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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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아공 월드컵 거리응원 취재기
    남아공 월드컵 거리응원 취재기 2002년에 고3이었던 나에게 거리응원은 부러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이유로 함께 어우러져 웃고 울었던 그날의 기분을 나는 그저 말로만 전해 들었을 뿐.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되어서야 비로소 말로만 듣던 거리응원을 처음 경험하게 됐다. 그때만 해도 서울광장이 만들어지기 전이라 응원단들은 광화문 일대를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모여들었다. 스크린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광화문에 자리하고  있는 신문사들의 광고용 전광판을 보며 응원을 했었다. 그땐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 때문에 엉덩이가 쑤셨고 너무 높이 달려있는 전광판 때문에 목이 아팠지만 순수한 마음들이 모여 응원한다는 즐거움이 넘쳐났다. 이번 월드컵 응원전처럼 경기시작 전에 화려한 공연은 없었지만 거리 응원이 대기업들의 상술에 이용당한다는 괜한 찝찝함은 느끼지 않아도 됐다.   그 이후 거리응원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2006년 독일월드컵을 거쳐 2010 남아공월드컵에 이르면서 거리응원전은 2004년 이전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훨씬 좋은 스크린에 경기 시작 전부터 흥을 돋아 주는 공연들. 응원전을 후원하는 방송사, 기업, 그리고 월드컵 응원가를 부르는 가수들. 월드컵 거리응원 특수를 노린 각각의 이익집단들이 이번 2010월드컵에선 월드컵 시작 전부터 들끓었다. 급기야 붉은 악마들은 서울광장 응원을 포기하고 다른 장소를 선택하겠다는 극단(?)의 조치까지 내리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상업성에 반발한 붉은 악마의 노력과는 별개로 각 기업의 욕망에 따라 거리응원 장소도 늘어났다. 그 많은 장소 중에서 거리응원의 원조 격인 서울광장 취재가 맡겨진 것은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비가 오든 상술에 이용당했든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였다. 경기 시작 12시간 전부터 와서 자릴 잡고 앉아있는 사람들이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경기시작 직전 광장을 넘어서 도로까지 꽉 찬 것을 보니 미리 와서 자릴 잡는 심정도 알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도 12시간 전부터 기다리는 것은 심했다고 생각하지만) 경기 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기다림에 지쳤던 사람들도 다시 힘을 내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힘을 내 응원을 시작하면서 우리 취재진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경기 시작 두 시간 전부턴 광장 한 켠에 마련된 무대가 시끄러워졌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 무대 위에서 월드컵 응원가만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니란 점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때맞춰 응원가를 만들지 못한 가수들은 응원가가 아닌 자신의 최신 곡을 부르고 있었다. 심지어 그 자리에서 이별노래를 부르는 가수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국 대표팀의 승리를 기원한다는 그들의 말이 순수하게 들리지 않았다. 이별노래가 나오는 와중에도 응원을 나온 시민들은 열심히 응원했다. 대한민국을 외치며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니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카메라가 가까이 가기만 해도 “YTN이다.”라며 더 밝은 표정으로 더 신나게 응원을 해 주었다. 그 중에는 한국인만 있는 것이 아니란 점도 이전의 거리응원과는 다른 것이었다. 한국을 찾은 많은 외국인들이 거리응원이라는 한국의 독특한 문화를 즐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대한~민국”이라고 외치는 그들의 응원은 이미 많이 해본 솜씨(?)다. 2002년에 거리응원이 하나의 문화코드로 자리 잡으면서 새로운 관광 상품이 될 수도 있다는 분석도 있었다. 그땐 무슨 헛소린가 했는데 이번 월드컵을 취재하면서 만난 많은 외국인들을 보며 그 분석이 틀린 것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사람들의 표정엔 긴장감이 돌기 시작한다. 이때부터는 그 전과는 달리 카메라가 가까이 가는 것을 오히려 싫어했다. 화면을 가린다는 이유다. 그나마 광장을 가로질러 통로가 나 있어 취재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앉아!!”라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취재하기란 꽤 힘든 일이었다. 또 경기를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람들의 표정을 잡는 일도 쉽지 않았다. 골이 들어갈 것 같은 상황인지 골을 먹을 것 같은 상황인지 그들이 아쉬워하거나 기뻐하기 전까지는 표정만으론 구별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아쉬워하는 표정이든 기뻐하는 표정이든 그 표정이 나타난 후에 녹화 버튼을 누르면 늦는다. 누가 더 좋은 표정을 지어줄지 알 수 없어도 골이 들어가는 순간, 혹은 골을 먹는 순간의 표정을 잡으려면 누군가를 뷰파인더에 잡아놓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거리응원전 취재는 뻗치기 취재와 닮았다. 경기 시작 전엔 경기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경기 시작 후엔 사람들의 표정을 기다려야한다. 거리응원을 나온 사람들은 경기가 끝난 후에도 이기면 이긴 대로 기분이 좋아서 지면 진대로 다음엔 더 잘해줄 것을 기대하면서 더 신나는 축제의 장을 만든다. 언제나 빠질 수 없는 응원도구인 북에서부터 이번 월드컵에서 새롭게 부상한 부부젤라까지. 소리 나는 모든 것을 이용해 음악을 만들고 그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월드컵 거리응원의 진정한 매력은 경기가 끝난 후에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어께동무를 하고 춤을 추고 같은 소리로 응원을 하는 진정한 축제의 장. 어떤 이익집단의 계산에 맞춰 만들어진 화려한 무대 응원 보다 훨씬 신명난다. 하지만 축제가 끝난 후의 광장은 온통 쓰레기 천지다. 성숙한 시민의식 어쩌고 저쩌고하는 멘트가 흘러나오면 그 말을 의식한 사람들은 조금 치우는 듯하다 곧 사라져 버린다. 물론 자신이 만든 쓰레기뿐만 아니라 남들이 버린 쓰레기까지 줍는 사람들도 종종 보인다. 그러나 광장을 가득 메웠던 인원에 비하면 이는 극소수다. 그럼에도 으레 만드는 리포트의 한 꼭지로 ‘시민의식 돋보여’ ‘성숙한 시민의식’ 등등의 이름의 기사들이 등장한다.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들만 찍어서 만들려면 리포트 하나 못 만들겠냐 만은, 내가 목격한 바와 다른 쪽으로 왜곡시켜 만든 리포트는 그것이 아무리 내용 좋은 뉴스였어도 하고 싶지 않았다.   2002년에 고3이여서 거리응원도 못해봤다며 억울해 하는 나에게 선배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곳에서 취재하고 있는 것 보단 낫다고. 그랬다. 다른 사람들 즐겁게 응원하는데 경기도 보지 못하고 그 사람들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외로운 싸움’이었다. 원정 첫 16강 진출이라는 기분 좋은 상황에서도 8강엔 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랄 수 밖에 없는 우리 취재진들. 경기가 끝나고 하나 둘 떠나고 나서 나는 오디오맨이 주워 준 수명을 다한 붉은 악마 뿔을 머리에 써보았다.  희미하게 아직도 반짝이고 있는 뿔을 쓰니 나도 응원을 나온 사람인 듯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빨간 옷을 입고 있는 취재진들이 눈에 띈다. “그래, 이러쿵저러쿵 해도 취재할 때 빨간 옷을 입고 나오는 걸 보면 우리도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 국민인가 보다.” 김현미 / YTN 영상취재부 ※ <미디어아이> 제74호에서 이 기사를 확인하세요 미디어아이 PDF보기 바로가기 링크 /bbs/zboard.php?id=media_ey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42
    2010-07-19
  • - 경찰서 마다 외부 연결 인터넷 라인이 있다면?
    어제 동대문 경찰서 성폭행범 찍으러 갔었드랬습니다. 경찰서 취재 많이 가는데요. 요즘 각사가 대부분 인터넷 송출을 합니다. 많이 하죠. 근데, 인터넷 송출할 경우 경찰서 취재때는 항상 pc방을 찾거나 주변 인터넷이 되는 곳을 찾느라 밖으로 나가 시간을 허비하게 됩니다. 잠깐 웹하드에 파일을 올리고자 하더라도 경찰서에서는 외부로 인터넷이 연결이 안 되기 때문인데요... 경찰서에 우리 카메라기자를 위한 외부 인터넷 전용선 하나씩 설치하면 어떨까요? 협회차원에서 경찰청과 협약을 맺어 기자실에 외부 연결 인터넷 라인 하나씩만 있으면 카메라기자들이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거 같은데요. 물론 하나뿐이라 서로 먼저 웹하드에 영상 올리려고 아옹다옹하겠지만, ^^ 항상 경찰서 취재 나가때마다 외부로 나가 pc방 찾아 헤맬걸 생각하니 왜 취재기자들은 기자실, 샤워실 등 편의 제공 받으면서 우리는 취재 편의를 받지 못할까 생각이 항상 드는군요. 협회 차원의 인터넷 전용선 설치 협약식, 어떤가요. ================================================= 카메라 스티커 로고 멋진 걸로 제작 안 해주시나요?
    2010-07-17
  • 6.25전쟁 프랑스 종군기자 앙리 드 튀렌 인터뷰
    6.25전쟁 프랑스 종군기자 앙리 드 튀렌 인터뷰 戰後 5년… 또 3차 대전이 터진 줄 알았다… 1950년 긴장과 공포 속에 한국행 비행기에 몸 실어 지난 6월 7일, 6.25 전쟁 발발 60주년을 앞두고 당시 미군에 종군했던 앙리 드 튀렌 (Henri de Turenne, 이하 튀렌) 기자를 만났다. 튀렌 기자는 1966년부터 약 7년동안 방영된 “대전투(Les grandes batailles)” 라는 세계 전쟁사 다큐멘터리를 통해, 저널리스트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접근 방법으로 역사의 대중화에 앞장서 방송관계자는 물론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이후 역사프로그램의 연출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는 지난 해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총망라한 “아포칼립스(Apocalypse)”라는 여섯 편의 다큐 시리즈 공동저자로도 다시 한번 화제가 됐다. 그의 초창기 기자생활이 한국전쟁 취재로 시작했다는 점은 전쟁 발발 60주년을 맞는 우리에게는 매우 특별한 일이다.   “그게 벌써 60년이나 지났다니… 나에겐 참 특별했던 경험이었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서 그런지 기억이 잘 안나네요.” 아흔을 앞둔 그의 얼굴에 반세기가 훌쩍 넘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프랑스연합통신(AFP)과 일간지 르피가로(le Figaro) 기자였던 그가 전쟁이 나자 한국특파원으로 발령받았던 당시 나이는 28세. 결혼을 일주일 앞두고 있었다. 한국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잘 몰랐던 때 일이다. “지금이야 프랑스에서는 한국이 LG, 삼성, 현대 등 훌륭한 가전제품이나 자동차 만드는 나라로 유명하지만, 그 당시는 일본의 식민지라는 사실 외에 한국에 대해 알려진 것이 별로 없었어요. 나 또한 편집장이 한국에 큰 전쟁이 났다며 빨리 출국해야 되겠다고 했을 때, ‘거기가 대체 어딘데요?’라고 물어봤을 정도니까요.”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 전쟁이 나자 그 후 약 일주일 정도 후 튀렌 기자는 비행기를 타고 현장으로 향했다. “참 다른 세상이야기지요. 당시는 직행으로 한국에 가는 항공편도 없어, 여러 번 환승을 했어요. 이집트 근처 중동 지역에서 한번, 뉴델리, 방콕, 홍콩을 거쳐 도쿄에 있는 AFP지사에 도착했지요. 취재환경도 열악했습니다. 언제나 신속정확한 보도가 중요한 기자들에게 당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전화였어요. 전화를 걸어 파리 본사에 취재한 결과를 알려야 했지만, 전쟁터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어요. 이 때문에 기자들은 매일같이 비행기를 타고 한국-일본을 매일같이 왕복했어요. 낮에 전쟁터에서 전쟁의 추이와 군이나 경찰, 피난민들의 상황을 기록한 후 매일 저녁 비행기로 일본 하네다에 내립니다. 거기서 도쿄 지사에 전화를 걸어 이 취재결과를 알리고, 도쿄에서는 파리 본사에 라디오 전파를 통해 이를 전달했습니다. 이 과정 또한 복잡했지요. 기술 사정에 따라 파리까지 직접 전파를 보낼 수가 없어서, 아프리카 콩고 브라자빌에 소재한 AFP지사에 보낸 후, 그 곳에서 파리로 취재기록을 보내곤 했어요. 그리고는 그 다음날 다시 한국에 가서 전쟁 취재를 하고 저녁 때는 하네다로 날아와서 취재결과를 본사에 전달하는 일상을 거의 매일 반복했지요. 매일 저녁 한국에서 일본에 갈 때는 부상자들과 함께 가고, 다음 날 아침에는 군수물자나 수혈용 혈액 등을 싣고 가곤 전쟁터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현장에서 고화질 HD화면으로 촬영된 취재영상을 인터넷이 가능한 곳이면 단시간 안에 방송사에 보낼 수 있는 요즘 촬영기자들에게 튀렌 기자의 경험은 정말로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다. 이처럼 세계사의 현장에서 어렵사리 취재한 결과를 전 세계에 알리고자 한 그의 노력이 가져온 결과는 어떠했을까. 프랑스에서 첫 TV뉴스가 방송된 1949년, 텔레비전 수상기를 보유 가구 수는 약 3,700 가구. 전체 시청률 고작 1%도 채 안되던 시절이었다. 프랑스 대중들에게 텔레비전 화면보다는 라디오나 신문이 훨씬 더 영향력이 있었다. 당시 튀렌 기자를 포함해 한국에 파견됐던 4명의 종군기자들의 노력 덕분에 한국 전쟁 소식은 유력 일간지였던 르 피가로의 헤드라인에 매일같이 보도되었다. 나라 이름조차 생소한 프랑스 국민들에게 극동의 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 소식들이 어떻게 알려졌는지 궁금해진다. “당시 전쟁 영상을 촬영했던 기자들은 최신장비를 갖추고 있던 미국 기자들 몇 명뿐이었어요. 이들이 찍은 영상이 극장상영용 뉴스에 소개됐지만 프랑스 텔레비전에 한국전쟁과 관련된 소식은 거의 없었지요. 프랑스에도 TV수상기가 그다지 많이 보급되어 있지는 않았어요. 우리 신문기자들이 현장에서 전쟁의 여러 모습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기록한 후 이를 가능한 빨리 본국에 전달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모두 중요했던 때입니다. 그래야 한반도 밖에서도 이러한 세계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바로 알 수 있으니까요. 처음 제가 한국에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를 포함한 언론인들은 물론 프랑스, 나아가 유럽 전역에서는 드디어 3차 대전이 터진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먼 극동의 이야기지만, 공산권과 미국 사이의 분쟁이라는 소문은 2차대전이 종전한 지 5년이 채 안된 유럽에서는 또 다른 국제전의 서막을 예고하는 듯 했습니다. 45년 2월 얄타 회담 이후 전 세계는 이미 공산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으로 양분되어 있었고, 한국도 독일이나 베트남처럼 그런 분단국 중의 하나였으니까요. 취재를 떠나야 했던 저 또한 겁이 났습니다. 그럼에도 반드시 현장에 가서 실제로 상황이 돌아가고 있는지를 직접 알아보고 세상에 그것을 알려야 되겠다는 ‘기자정신’을 생각하며 용기를 냈습니다. 해방 직후 프랑스 국내에서는 레지스탕스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던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 세력이 매우 강했습니다. 의회의 약 60%를 좌익 정당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당 기관지들은 한국전쟁의 시작이 미국의 침략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제국주의 세력이 한국을 침략한 것이라는 식으로 말하며 실제 사실과는 전혀 다른 오보로 여론몰이를 했죠. 게다가 당시 프랑스 국민들에게는 반미감정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식의 허위보도가 충분히 수긍할 만한 것이었고, 이로 인해, 이 곳에서는 많은 이들이 한국전쟁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와 제 동료들이 썼던 르 피가로지(紙)의 기사들은 전황이 어떻게 변하고 있고, 실제 군 내외 분위기는 어떠한지, 피난민들의 상황과 폭격피해 등을 입은 시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데 주력했지요. 저는 낮에는 AFP 본사에 보낼 각종 전황이나 미군, 영국군 측의 상황과 관련된 속보 기사 작성을 하고, 저녁 때는 그 외에 여러 현장 일화들, 즉 크고 작은 도시나 시골의 치안유지 상황이나 기아와 추위에 헐떡이는 비참한 피난민들의 현실에 대해 가능한 자세히 묘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당시 취재했던 여러 가지 기억들이 하나 둘 생각나는데, 가장 잊기 어려운 것은 한겨울에 어느 작은 도시가 네이팜탄 공중폭격 맞은 광경을 목격한 기억이에요. 그곳이 네이팜탄으로 인해 한번에 붕괴됐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직접 찾아갔는데, 모든 주민들이 죄다 타버려서 시커먼 숯으로 변해있었어요. 폼페이 화산폭발 때 그랬던 것처럼 거리를 다니던 사람들이 동상처럼 변해있었습니다. 거기다 눈까지 왔는데 움직이던 모습 그대로 까맣게 타버린 사람들 시체 위로 하얀 눈이 내리니까 진짜 동상처럼 이러고 있더군요. 한 남자하고 아이가 같이 자전거를 타다가 이렇게 얼어있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 해 한국의 겨울은 정말 추웠어요. 영하 30도쯤 되었을까. 전선에서 다쳐 죽은 사람보다 얼어 죽은 사람들이 더 많다고까지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우리도 매번 위스키 두어잔을 마시고서야 속을 좀 데우곤 그랬습니다…” 튀렌 기자의 머릿속에는 60년이나 지난 지금도 그런 끔찍한 기억들이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는지, 그는 취재 당시를 떠올리며 손짓으로 그 때 본 모습들을 재현하며 보여주었다. “제가 주로 취재했던 쪽은 미군 측의 상황이나 전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유엔군 측의 전략 등이었기 때문에 민간인 취재는 그다지 많지 않았어요. 우리는 한국말을 할 줄 몰랐고, 그들은 영어를 할 줄 몰랐으니까 그렇게 잦은 소통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죠. 하지만 한국인들은 참 친절하고 정이 많은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취재하다가 마주치면 그들은 우리에게 먹을 것도 좀 건네주고, 쉴 곳도 마련해주고 그랬거든요. 또 전쟁고아들이 그렇게 많았던 기억이 나는데, 우리가 본 전쟁 고아들 중 열여덟살 정도 되보이는 젊은이들은 가끔가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이들도 있었어요. 그들은 우리 숙소로 와서 기자들과 영어로 이야기 하면서 먹을 것도 얻어 먹곤 했습니다. 우린 그렇게 민간인 취재를 하곤 했죠. 그러다 정말 친해지고 그런 경우 취재가 끝나 프랑스로 떠날 때 그 아이들을 데려가서 입양하는 기자들도 있었어요. 인민군이나 남한군 헌병들이 양민들을 대상으로 인민재판이나 부역자 처벌을 하는 현장도 취재했었고, 50년 9월 서울 수복 이후국군-유엔군이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평양 진격 때까지 미군들을 따르면서 평양에서의 전황 역시 기사로 썼던 생각이 납니다. 제가 김일성에 대해 거의 처음으로 기사를 썼을 겁니다. 사실 그에 대한 인물 정보를 찾기 위해 서울에서 영자신문들을 다 뒤져봤지만, 그때만 해도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제가 쓴 기사가 전세계에 당시 북한의 원수가 어떤 인물인지, 어디서 사회주의를 공부했고, 빨치산 활동을 했는지 등 세세한 정보를 알리는 데 공헌을 했죠.≫ 튀렌 기자는 그 후 약 1년 반 정도의 한국전 취재를 마친 뒤 프랑스에 돌아와 그의 동료들과 함께 ″한국으로부터의 귀환(Retour de Coree, 1951, 줄리아르 사 출판)″이라는 취재집을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그리고 그 저널리즘 정신으로 1951년에는 ‘알베르 롱드르 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프랑스에서는 매우 권위있는 언론상인 알베르 롱드르 상은 1933년 유명한 프랑스 기자였던 알베르 롱드르의 죽음을 기려 제정되었는데, 이 후 매년 용기있는 기자정신을 보여준 40세 이하의 젊은 언론인들에게 수여해왔다. 튀렌 기자는 1960년대부터 스스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연출가로 활약하면서, 영상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알베르 롱드르의 정신을 보여준 촬영기자들을 격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1985년 다큐멘터리 부문을 신설하여 이에 걸맞는 우수한 다큐멘터리스트들에게 이 상을 수여해오고 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프랑스판 ≪ 방송 카메라기자상 ≫이라 할 수 있다. ≪ 한국전 취재는 저에게 개인적으로 참 인상적인 경험입니다. 기자가 되고 처음으로 아시아 지역에서 특파원으로 활동한데다, 최초의 전쟁취재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돌아와서는 4년 정도 AFP 워싱턴 특파원으로 파견됐고, 그 후 프랑스 수와르라는 일간지 기자로 일하다 주간지 엑스프레스의 부주간을 역임했습니다. 66년부터는 프랑스 국내에 텔레비전이 널리 보급되고 그 영향력이 훨씬 커지면서, 방송 분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저는 생각해보면 펜대에서 타자기로, 타자기에서 편집데크로, 문명의 발달을 몸소 체험한 기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긴 여정에서 한 가지 변하지 않은 ‘초심(初心)’이 있는데, 그건 바로 저널리즘 정신이지요. 제가 처음 기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단지 세상을 제대로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940년부터 4년이나 계속된 나치 점령시기는 저에게 끔찍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때는 마치 전쟁포로처럼 사는 듯 했지요. 라디오를 켜면, 또는 신문을 펼치면 죄다 나치 점령군 또는 비시 정부의 프로파간다들로 가득찼으니 세상을 제대로 보는 눈을 가질 수가 없었죠. 그래서 바로 기자라는 직업을 생각했습니다. 실은 저희 집안 어른들은 대대로 외교관과 군인 장교를 지내왔고, 제 부친 또한 1차 대전 당시 공군장교였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외교관이나 장교가 되도록 교육을 받아왔지만, 저는 그것을 따르지 않았죠. 해방 후 AFP 기자가 되고는 베를린에 4년 정도 특파원으로 나가, 냉전체제로 분단된 세계의 실상을 똑바로 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 튀렌 기자의 이러한 저널리즘 정신은 이후 영상 분야에서도 그 빛을 발하면서, 그는 30여년 동안 현재의 시각에서 지나간 과거의 역사를 되새겨보는 저널리즘과 역사를 결합한 시각의 다큐멘터리나 여기에 픽션적 요소를 가미한 팩션 다큐멘터리 등의 역사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그가 참여한 작품 수만 100여 시간에 이르며, 그 작품들 덕분에 프랑스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은 상을 수상한 바 있다. ≪ 많은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영상역사가’라고 지칭하지만, 제가 영상을 가지고 해온 일은 단지 우리 시대의 역사 속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테마들을 소재로 장단편의 ‘르포’를 만든 것입니다. 저는 거창한 역사가가 아니라, 모든 기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대중들이 어렵거나 베일에 가려진 역사적 사실에 좀더 쉽우면서 진지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는 것 뿐입니다. 아쉽게도 아직은 한국전쟁에 대해 프로그램을 만들어본 적이 없네요. 제 스스로 여러 번 기획을 제안해봤지만, 이 곳 방송 관계자들은 이에 그렇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한국전쟁이 난 지도 벌써 60년이 지났는데, 앞으로 여러 목소리를 담은 더 많은 작품들이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 ≫ 한국전쟁처럼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중요한 사건이 영상화된 사례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점에 튀렌 기자는 다소 아쉬운 듯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전쟁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각종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좀더 양질의 관련 프로그램이 만들어져 한국은 물론 해외의 젊은이들이 잊혀져가는 이 전쟁에 대해 반드시 알아가는 기회가 많아지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한국 촬영기자들에게 선배기자로서 한마디를 남겼다. ≪ 한국의 촬영기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점은, 지나치게 신속한 취재는 삼가달라는 점입니다. 기술이 발전하고 모든 것이 속도 경쟁의 시대가 된 오늘날, 아무리 빨리 취재하여 보도를 한다고 해도, 정확하지 않으면 기사로서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지난 루마니아 내전 당시 무고한 시민들이 대량 학살된 현장을 보여주겠다고 촬영된 영상이 알고보니 한 병원에서 시신들을 모아놓은 곳에서 찍혔다고 드러난 사례는 유명합니다. 그 영상을 본 모든 이들이 방송으로 나갈 당시에는 학살 현장에서 찍힌 줄 알았다고 합니다. 아무도 그것을 확인한 이가 없었으니까요. 취재 대상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더 자주 사실 진위여부를 확인해보고, 더 자세히 묘사하여, 시청자들에게 빠른 시간안에 현장의 생생함을 정확하게 전달하도록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효진 / 프랑스 통신원 ※ <미디어아이> 제74호에서 이 기사를 확인하세요 미디어아이 PDF보기 바로가기 링크 /bbs/zboard.php?id=media_ey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42
    2010-07-15
  • 선배님 어떻게 지내시나요? [C&M 김민호 이사]
    종합 방송인 김민호 이사 김민호 이사는 81년 문화방송 카메라 기자로 입사한 후, 10여년 동안 '카메라 출동'이라는 방송 뉴스의 대표적인 고발 프로그램을 제작 했다. 이후 MBC 프로덕션 교양 예능 국장을 거쳐, 현재 C&M 이사겸 C&M 미디어원 서울 미디어국 보도본부장을 겸임하고 있다. 카메라기자로써 열정을 다해 현장에서 일을 하고, 프로듀서 겸 방송 진행자로써 이 시대의 건강한 물음을 시청자들에게 던졌다. 그리고 유학생활을 마치고 대학교수로 미래의 방송인을 가르쳤고, 지금은 여러 방송인을 이끄는 위치에서 자신의 방송 철학을 프로그램에 녹여내며, 이제는 말하기보다 '듣는' 방송을 추구하며 ‘김민호의 사람이야기’라는 인터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김민호 이사의 방송철학과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들어 본다. 지금까지 종합 방송인으로 살아 오셨고, 현재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신데요..방송인로써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과 전달하고 싶으셨던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입사하자마자 카메라 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카메라출동’이라는 프로그램이 카메라 기자가 기획하고, 제작하고, 리포트를 하는 것 이었는데, 도와주는 이가 없어서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고 스스로 깨쳐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상과 글로 리포트를 구성해야 했는데, 주로 영상으로써 구성을 하여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고자 노력했고, 출동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지금도 아쉬운 점은 ‘카메라 출동’이라는 것이 단순 고발을 위해 제작이 되었다는 것인데요, 누구의 잘잘못만을 탓하려고 만든 프로그램 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지금 카메라 출동이 존속하지 못한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사람의 잘못이 아닌 우리 사회의 ‘시스템의 부조리‘를 말하고, 시민이 살아가기에 불편한 것들을 해소 해 나갈 수 있는 ’감시자‘로써의 역할을 방송에서 말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건전한 시민의식에 대해서도 말하고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건강한 토론(논쟁이 아닌)을 해서 결과를 모색하는 그런 방송을 하고 싶었고, 그런 방송인이 되고자 했습니다. 지금도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그것이구요.. 그래서 그 이후 여러 프로그램 제작을 거치면서, 프로듀서겸 진행자로써 ‘여기서 잠깐’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화두는 “왜 그럴까요?”라는 시청자들에게 던지는 물음입니다. 한 5년 동안 제작하면서 ‘고발’이 아닌 ‘전달’로써 단순한 사실을 가감없이 전달하고 시청자들의 생각을 유도하고, 판단 할 수 있게 만드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반향은 컸습니다. ‘소통’이라는 커뮤니케이터로써 보도와 제작 쪽에서 많은 벤치마킹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제 이름을 걸고 ‘김민호의 사람이야기’라는 심층 인터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고발과 소통을 넘어 지금은 ‘듣는’ 프로그램으로 지향하고 있습니다. 사회 각계 각층의 저명한 인사들의 사는 애기를 듣는, 그들의 삶을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풀어나가 편하게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100회 이상 진행이 됐는데요, 지휘자 금난새씨나 우리나라 최고의 발레리노 김용걸 교수등 많은 인사들의 삶을 인터뷰로 들여다 보았습니다. 앞으로도 이 프로그램을 계속 진행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이사님의 지금까지의 발자취를 보면 많은 도전과 변화가 있었는데요, 이사님의 삶의 태도와 자신의 이루고픈 꿈이 있다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저는 항상 방송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종합 방송인으로써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방송 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방송만을 만들며 그것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앞으로도 방송을 위해 살아갈 것입니다. 사실 방송에 욕심이 많다 보니 MBC에 몸담고 있을때 불만이 좀 있었습니다. 방송을 스스로 만들어 보고싶은 욕심에,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하고 제작하고 싶은 욕심에 제 스스로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주어지는 역할에 만족하지 않고 제 스스로의 역할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기자로써 피디로써의 역할을 거치고, 지금 이 자리에서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의적인 프로그램 제작에 나서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이 제가 가진 방송인의 역할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꿈이라고 하면 각 방송사에서 퇴직하신 분들의 방송인 OB 방송을 해보고 싶습니다. 거창하게 전국을 상대로 방송을 하는 것은 아니구요.. 지금 살고 계신 곳의 구청의 소식을 전하는 기자로써 카메라기자로써 직접 촬영하고 글쓰고 편집할 수 있는 그런 방송 프로그램을 꿈꾸고 있습니다.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현직 전국 방송 기자로써 일하시다가 퇴직하셔서 지역의 발전을 위해 일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이 지금 제가 가지고 있고 추진하고 있는 작은 꿈입니다.   다변화되는 미디어 환경 속에 일하는 후배 카메라기자들에게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미디어의 핵심은 영상입니다. 미디어의 변화와 혁명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개더링 되는 영상을 좀 더 화질이 좋게 만드는 것과 영상을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게 만드는 기술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미디어 컨텐츠의 핵심를 이루는 영상은 이렇게 발전이 되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영상을 만드는 카메라기자의 의지라고 하겠습니다. 단순 찍어내는 것이 아닌 한 컷으로 취재, 전달 하고자 하는 것의 의미를 담고, 시청자들의 흡입력을 끌어내는 그런 의미있는 영상을 만들고 구성 할 줄 알아야합니다. 영상을 만들어내고 압축하여 의미를 담고 전달하는 구성 능력. 카메라기자는 단순 기자가 아니라 영상구성작가가 되야합니다. 영상과 또한 글과 그리고 그것을 구성하는 3위일체의 영상구성작가가 우리가 나아갈 길이 아닌가 합니다. 또한 방송인으로서 ‘스타성’이 있어야 합니다. 배우나 가수나 스타성이 있어야 대중적인 인기를 얻습니다. 영상 또한 “자기가 자기를 메이크업‘하는 영상 메이크업이 필요합니다. 흡입력있는 영상과 구성으로 프로그램을 제작 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스타성은 자신의 ’안과 밖이 조화‘를 이룰때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상물을 만들 때 기존의 예쁜 그림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발상의 전환, 역발상으로 함축적인 영상과 과감한 음악, 영상, 편집의 저돌성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나아가 영상구성작가로서의 능력을 갖추어 종합 방송인으로 자리를 매김하는 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카메라기자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욕심을 표출해 프로그램을 만들 줄 아는 ‘완벽한 방송인’이 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양동 C&M 미디어원 센터에서 이루어진 인터뷰는 2시간가량 이어졌다. 서울 15개 구와 경기지역을 아우르는 지역 보도물과 제작물을 담당하고 있는 김민호 이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방송에 대한 열정을 인터뷰 내내 보여 주었다. 또한 현실에 안주 하지 않고 나아가는 카메라기자의 모습을 강조 했다. 인터뷰 이후 C&M 스튜디오와 사무실을 보여 주시면서 ‘큰 방송사에 비해서 규모도 작고 그렇지만 여기서 내 꿈을 펼칠 수 있다.’라고 뿌듯하게 말씀 하셨다. 김민호이사는 지금까지 이루어 온 것 보다 더 많은 것들을 이루려고 지금도 방송의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대담`정리 : 정연철 / MBC 영상취재부
    2010-07-15
  • <릴레이 인터뷰> GTB 권순환 팀장
    GTB 권순환 팀장 1. 미디어 아이 제 73호에서 YTN 진민호차장님께서 추천해주셨는데, 추천 소감을 말씀해 주세요. - 미디어아이에서 나오는 <릴레이 인터뷰>를 보다가 나에게도 기회가 올거라 생각은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습니다. 그만큼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고맙고 황송스러울 뿐입니다. 2. YTN 진민호차장님과 어떤 인연으로 알게 되었고, 어떤 분이신가요? - 처음 YTN 개국 시에 방송국에 입사하였습니다. 고향인 강릉에 발령 난지 얼마 되지 않아 <강릉 잠수함 무장공비 사건>으로 YTN 기자들이 모두 내려 왔었습니다. 그때 진민호기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서로 연락하면서 친분을 쌓았습니다. 처음에 진민호차장님을 뵈었을 때 카리스마 있는 모습에 무서웠는데 차차 함께 시간을 보내고 촬영을 하면서 보기보다 참 순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순한 모습이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여 연락을 자주하게 되었습니다. 3. 카메라 기자가 되기로 한 이유는 무엇이며, 카메라 기자가 된 후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요? -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방송기술관련 취직을 준비하였습니다. 몇 번의 실패를 맛보다가 YTN개국 당시 방송국에 입사하였고 중계팀으로 배치되어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을 접하였습니다. 그 후 강릉으로 발령되어 내려가 있는 도중 카메라팀이 없어 직접 카메라를 잡게 되면서 우연찮은 기회에 카메라기자가 되었습니다. - 카메라기자는 몸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촬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아플 때 취재?촬영을 못하는 심정이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4. 카메라 기자로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일은 무엇인가요? - 예전 화물연대 파업당시 탱크로리운행이 중단되었습니다. 탱크로리 운행 중단으로 기름 운송에 차질을 빚어 심각한 위기에 달하였습니다. 그러나 몇몇 탱크로리 운전자들이 운행을 한다는 제보를 받고 촬영을 하였습니다. 최대한 운전자들의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조심히 촬영을 하였습니다. 방송에 나갔을 때 탱크로리 운전자의 모습과 차량이 조금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들이 문제가 되어 방송 후 탱크로리운전자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너가 촬영한 것 때문에 나와 내 차가 위험해 졌는데 책임질꺼야?" 하면서 술 취한 목소리로 연락이 왔습니다. 그 분은 분을 참지 못하며 욕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순간 저도 할 말은 해야겠다 싶어서 "촬영한 부분에 대해서 피해가 있을 때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운전기사는 오히려 더 화를 내었습니다. 저 또한 답답한 마음에 직접 만나 단판을 짓기로 하였습니다. 큰 싸움이 일어 날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분과 만나 술 한잔 하면서 대화를 나누니 화도 누그러졌고 나중에는 서로 형, 동생 하면서 친한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5. 지금현재 카메라 기자단 강원지부장이신데,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강원지부를 이끄실 생각이신가요? - 작년 말에 지부장을 맡아 뭘 어떻게 이끌어갈까 고민을 많이 하였습니다. 시기가 시기다 보니 디지털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방이라는 여건상 실제 피부로 많이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원도에 있는 카메라기자분들에게 교육의 여건을 많이 만들어 앞으로 나아가야 할 카메라기자의 참다운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강원도지역 카메라기자를 대상으로 에디우스 교육(편집교육)을 올해 초에 실시하였습니다. 지방에서는 최초라고 들었습니다. 교육을 마친 강원도권 기자들 분들도 배움에 기뻐하여 저 또한 흐뭇하였습니다. 아직은 장비와 장소부재로 다양한 교육을 할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하여 교육의 여건을 만들겠습니다. 6. 평소 쉬는 날에는 무슨 일을 하시나요? - 골프를 취미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GTB 본사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여유를 즐길만한 시간이 없고, 재충전의 시간을 갖기 위해 주말에는 되도록 가족들과 함께 보내고 있습니다. 7. 앞으로 세운 계획이 있다면? - 미래는 개척하기 어렵겠지만, 일단 계획이 있다면 카메라기자들이 좀 더 편안하게 일하기 위해 노력하고 싶습니다. 주변 여건이 어렵다고 하는 현실에서 카메라기자들이 본업에 충실할 수 있도록 안전적인 기반을 만들고 싶습니다. 8. 카메라 기자를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 저도 이 직업을 갖기 전에 카메라기자가 어떤 존재인지 잘 몰랐습니다. 지금 들어와서 경험하며 일을 해보니 티는 나지 않지만 참 중요한 직업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비유하자면 산소라고 생각합니다. 느끼지는 못하지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카메라기자를 준비하는 후배님들은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우선 책임의식을 갖고 있어야 됩니다. 실제 현장에서 내가 손해를 볼지라도 나의 책임으로 인해 국민들의 알권리가 보장된다고 생각하면서 카메라기자를 준비하십시오. 사건 사고 현장은 어떤 상황인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 상황에서 좋은 앵글을 잡기위해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는 책임과 희생이라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됩니다. 9. ‘신생아 불법매매 현장'이 특종보도 된 걸로 알고 있는데 취지와 이 영상을 통해 얻은(사회적인 것이나 느낌)것은 무엇인가요? - 2005년도 말이었습니다. 그 당시 막내 취재기자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선배님 신생아 불법매매가 이뤄지고 있다는데 취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처음 생각 했을 때 너무 어려운 취재라 고민을 많이 하였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비인륜적이고 절대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에 힘든 여건에도 불구하고 막내기자와 단합하여 취재를 시작하였습니다. 막상 시작하니 단서도 쉽게 나오지 않아 촬영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작은 실타래가 풀리는 것처럼 제보가 하나 들어오더니 어느새 여러 제보자들이 연락을 주어 촬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제보자들의 인터뷰와 촬영을 통해 '신생아 불법매매 현장' 이 보도 되었고 비인륜적인 현장의 모습이 방송된 후 많은 시청자들이 공감을 하며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라며 많은 댓글을 달아주었습니다. 보도가 나간 후 지지부진하던 경찰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사각지대에 놓인 의료기관에 대한 정부의 관리정책 강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사건이 발생한 근본 원인인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과 지원을 강화하는데 일조하여 저 또한 뿌듯하였습니다. 다음 이어지는 인터뷰를 추천해주신다면? -다음 이어지는 인터뷰 주자는 서울 KBS에 있는 김대원기자입니다. 김대원기자는 강릉에 파견내려와서 저와 인연이 있었고 자주 만나지는 않았지만 침착한 성격이 맘에 끌렸던 친구입니다. 강릉에서 서울로 발령나면서 마지막으로 저녁을 먹으며 무척 아쉬웠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김대원기자 보고싶습니다. 춘천한번 내려와서 얼굴 한번 봅시다^^ 대담 : 안정원 / 제5기 명예카메라기자
    2010-07-14
  • <디지털 방송환경의 변화와 보도영상 세미나> 참관기
    <디지털 방송환경의 변화와 보도영상 세미나> 참관기 미 국방부는 2010 합동보고서(Joint Vision 2010)에서 21세기 전쟁은 네트워크(중심)전쟁(network centric warfare)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네트워크 전쟁은 사령부와 최전선의 병사가 정보의 네트워크로 엮여(networked), 정보의 이용가치를 극대화하는 전쟁수행 시스템이다. 군에서 시작한 네트워크로의 흐름은 이미 여러 산업분야로 전파되고 있다. 2010년 5월 28일 “디지털 방송환경의 변화와 보도영상”이란 주제로 서울 그린월드호텔에서 개최된 세미나는 방송계에 불어온 네트워크 열풍을 확인할 수 있는 장소였다. 세미나를 통해 주최 측인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는 회원과 함께 네트워크제작시스템(networked production system, NPS)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NPS는 방송사만 보유하던 영상데이터를 현장의 카메라기자와 네트워크로 공유하여 방송영상의 활용도를 극대화 하는 것이다. 이는 전선에 있는 병사가 사령부 서버에 접속하여 다양한 정보를 불러올 수 있는 네트워크전쟁의 수행체계와 유사하다. 이날 지상파 3사와 보도전문채널 2사는 실무를 통해 축적한 NPS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공개했다. SBS는 자사의 네트워크데이터시스템(NDS)을 통해, 당시 방송중인 SBS 8시뉴스의 화면을 SBS 본사의 서버에서 불러와 세미나에서 시연하였다. NPS의 구동장면을 세미나 장에서 공개한 것이다. 다른 방송사들도 NPS 구축을 위한 노력과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발표했다. 여러 방송사 모두 경비적 측면과 업무효율적 측면에서 NPS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렸다. MBC에서는 NPS의 구축효과로 테이프와 복사장비의 불필요함에 따른 경비절감과 동시에 영상 편집시간의 단축을 꾀했다고 밝혔다. SBS에서는 원소스(테이프 한 개)를 한명의 유저가 이용하는 기존의 시스템과 달리, NPS를 통해 원소스(중앙서버의 데이터)를 다수의 유저가 이용할 수 있어 업무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밝혔다. 디지털화, 테이프리스화, 네트워크화 되는 방송제작환경을 고려할 때, NPS는 더욱 활성화될 것임이 느껴졌다. 네크워크화는 방송에서도 피할 수 없는 흐름임을 세미나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네트워크 시대의 속보전쟁은 기존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네크워크 시대를 맞아 미군이 네트워크 전쟁을 준비하듯 카메라기자도 NPS로 미래의 보도영상을 준비하는 것이다. 향후 NPS를 이용해, 출장지에서 영상을 편집하는 카메라기자의 모습이 일반화 될 것이다. 순간 사건현장의 최일선에서 취재중인 카메라기자와 최전선에서 전투 중인 군인들이 네트워크로 디졸브되는 느낌이 들었다. NPS가 카메라기자의 든든한 우군이 되어 보다 신속하고, 보다 다양한 영상으로 구성된 방송뉴스의 시청을 시청자의 한 명으로서 기대해 본다. 고형석 / 회사원
    2010-06-25
  • 월드컵을 가져오자
    월드컵을 가져오자 한국 대표팀이 드디어 원정 16강에 올랐다. 한국대표팀은 당초 예상대로 B조 2위로 16강에 올라 우루과이와 26일 11시 승리의 땅 넬슨 만델라베이 경기장에서  16강전을 치른다. 격세 지감(隔世之感)이다. 몇 십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대표팀은 태국, 말레이지아, 버마,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등과 박터지게 축구를 했다.  도토리 키재는 시합이 열리는 날이면 손에 땀을 지고  동네에 한 두개 있는 흑백TV를 보며 응원하던 시절. 그시절 한국 축구가 최고인 줄 알았던 때도 있었다. 76년 9월 박스컵에서는 말레이시아에 1:4로 뒤지다 종료 5분여를 남기고 SBS 해설위원이신 차범근의 그림같은 3골이 터졌다. 그림이었다. 그때 당시 말레이시아는 강적이었다. 아마 지금 말레이시아에게 선제골로 4골을 내어 주었다면 딩크형 할아버지라도 감독이 바뀌었을 것이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은  아시아 동네축구 골목대장 한국과 일본이 세계무대의 벽을 실감한 경기였다면 2002년은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한 대회였고 유소년 축구 육성의 중요성을 실감 한 대회였다. 2006년 대회는 17위로 원정 16강 가능성을 본 대회였다. 이때 호주는 우리와 승점이 같은 1승1무1패로 16강에 진출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우리는 승점 4점으로 16강에 올랐지만 호주는 같은 승점으로 독일과의 대량실점을 만회하지 못하고 탈락했다. 어제 새벽에 끝난 C조와 D조의 경기는 우리를 더욱 흥분하게 만든 결과로 나왔다. 우선 8강까지는 전통의 강호들을 모두 피할 수 있는 최상의 대진운이 만들어졌다. 대표팀은 우루과이를 이기고 8강에 진출 할 경우 미국과 가나와의 승자와 대결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아르헨티나는 멕시코를 누르더라도 잉글랜드와 독일의 승자와 대결을 하게 돼 전력을 쏟고 4강에 올라 올 확률이 높아졌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우루과이를 이겼을 때 생각해 볼 일이다. 대한민국은 우루과이에게 지난 90년 월드컵 경기에서 0:1로 석패를 했다. 그 외 친선경기에서도 3패를 했지만 우루과이는 남미예선에서 최하위로 코스타리카와 플레이오프를 거쳐 턱걸이로 월드컵에 나왔다. 18경기에서 28득점에 20실점이다. 그만큼 수비가 불안하다는 이야기 였는데 이번 조별리그에서는 무실점으로 16강에 올라왔다. 아트사커 프랑스와 개최국 남아공을 연파하며 조1위로 올라온 강팀임에는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난 2008년 베이징올림픽 8강에서 남미에서 해볼 만하다는 파라과이에게 2:3패배를 해 4강 문턱에서 주저앉은 기억이 있다. 가까이는 홍명보 감독의 U-20대표팀이 2009년 U-20월드컵 8강에서 가나에게 2:3으로 패해 탈락했다. 결코 우리가 재물로 볼 수 있는 팀은 월드컵 진출팀 중에 단 1팀도 없다.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은 16강전에서부터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의 강호들과 치열한 경기를 치러 어렵게 4강에 올랐었다. 우루과이나 가나 미국 등 결코 만만한 팀이 없지만 적어도 해볼만한 상대와 일전을 벌인다는 것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다.   이번 2010년 월드컵 대진은 아마 다시 오기 힘든 기회 일 것이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이 있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효율적으로 이용해 실행해야한다.  8강전에서 전력을 소모한 아르헨티나를 맞아 마라도나 감독의 입에 오바로크를 치고 월드컵을 한국으로 가져오자. 너무 오버인가?^^;;; 이정남  newscams@korea.com
    2010-06-24
  • 아르헨티나에게 제대로 한방 먹은 날
    아르헨티나에게 제대로 한방 먹은 날 아르헨티나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나라 중에 하나이다. 내가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외국이라는 곳을 나가 본 곳이 아르헨티나였고 공교롭게도 지금의 아르헨티나 대표팀 감독인 마라도나를 취재하러 갔었다. 그때가 벌써 15년 전이다.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가 보카주니어스 팀을 이끌고 한국에서 재기전을 했었고 그 때 우리는 일개 프로팀을 맞아 국가대표가 상대 하던 시절이었다. 십여년 전만해도 해외 유명 프로팀들이 한국을 방문 할 때면 국가대표가 나서 경기를 했다. 평소 보다 일찍 사무실을 나서 여의도로 향했다. 길거리 응원의 메카인 시청이나 봉은사 길보다 쾌적한 환경에서 경기를 볼 수 있으리라는 의도가 있었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시원한 강바람에 생각보다 잘 꾸며진 편의시설이 응원전에 나서는 이들을 더욱 즐겁게 했다. 월드컵은 우리나라 국민들을 하나로 묶는 축제다. 천안함 사태로 경색된 남북관계, 6.2지방 선거로 인한 남남 갈등은 잊은지 오래다. 이미 우리는 하나였고 우리의 적은 아르헨티나 였다. 사무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손을 놓은 지 오래다. 빨리 아르헨티나와 경기를 해 승전보에 온 나라가 떠들썩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1:4패배, 누구도 예상 못한 결과에 허탈했고 일부 언론과 네티즌은 연일 대표팀의 전략부재와 전술, 선수기용을 놓고 씹고 있었다. 아쉬운 점은 많았지만 전통의 강호 아르헨티나를 맞이하여 우리 선수들은 선전을 했다. 적어도 후반30분까지는... 아르헨티나의  세 번째 골이 오프사이드 판정이 났다면 염기훈의 슛이 골로 들어갔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오범석선수를 비난 할 필요도 없고 선수기용을 잘못했다며 허정무 감독을 비난 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우리한테는 이번 경기가 남아공 월드컵에서 제대로된 스파링 파트너를 만나 다음 결전에 대비 할 수 있는 단비가 될 것이다. 상황은 우리에게 훨씬 유리하다. 지난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1승1무 였음에도 마지막 상대인 스위스를 반드시 이겨야 16강에 진출하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1승1패인데도 나이지리아와 비겨도(아르헨티나가 그리스를 잡아주는 상황) 16강에 진출 할 확률이 높아졌다.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서 정말 퇴장없이 운좋게 지금의 실력으로 선전을 펼친다면 적어도 8강까지 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행복한 상상을 해본다. 4강에서 아르헨티나와 다시 만나 후회 없는 한판을 보고 싶다. 이정남  newscams@korea.com
    2010-06-22
  • 2010 NAB SHOW 참관소감
    2010 NAB SHOW 참관소감 현재 KNN의 경우 아날로그 TV 방송을 아직 종료하지 못하고 디지털 전환이 진행되면서 HD제작이 이제 시작에 불과한 시점에 금년 NAB 2010은 3D 분위기 물씬 풍긴다. 장비 제조업체들은 3D 제품들을 전시하면서 3D쪽으로 분위기를 몰고 간다. 아직 HD 수상기도 이제 겨우 시작되고 있는데 벌써 3D가 대세인 듯하다. 이러다가는 HD와 3D가 동시에 진행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점쳐보기도 한다. 최근 KNN 뉴스를 중심으로 일부 프로그램이 HD로 제작되면서 눈높이가 높아져 SD 아날로그 영상을 보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중계차를 도입해서 야구 중계 등 야외 제작을 HD제작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이 된 것으로 판단된다. 관심은 아카이브, Tapeless 제작환경, NLE 편집 등 일련의 새로운 방송환경 구축에 몰입되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3D 입체영상이다. 디지털의 설계는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다. 생각(아이디어, 기획)이 떠오르면 바로 시행할 수 있다. 전혀 새로운 발상으로 제품을 만들 수 있다. 장비의 도약적 발전도 있었다. 디지털 데이터 테이프 카트리지 1개에 20GB40GB80GB200GB400GB800GB1500GB(1.5TB)3000GB(3.0TB)1) 순으로 기록밀도를 올려서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는 좁은 공간에 많은 량의 콘텐츠를 보관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NAB SHOW는 사실 conference 가 중요하지만 대부분 장비전시장만 둘러보고 돌아온다. 한국의 KOBA SHOW 역시 conference가 있다. 많은 사람이 최근 참석하고 있다. Quantel은 편광방식의 3D 그래픽 툴을 현장에서 시연하면서 왼쪽 눈으로 본 영상, 오른쪽 눈으로 본 영상을 각각 그려서 동시 출력하면 입체영상을 구현하는 방식을 선보였다. 일본 Ikegami는 그 동안 3D 카메라 몇 가지를 전시하고 있었다. 사람도 미간(眉間)이 넓은 사람과 좁은 사람이 있다. 카메라도 왼쪽과 오른쪽 카메라 간격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Ikegami는 조정해서 사용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다양한 실험을 했던 것이다. 편의상 LV/RV(Left Video, Right Video)로 표기. LV/RV의 카메라 간격은 입체감과 눈의 피로감 등에 관해 많은 연구와 실험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처럼 아무런 준비 없이 입체감이 있다고 무조건 시행해서는 안 될 것이다. 3D방식은 아직 표준화가 되지 않았다. 앞으로 많은 문제가 남아있다. 국제적으로 표준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과거 흑백에서 칼라TV를 시행하면서 흑백TV로 칼라 방송 시청이 가능하도록 개발하였다. 지금도 입체방송이지만 일반 HD 시청이 가능해야 할 것이다. 이런 양립성(compatible)이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방송사는 2D와 3D를 별도로 방송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을 수 있다. 양립성을 위해서 방송사와 가전사 간에 표준 규약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데 벌써부터 3D TV라고 소개하면서 제품을 팔고 있다. 2010 NAB는 많은 업체들이 3D를 소개하고 있지만 특별히 solution 기술이라든지 특별한 제품이 없으면서도 3D관련 전시를 하고 있다. 특히 SONY는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3D 제작 중계차를 동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대형 모니터와 passive 방식으로 편광안경을 제공하고 있다. 개발 제공할 수 있다고 장담은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조명 업계의 화두는 당연히 LED였다. 다수의 업체에서 고출력 소형 LED 조명 제품을 출시하였으며 일부업체에서는 대형 Studio 용 제품 도 출시되었다. 문제는 일반 조명용 제품처럼 색온도를 맞추는 문제가 업계의 화두 인데 이번 제품에는 단일 색온도의 소자를 반사면 및 전면 필터를 사용한 색온도 교정제품과 다수의 색온도 제품을 혼합 사용하여 색온도를 교정한 제품이 출시되어 있었다. ENG 취재에서 많이 사용되던 Sungun 할로겐 램프를 사용하던 조명도 LED 형으로 전시되고 있다. 스튜디오 등기구 역시 LED 형으로 만들어진 기구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3D에 영향을 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장비가 그래도 데이터를 기록 보관하는 장비이다. 곡간과 같은 테이터 창고이기에 데이터 방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카이브 장치가 바로 그런 것이다. 아직 3D와 관련된 아무런 표준이 없다. 신호구성, 전송방식, 동기신호 구성, 등등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좀 더 시간을 가지고 발전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 정용수 / KNN 영상제작팀 ※ <미디어아이> 제73호에서 이 기사를 확인하세요 미디어아이 PDF보기 바로가기 링크 /bbs/zboard.php?id=media_ey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41
    2010-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