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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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영상기자 2세대의 자가당착(自家撞着)
    영상기자 2세대의 자가당착(自家撞着)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등장한 한국의 영상기자는 올해로 61년의 직업적 역사와 전통을 가지며, 발전해오고 있다.  60여년 ‘한국영상저널리즘사’에 있어서, 영상기자 2세대는 한국영상저널리즘의 아버지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50년에서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필름카메라에 기반한 1세대 영상기자들이 몸으로 보여준 헌신과 노력 끝에 대졸공채로 입사한 2세대 영상기자들은 ENG카메라의 등장, 80년대의 컬러TV방송 시작과 경제성장, 사회민주화, 서울올림픽을 통한 세계방송흐름의 변화를 겪으며, 영상저널리즘의 발전과 영상기자의 독립성, 전문성 확립에 한 획을 그었다. ‘영상저널리즘’, ‘영상취재’, ‘보도영상’, ‘영상기자’라는 용어의 조어와 개념정의가 이들 2세대에 의해 확립되었다. 또, KBS의 ‘현장의 눈’, ‘현장고발’, MBC의 ‘카메라고발’, ‘카메라출동’과 같이 시대를 앞서간 영상기자의 탐사저널리즘 프로그램들은 지금도 방송계에 차용되고, 회자되고 있다. 그들이 직접 기획하고 제작했던 다큐멘터리들은 오늘날 자연다큐, 시사다큐의 효시로 평가받는다. 아웅산폭발테러의 현장에서도 카메라의 버튼을 끄지 않았고, 화염병과 체류탄이 터지는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한 전투의 현장에서도 숨이 끊길 듯한 고통과 눈물을 참으며, 시대를 기록했다. 그래서, 그들의 영상기자로서의 프로의식과 항상 공부하고 고민하며, 행동하던 정신과 결과물들은 다매체시대를 살아온 3세대, 디지털시대의 4세대 영상기자들이 두고두고 되새기고, 다시 고민해야 할 존경과 배움의 표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조중동종편의 방송이 가시화 되어가면서, 2세대 영상기자들이 그들이 보여 왔던, 개척자로서의 삶을 멈추지 않고, 이들 종편사들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들려오고 있다. 후배들의 존경을 받으며, 이미 퇴직을 하거나 은퇴를 앞둔 2세대 영상기자들이 새로운 방송사에서 자신들의 다양한 30년 영상취재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삶을 진지하게 펼쳐간다는 것은, 소자고령화시대에 후배영상기자들로서는 신선한 충격과 스스로의 새로운 혁신을 위한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세대 영상기자들의 조중동종편에서의 역할들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이런 후배영상기자들의 기대와 존경심에 커다란 상처가 나고 있다. 조중동종편사들은 사주의 이익에 충실한 보도를 만들어내기 위해 보도영상의 위상을 취재된 기사를 보조하고 강화하는 역할정도로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또, 공정방송의 요구가 싹트지 않기 위해, 분업과 협업체계 속에서 방송사를 대표하는 전문성과 윤리성을 추구해온 독립된 직종으로서의 영상기자를 인정하지 않고, VJ로 대볌되는 외주화 된 저임금의 고용이 불안한 카메라맨을 영상취재의 근간으로 활용하는 시스템을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종편사들에 각 방송사 출신의 2세대 영상기자들이 그 시스템의 관리자로서, 운영자로서 참여하기 위해, 제안서를 기획하거나, 종편의 출입처 안착을 위한 계약직 영상기자로서의 입사를 제안 받으며, 실무자들과 만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또, 그 소문들은 협회의 조사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이미 이러한 작업에 참여한 2세대 영상기자들은 ‘기존의 조중동종편의 보도영상에 대한 무지를 바로잡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 ‘더욱 추락할 수 있는 영상기자들의 위상을 살리기 위한 노력의 하나’라며, ‘반드시 영상기자후배들의 입지를 흔드는 일이 없을 것이다.’는 자신논리의 합리화를 추구하는 단계에 이른 듯하다. 하지만, 2세대 선배들이 영상기자와 영상저널리즘의 직업적 근간과 이론들을 만들어가며, 후배들에게 강조했던, 영상기자의 저널리스트로서의 독립성과 전문성, 협업과 분업의 틀에서 최고의 방송을 만들어가는 영상기자로서의 자부심이 존재하지 않는 영상기자와 조직은 그 진실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가짜 영상저널리즘을 추구하는 조직일 수밖에 없다. 더 이상 2세대 선배들이 쌓은 영상저널리즘의 업적과 선배영상기자로서의 존경을 한순간에 허물어버리는 자가당착의 길을 가지 않기를 선배들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싶다. 그것이 선배들이 항상 이야기하는 ‘우리 사랑하는 영상기자후배들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선배’로서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선배님들 저희의 사랑과 존경을 부디 버리지 말아 주세요!!!                   - 한 후배기자의 호소
    2011-05-20
  • (줌인) 누린 것, 그대로를 후배들도 누리게 하라.
    누린 것, 그대로를 후배들도 누리게 하라. 방송 카메라기자협회의 주춧돌을 쌓으신 원로 선배들이 새로 생길 종편의 자문 역할을 맡았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내심 반가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편과 함께 수많은 카메라 기자들이 생겨날 것인데 그 처우와 지위를 챙겨줄 든든한 선배들이 생겼다는 소식에 그 반가움은 더욱 컸다. 게다가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뒤 소위 사회적 지위까지 얻은 존경할만한 선배들이었기에 은근한 자부심과 기대감마저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심상치 않은 소문이 들려왔다. 그저 와전된 ‘소문’이라 생각하며 ‘설마’를 곱씹었건만 ‘자문’ 내용의 실체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되면서 협회원 모두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며칠 전 협회 집행부가 논란의 당사자 중 한 명인 한 원로 선배를 만나 해명을 듣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해명 내용의 골자는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되는데 그 일성은 이 모든 논란의 출발점이 카메라기자 후배들을 위하고자 하는 본인들의 ‘진정성’이 잘못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원로선배들이 후배들을 위하겠다는 진정성을 굳이 의심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 진정성의 진위여부를 떠나 해명의 내용과 지금까지 드러난 객관적 사실이 우리에게 미칠 파장이 너무 크기에 해명 내용을 조목 조목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카메라기자 조직을 종편 조직 안에 둘 것을 최우선적으로 요구했다는 부분이다. 고마운 말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 손바닥이 따로 없다. 이 말을 들은 종편 사주 입장이 한번 돼보자. 카메라기자 외부 파견이라는 옵션이 버젓이 보이는데다 그것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명확해 보이는 당사자들이 제안한 ‘내부 조직 제안’이라는 것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정말 후배들을 위했다면 한손에 든 또 다른 옵션, 즉 카메라기자 외부 파견이라는 옵션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다. 둘째, 위의 제안이 이루어 지지 않아 부득이하게 외부에 둘 경우 ‘파견’이 아닌 ‘도급’ 형태로 가겠다는 주장이다. 파견직은 설명할 것도 없이 이른바 ‘비정규직’이다. 그에 비해 ‘도급’은 회사의 책임성이 커 처우와 고용안정성의 자율성도 크다는 주장일 것이다. 그러나 도급이라 할지라도 직접고용이 아닌 이상 모기업인 종편이 계약을 해지하면 그만이다. 이른바 ‘저널리스트’로써 카메라기자에게 고용의 안정성은 비단 근로조건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기자’의 자존심에 관한 문제이다. 어찌 보면 급여의 많고 적음보다 더 중요한 사항이다. 그런데 소위 ‘도급회사‘가 모기업인 종편과의 계약과 무관하게 이들의 고용, 더 나아가서는 기자로써의 자존심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낙관이다. 셋째, 3년이 지나면 외부에 둔 카메라기자 조직을 종편 안으로 편입시키라고 권고했다는 부분이다. 이건 더 어처구니가 없다. 세상에 어떤 사주가 3년 동안 별 탈 없이 굴러가는 도급회사를 조직 안으로 들이겠는가? 이 제안의 진정성과 선의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현실성 없는 ‘선의’는 ‘악의’의 과대포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당장 굶어죽을 거지에게 정작 동냥은 하지 않으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몇 년 후에 부자가 될 것 이란 말만 늘어 놓는다면 이런 ‘선량한 말’은 거지에게 상한 밥을 던져주는 것보다 못하다. ‘이런 시도를 우리가 하지 않아도 다른 누군가는 하게 될 것’이라고 반문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작금의 ‘방송 판’에서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분노하고 허탈해하는 이유의 요체는 이런 ‘볼썽사나운 시도’를 카메라기자 출신 원로선배들이 굳이 해야 하는지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돈 때문도 명예 때문도 아니라고 한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진정 미래의 후배 카메라기자들을 위한 충정 때문이라면 그것을 증명하는 길은 간단하다. 본인들이 카메라 기자로써 누렸던 모든 것, 그대로를 후배들도 누리게 하려는 노력! 그 ‘노력’이 ‘선의’와 ‘해명’보다 먼저여야 했다.
    2011-05-20
  • 이집트 출장 지원자를 받습니다.
    이집트 출장 지원자를 받습니다. 여느날과 다름없는 일상의 아침은 짧은 문자와 함께 요동쳤다. 무라바크의 퇴진을 요구하는 이집트 반정부 시위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는 그 시점이었다. 기자로서 이런 역사적 순간에 국제적 수준에서 취재할 수 있다는 것은, 흔히 찾아오지 않는 분명한 기회였다. 두말할 것 없이 선뜻(!) 지원하고 싶었으나, 문제는‘타이밍’이었다. 사정인즉, 개인적으로 회사의 지원을 받아 다닌 대학원 졸업논문이 상반기까지 통과하지 못하면 지원금 천오백만원을 반납해야 한다는‘인생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복잡하고도 무거운 마음을 표현해줄 짧은 문자를 보냈다“지원자 없으면 가겠습니다”영어로“I’m the last man to go...”분명‘Last’에 방점이 찍혀있다고 주장하였으나, 이 문자는 일종의 지원으로 즉각 해석되었고, 이집트는 그렇게도 빨리, 그리고 아주 무겁게 눈앞에 펼쳐졌다. 혁명의 광장, 타흐리르(Tahrir) 이집트로 가는 밤비행기 안에서 신문을 꺼내들었다. 아랍어로 자유를 뜻한다는‘타흐리르 광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이집트 시민들 한명 한명의 표정에서 읽어낼 수 있는 간절함이 시위의 밀도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간절한 외침을 열세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광장의 인파는 대단했다. 이들은 예상외로 언론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거기에서 만난 모하메드라는 대학생은 아랍어를 모르는 나를 위해 두시간동안 동시통역을 옆에서 자원해서 해주기까지 했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무바라크의 퇴진과 그와 그의 관료들이 축적한 부의 환수였다. 높은 실업률과 반민주적 통치, 그리고 극심한 빈부격차 등 사회불안 요소들은 그렇게 광장에서 용암처럼 터져나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순조로울 것 같던 취재였다. 통신망도 용이치 않았으나, 먼저 도착해 훨씬 고생하며 좋은 결과를 내고 있던 후배 박주일 기자와 KBS 박진경 선배, 그리고 세계에서 온 수많은 외신기자들과 함께 이들의 절박한 요구를 세계에 알리는 인류애적인 과정에 동참하고 있다는 보람도 느껴질 즈음, 문제는 공권력의 위협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나왔다. 바로 친무바라크계와 반무바라크계의‘민민(民民)갈등’이었다. 민주화의 역사가 거의 그러하듯 상처를 기억하려는 자와 상처를 지우려는 자들이 하나의 공간에서 만났고, 이들은 서로에게 과격했다. 어렵게 들어간 광장. 머리위로 돌이 날라 다니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는 불탄 관공서들, 뒤집혀 전소된 차량, 도시 곳곳에 배치된 탱크, 장갑차와 함께 전장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이런 첨예한 갈등 속에서 광장에 있는 반무바라크 시위대에 유입되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친 무바라크 시위대들이 이들을 에워싸면서 광장은 봉쇄됐다. 무엇보다 친무바라크 시위대는 외신 취재진에게 매우 과격했다. 반민주적 행태를 보여온 경찰들은 시위대에 가장 먼저 습격당해 도시에서 자취를 감추고 없었고, 경찰을 대신해서 자경단의 형태로 스스로 경찰을 자처하는 이들은 외국인 기자들을 잡고 근거없는 마녀사냥을 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제복을 입지않은 사복경찰이 이들속에 섞여 시위대에 총을 쏘아 대고, 차량으로 시위대에 돌진하기도 하고, 호텔 베란다에서 촬영하던 취재진의 방을 따고 들어와 물리적으로 위협하기도 했다. 말그대로 무법지대였다. 140여명의 기자들이 죽거나 다쳤다. 이들은 외신들이 이집트의 문제를 국제화하여 무바라크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무바라크는 나의 영원한 대통령이자 나의 아버지이다! 꺼져라!" 카메라를 보면 무조건 수십명이 달려와 몸을 잡아 끌었다. 시간이 갈수록, 이들은 더욱 과격해졌고, 길거리에서 촬영을 하지 않아도 카메라만 보고 달려와 주먹과 쇠파이프 등으로 위협했다. 필요한 건 연기력과 핸드폰 이 상황에선 연기력이 필요했다. 제지하는 군인들에겐 얼치기 관광객 모드로“무바라크가 누굽니까 전 관광객인데 타흐리르 보러 왔는데요. 피라미드는 왜 안하나요”를, 친무바라크 시위대엔“무바라크를 존경합니다. 위인전에서 봤는데요”라든지, 반무바라크 시위대엔“우리는 당신들을 돕기 위해 왔습니다”를 어설프지만 간절한(?) 연기와 함께 사용했는데, 이런 것들도 먹히지 않으면, “쌀람 알레이 꿈”,“ 브라더”, 등등을 외쳐대며 그들의 어깨를 감싸고 스킨쉽을 해댔다. 험지교육강사들이 가르치듯 인간의 eye to eye contact는 흥분한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고, 이는 실제로 자긍심이 강한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약간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문제는 취재였다. 숙소에서 걸어서 이십분도 채걸리지 않았던 광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서른 번의 검문을 당해야 했다. 카메라는 이런 상황에서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날 밤 호텔로 돌아와 가만히 광장 들어가는 과정을 곰곰히 생각해 봤다. 그리고 조금의 회의 끝에 핸드폰 정도는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에 이르렀고, 취재기자들에게 영상취재의 기술적 결과물이 안좋을 경우의 편집적 보완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취재는 그렇게 자유롭게 시작됐다. 민감한 부분에서는 전화를 거는 척하며 촬영을 했고, 스탠드업 역시 셀프로 하게 했다. 1인칭 주관적 시점의 영상은 2000년대들어 가장 두드러진 약진을 하고 있는 분야로서 이질적이지 않게 현장감을 부각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과 다른 대안이 없다는 절박함에 이끌려 그렇게 취재는 진행되었고, 하나둘 이집트 시민들의 외침은 작은 휴대폰에 차곡차곡 담겨갔다. 성공한 혁명, 그 놀라운 감격 그렇게 열흘을 보냈다. 정치적인 타협안이 연이어 나오고 있었고, 가장 중요하다는 미국의 외교적 입장은 갈팡질팡 흔들리기만했다. 광장에서는 사람들이 매일매일 끈질기게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상황이 완만하다고 판단되면서, 전 팀이 먼저 복귀를 했고, 우리도 복귀 비행기편을 예약하고 귀국 짐을 싸고 있었다. 많은 외신 취재진들 역시 귀국길에 오르고 있었다. 그때 주요 외신들의 브레이킹 뉴스가 급박하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 Mubaraksteps down!” 곧이어 민주화를 쟁취해낸 시민들의 승리감이 도시 전체에 흘러넘쳤다. 사람들이 모두 길거리로 나와 서로서로를 축하했고, 이들을 통제하던 탱크와 장갑차 위의 군인들도 시민들과 하나되어 춤을 춰댔다. 카이로 전체가 시민들의 손으로 직접 일군 혁명과도 같은, 아니 기적과도 같은 결과를 누리고 있었다. 인류문명이 시작되었던 나일강. 이 강은 인류역사를 고스라니 안고 흐르는 강이다. 이곳에서 시민들의 손으로 그리고 그 많은 목숨을 던져,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열망을 성취해 냈다는 기적을 보는 것은 관찰자의 입장에서도 뭉클한 것이었다. 승리를 만끽하면서 내게 다가와 더듬거리며 질문 했던 한 이집트인의 질문으로 글을 마친다. “what will you talk about egypt revolution... to your country? (당신나라 사람들에게 이집트 혁명에 대해 뭐라 말할 겁니까”) 대답은 이날을 기억하며 증언해야하는 바로 우리들의 몫이다. 김우철 MBC 영상취재부
    2011-03-25
  • 이들을 더 이상 오디오맨이라 부르지 말자
    이들을 더 이상 오디오맨이라 부르지 말자 오랜 죽마고우와 같이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그들……. 언제나 변하지 않는 소나무처럼 든든하게, 때로는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카메라기자 곁을 지켜준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있었기에 카메라기자는 더욱더 정교한 영상을 추구할 수 있었으며 위험한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대한민국 첫 방송 이후 40여 년 동안 줄곧 오디오맨이라고 불리는 우리의 仁兄입니다. 과거 오디오맨은 카메라와 오디오박스가 분리된 촬영에서 오디오부문을 담당하는 역할로서 탄생됐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그 영역은 오디오맨이라 칭하게 됐으며, 사회적 직업의 한 직군으로 자리하게 되었고 줄곧 그렇게 부르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 직군을 지금처럼 오디오맨이라 칭하는 것은 현실을 비춰 볼 때 큰 괴리감을 갖고 있습니다. 이미 오래전 일체형 카메라의 등장으로 오디오맨의 역할은 바뀌었습니다. 오디오부문을 담당하기보다는 카메라기자와 동반자적 관계로 진화해 사건사고의 위태로운 상황을 서로 극복해 왔으며, 유기적 상호작용으로써 보도영상 발전의 큰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3~4년 전부터 상용화된 HD 디지털 장비를 사용하면서 그들의 역할은 더 커졌습니다. 다양한 취재영역과 상황별로 가편집, 송출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모습입니다. 때문에, 오디오맨이라는 직업명은 현재에 있어 적절치않다고 생각되며, 현실에 부합하는 직업명을 부여함으로서 보도영상을 담당하는 직업군 스스로가 스마트해 지길희망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예)camera partner (어시스트, 인턴 등…….) 라고 칭하고 싶습니다만, 어떤 명칭이든 현 시점에서 개명의 필요성을 카메라기자 모두 공감했으면합니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동반자에게 새로운 명칭과 역할을 심어주는 것! 더 나은 영역을 설정해주는 것! 이것은 우리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계기도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와 가장 가까이 생활하는 이들의 옛 명칭을 바꾸는 것 부 터가 급변하는 사회에서 우리 스스로가 변화하는 첫 걸음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정재성 MBN 영상취재부
    2011-03-21
  • 아덴만 여명 작전 -삼호주얼리호 취재
    이국의 바다에서 삼호주얼리호를 만나다   오만의 바닷가는 ‘클린스테이트’를 지향한다는 그들의 말 만큼이나 푸르고 깨끗했다. 한국대사관과 무스카트항을 몇 번씩 오가며 삼호주얼리호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사살된 해적들의 시신처리와 생포된 해적들의 인도문제로 주얼리호의 입항은 기약 없이 늦어졌다. 오전에 출근하듯이 대사관에 들려 브리핑을 듣고는 그날의 취재일정을 세웠다. 이러저러한 스케치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이 상황에서 타사 취재팀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더 궁금했다. 타사는 이미 몇 번이나 배를 타고 외항에 대기 중인 삼호주얼리호를 촬영하러 나갔다 왔었다고 한다. 헬기를 수배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며칠이나 늦게 현지에 도착해 현장상황을 따라잡기에도 숨이 찼던 시점이라 전전긍긍 했다. 뒤늦게 우리도 배편을 알아보기 시작했지만, 삼호주얼리호를 호위하는 최영함이 레이더로 감시하며 다른 선박이 접근할 경우 주얼리호를 이동시키기 때문에 절대 배를 잡지 못할 것이라는 관계자의 조언에 따라 계획을 접었다. 지리멸렬하지만,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애초의 입항 예정보다 나흘정도 늦어진 1월 31일 밤, 외교부 관계자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브리핑이 있다고. 부리나케 달려간 대사관은 여러 사람들로 어수선했다. 외교부 측의 발표가 이어졌다. 삼호주얼리호의 입항허가가 떨어졌고, 내일 중으로 입항할 것이라는 것. 모두 긴장 반 흥분 반이다. 어쨌든 내일이면 취재는 끝날 것이고, 설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내일 하루에 사실상 이번 출장의 모든 것이 걸려 있었다.   다음날, 일찌감치 무스카트항으로 향했다. 역시 보는 눈들은 다들 같았다. 항구 전경이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점찍어 둔 포인트는 나만 보아 둔 것이 아니었다. 태풍으로 절반 정도가 무너져 내린 낡은 첨탑을 올라, 녹슨 대포의 포신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국의 바다가 끝없이 펼쳐졌다. 해무에 쌓인 채 수평선 너머로 일렁이는 배라도 보일라치면 주얼리호가 아닌지, 최영함이 아닌지, 카메라로 몇 번을 확인해 보곤 했다.   사실 취재보다는 송출이 문제였다. 지금까지는 인터넷 송출을 했는데, 당일 주얼리호의 입항시간이 애매했다. 뉴스 시간에 임박했고, 뉴스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는 중간에 취재를 포기하고 나와야 할 상황이었다. 결국 고심 끝에 위성 송출 청약을 하기로 했다. 오만의 국영방송인 오만TV가 무스카트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며칠 전 직접 사전답사를 해서 최종 송출 전 단계의 링크까지 확인해보고 온 터였다. 타사의 경우 여러 팀이 취재를 와 있어서 한 팀은 취재를 하고, 한 팀은 인터넷 송출을 맡는 방식으로 일을 분담했는데, 뉴스시간에 임박해 홀로 취재와 송출을 맡아야하는 나로서는 위성 청약이 최선이었다.   멀리 최영함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최영함 옆으로 주얼리호가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먼 바다만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누군가 외쳤다. 이거 주얼리호 아니야? 아차 싶었다. 최영함과는 다른 방향에서, 첨탑의 사각지대로 주얼리호는 벌써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와 있었다. 연돌이다! 작전 당시의 흐릿한 영상에서만 보았던 주얼리호의 연돌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연돌 곳곳에 남겨진 상흔은 마치 하나의 상징처럼 그들의 고단했던 여정을 말하고 있었다. 주얼리호가 항구 인근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촬영한 후에는 부리나케 부두로 달려가야 했다. 외교부 관계자와 함께 통제구역을 지나가니, 삼호주얼리호가 이미 부두에 정박해 있었다. 승선 취재는 철저히 제한되었다. 곳곳에 남은 총탄의 흔적들이며, 성한 것이 없는 유리창들, 부분적으로 패이고 휘어진 선체는 작전 당시의 위태로웠던 상황을 짐작하게 했다. 간간히 갑판위로 오가는 선원들의 한마디라도 듣고자 소리쳐 보았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이제 집으로 간다는 안도와 오랜 피로가 함께 뒤섞인 담담한 표정들이었다. 본래 뱃사람들은 사고가 난 배에 탔었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배에 승선을 거부당할 정도로 징크스에 민감하다고 한다. 선원들이 노출을 꺼려하는 것이 당연했다.   취재를 하다보니 어느덧 그림을 송출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아직 현장을 더 지켜보아야 했지만,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했다. 그렇게 급하게 달려간 송출포인트,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위성청약은 최악의 선택이 되고 말았다. 위성링크를 통해 본사의 위성중계실 화면에 뜬 그림들은 모두 색깔이 빠지고 노이즈가 심했다. 오만TV의 엔지니어들에게 항의했지만, 그들도 고개만 갸우뚱할 뿐이었다. 위성청약시간 20분은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가 버렸다. 인터넷 송출하기도 시간이 부족한 상황, 위성청약을 더 잡아보려 했지만, 이미 다른 청약이 다 되어 있어서 그것도 불가능했다. 그렇게 허둥대기만 하다가 뉴스시간은 다가왔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뉴스는 시작됐다. 결국 그날의 뉴스는 색깔이 빠진 화면과 내근자의 오디오로 방송이 되었다. 가장 중요한 입항 당일의 뉴스였다! 결과적으로 오만TV 측의 귀책사유가 확인되었지만, 상황에 민첩하게 대처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컸다. 그날 밤에는 주얼리호 선원들에 대한 후속취재도 해야 했지만, 기운이 날 리 없었다. 취재팀원 모두 의기소침했다. 하지만, 많은 선후배들이 오히려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주었고, 그 덕분에 큰 위안을 얻었다. 감사했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끝났고, 나는 무엇을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해답은 다음날 우연처럼 다가왔다. 우리 취재팀은 귀국을 위해 공항으로 가기 전 무스카트항에 잠시 들렸다. 항구 안에 들어가는 것은 생각도 못했고, 주변에 혹시 취재거리가 있나 그저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삼엄한 보안 탓에 절대 출입할 수 없었던 항구 정문에서 우리는 스스로도 놀라고 말았다. 우리가 탄 차가 별다른 제지없이 정문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 이유를 우리도 나중에서야 알았다. 현지 코트라 사무소에 취재기자와 친한 지인분이 계셨고, 그 분께서 공항까지 데려다준다며 당일 자신의 차를 잠시 빌려주셨는데, 그 차가 코트라 소속의 차량인 덕분에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행운이었다.   흥분되기 시작했다. 항만경찰에 눈을 피해 카메라를 들고 갈 수 있다면, 부두에 정박한 주얼리호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은 머나먼 오만, 얼마 전 한 취재팀이 항구 정문에서 촬영을 하다가 항만경찰에 끌려가 몇 시간씩 조사를 받은 사례도 있었던 곳이다. 신중해야 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접근한 삼호주얼리호 앞에서 우리는 한번 또 멈칫했다. 배에 승선하는 일은 출입국 절차에 준하는 중대한 일이라고 했다. 자칫하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고, 그야말로 구속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때 어제의 실패가 떠올랐다. 더는 무언가를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한 상황 속에 반전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용기가 생겼다. 올라가는 거다. 뭍을 떠나 배에 오르니 길이 보였다.   삼호주얼리호를 인수 받은 교체선원들은 의외로 친절했다. 비록 20여분 남짓의 시간 밖에는 허락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주얼리호 내부의 치열했던 흔적을 생생하게 담을 수 있었다. 납치에서 구출작전까지 생사의 길을 오갔던 외국인 선원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단독취재였다. 그렇게 취재를 마치고, 단독영상을 송출한 뒤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문득 만감이 교차했다. 단독취재를 했다는 기쁨보다는 어제의 실패에 위축되지 않았다는 성취감이 더 컸다. 우습지만, 스스로가 대견한 순간이었다.   모든 유리창이 다 깨져 버린 채, 총탄에 검게 그을린 조타실의 황량함은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다. 반 쯤 찢겨진 커튼을 흔들던 바닷바람과 인생을 두 번 산다는 한 선원의 말은 어떤 경건함마저 들게 했다. 생과 사에 준하는 일은 아니겠지만, 취재실패와 성공 사이를 롤러코스터처럼 오갔던 경험은 그렇게 스스로를 깊이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먼 이국의 바다에서 만난 주얼리호와 사람들. 그들은 뉴스속의 사건사고로서가 아니라, 내 삶의 소중한 경험치로서 깊이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조창현 SBS 영상취재팀
    2011-03-21
  • 아프리카를 가다
    마지막 기회의 땅 - 아프리카를 가다 설레고 긴장하며 아프리카 취재를 준비했다. 남아공, 콩고, 우간다, 에티오피아, 카메룬, 케냐, 빠듯한 17일간의 여정이 시작된다. 마지막 기회의 땅으로 불리는 아프리카는 깨어나고 있었다. 나의 첫 번째 목적지는 남아공. 아프리카 경제의 50%를 차지하는 남아공 최대의 도시 요하네스버그 (조벅)에 도착했다 .아프리카의 도시는 고지대에 많이 형성됐다. 말라리아와 무더위를 피해서가 그 주된 이유이다. 때문에 우기인데도 한국의 초가을정도로 날씨가 선선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유럽과 너무나 흡사한 느낌이 들었다. 이게 아프리카인가 싶을 정도였다. 취재를 시작하면서 상상했던 이미지인 기아 빈곤 질병 저개발국이 아니라 미개발국 아프리카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 소비자인 중산층 가정을 찾아 나서기 위해 16일, 소웨토로 향했다. 소웨토는 남아공 경제 수도 요하네스버그 중심지에서 남서쪽으로 30km 떨어진 지역에 위치한 흑인 집단거주지역으로 아파르트 헤이트(남아공 인종격리정책)를 무너뜨린 소웨토 항쟁이 일어난 민주화 성지이기도 하다. 기자가 차에서 내리자 집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포 라데베(Sipho Radebe)씨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손을 내밀었다. 그는 집을 구경시켜주겠다며 우리를 안내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전제품. LCD TV, 냉장고, 세탁기, 전자레인지 등 대부분이 한국제품이었다. 한국저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팁을 공유하자면, 아프리카의 가정집을 방문해 인터뷰를 할 경우 사례금을 주는 관행이 있다고 한다. 한국과 다른 취재문화에 처음에는 다소어색했지만, 어쩌겠는가?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하거늘……. 순순히 100달러를 내놓고 나온 뒤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 아! 출장비……. ◈ 마라톤영웅을 우연히 만나다 20일. 새벽녘의 한기를 뚫고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 자택을 빠져나온 사람이 있었다. 조금은 쌀쌀한 기온을 뒤로한 채 그의 발걸음은 집 뒤편에 자리잡은 해발 3000m 높이의 투투 산으로 향했다. 그를 세계 최고의 마라토너로 만든 산이었다. 2시간 3분 59초. 그가 지난 2008년 9월 베를린 마라톤에서 달성한 세계기록이다. 2시간 3분대의 신기원을 연 마라토너는 바로 에티오피아의 마라톤 영웅 하이레 게브르셀라시에다. 스포츠재벌인 그의 명함은 현대마라톤 모터&엔지니어링 회장. 이유는 현대차를 에티오피아에 독점 공급하는 회사의 회장으로도 있기 때문이었다. 한해 신차시장이 3-4천대인 에티오피아에서 현대차는 20%를 차지하고 있다. 게브라셀라시에는“마라톤 대회 출전을 위해 전 세계 도시를 돌때마다 길거리에서 현대차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며 곧바로 두바이 현대차로 향해 독점공급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살라시집에 도착했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집 앞 마당에 2.5톤짜리 화물차 15대가 세워져있는 것이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야적장이 없어 집에다 가져다 놓은 거라 말했다. 집이 얼마나 컸으면 집 안에 야적장을 만들었을까 라는 생각에 기가차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집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우리는, 올해 8월 대구육상선수권대회 vip 자격으로 서울을 찾는다고 훗날 다시 보자고 말했다. ◈ 최신 IT 제품으로 중무장한 치타세대 얼마 전 MBC에서 방영된 프로그램 때문에 유명해진 쎄시봉. 사실“쎄시봉(아주 좋다)은”남아공의 젊 은 흑인들의 입에서 자주 나오는 말이다. 이들을 아프리카에서는 치타세대라 부른다. 핸드폰, 인터넷에 익숙하고 신기술을 쉽게 받아들이는 젊은 층을 의미하는 세대다. 때문에 IT시대에 이들의 구매력과 욕구는 상상을 초월한다. 케냐, 남아공, 우간다, 콩고 등 여느 나라를 가도 이런 젊은 층이 핸드폰매장이 즐비한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한 시간 이상 줄서서 개통을 하곤 한다. 레스토랑에서 아이패드로 영화를 보는 이들, 길을 걸어가며 갤럭시 S 휴대폰으로 통화하는 사람들 등 을 마주치며 아프리카의 IT 모바일 혁명의 현 주소를 볼 수 있었다. 자원의 보고로만 여겨졌던 아프리카가 소비시장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 취재하기 너무 가혹한 조건 아프리카 아프리카의 대부분 사람들은 미주유럽방송을 실시간으로 시청한다. 동양인인 우리의 선입견과 마찬가 지로 미국, 유럽의 사람들도 아프리카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그렇기에 빈민, 질병, 기아, 후진국, 분쟁, 내전 등만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아프리카의 사람들은 카메라를 싫어한다. 길거리에 가만히 놔두기만 해도 모든 사람들이 손사래를 치며 도망가는 모습에 뷰 파인더를 보는 마음도 불편했다. 취재 행동반경 또한 좁았다.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어 주변을 둘러보면 어느새 AK소총으로 무장한 군인, 경찰, 심지어 민간인들까지 서성였다. 그러다 우리의 옆으로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머니! 머니!”취재하면서 빼앗긴 달러만 해도 상당하다. 또한 힘들게 섭외해서 인터뷰를 해도 사례금을 지불해야했다. 우리나라 국회의장만 해도 어떻게든 인터뷰하고 싶어 취재진을 기웃기웃하는데 반해, 남아공의 국회의장은 인터뷰 한 후 450불이나 지불했다. 기타 숙소, 음식, 차량, 상비약 준비 등도 만만치가 않다. 때문에 아프리카 지역으로 출장을 가게 된다면 주재한국 기업인을 통해 예약 및 준비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김병문 MBN 영상취재부
    2011-03-21
  • OBS 역외 재송신 허가
    방통위 OBS 역외 재송신 허용   방송통신위원회는 21일 전체회의를 열고 OBS경인TV의 서울지역 역외 재송신을 허가했습니다. 이로써 OBS는 종전 지상파 송출 권역이었던경기도와 인천지역외에 서울지역 전역에도 케이블TV를 통해 방송을 내보낼 수 있게 됐습니다.
    2011-03-21
  • 협회, 체험 아이스 하키 교실 운영
    2011년 3월 3일부터 연습시작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회장 태양식)는 회원들의 건강 증진과 친목 도모를 위해 겨울 스포츠의 꽃인 아이스하키를 체험할 수 있도록 목동 아이스링크장(사장 김인성)과 업무협의를 마쳤다. 아이스하키가 아직 널리 익숙한 스포츠는 아니지만 점차 많은 숫자의 클럽팀들이 생겨나고 있을 만큼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스케이트를 타며 퍽을 다루는 하키는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요소가 많으며, 스트레스 해소는 물론 빙상위에서의 속도감과 스포츠맨쉽을 느끼기에 적합한 운동이다. 체험 아이스하키 교실을 위해 우리나라 아이스하키의 대표 구단인 안양한라(구단주 정몽원)가 스케이트와 보호 장비 등 관련 물품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관심이 있는 회원들이 초기 장비에 대한 부담에 벗어나 편안한 마음으로 아이스하키를 경험해볼 수 있도록 했다. 이번 기회에 가족들과 함께 링크에 나와 스케이트를 타며 공감대 형성을 가져보는 즐거운 시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협회 회원들과 가족들로 구성된 아이스하키 팀“포커스”와“체험 아이스하키 교실”의 탄생에는 한국 동계스포츠의 산실 역할을 해오고 있는 목동 아이스링크 김인성 사장의 도움이 컸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와 아이스하키의 저변확대를 위해 링크장의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훈련과 체험 교실을 운영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팀 훈련과 체험 아이스하키 교실을 맡고 있는 김홍일 감독은 국가대표 출신으로 현재 안양한라 아이스하키팀 선수로 활동하고 있는 실력파로 다수의 코치들과 함께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위해 꼼꼼히 훈련 일정을 잡는다. 관심 있는 회원들은 이번 기회에 참여해 볼 만 하다. 팀구성원이 아직 많지 않기에 개별적으로 적절한 훈련을 받기에 좋을 듯 보인다. 얼음을 가르는 시원함과 골을 넣는 성취감, 흠뻑 땀을 흘린 뒤의 개운함을 느끼고 싶다면 아이스하키라는 즐거운 취미 생활에 동참할 것을 추천한다. 3월은 매주 목요일 9시부터 11시까지 목동 아이스링크장으로 오시면 체험을 해 볼 수 있다. 자세한 문의는 협회로 해주시면 된다.
    2011-03-16
  • 줌인-포탄과 총알 앞에 포토라인은 없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다면, 당신은 충분히 가까이 가지 않은 것이다.” 전설적인 종군 사진기자였던 로버트 카파의 이 말은 사실 카파 이후 모든 카메라기자들의‘강박관념’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좀 더 가까이 피사체에 다가 갈수록 훌륭한 사진과 영상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이 말은 어찌 보면 아주 기본적인 원칙일지도 모른다. 이 원칙을 행동의‘철칙’으로 삼았던 그가 북베트남의 정글에서 오른손엔 카메라를 든 채 산화한지 반세기가 지났건만 아직도 지구상에는 전쟁이 멈출 날이 없다. 그리고 어김없이 카파의‘철칙’으로 무장한 혈기왕성한 기자들이 그곳에 있다. 이른바‘종군기자’라고 불리는 그들, 그들은 바로 잠재적인‘우리들’이기도 하다. 카메라기자에게 때론‘행운’으로 때론 피할 수 없는‘숙명’으로 다가오는 전쟁 취재! 그러나 현실은 그리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카파의‘철칙’으로 무장한 투철한 기자정신만으로 감당하기에는 적아와 민군을 구별하지 않는 무차별적인 현대 전의 양상이 너무나도 위험 천만하기 때문이다. 1929년 제정된 제네바협약은 1949년 개정되면서‘종군기자’를 보호되어야 할 민간인에서 제외시켰다. 다만 군대의 구성원, 민병대, 군무원과 같이 포로가 된 이후에는‘포로의 대우에 의한 조약’에 따르는 지위를 보장해주고 있다. 사실 총알과 포탄이 군인과 기자를 구별하지 않는 이상 전장에서의‘기자’는 그 누구로 부터도 신변의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없는 무방비상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3년 이라크 침공 시 미군은“미군에 등록되고 미군과 동행하는 기자 (embedded journalists) 외에는 일체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더불어 미군은 동행취재방식의 종군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동행하게 될 부대의 특성에 맞게 기자들의 생존교육을 실시한 후 전투부대와 동행하도록 했다. 이렇게 최종 선발된 종군기자의 인원은 총 6백여명, 이들을 뺀 나머지기자들은 미군으로부터 홀대를 받은 것 뿐 만 아니라 연합군과 이라크군 어느 쪽으로 부터도 보호받지 못하는 무방비 상태에서 취재를 감행해야 했다. 당시 미군의‘임베디드 프로그램’에 속하지 않았던 거의 모든 한국의 방송, 신문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7년이 지난 지금 또 다른 아랍의 분쟁지역인 리비아 내전의 안팎에서 우리 동료들이 위험한 취재를 수행하고 있다. 확실하게 적아가 구별되는 전면전에 비해 내전상황은 기자들에게 더욱 위험할 수 있다. 정치적, 종교적, 계급적 갈등의 현장에서 나에게 위해를 가할 잠재적인‘적’을 구별해내기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스페인 내전과 2차 대전 등 굵직한 전장을 종횡무진 누비던 로버트 카파는 42살에 전장에서 지뢰를 밟고 사망했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전쟁의 참화를 전하고자했던 그의 숭고하고 용감한 기자정신은 이 세계 모든 기자들의 영원한 귀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목숨과 맞바꾸다시피 해 전쟁의 참상을 오로지 흑백사진 한 장으로 전하던 그 시대의‘철칙’을 지금‘스마트폰’시대에 무조건적으로 답습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곰곰이 따져 볼일이다. 오히려 흑백사진 한 장의 가치보다도 못한 무분별한 경쟁논리와‘물먹지 말아야 한다’는 억지논리에 눌려 개인의 자발적 의사와는 무관하게 종군취재를 감행해야 하는 비극적 상황이 우리들 누군가에게 강요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이다. 그리하여 현재의 경쟁사 눈치보기식, 주먹구구식 전쟁보도의 행태를 개선하고 통일된 종군취재 원칙과 실질적인 보호 장치의 마련, 무분별한 취재경쟁 행태의 자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때이다. 포탄과 총알로부터 우리를 지켜줄‘포토라인’은 그 어디에도 없다.
    2011-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