 겨울인데도 낮 기온은 26도 까지 올라가는 해양 관광지이다. 더반은 인구의 1/3이 인도출신이고  아프리카에서 제일 다혈질인 나이지라아인들이 제일 많이 모여 사는 곳으로 남아공에서도 '더반은 곳 나이지리아다' 할 정도로 현지 경찰들도 조심하는 곳이다. 한국 원정응원단도 만일을 위해 최소인원으로 줄였다. 해안선을 끼고 있는 더반 경기장은 아름다운 곳이다. 결전의 날 더반 저녁 8시 30분(한국 새벽3시 30분) 경기 시작 후 한국 골망을 가르는 첫 골에  ‘어’ 소리 한 번 못 지르고 붉은악마들은 주저앉았다. 하지만 침묵도 잠시였다. 붉은악마들은 '괜찮아'를 외치며 다시 열렬히 응원하였다. 잠시 후 동점골과 역전골이 터지자 경기장안의 붉은악마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웃었다. 그때의 붉은악마의 모습은 진정한 12번째 태극전사였다. 김남일의 반칙으로 만들어진 나이지리아의 페널티킥에서는 정성룡을 외쳤고, 동점상황에서 남은 15분 동안은 정말 모두 하나가 되어 모두 골대를 지켰다. 야쿠부의 실수가 응원단의 힘이 되었고 시끄럽던 부부젤라 소리를 잠들게 만들었다. 종료휘슬이 울린 순간 잠깐의 정적후 곧이어 터진 함성소리는 내가 이 순간 새로운 역사의 순간에 있다는 것을 만끽하게 하였다. 우리의 16강 상대는 우루과이로 킴벌리라는 조그만 시골마을에서 훈련중이였다. 보통의 기자회견장은 감독과 선수가 동시에 같이 나와서 질문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우루과이는 감독혼자 하고 들어간 후 선수를 불러주었다. 그래서 인터뷰보다 선수를 기다리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포를란과 수와레즈는 처음 보는 선수였다. 수와레즈는 명색이 공격수라는데 체격이 작아서 부딪히면 넘어질 것 같아보였다. 주전이라기보다는 후보선수정도로 보였다. 그런 선수에게 2골을 내주며 대한민국의 8강꿈이 깨져버리다니 너무나 아쉬웠다. 비록 8강은 가지 못했지만 한국축구의 가능성을 보여준 월드컵이었다. 지금도 월드컵 4강이 아닌 결승전에서 웃는 날을 위해 어린 태극전사들은 열심히 뛰고 있다. 언젠가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ps) 흑인들은 가발과 사진을 최고로 친다. 카메라를 잡고 있으면 사진을 찍어달라고 포즈를 잡는다.       심지어는 ENG를 보고 반대쪽도로에서 자기를 찍어달라고 온갖 제스처(?)를 한다.         나도 똑같이 손가락으로 인터뷰를 하자고 부르면 시커먼 흑인들이 2~3명씩 넘어와 부드럽게 이야기를 한다.       너무 솔직담백하고 진솔한 우리가 듣던 다른 세상을 느낄 수 있었다.      강동철/SBS 영상취재팀 ※ <미디어아이> 제74호에서 이 기사를 확인하세요 미디어아이 PDF보기 바로가기 링크 /bbs/zboard.php?id=media_ey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42
    2010-07-19
  • 남아공 월드컵 거리응원 취재기
    남아공 월드컵 거리응원 취재기 2002년에 고3이었던 나에게 거리응원은 부러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이유로 함께 어우러져 웃고 울었던 그날의 기분을 나는 그저 말로만 전해 들었을 뿐.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되어서야 비로소 말로만 듣던 거리응원을 처음 경험하게 됐다. 그때만 해도 서울광장이 만들어지기 전이라 응원단들은 광화문 일대를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모여들었다. 스크린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광화문에 자리하고  있는 신문사들의 광고용 전광판을 보며 응원을 했었다. 그땐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 때문에 엉덩이가 쑤셨고 너무 높이 달려있는 전광판 때문에 목이 아팠지만 순수한 마음들이 모여 응원한다는 즐거움이 넘쳐났다. 이번 월드컵 응원전처럼 경기시작 전에 화려한 공연은 없었지만 거리 응원이 대기업들의 상술에 이용당한다는 괜한 찝찝함은 느끼지 않아도 됐다.   그 이후 거리응원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2006년 독일월드컵을 거쳐 2010 남아공월드컵에 이르면서 거리응원전은 2004년 이전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훨씬 좋은 스크린에 경기 시작 전부터 흥을 돋아 주는 공연들. 응원전을 후원하는 방송사, 기업, 그리고 월드컵 응원가를 부르는 가수들. 월드컵 거리응원 특수를 노린 각각의 이익집단들이 이번 2010월드컵에선 월드컵 시작 전부터 들끓었다. 급기야 붉은 악마들은 서울광장 응원을 포기하고 다른 장소를 선택하겠다는 극단(?)의 조치까지 내리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상업성에 반발한 붉은 악마의 노력과는 별개로 각 기업의 욕망에 따라 거리응원 장소도 늘어났다. 그 많은 장소 중에서 거리응원의 원조 격인 서울광장 취재가 맡겨진 것은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비가 오든 상술에 이용당했든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였다. 경기 시작 12시간 전부터 와서 자릴 잡고 앉아있는 사람들이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경기시작 직전 광장을 넘어서 도로까지 꽉 찬 것을 보니 미리 와서 자릴 잡는 심정도 알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도 12시간 전부터 기다리는 것은 심했다고 생각하지만) 경기 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기다림에 지쳤던 사람들도 다시 힘을 내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힘을 내 응원을 시작하면서 우리 취재진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경기 시작 두 시간 전부턴 광장 한 켠에 마련된 무대가 시끄러워졌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 무대 위에서 월드컵 응원가만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니란 점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때맞춰 응원가를 만들지 못한 가수들은 응원가가 아닌 자신의 최신 곡을 부르고 있었다. 심지어 그 자리에서 이별노래를 부르는 가수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국 대표팀의 승리를 기원한다는 그들의 말이 순수하게 들리지 않았다. 이별노래가 나오는 와중에도 응원을 나온 시민들은 열심히 응원했다. 대한민국을 외치며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니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카메라가 가까이 가기만 해도 “YTN이다.”라며 더 밝은 표정으로 더 신나게 응원을 해 주었다. 그 중에는 한국인만 있는 것이 아니란 점도 이전의 거리응원과는 다른 것이었다. 한국을 찾은 많은 외국인들이 거리응원이라는 한국의 독특한 문화를 즐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대한~민국”이라고 외치는 그들의 응원은 이미 많이 해본 솜씨(?)다. 2002년에 거리응원이 하나의 문화코드로 자리 잡으면서 새로운 관광 상품이 될 수도 있다는 분석도 있었다. 그땐 무슨 헛소린가 했는데 이번 월드컵을 취재하면서 만난 많은 외국인들을 보며 그 분석이 틀린 것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사람들의 표정엔 긴장감이 돌기 시작한다. 이때부터는 그 전과는 달리 카메라가 가까이 가는 것을 오히려 싫어했다. 화면을 가린다는 이유다. 그나마 광장을 가로질러 통로가 나 있어 취재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앉아!!”라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취재하기란 꽤 힘든 일이었다. 또 경기를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람들의 표정을 잡는 일도 쉽지 않았다. 골이 들어갈 것 같은 상황인지 골을 먹을 것 같은 상황인지 그들이 아쉬워하거나 기뻐하기 전까지는 표정만으론 구별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아쉬워하는 표정이든 기뻐하는 표정이든 그 표정이 나타난 후에 녹화 버튼을 누르면 늦는다. 누가 더 좋은 표정을 지어줄지 알 수 없어도 골이 들어가는 순간, 혹은 골을 먹는 순간의 표정을 잡으려면 누군가를 뷰파인더에 잡아놓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거리응원전 취재는 뻗치기 취재와 닮았다. 경기 시작 전엔 경기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경기 시작 후엔 사람들의 표정을 기다려야한다. 거리응원을 나온 사람들은 경기가 끝난 후에도 이기면 이긴 대로 기분이 좋아서 지면 진대로 다음엔 더 잘해줄 것을 기대하면서 더 신나는 축제의 장을 만든다. 언제나 빠질 수 없는 응원도구인 북에서부터 이번 월드컵에서 새롭게 부상한 부부젤라까지. 소리 나는 모든 것을 이용해 음악을 만들고 그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월드컵 거리응원의 진정한 매력은 경기가 끝난 후에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어께동무를 하고 춤을 추고 같은 소리로 응원을 하는 진정한 축제의 장. 어떤 이익집단의 계산에 맞춰 만들어진 화려한 무대 응원 보다 훨씬 신명난다. 하지만 축제가 끝난 후의 광장은 온통 쓰레기 천지다. 성숙한 시민의식 어쩌고 저쩌고하는 멘트가 흘러나오면 그 말을 의식한 사람들은 조금 치우는 듯하다 곧 사라져 버린다. 물론 자신이 만든 쓰레기뿐만 아니라 남들이 버린 쓰레기까지 줍는 사람들도 종종 보인다. 그러나 광장을 가득 메웠던 인원에 비하면 이는 극소수다. 그럼에도 으레 만드는 리포트의 한 꼭지로 ‘시민의식 돋보여’ ‘성숙한 시민의식’ 등등의 이름의 기사들이 등장한다.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들만 찍어서 만들려면 리포트 하나 못 만들겠냐 만은, 내가 목격한 바와 다른 쪽으로 왜곡시켜 만든 리포트는 그것이 아무리 내용 좋은 뉴스였어도 하고 싶지 않았다.   2002년에 고3이여서 거리응원도 못해봤다며 억울해 하는 나에게 선배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곳에서 취재하고 있는 것 보단 낫다고. 그랬다. 다른 사람들 즐겁게 응원하는데 경기도 보지 못하고 그 사람들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외로운 싸움’이었다. 원정 첫 16강 진출이라는 기분 좋은 상황에서도 8강엔 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랄 수 밖에 없는 우리 취재진들. 경기가 끝나고 하나 둘 떠나고 나서 나는 오디오맨이 주워 준 수명을 다한 붉은 악마 뿔을 머리에 써보았다.  희미하게 아직도 반짝이고 있는 뿔을 쓰니 나도 응원을 나온 사람인 듯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빨간 옷을 입고 있는 취재진들이 눈에 띈다. “그래, 이러쿵저러쿵 해도 취재할 때 빨간 옷을 입고 나오는 걸 보면 우리도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 국민인가 보다.” 김현미 / YTN 영상취재부 ※ <미디어아이> 제74호에서 이 기사를 확인하세요 미디어아이 PDF보기 바로가기 링크 /bbs/zboard.php?id=media_ey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42
    2010-07-19
  • - 경찰서 마다 외부 연결 인터넷 라인이 있다면?
    어제 동대문 경찰서 성폭행범 찍으러 갔었드랬습니다. 경찰서 취재 많이 가는데요. 요즘 각사가 대부분 인터넷 송출을 합니다. 많이 하죠. 근데, 인터넷 송출할 경우 경찰서 취재때는 항상 pc방을 찾거나 주변 인터넷이 되는 곳을 찾느라 밖으로 나가 시간을 허비하게 됩니다. 잠깐 웹하드에 파일을 올리고자 하더라도 경찰서에서는 외부로 인터넷이 연결이 안 되기 때문인데요... 경찰서에 우리 카메라기자를 위한 외부 인터넷 전용선 하나씩 설치하면 어떨까요? 협회차원에서 경찰청과 협약을 맺어 기자실에 외부 연결 인터넷 라인 하나씩만 있으면 카메라기자들이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거 같은데요. 물론 하나뿐이라 서로 먼저 웹하드에 영상 올리려고 아옹다옹하겠지만, ^^ 항상 경찰서 취재 나가때마다 외부로 나가 pc방 찾아 헤맬걸 생각하니 왜 취재기자들은 기자실, 샤워실 등 편의 제공 받으면서 우리는 취재 편의를 받지 못할까 생각이 항상 드는군요. 협회 차원의 인터넷 전용선 설치 협약식, 어떤가요. ================================================= 카메라 스티커 로고 멋진 걸로 제작 안 해주시나요?
    2010-07-17
  • 6.25전쟁 프랑스 종군기자 앙리 드 튀렌 인터뷰
    6.25전쟁 프랑스 종군기자 앙리 드 튀렌 인터뷰 戰後 5년… 또 3차 대전이 터진 줄 알았다… 1950년 긴장과 공포 속에 한국행 비행기에 몸 실어 지난 6월 7일, 6.25 전쟁 발발 60주년을 앞두고 당시 미군에 종군했던 앙리 드 튀렌 (Henri de Turenne, 이하 튀렌) 기자를 만났다. 튀렌 기자는 1966년부터 약 7년동안 방영된 “대전투(Les grandes batailles)” 라는 세계 전쟁사 다큐멘터리를 통해, 저널리스트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접근 방법으로 역사의 대중화에 앞장서 방송관계자는 물론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이후 역사프로그램의 연출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는 지난 해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총망라한 “아포칼립스(Apocalypse)”라는 여섯 편의 다큐 시리즈 공동저자로도 다시 한번 화제가 됐다. 그의 초창기 기자생활이 한국전쟁 취재로 시작했다는 점은 전쟁 발발 60주년을 맞는 우리에게는 매우 특별한 일이다.   “그게 벌써 60년이나 지났다니… 나에겐 참 특별했던 경험이었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서 그런지 기억이 잘 안나네요.” 아흔을 앞둔 그의 얼굴에 반세기가 훌쩍 넘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프랑스연합통신(AFP)과 일간지 르피가로(le Figaro) 기자였던 그가 전쟁이 나자 한국특파원으로 발령받았던 당시 나이는 28세. 결혼을 일주일 앞두고 있었다. 한국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잘 몰랐던 때 일이다. “지금이야 프랑스에서는 한국이 LG, 삼성, 현대 등 훌륭한 가전제품이나 자동차 만드는 나라로 유명하지만, 그 당시는 일본의 식민지라는 사실 외에 한국에 대해 알려진 것이 별로 없었어요. 나 또한 편집장이 한국에 큰 전쟁이 났다며 빨리 출국해야 되겠다고 했을 때, ‘거기가 대체 어딘데요?’라고 물어봤을 정도니까요.”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 전쟁이 나자 그 후 약 일주일 정도 후 튀렌 기자는 비행기를 타고 현장으로 향했다. “참 다른 세상이야기지요. 당시는 직행으로 한국에 가는 항공편도 없어, 여러 번 환승을 했어요. 이집트 근처 중동 지역에서 한번, 뉴델리, 방콕, 홍콩을 거쳐 도쿄에 있는 AFP지사에 도착했지요. 취재환경도 열악했습니다. 언제나 신속정확한 보도가 중요한 기자들에게 당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전화였어요. 전화를 걸어 파리 본사에 취재한 결과를 알려야 했지만, 전쟁터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어요. 이 때문에 기자들은 매일같이 비행기를 타고 한국-일본을 매일같이 왕복했어요. 낮에 전쟁터에서 전쟁의 추이와 군이나 경찰, 피난민들의 상황을 기록한 후 매일 저녁 비행기로 일본 하네다에 내립니다. 거기서 도쿄 지사에 전화를 걸어 이 취재결과를 알리고, 도쿄에서는 파리 본사에 라디오 전파를 통해 이를 전달했습니다. 이 과정 또한 복잡했지요. 기술 사정에 따라 파리까지 직접 전파를 보낼 수가 없어서, 아프리카 콩고 브라자빌에 소재한 AFP지사에 보낸 후, 그 곳에서 파리로 취재기록을 보내곤 했어요. 그리고는 그 다음날 다시 한국에 가서 전쟁 취재를 하고 저녁 때는 하네다로 날아와서 취재결과를 본사에 전달하는 일상을 거의 매일 반복했지요. 매일 저녁 한국에서 일본에 갈 때는 부상자들과 함께 가고, 다음 날 아침에는 군수물자나 수혈용 혈액 등을 싣고 가곤 전쟁터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현장에서 고화질 HD화면으로 촬영된 취재영상을 인터넷이 가능한 곳이면 단시간 안에 방송사에 보낼 수 있는 요즘 촬영기자들에게 튀렌 기자의 경험은 정말로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다. 이처럼 세계사의 현장에서 어렵사리 취재한 결과를 전 세계에 알리고자 한 그의 노력이 가져온 결과는 어떠했을까. 프랑스에서 첫 TV뉴스가 방송된 1949년, 텔레비전 수상기를 보유 가구 수는 약 3,700 가구. 전체 시청률 고작 1%도 채 안되던 시절이었다. 프랑스 대중들에게 텔레비전 화면보다는 라디오나 신문이 훨씬 더 영향력이 있었다. 당시 튀렌 기자를 포함해 한국에 파견됐던 4명의 종군기자들의 노력 덕분에 한국 전쟁 소식은 유력 일간지였던 르 피가로의 헤드라인에 매일같이 보도되었다. 나라 이름조차 생소한 프랑스 국민들에게 극동의 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 소식들이 어떻게 알려졌는지 궁금해진다. “당시 전쟁 영상을 촬영했던 기자들은 최신장비를 갖추고 있던 미국 기자들 몇 명뿐이었어요. 이들이 찍은 영상이 극장상영용 뉴스에 소개됐지만 프랑스 텔레비전에 한국전쟁과 관련된 소식은 거의 없었지요. 프랑스에도 TV수상기가 그다지 많이 보급되어 있지는 않았어요. 우리 신문기자들이 현장에서 전쟁의 여러 모습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기록한 후 이를 가능한 빨리 본국에 전달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모두 중요했던 때입니다. 그래야 한반도 밖에서도 이러한 세계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바로 알 수 있으니까요. 처음 제가 한국에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를 포함한 언론인들은 물론 프랑스, 나아가 유럽 전역에서는 드디어 3차 대전이 터진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먼 극동의 이야기지만, 공산권과 미국 사이의 분쟁이라는 소문은 2차대전이 종전한 지 5년이 채 안된 유럽에서는 또 다른 국제전의 서막을 예고하는 듯 했습니다. 45년 2월 얄타 회담 이후 전 세계는 이미 공산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으로 양분되어 있었고, 한국도 독일이나 베트남처럼 그런 분단국 중의 하나였으니까요. 취재를 떠나야 했던 저 또한 겁이 났습니다. 그럼에도 반드시 현장에 가서 실제로 상황이 돌아가고 있는지를 직접 알아보고 세상에 그것을 알려야 되겠다는 ‘기자정신’을 생각하며 용기를 냈습니다. 해방 직후 프랑스 국내에서는 레지스탕스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던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 세력이 매우 강했습니다. 의회의 약 60%를 좌익 정당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당 기관지들은 한국전쟁의 시작이 미국의 침략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제국주의 세력이 한국을 침략한 것이라는 식으로 말하며 실제 사실과는 전혀 다른 오보로 여론몰이를 했죠. 게다가 당시 프랑스 국민들에게는 반미감정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식의 허위보도가 충분히 수긍할 만한 것이었고, 이로 인해, 이 곳에서는 많은 이들이 한국전쟁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와 제 동료들이 썼던 르 피가로지(紙)의 기사들은 전황이 어떻게 변하고 있고, 실제 군 내외 분위기는 어떠한지, 피난민들의 상황과 폭격피해 등을 입은 시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데 주력했지요. 저는 낮에는 AFP 본사에 보낼 각종 전황이나 미군, 영국군 측의 상황과 관련된 속보 기사 작성을 하고, 저녁 때는 그 외에 여러 현장 일화들, 즉 크고 작은 도시나 시골의 치안유지 상황이나 기아와 추위에 헐떡이는 비참한 피난민들의 현실에 대해 가능한 자세히 묘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당시 취재했던 여러 가지 기억들이 하나 둘 생각나는데, 가장 잊기 어려운 것은 한겨울에 어느 작은 도시가 네이팜탄 공중폭격 맞은 광경을 목격한 기억이에요. 그곳이 네이팜탄으로 인해 한번에 붕괴됐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직접 찾아갔는데, 모든 주민들이 죄다 타버려서 시커먼 숯으로 변해있었어요. 폼페이 화산폭발 때 그랬던 것처럼 거리를 다니던 사람들이 동상처럼 변해있었습니다. 거기다 눈까지 왔는데 움직이던 모습 그대로 까맣게 타버린 사람들 시체 위로 하얀 눈이 내리니까 진짜 동상처럼 이러고 있더군요. 한 남자하고 아이가 같이 자전거를 타다가 이렇게 얼어있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 해 한국의 겨울은 정말 추웠어요. 영하 30도쯤 되었을까. 전선에서 다쳐 죽은 사람보다 얼어 죽은 사람들이 더 많다고까지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우리도 매번 위스키 두어잔을 마시고서야 속을 좀 데우곤 그랬습니다…” 튀렌 기자의 머릿속에는 60년이나 지난 지금도 그런 끔찍한 기억들이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는지, 그는 취재 당시를 떠올리며 손짓으로 그 때 본 모습들을 재현하며 보여주었다. “제가 주로 취재했던 쪽은 미군 측의 상황이나 전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유엔군 측의 전략 등이었기 때문에 민간인 취재는 그다지 많지 않았어요. 우리는 한국말을 할 줄 몰랐고, 그들은 영어를 할 줄 몰랐으니까 그렇게 잦은 소통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죠. 하지만 한국인들은 참 친절하고 정이 많은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취재하다가 마주치면 그들은 우리에게 먹을 것도 좀 건네주고, 쉴 곳도 마련해주고 그랬거든요. 또 전쟁고아들이 그렇게 많았던 기억이 나는데, 우리가 본 전쟁 고아들 중 열여덟살 정도 되보이는 젊은이들은 가끔가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이들도 있었어요. 그들은 우리 숙소로 와서 기자들과 영어로 이야기 하면서 먹을 것도 얻어 먹곤 했습니다. 우린 그렇게 민간인 취재를 하곤 했죠. 그러다 정말 친해지고 그런 경우 취재가 끝나 프랑스로 떠날 때 그 아이들을 데려가서 입양하는 기자들도 있었어요. 인민군이나 남한군 헌병들이 양민들을 대상으로 인민재판이나 부역자 처벌을 하는 현장도 취재했었고, 50년 9월 서울 수복 이후국군-유엔군이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평양 진격 때까지 미군들을 따르면서 평양에서의 전황 역시 기사로 썼던 생각이 납니다. 제가 김일성에 대해 거의 처음으로 기사를 썼을 겁니다. 사실 그에 대한 인물 정보를 찾기 위해 서울에서 영자신문들을 다 뒤져봤지만, 그때만 해도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제가 쓴 기사가 전세계에 당시 북한의 원수가 어떤 인물인지, 어디서 사회주의를 공부했고, 빨치산 활동을 했는지 등 세세한 정보를 알리는 데 공헌을 했죠.≫ 튀렌 기자는 그 후 약 1년 반 정도의 한국전 취재를 마친 뒤 프랑스에 돌아와 그의 동료들과 함께 ″한국으로부터의 귀환(Retour de Coree, 1951, 줄리아르 사 출판)″이라는 취재집을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그리고 그 저널리즘 정신으로 1951년에는 ‘알베르 롱드르 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프랑스에서는 매우 권위있는 언론상인 알베르 롱드르 상은 1933년 유명한 프랑스 기자였던 알베르 롱드르의 죽음을 기려 제정되었는데, 이 후 매년 용기있는 기자정신을 보여준 40세 이하의 젊은 언론인들에게 수여해왔다. 튀렌 기자는 1960년대부터 스스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연출가로 활약하면서, 영상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알베르 롱드르의 정신을 보여준 촬영기자들을 격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1985년 다큐멘터리 부문을 신설하여 이에 걸맞는 우수한 다큐멘터리스트들에게 이 상을 수여해오고 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프랑스판 ≪ 방송 카메라기자상 ≫이라 할 수 있다. ≪ 한국전 취재는 저에게 개인적으로 참 인상적인 경험입니다. 기자가 되고 처음으로 아시아 지역에서 특파원으로 활동한데다, 최초의 전쟁취재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돌아와서는 4년 정도 AFP 워싱턴 특파원으로 파견됐고, 그 후 프랑스 수와르라는 일간지 기자로 일하다 주간지 엑스프레스의 부주간을 역임했습니다. 66년부터는 프랑스 국내에 텔레비전이 널리 보급되고 그 영향력이 훨씬 커지면서, 방송 분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저는 생각해보면 펜대에서 타자기로, 타자기에서 편집데크로, 문명의 발달을 몸소 체험한 기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긴 여정에서 한 가지 변하지 않은 ‘초심(初心)’이 있는데, 그건 바로 저널리즘 정신이지요. 제가 처음 기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단지 세상을 제대로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940년부터 4년이나 계속된 나치 점령시기는 저에게 끔찍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때는 마치 전쟁포로처럼 사는 듯 했지요. 라디오를 켜면, 또는 신문을 펼치면 죄다 나치 점령군 또는 비시 정부의 프로파간다들로 가득찼으니 세상을 제대로 보는 눈을 가질 수가 없었죠. 그래서 바로 기자라는 직업을 생각했습니다. 실은 저희 집안 어른들은 대대로 외교관과 군인 장교를 지내왔고, 제 부친 또한 1차 대전 당시 공군장교였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외교관이나 장교가 되도록 교육을 받아왔지만, 저는 그것을 따르지 않았죠. 해방 후 AFP 기자가 되고는 베를린에 4년 정도 특파원으로 나가, 냉전체제로 분단된 세계의 실상을 똑바로 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 튀렌 기자의 이러한 저널리즘 정신은 이후 영상 분야에서도 그 빛을 발하면서, 그는 30여년 동안 현재의 시각에서 지나간 과거의 역사를 되새겨보는 저널리즘과 역사를 결합한 시각의 다큐멘터리나 여기에 픽션적 요소를 가미한 팩션 다큐멘터리 등의 역사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그가 참여한 작품 수만 100여 시간에 이르며, 그 작품들 덕분에 프랑스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은 상을 수상한 바 있다. ≪ 많은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영상역사가’라고 지칭하지만, 제가 영상을 가지고 해온 일은 단지 우리 시대의 역사 속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테마들을 소재로 장단편의 ‘르포’를 만든 것입니다. 저는 거창한 역사가가 아니라, 모든 기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대중들이 어렵거나 베일에 가려진 역사적 사실에 좀더 쉽우면서 진지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는 것 뿐입니다. 아쉽게도 아직은 한국전쟁에 대해 프로그램을 만들어본 적이 없네요. 제 스스로 여러 번 기획을 제안해봤지만, 이 곳 방송 관계자들은 이에 그렇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한국전쟁이 난 지도 벌써 60년이 지났는데, 앞으로 여러 목소리를 담은 더 많은 작품들이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 ≫ 한국전쟁처럼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중요한 사건이 영상화된 사례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점에 튀렌 기자는 다소 아쉬운 듯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전쟁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각종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좀더 양질의 관련 프로그램이 만들어져 한국은 물론 해외의 젊은이들이 잊혀져가는 이 전쟁에 대해 반드시 알아가는 기회가 많아지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한국 촬영기자들에게 선배기자로서 한마디를 남겼다. ≪ 한국의 촬영기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점은, 지나치게 신속한 취재는 삼가달라는 점입니다. 기술이 발전하고 모든 것이 속도 경쟁의 시대가 된 오늘날, 아무리 빨리 취재하여 보도를 한다고 해도, 정확하지 않으면 기사로서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지난 루마니아 내전 당시 무고한 시민들이 대량 학살된 현장을 보여주겠다고 촬영된 영상이 알고보니 한 병원에서 시신들을 모아놓은 곳에서 찍혔다고 드러난 사례는 유명합니다. 그 영상을 본 모든 이들이 방송으로 나갈 당시에는 학살 현장에서 찍힌 줄 알았다고 합니다. 아무도 그것을 확인한 이가 없었으니까요. 취재 대상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더 자주 사실 진위여부를 확인해보고, 더 자세히 묘사하여, 시청자들에게 빠른 시간안에 현장의 생생함을 정확하게 전달하도록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효진 / 프랑스 통신원 ※ <미디어아이> 제74호에서 이 기사를 확인하세요 미디어아이 PDF보기 바로가기 링크 /bbs/zboard.php?id=media_ey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42
    2010-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