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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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기자 협회보

NEWS

지속가능경영
  • 공정방송 그리고 시청자의 소중함
    MBC 파업을 말한다 한겨울 칼바람에 땡땡 언 손으로 피켓을 들며 시작했던 MBC 파업이, 이제 뙤약볕 아래 나날이 까매지는 피부를 걱정해야하는 계절에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투쟁은 진행형이며, 공정방송을 향한 조합원들의 열의는 쨍한 태양만큼이나 뜨겁습니다. 무엇이 저희를 이토록 단단하게 해주었는지 돌이켜보니, 가슴 속 단 하나의 다짐이 있었네요. 정권이 아닌 국민의 품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 이 약속의 준엄한 무게가 저희를 여전히 싸우게 하고, 눈물 흘리게 하고, 또 다시 다짐하게 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MBC 조합원들은 거리에 있습니다. 그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저희의 빈자리를 채운다는 명목으로 이름도 생소한 취재PD, 시용기자 들이 대거 MBC에 들어와 맹(?)활약 중입니다. 회사는 줄기차게 징계를 남발해, 벌써 해고자만 8명에 정직과 대기발령까지 합치면 백여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원치않던 훈장을 달고야 말았습니다. ‘허리’우드 액션으로 유명해진 보도본부장으로 인해 조합원들이야 말로 ‘정신적 충격’을 강하게 입었으며, 김재철 사장님은 ‘2014년까지 임기를 채우겠다’며 국민적 사퇴여론을 일축하셨습니다. 또한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공영방송 MBC를 지켜달라며 각계 각층의 정말로 다양한 인사들이 뜨거운 지지와 후원을 밝혀왔습니다. 얼마 전 시작한 ‘MBC살리기 백만인 서명운동’은 벌써 목표치의 절반을 넘기고 있고, 이제는 온라인에서도 그 열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파업 중인 MBC기자회는 ‘일을 안 하고 있다’는 아이러니한 이유로 방송기자연합회 특별상을 타기도 했고, ‘제대로 뉴스데스크’와 ‘파워업 PD수첩’은 조회수 수십만을 상회하는 인기동영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남은 일도 분명합니다. 공영방송 MBC를 정상화하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 바로 김재철 사장의 사퇴입니다. 아울러 방송문화진흥위원회 이사님들께도 촉구합니다. 비정상적인 상황을 그저 수수방관만 하는 것은 책임있는 관리감독기구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방송을 보고 싶다는 시청자들의 원성을, 언제까지 외면만 하실건가요? 파업이 남기고간 상처는 깊고 휑합니다. 하지만, 상처 못지않게 깊은 깨달음도 얻게 됩니다. 매일 매일 시간이 쫓기며 한편으론 간과하고 있었던 ‘공정방송’의 소중함. 한 컷 한 컷을 고민하고, 매 순간 깨어 있어야 한다는 사명감. 그리고 무엇보다 ‘시청자’ 라는 단어가 갖는 절실함이 그것입니다. 부끄럽지만, 카메라를 놓고 나니 비로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후회는 때늦었지만, 반성은 빨리 할 수 있어 다행이네요. 장마가 곧 시작된다고 합니다. 오랜 가뭄을 해결해 줄 꿀같은 비가 되겠지요. 지독한 가뭄 끝에 단비가 뿌려지듯, MBC의 파업도 그렇게 해결 될 것입니다. 목마름이 깊었던 만큼 해갈의 환희도 클 것입니다. ‘나만 바라 봐’를 외치는 어느 가수의 노래처럼, 국민만을 바라보며 일할 수 있는 그 날, 계절과 상관없이 저희들은 뜨거울 것입니다. 박주일 MBC 영상취재부
    2012-07-24
  • 방송콘텐츠 유럽 전역 확산을 위한 시도
    이번 행사는 헝가리에서 개최되는 신생 방송콘텐츠 거래시장(NATPE Budapest 2012)과 영국 방송콘텐츠 쇼케이스를 연계하여 우리 방송콘텐츠의 유럽시장 개척을 지원하기 위해 계획되었으며, KBS, KBS미디어, MBC, SBS콘텐츠허브, EBS, CJ E&M, 아리랑TV, YTN, CU미디어, 대한미디어월드 등 10개 방송사업자가 참가한다. 방통위는 “NATPE Budapest 2012”행사에 국내 방송콘텐츠 상담룸을 설치하여 방송사업자들의 마케팅 활동을 지원하고, 국내 방송사업자와 해외 주요 바이어와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한류를 전파하여 동유럽 권역 신규시장 개척의 기회로 활용할 계획이다. 또한, 우리 방송콘텐츠의 영국 시장 개척을 지원하기 위해 오는 29일 영국에서는 처음으로 방송콘텐츠 쇼케이스를 런던에서 개최할 계획이다. 특히 이번 방송콘텐츠 쇼케이스에서는 KBS의 ‘누들로드’, EBS의 ‘신들의 땅, 앙코르’, YTN의 ‘고수비급’ 등 다큐멘터리에서부터, KBS의 ‘아이리스’, MBC의 ‘닥터진’, SBS의 ‘유령’ 등 인기드라마, CJ E&M의 ‘코미디빅리그’, 아리랑TV의 ‘POPS IN SEOUL’, CU미디어의 '펫스토리‘ 등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 등 70여편의 다양한 방송콘텐츠와 27편의 3D를 콘텐츠를 적극 홍보하여 우리 방송콘텐츠의 영국시장 진출을 모색할 예정이다. 아울러, 방통위는 이번 행사에서 헝가리의 공영방송인 MTV, 방송통신규제기관인 미디어정보커뮤니케이션청, 영국의 민영방송사인 ITV 등 국가별 주요 방송사와 정부기관 면담을 통해 유럽 지역에 우리 방송콘텐츠를 적극 홍보하고 현지 방송관계자들과의 인적네트워크를 구축할 예정이다. 방통위 관계자는 “방통위는 이번 유럽 쇼케이스를 통해 방송콘텐츠의 진입장벽이 높은 유럽 지역에 우리 방송콘텐츠를 적극 홍보하고, 나아가 한국 방송콘텐츠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정남 기자
    2012-07-24
  • 고프로 카메라 공동 구매 건
    본 협회는  카메라감독연합회와 공동으로 요즘 핫이슈가 되고있는 정식수입 고프로카메라 (워런티 1년)를 권장소비자가격에서 15~12%할인된 가격으로 캠09(www.cam09.com) 지원을 받아 공동구매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특히 이번 공동구매는 회원님들의 부담을 줄여드리고자 신용카드 무이자 할부도 함께 진행 됩니다. 다만, 현금과 카드 결제는 할인율은 차이가 있는점 양해 부탁 드립니다. 기간 : 2012년 6월 1일 부터 6월 9일 자정까지 참여방법 : 1. www.cam09.com 접속   2. 아이디 패스워드 협회 문의 (02-3219-6477) 3. 구입을 원하시는 제품을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4. 제품 상세 페이지에서  [전체쿠폰다운받기] 클릭 하셔서 쿠폰을 다운 받습니다. 주의. 고프로 상품에서만 쿠폰이 보입니다. 5. 장바구니 가셔서 [전체상품주문]  클릭 6. 배송지정보에 회원님의 정보를 입력 합니다. 7. 결제정보 쿠폰 할인 [쿠폰선택] 클릭 8. 새창 - 상품별 쿠폰적용 - [해당쿠폰] 을 선택 합니다.    주의. 반드시 [쿠폰적용하기] 클릭 하셔야 합니다. 9. [결제하기] 클릭 현금은 [무통장입금], 신용카드는 [신용카드] 선택 하시면 할인된 금액이 보입니다. 주의. 반드시 결제 방식에 따른 아이디로 로그인 하셔야만 할인 처리 됩니다. 10. 공동구매 제품은 로젠 택배로 발송 됩니다. 11. 기타 문의 사항은 아래로. 파츠넘버나인 대표 안세환 홈페이지 : http://www.parts09.com  (모터사이클)                   http://www.cam09.com  (카메라) 이메일 : sehwan.an@parts09.com 사무실 : 1661-8709 팩 스 : 02-6280-8709 핸드폰 : 010-2928-9999 주 소 : 서울 강남구 청담동 112-30 파츠넘버나인
    2012-05-31
  • 일제의 억압 속에 자라난 자주적 영상기록의 갈증
    새롭게 보는 한국보도영상사4 일제의 억압 속에 자라난 자주적 영상기록의 갈증 해방의 순간, 한국 사회 카메라를 들어, 영상뉴스를 만들다.   ‘1945년 8월 15일. 삼천리 방방곡곡을 휘몰아치던 광복의 감격에 벅찬 민초들의 얼굴들’. 우리는 이 얼굴들을 상상하지 않고도 해마다 광복절만 되면 TV특집프로그램들에서 만날 수 있다. 이제는 빗물내리는 화면 속의 흑백 영상이 되어버린 이 영상들을 보면서, 영상기자라면 한 번쯤은 ‘저 영상의 기록자들이 과연 누구일까?’하는 의문을 품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1945년 8월 15일, ‘민족해방의 날’을 기록한 이 영상들이 우리 민족의 영상인들에 의해, ‘민족의 광복’이라는 엄청난 사실과 기쁨을 전 사회가 함께 공유해야한다는 확실한 저널리즘적 목적성을 갖고, ‘뉴스’라는 이름으로 기록,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1940년대 일제에 의해 조선의 민간영화사들이 통폐합되어 만들어진 조선 유일의 영화조직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영상인들은 해방과 함께, 곧바로 뉴스대를 조직해 격동의 순간들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뉴스영화로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조선영화건설본부’나 ‘10월 영화공장’과 같은 자생적인 영화인단체가 조직되어 ‘해방뉴스’를 시작으로, ‘10월영화뉴스’, ‘민족전선’, ‘전진대한보’ 등과 같은 뉴스영화들을 잇달아 내놓게 된다. 이렇게 해방공간에서 영상뉴스의 취재와 제작이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35년의 일제강점기간 동안 ‘영상’이라고 하는 수단을 통해 자주적으로 현실을 기록하고, 이를 통해 우리 시각의 다양한 정보와 메시지를 공유하고 싶어 하는 ‘근대적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갈망이 한국사회에 팽배해 있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독립운동으로서 애국계몽운동과 영상에 대한 적극적인 활용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1910년 일제의 국권 강제병합의 과정을 거치면서, 일제에 대한 독립운동은 항일무장투쟁이라는 강력한 물리적 투쟁과 애국계몽운동이라고 하는 온건한 투쟁의 두 가지 양상으로 전개되게 된다. 이 중 애국계몽운동이 택한 중요한 도구의 하나가 ‘영화’였다.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향상을 목적으로 시작된 학교설립운동의 모금회에 대중을 모이게 하는 방법으로 영화가 상영되었고, 애국부인회나 대한실업장려회와 같은 단체들은 각 종 계몽적 활동이나 애국사상 고취를 위해 고종이나 영친왕이 등장하는 다양한 영상물들을 전국에 순회 상영하면서 대중의 울분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했지만 ‘영상’이라는 근대적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을 이용해 대중이 정보를 취득하고, 공감하고, 해석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이 개념화되고 고민되기 시작했다. 1910년대 영화 보급의 활성화와 뉴스영화의 소개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제와 일본인들의 조선진출이 본격화 되면서, 서울과 부산 등지의 대도시에 본격적인 영화 상영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 영화관들에서는 미국과 프랑스,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제작된 다양한 영화들이 상영되었다. 이들 영화들은 극영화가 중심을 이루었지만, 강제합병 한 한국사회를 순치 시키거나 일본국민들과 국제사회에 대해 자신들이 벌인 대한제국에 대한 국권침탈 행위를 미화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나 일제의 국가기관들이 직접 제작한 <해뜨는 나라(1917)>, <부산경성의 전경(1918)>, <금강산대활동(1919)> 등과 같은 선전용 기록영화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1910년대 중반부터 일본에서 본격적인 뉴스영화의 제작이 시작되면서, 일제강점기 한국사회의 영화관에서도 이들 뉴스영화의 상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부산지역의 영화자료를 살펴보면, 1917년 부산의 보래관(寶來館)에서 <오사카 마이니치필름 제4호(大阪每日フィルム通信第4號)>가 상영된 이래 영화관에서 뉴스영화의 상영이 계속되어 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1910년대 일제가 제작한 각 종 기록영화와 뉴스영화를 접하면서 식민지 조선인들의 머릿속에 시사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영상에 대한 개념화와 우리 시각으로 제작된 기록영화와 뉴스영화들의 필요성이 싹트게 되었다. 3.1독립운동 이후, 조선인이 제작한 뉴스기록영화의 등장   박승필의 <고종인산실경>,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전선여자정구대회>, <조선일보 뉴우스>   일제강점초기 조선총독부에 이뤄진 무단통치는 항일독립투쟁은 물론이고 사회 전반에 걸친 억압으로 이어졌다. 10년 가까운 강압통치의 결과는 마침내, 1919년 3.1독립운동이라는 조선민중들의 강력한 대중적 독립투쟁으로 나타나게 된다. 전국적으로 펼쳐진 3.1운동에 대한 커다란 위기의식 때문에 일제는 조선총독부의 통치방식을 ‘문화통치’로 전환하게 된다.   ‘문화통치’의 대표적인 조치 중에 하나로 기존에 강력하게 억압해오던 언론과 문화 전반에 대한 통제를 어느 정도 완화시켜줌으로써, 조선인들에 의한 언론사 설립이 가능해지고 영화, 문학, 예술분야의 활동에 일정한 제약들을 풀어지게 되었다. 이런 조치가 가능했던 이유에는 강압적인 무단통치로 인해, 지하언론이 활성화되고, 그에 따른 일제에 대한 반감이 점점 커져가는 것을 막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   3.1독립운동이라는 민족적 저항을 통해 우리 민족은 한시적이나마 제한적 자유의 공간을 획득할 수 있었고, 이 기간을 통해 영상이라는 근대적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싶어 하는 근대적 욕구들도 조금이나마 현실에서 실험되고, 그에 따른 결과물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1907년 단성사를 인수해 민족영화의 제작을 꿈꿔온 영화제작자 박승필은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최초의 영화로 기록되는 연쇄극 <의리적 구토(1919년 10월 27일)>를 만들어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연극의 중간에 조선의 풍광을 촬영해 만든 영상을 상영하는 <의리적 구토>의 제작시기에 박승필이 제작한 또 하나의 영화가 기록영화 <고종인산실경(1919년)>이다. 고종황제의 국장을 카메라로 기록한 10분 분량의 이 영화는 일제강점의 상황에서 우리사회의 영상가가 ‘고종’의 죽음이라는 시사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사건을 영상으로 기록했다는데서 보도영상사적으로 큰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문화통치가 본격화되었고, 한국사회에 불어 닥친 가장 큰 변화는 민간신문의 허용이었다. 1920년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사일보의 창간이 허용되면서 조선인들이 만든 언론사의 활동과 경쟁이 본격화 되었다. 새롭게 시작한 한국사회의 신문사들은 조직이나 영업활동을 위해 일본의 신문사들의 지면과 조직, 영업활동들을 많이 참고했고 이를 통한, 새롭고 빠른 뉴스를 전달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1921년 동아일보는 백두산 탐험대를 조직해 활동하면서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의 사진을 신문지면을 통해 보도하게 된다. 이 보도사진을 계기로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역사조작에 대한 조선사회의 반론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각 신문에 노동자와 민중들의 시위를 취해한 사진이 실리면서 조선사회 전체에 큰 파장이 일자, 총독부가 사진기자들의 취재를 제한하고 사진을 검열하는 통제가 가해졌다. 이런 사진기자의 활동과 보도사진의 영향력이 본격적으로 인식되면서, 신문사들은 그 과정에서 일본의 신문사들이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뉴스영화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신문사의 뉴스영화에 대한 첫 관심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1924년 동아일보에서 제작된 20분 분량의 기록영화인 <전선여자정구대회(全鮮女子庭球大會)>이다. 여자테니스대회를 취재한 스포츠뉴스 형식의 기록영화로 전해지는 이 기록영화가 조선사회에서 뉴스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이 모색되게 되었다.   1920년대 중반, 경영난과 사회주의 사상 기자들에 대한 문제로 폐간위기까지 치달았던 조선일보는 금광사업으로 성공한 방응모가 신문을 인수하면서, 막대한 자본을 투여해 본격적인 상업적 경쟁의 길을 추구하게 된다. 이를 위해, 조선일보가 눈을 돌린 새로운 사업이 뉴스영화분야였다. 조선일보는 신문지면을 그대로 옮긴 뉴스영화의 제작을 추진해 1929년 사내에 활동사진반을 설치한다. 그리고 대대적인 신문홍보를 펼치며 1929년 6월 조선극장에서 최초의 민간뉴스영화인 <조선일보 뉴우스>를 상영하게 된다.   <조선일보 뉴우스>는 조선일보가 펼친 생활개선캠페인, 상공인대운동회, 유치원연합 대원유회 등의 내용을 담은 10분 분량의 영화를 전국을 돌며 무료 상영 했다. 우리 민족의 손으로 만들어진 뉴스영화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하지만 조선일보뉴스는 1회 제작 이후, 추가 제작을 이어가지 않았다. 동아일보 역시, 1921년 뉴스영화형식의 기록영화제작이후 본격적인 뉴스영화 제작의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   이렇게 1920년대의 우리 언론사들이 뉴스영화의 제작을 시도하거나 제작했지만 이후 계속되 되지 못한 데에는 뉴스영화에 대한 언론사들의 고민이 첫째는 언론사간 경쟁의 관점에서 사세과시라는 사업적 홍보에 집중되었고 일본언론사들에서 시작된 뉴스영화 제작이 언론사업으로서 성공가능한 지를 실제 테스트해 보고 싶은 의도에서 기획되어졌기 때문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조선총독부가 자생적인 조선의 민간 뉴스영화를 계속 유지하는 데 대한 불편함과 우리 언론인들이 언론사의 존폐를 걸만큼, 영상이라는 수단을 통한 커뮤니케이션과 저널리즘을 만들어가려는 절실함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영화령과 전시체제하의 민간 뉴스기록영화의 궤멸   3.1운동 직후 조선총독부가 내세운 문화통치의 기치아래, 조선사회에 숨통이 트이기는 했지만 그와 함께 검열, 감시, 제약을 일상화하는 다양한 규제장치들도 계속해 만들어 졌다. 조선총독부는 직접 ‘활동사진반’을 만들어 민간의 언론영화활동을 견제했다. 1920년부터 1936년 까지 조선총독부의 활동사진반이 국내외 보급을 목적으로 제작한 영화들은 241편에 이른다. 하지만, 그 내용들은 <경성교외 전경>, <조선여행>과 같이 조선정책의 성공을 알리는 것부터 일중전쟁과 관련된 전쟁사황을 알리는 선전영화들이 대부분이다. 1930년대 일본의 전시동원체제가 본격적으로 구축되어가면서 영화 전반에 대한 규제검열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마침내, 1940년에는 조선영화령이 시행되면서 조선의 모든 민간영화사들과 영화인들이 조선영화주식회사로 통폐합되고, 태평양전쟁과 천황체제를 선전하는 영화들만이 쏟아 지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1910년 일제강점의 시기에도 그치지 않고 진행되었던, 영상을 통한 자주적 역사 기록과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을 추구했던 한국사회는 이런 갈망을 멈춰야 했고, 그 사회적 갈증들은 1945년 8월 15일의 역사적 대반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준영 / MBC 영상취재1부 차장
    2012-05-04
  • 제19차 유엔 인권이사회 취재기
    <제19차 유엔 인권이사회 취재기> 남과 북의 충돌로 외신의 관심이 집중된 취재   파리에서 TGV로 3시간 30분... 스위스 제네바에 도착했다. 탈북자 송환 문제로 유엔 인권이사회를 참관하는 우리 국회 대표단을 취재하기 위해서 였다. 제네바는 국제적인 회의가 많이 열리는 관광 도시이지만 취재를 목적으로 방문하기에는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은 곳이다. 비싼 물가와 열악한 인터넷 환경, 가격 대비 특색 없는 음식 때문이다.   다음 날, 인권이사회가 열리기로 예정 된 제네바 유엔본부. 참관인들과 기자들이 출입 등록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줄지어 서 있다. 종편과 보수 언론사 취재진 등 10여명의 한국 취재진이 보였다. 오전 10시경, 북한 대표가 회의장에 먼저 모습을 나타냈다. 그로부터 10여분 후에 김형오, 안형환, 박선영, 이은재 의원으로 이루어진 국회대표단이 참관을 위해 본부에 도착했다. 참관만 하려면 이 멀리 왜 왔을까 하는 의문도 잠시, 도착 인터뷰에 응한 안의원은 "이준 열사가 된 심정으로 북송저지 운동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촉구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 고 말했다.   이준 열사!!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루스만 북한 인권 보고관의 보고가 끝나고 북한 대사의 반론이 이어졌다. 탈북자 강제송환이 이뤄지고 있다는 보고서의 내용은 근거 없이 날조된 것이라는 거였다. 우리국회 대표단이 손짓으로 북한 대사를 가리키며 바쁘게 움직였다.   서대평 북한 대사가 자리를 뜨는 순간 국회의원단이 북한 대사를 향해 나아갔다. 렌즈도 급히 의원단 쪽으로 향했다. 안의원, 박의원이 북한 대사를 향해 거침없이 말을 쏟아낸다. "탈북자들을 북한으로 송환하지 마십시요", "그러면 안 됩니다."   순간 회의장의 모든 시선이 뒤쪽으로 집중되었다.   당황한 북한대사... 그러나 참으로 냉정하게 침묵으로 일관한다.   뭐 이따위냐!라며 거칠어진 북한 측과 나가지 말라고 소리치는 의원단 간에 몸싸움이 일어났다. 유엔회의 사상 최초(?)사태였다. 혼란한 회의장에서 가장 당황한 건 보안 요원들이었다. 급기야 안의원은 팔이 꺾여 벽 모퉁이로 몰아 붙여졌다. 쿵! 부상이 염려 될 만한 큰 소리가 들렸다. 안의원이 제압당하자 박선영, 이은재 의원이 카랑카랑하게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북쪽 인사들과 보안 요원들이 의원들과 취재진을 막아서자 북한 대사는 회의장을 빠져 나갔다. 이렇게 공격적으로 북한 대표를 향해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었던가?. ... 9시뉴스 네 번째 꼭지란다. KBS를 제외한 다른 방송사들은 시간상, 편성상, 전략상 메인 뉴스제작을 포기했다.   송출을 마친 오후, 기자회견장으로 향했다. 안형환, 이은재 의원이 붕대를 두르고 유엔본부 밖을 서성이고 있었다. 출입을 거부당한 것이다. 회견장에는 생각보다 많은 외신이 참석해 있었다. 참관만으로 끝날 수 있었던 상황이 남과 북의 충돌로 인해 외신의 관심을 끌어내는 데는 성공한 셈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있었다. 발언권이 보장되는 국제회의장에서 ‘대한민국 국회 방식’으로 문제 제기하는 게 합당할까 하는 것이었다. 우리에겐 매년 몇 번씩 볼 수 있는 너무도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대부분의 외신들은 상당히 놀란 듯 했다. 회견장에서 만난 한 외신기자는 국제회의에서는 언제나 조용히 대응하는 나라가 마지막에는 웃는 법이라고 대응 방식을 꼬집는다. 하지만 회견 내내 우리 의원단은 상당히 고무된 표정이었다. 왜일까? -제네바 유엔본부 취재 팁- @ 회의장은 뒤 쪽에서만 촬영이 가능하고 오디오 픽업 단자가 마련되어 있으며 규모가 크기 때문에 발언자의 녹취를 위해서는 ENG로 취재가 필수입니다. @ 인터넷 속도는 대부분의 유럽이 안 좋지만 특히 스위스가 더욱 열악합니다. 물론 호텔마다 차이가 있지만 300K 이상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 행사가 많은 도시인 제네바의 숙박비는 싱글 룸 기준으로 200유로(한화 32만원)정도가 됩니다. 출장비에 여유가 없으시다면, 실비 정산이 안 된다면 제네바에서 30분정도 벗어나 프랑스 국경도시 Annemasse에서 묵으면 숙박비용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김승욱 / KBS 파리특파원
    2012-05-04
  • 핵안보 정상회의 HB(주관방송)취재
    기분 좋은 스트레스 - 핵안보 정상회의 HB(주관방송)취재 내가 촬영한 영상이 전 세계 뉴스에 방송된다   HB(Host Broadcaster)는 행사를 개최하는 특정 국가의 주요 방송국이 행사에 참여하는 모든 방송사들의 혼잡과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방송 제작 업무를 대행해서 처리해 주는 제도이다. 국가적인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HB제도가 활용되는데, 이번 핵안보 정상회의 취재는 KBS가 HB를 담당했다. 나는 정상회의장을 취재하는 HB팀의 막내로서 이번에 정상회의 취재라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HB의 취재방식은 기존에 우리가 행하던 취재방식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내가 KBS의 촬영기자가 아니라 행사를 위해 별도로 고용된 ‘국적불명의 촬영기자’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 대통령이 아니라 정상회의에 참석한 모든 나라의 정상들이 내 조국의 대통령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촬영에 임해야 한다. 영상을 제공 받는 나라입장에서는 그 나라의 정상을 중심으로 뉴스가 나갈 것이기 때문에 각 나라의 정상들을 공평하게 촬영해야 한다. 이 때문에 HB팀들은 다른 방송사보다 먼저 행사장에 들어가 좋은 위치를 선점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물론 의장국을 포함한 주요국 정상들의 비중이 더 큰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내가 맡은 섹터에서 촬영할 수 있는 정상들의 원샷을 반드시 담아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취재환경이 그리 녹록치는 않았다. 정상회의가 시작 될 때까지 회의장 내의 보좌진들은 분주하게 움직였고, 정상들 역시 자신들의 외교를 펼치느라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들은 카메라의 시선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카메라 앞을 가리기 일쑤였다. 이들을 피해서 순식간에 원하는 포인트를 잡아내어 촬영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오바마 미국대통령이 마이크를 손으로 가리는 장난 섞인 제스쳐를 잡아낸 것 또한 수많은 사람들을 피해서 어렵게 촬영한 영상이다.   회의가 시작 된다는 장내 멘트가 나오고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 착석하면, 그때부터 뉴스에 사용할 수 있는 정돈된 영상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때 HB에게 주어지는 시간이 짧다는 점이다. 신속, 정확하게 각 나라의 정상들을 일일이 촬영해야한다.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사이즈를 담아내는 것 또한 기본이다. 숨 가쁘게 촬영을 하다보면 어느새 경호팀 사람들이 뒤에서 소리 없이 다가와 ‘이제 나가주시죠~’하며 압박을 가한다. 늘 그렇지만 나갈 때는 혹시나 놓친 장면은 없는지, 실수한건 없는지 돌이켜보며 마지못해 아쉬운 발걸음을 떼게 된다.   이렇게 VIP들이 모이는 행사를 취재하면 경호팀이나 기획단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실제로 이번 정상회의 취재 때도 사전협의에 문제가 생겨서 취재를 방해받은 일이 있었다. 사전에 기획단과의 회의에서는 각국 전속카메라맨들이 취재를 다 마치고 나가면 HB에게 따로 취재할 수 있는 시간을 주겠다고 협의가 돼있었는데, 갑자기 경호팀에서 다 나가라고 압박을 가하는 바람에 같이 취재하던 한 선배가 떠밀려서 쫓겨나기도 했다. 사전에 협의가 돼있던 사항인데, 경호팀에서 착각하고 HB촬영기자들까지 나가라고 한 것이다. 물론 강력하게 항의하여 나머지 HB팀들은 마지막까지 취재를 할 수 있었지만 사전커뮤니케이션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낄 수 있었던 대목이다.   내가 촬영한 영상이 전 세계 뉴스에 방송된다는 책임감은 국내 뉴스를 취재 할 때와는 또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러한 책임과 무게감이라면 촬영기자로서 한번쯤은 느껴볼 가치가 있는 기분 좋은 스트레스라고 생각한다. 내가 촬영한 영상이 전 세계에 방송된다고?! 촬영기자의 책임감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줬던 좋은 경험이었다. 이재섭 / KBS 보도영상국
    2012-05-04
  • 멋지게 투쟁했던 2012년 봄날
    멋지게 투쟁했던 2012년 봄날   공정보도라는 기치를 들고 파업을 시작한지 벌써 90일이 넘었다. 지난 90여일은 그동안 우리가 선언적으로 외쳐온 공정성과 공정보도가 무엇인지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공정보도라는 구호를 매일매일 외쳐왔지만 실제 공정보도는 무엇이며 어떻게 실현되는 것인지 명쾌하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많이 언급되는 양적 균형과 기계적 중립과 같은 방법론적 개념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무미건조한 양적 균형과 기계적 중립이라는 개념들이 왜 어쩔 수 없이 현재 우리가 최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선택할 밖에 없는 최후의 선택이자 공정보도의 최후의 방어선으로 자리잡게 되었는지 2012년 총선 보도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총선 보도가 한창이던 지난 4월 3일부터 5일까지 짧은 3일간의 기간 동안 총선보도 리포트에 대한 영상분석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그 동안 수십 년 동안 지키기 위해 노력해 온 공정보도가 너무도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카메라기자의 끊임없는 노력과 투쟁만이 우리 선배들이 수많은 역경과 희생을 통해 얻어낸 공정보도를 계속 지켜나갈 수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영상분석 결과를 보면 보도영상에서의 편파보도는 매우 교묘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공정보도의 대표적인 개념인 양적 균형은 매우 충실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오히려 야당보도가 근소하게 더 길기도 했다. 하지만 총선보도가 시작되면서 여기저기서 이거 뭔가 이상한데 딱히 뭐라고 하기 힘든 지적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림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장난의 양상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인파 속의 여당과 썰렁한 야당 프레임이다. 박근혜위원장 중심의 여당보도는 항상 인파 속의 박위원장과 환호하는 시민들이 보여졌다. 샷과 앵글을 분석한 결과 여당보도에서는 42%의 풀샷이 사용돼 야당에 비해 10%이상 많은 반면 야당보도에서는 미디움샷이 8%가량 많았다. 풀 샷은 선거유세의 규모와 반응은 유세 정당과 후보에 대한 지지의 정도와 강도를 보여주는 선거 유세보도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샷으로 한나라당은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모인 모습과 환호하는 모습이 보여졌지만 민주당은 풀 샷이 상대적으로 적게 사용되었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유세규모 전체를 보여주는 풀 샷은 거의 없었고 앵글 자체도 매우 불안정했다. 분위기는 당연히 열기도 없고 썰렁함 그 자체였다.   두 번째는 유세중인 박근혜 위원장과 회의하는 민주당 프레임이었다. 여당보도는 항상 유세현장에 있는 박근혜 위원장이 보여진다. 90%가 현장 유세영상이고 박위원장의 등장비율도 60%가 넘는다. 반면 야당은 유세영상의 비율이 56%로 여당에 비해 무려 34%나 적고 대신 회의나 브리핑과 같은 비유세영상이 44%나 차지했다. 여당의 대표는 항상 유세현장에 있는데 야당은 실내에서 회의를 하거나 브리핑을 하는 모습이 상대적으로 많이 등장한다. 게다가 야당 보도영상에는 자료화면까지 등장한다. 휴대전화 공약부분에서 휴대폰 자료화면이 나오고, 4월 5일 보도에서는 전날 회의하는 자료화면이 그대로 사용되었다. 아무리 파업 중이지만 여러 건의 현장 유세가 취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당 대표가 지역구 후보의 손을 들어줄 때 야당 후보는 휴대폰 자료화면에 밀려 등장하지도 못 한 것이다.   세 번째는 꽃받는 박근혜위원장과 어정쩡한 한명숙대표 프레임이다. 박위원장은 항상 웃고 악수하고 손을 흔들고 지지자로부터 3일중 2번이나 꽃을 받는다. 반면 한명숙 대표는 시민들과 악수하는 장면보다 그냥 혼자 걸어가는 장면, 리포트 첫 화면에서부터 머쓱하게 걸어가는 장면, 악수를 하다 말고 옆으로 빠져나가는 모습, 지지 후보와 손드는 장면은 없이 손 내리는장면 등 영상기자가 보기에 NG컷인 장면이 너무도 자주 등장한다. 열심히 유세하고 열렬한 지지를 받는 박근혜위원장과 어정쩡한 한명숙대표라는 이미지를 줄 수밖에 없는 의도가 다분한 편집이 아닐 수 없다.   방송뉴스영상의 조작은 매우 교묘하게 이루어져 심증은 가더라도 방송은 한번 흘러 지나가면 다시 돌려보기 힘들고, 신문의 사진처럼 한 컷 한 컷 비교하기 힘들어 그 문제를 인식하기 어렵다. 그래서 선거보도에는 매우 엄격한 양적, 내용적 균형을 강조하고 선거이전에 영상기자단은 샷과 앵글에 대해 미리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에 의해 영상취재와 편집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리포트 길이, 인터뷰 길이는 물론 풀 샷, 대표 발언시 샷의 크기, 군중의 반응 샷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기준을 세우고 기계적으로나마 중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너무 단순하고 기계적이라며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한 그 기계적 중립이 이번 MBC 총선보도에서 한 순간에 허물어짐으로써 그 기계적중립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보도영상은 기사가 전달하지 못하는 선거유세의 규모, 분위기, 후보자에 대한 인상과 같은 시각 정보와 감성적인 느낌을 전달하는 중요한 정보원으로 언론을 장악하려는 세력들은 항상 자신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들만 보여주기 위해 보도영상을 통제해왔다.   이에 저항해 분신과도 같은 카메라를 내려놓고 파업에 동참하고 있는 지금 김재철과 그 일당들은 자신들의 편파보도를 대선까지 이어가기 위해 정체불명의 영상PD를 채용하고, 영상편집부를 영상파트에서 분리해 직할체재에 두고 자신들 마음대로 주무르려는 조직개편이라는 도발을 단행하려 하고 있다. 지난 90여 일간 MBC뉴스에 대한 참담함과 자괴감, 그리고 앞으로 닥쳐올 시련은 오히려 우리를 더욱 강하게 단결시키고 있고 파업의 명분은 이제 하늘을 찌르고 있다. 공정방송을 외치는 오늘 하루하루의 투쟁은 너무도 의미있고 뿌듯하다. 불의에 분연히 일어났고, 불의와 싸웠던 내생에 가장 뜨거웠던 날들로 기억될 2012년 하루하루 나는 멋지게 투쟁하고 있다. 이창훈 / MBC 영상취재부
    2012-05-04
  • 4.11 총선 취재기- 12월 대선,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4.11 총선 취재기 12월 대선,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번 4.11 총선은 새누리당 승리, 민주통합당 참패, 통합진보당 중간성적표, 자유선진당 몰락, 무소속 부진, 국민생각/진보신당 국회입성 실패라는 결과를 낳았다. 야권의 두축이라 할 수 있는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선거연대 그리고 선거 전 불거진 민간인 불법사찰이라는 호재속에서 야권이 여유있게 과반을 획득하리라는 예상은 보기좋게 틀리고 말았다. 누가 그랬던가? 선거는 곧 전쟁이라고... 상대를 쓰러트리지 못하면 내가 쓰러지는 현실... 보이지 않는 총성이 울려 퍼지는 전쟁과 같은 상황... 우린 약 2개월여를 그속에서 함께 보냈다.   2012년 1월... 새로운 당대표를 선출한 민주통합당의 분위기는 4월에 있을 총선에서 무조건 과반을 넘어 제1당이 된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현장을 취재하는 출입기자들도 이전과는 달라진 늘어나는 취재인력, 주위에서 보이지 않던 새로운 인물들의 회의 참석, 공보국의 회의실 이전 제의(인원이 많아서)를 지켜보면서 ‘야! 정말 이번 선거는 야당이 이길 것 같구나’ 라는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공천이 시작되면서 잡음이 들리더니 연말부터 발목을 잡았던 야권단일후보 문제마저 상황을 어렵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여기에다가 총선을 얼마 앞두고 터진 김용민 막말 파문건은 큰 악재로 다가왔다. 한명숙 대표를 둘러싼 주위의 분위기가 이처럼 점점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빨리 정리해야 할 일들에 대한 판단이 미뤄지면서 당내 분위기는 몇달만에 바뀌어 버렸다.   총선 공식선거운동이 시작되면서 민주통합당을 출입하는 카메라기자들은 당혹스러웠다. 침체된 당 분위기처럼 상대당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영상과 한명숙 대표의 영상이 비교가 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상대는 이전부터 인기가 있었던 대선후보였지만 한명숙 대표는 인지도 면에서 열세를 면치못하고 있었다. 새누리당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손이라도 잡아 볼려고 구름떼처럼 몰려들었고 민주통합당 한명숙 대표의 유세현장은 사람들이 많지 않아 현장에서 부족한 취재인력으로 부감을 촬영하고 싶어도 새누리당과 너무 비교가 되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정도 영상에서의 열세를 면해 간다고 생각할 즈음 총선상황은 양당의 의석수가 비슷하게 가거나 질 수도 있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4.11 총선 최대 이슈메이커로 떠오른 인물... 막말 파문으로 한동안 움직임이 없었던 김용민 후보를 만난 유세 현장은 식을줄 모르는 인기로 가득찼다. 이 정도라면 당선이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4월 11일 오후6시. 영등포에 위치한 민주통합당 당사에서 방송3사의 출구조사를 시청하던 한명숙 대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내심 그래도 결과는 좋을 것이라는 기대를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워낙 박빙 지역이 많아 그 누구도 예측을 할 수 없었다. 결국 한 대표의 미소는 이 후 볼 수 없었다. 10시쯤 박빙지역에서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꿈은 오래가지 않았다. 연초의 그 좋던 분위기가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물론 18대 87석에서 19대때 127석으로 많은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불과 몇 달 사이에 문제에 대한 판단 오류에 대한 유권자들의 심판은 무서웠다. 앞으로 남은 대선에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야당은 또다시 유권자들의 냉혹한 심판을 받을 것 같다. 민심은 정치인들의 적당히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9대 총선에서 야권단일화 과정에서부터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은 곳은 아마 관악을 지역구일 것이다.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와 김희철 전 민주통합당 후보의 경선, 그 과정에서의 여론조사 조작 파문, 그리고 이어진 이정희 대표의 재경선 제안, 김희철 후보의 불복과 민주당 탈당, 이정희 대표의 사퇴와 그 대타 격으로 내세운 이상규 통합진보당 후보... 관악을 선거는 3자 구도속에서 결국 이상규 후보가 당선되기까지 이처럼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관악을은 헌정 사상 최초로 어렵사리 이뤄낸 야권연대에서 가장 상징적인 지역구로 떠올랐고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는 선거기간에 특히 관악을에 매달렸다. 지역 거리유세 때 마다 허리를 90도 이상 굽히는 낮은 자세로 일일이 지역민들의 손을 붙잡고 작은 목소리로 한 표 한 표를 부탁했다. 나는 15개월 동안 국회에 출입하면서 이정희 대표의 그렇게 간절한 모습을 본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처럼 관악을 선거는 이상규 후보가 나왔지만 실제로 이정희의 선거이기도 했다. 결국 이상규 후보는 이정희 대표의 도움으로 관악을에서 지역민들의 지지로 당선되었고 통합진보당은 13석을 차지하면서 제3당이 되었다. 하지만 통합진보당은 수도권에 텃밭을 개척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울산, 창원이라는 전통적 텃밭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해 뼈아픈 결과도 가져왔다.   이제 선거는 끝났다. 하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12월에 대선이라는 더 큰 싸움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각자의 위치에서 대선을 준비해야 한다. 총선유세현장 맨 앞에서 카메라 렌즈를 통해 바라본 후보들과 각 당 지도부들의 모습이 이제는 언제였던가 싶기도 하다. 그렇게 시간은 또 우리와 함께 흘러가고 있다. 김대철·제일 / SBS 영상취재팀
    2012-05-04
  • 대한민국 최초의 父子 카메라기자
    대한민국 최초의 父子 카메라기자 변영우 변성중 기자를 만나다   아버지와 아들이 바쁘게 생활하다 보니 인터뷰 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24일 저녁 7시 목동에서 드디어 재회했다. 간단히 가족을 소개해 달라. 아들이라 키우기 힘들었겠다.   변영우: 1남 1녀를 두고 있다. 아들과는 무려 8살 차이가 나는 딸이 있다. 성중이가 하도 동생을 낳아달라고 해서 낳았다.(웃음) 동생이 태어나고 나서 성중이가 학교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던 게 생각난다. 딸은 보스턴대학 국제학과를 1년 일찍 조기졸업하고 지금은 중국 베이징에서 유학을 하며 외무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성중이나 딸이나 키우면서 말썽 한번을 안 피웠다. 화초를 좋아해 많이 키웠는데 꽃잎 한번 따지 않았다. 하지 말라는 행동은 하지 않는 착한 아이들이었다. 다른 집은 벽이며 장롱이며 온통 낙서로 도배가 된다고 하는데 우리 애들은 참 순했다. 카메라기자가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변영우: 중앙대 사진학과를 다녔다. 사진을 전공 한 계기는 고3때 몸이 아파 휴학을 했었다. 그 후 나름대로 사진 작업을 했는데 성과가 좋게 나왔다. 당시 한국일보 학생과학 잡지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사진작가로 선정되었고 중앙일보 전국학생 사진 콘테스트 은상을 수상하는 등 여러 공모전에서 수상했다. 그 휴학하는 일 년이 내 인생의 목표가 정해지는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영상의 길로 가겠다는 결심은 졸업을 하고 ROTC로 군대를 다녀와 1년 여간 방황을 마친후 이루어 지게 되었다. 그때는 시대 상황이 방송이나 신문의 제 역할을 못하다보니 선배들이 다른 길을 찾아보라고 할 정도로 번뇌가 심했다. 하지만 결국 1982년 11월 MBC에 입사를 했고, 드라마, 중계 카메라 등의 촬영감독을 했다가 1991년 SBS가 창사되면서 카메라기자로의 전환을 시도하며 나름대로의 주관과 철학을 갖고 업무에 임했다. 조선시대 승정원은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과 비슷한 역할을 했는데 승정원에는 사관이 있었다. 왕도 승정원 일기를 마음대로 고칠 수 없었던 것처럼 카메라기자 역시 사관의 마음을 갖고 취재에 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의 오점 역시 항시 올바른 시각으로 시청자에게 사실을 전달해야 한다. 일종의 소명의식이 필요하다.   변성중: 대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DSLR 카메라를 사주셨다. 사진에 대해 많이 배웠고 촬영하는 것이 즐거웠다. 건축공학을 전공하여 졸업 후 건축회사에서 1년 반 정도 일을 했지만 배움과 현실은 너무 달라 아버지와 상의 후 퇴사를 했다. 그 후 유럽으로 3개월 간 배낭여행을 다녀왔고 고심 끝에 동경했던 카메라기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변영우: 동경했다고 했는데 아들은 표현을 하지 않았다. 아들이 말이 없어 속을 알 수 없었는데 유럽 여행을 다녀온 후 카메라기자가 되겠다고 하더라. 본인이 심사숙고해서 결정했기 때문에 아들의 의견을 존중했다. 기억에 남는 취재나 프로그램이 있으시다면?   변영우: 참 많다. SBS 카메라기자들과 함께 집필한 에서도 언급한 내용이지만 정말 울면서 취재했던 기억이 있다. 1993년 인가 1994년인가 사할린 교포가 입국했던 적이 있다. 당시 당일 출장으로 사할린에 가게 되었다. 공항 밖을 나갈 수 없는 취재였는데 소련 측의 배려로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주변을 취재 할 수 있었다. 공항이 철조망으로 둘러 싸여 있었는데 남아 있는 가족들이 철조망에 올라타거나 매달려 “가지마라” 소리치며 우는데... 절규였다. 나 역시 흐르는 눈물로 파인더가 흐려져서 촬영이 힘들 정도였다.. 귀국하는 동포들은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가 다시 사할린으로 돌아와 정착했지만 부모의 나라에 뼈를 묻고 싶어 귀국을 결심하게 된 분들이다. 이미 징용으로 인한 강제이별을 경험했는데 또 다시 남아 있는 가족들과 이별을 해야만 했다. 취재 후에도 동포들이 자꾸 생각나 애잔한 아픔으로 남아있다. 보람된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   마약회사 정트리오... 마약실태 파악을 하는 50분 특집물을 제작했다. 90년대 초반일 것이다. LA 할렘가에 들어가기 전 카센터에서 차의 내부를 안보이게 선팅을 한 후 조그만 구멍을 뚫어 그곳으로 마약 현장을 촬영했다. 긴장도 많이 되었고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다. 이어 마약 청소년 중독자 개선 센터를 취재했는데 그중에 한국계 청년들도 있었다. 인터뷰 도중 그들은 참회의 눈물을 흘렸고 우리와의 인터뷰를 계기로 다시는 마약에 손을 대지 않겠다는 그들의 다짐에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2000년대에는 10여 년간 현장 취재를 하지 못했다. 영상편집부장, 영상취재부장, 영상 본부장을 역임했다. 특히 영상편집부장 시절은 아날로그 시스템이 디지털로 전환되는 시점으로 디지털 관련 여러 교육이 이루어졌다. 영상취재기자와 영상편집기자들은 일과 후에도 테스트를 받아야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우리 방송사가 디지털 선두주자로 나서는데 초석을 다져 보람되었다. 변성중 기자는 이제 3년차인데 기억에 남는 취재가 있었는가?   변성중: 천안함과 연평도 사태가 기억에 남는다. 천안함 사태가 일어났을 당시에는 수습기간이었는데 집에서 자다가 급히 연락을 받고 출장준비도 없이 입은 옷 그대로 백령도에 김재헌 선배와 함께 들어갔다. 역사의 현장에서 실종자 가족들을 보며 많이 안타까웠고 추위와 싸우며 6일정도 있었다.   변영우: 천안함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이 났는데 부자지간에 첫 합작품이 나올 뻔 했다. 침몰 천안함을 바지선에 싣고 예인해 평택항으로 들어올 때 아들한테 전화가 왔다. “이거만 되면 꼭 특종이니 평택항 입구에 있는 한전서부발전 평택 화력발전소 대형 굴뚝에 올라가 촬영할 수 있게 아는 분께 섭외를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SBS소속이고 아들은 MBN인데... 망설이다 그곳에 근무하는 선배에게 전화를 했더니 이미 경찰관계자가 취재진이 절대로 굴뚝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협조해 달라는 연락을 해왔다며 정중히 거절하는게 아닌가. 첫 합작품(?)이 될 뻔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됐어도 입장이 애매모호 할 뻔했다.(웃음)   변성중: 그 다음 기억에 남는 취재는 역시 아웅산 수치의 인터뷰이다. 만 1년도 안되었는데 출장 명령을 받았다. 책을 통해 보안이 어떤지에 대해 공부도 많이 했다. ( 미디어아이 78호 아웅산 수치 취재기 참고)   이즈음 인터뷰가 진행되었을 때 한국 올림픽 대표팀의 런던 올림픽 축구 대진표가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변영우: 어떻게 보면 카메라기자는 축구선수와 비슷하다. 개인기도 중요하지만 팀웍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출입처에서는 타방송사 기자들과 팀웍을 이뤄 취재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다른 직종에 비해서 경쟁관계의 기자들과도 친하게 된다. 종편 개국이후 POOL에 문제가 많은 것 같은데 협회에서 조율을 잘해야 할 것이다. 저도 협회 사무국장과 부회장을 해봤지만 지금의 협회는 예전의 친목성 단체에서 벗아나야 한다. 방송3사 체제에서야 세가 약했지만 지금은 명실상부한 언론 직능단체로 자리매김했다. 협회가 풀로 인한 협회 회원사의 갈등을 적극적으로 해결해줘야 한다. 아들에게 카메라기자 선배로서 조언을 해주신다면?   변영우: 요즘 아들 보기가 참 어렵다. 기자가 되었는데도 어렸을 때의 성격 그대로인 것 같다. 자주 해 준 이야기인데 잘났다고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고, 팀웍을 깨지 않는 기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상호간에 인사를 잘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 선배들과의 유대감이 재산이 될 것이다. 또, 뛰어난 능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수를 최소화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아마 지속적인 경험을 통해서 느끼게 될 것이다. 후배 기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변영우: 기자란 말 그대로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다. 글로 쓰던 영상으로 취재를 하던... 취재기자들이 보면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글은 현장에 없어도 쓸 수 있고, 과장되게 쓸 수도 있지만 영상은 과장 할 수도 없고 현장에 없으면 아예 취재자체가 불가한 것이다. 예전엔 화재가 발생하면 거리에 상관없이 취재를 갔다. 그런데 지금은 대부분 소방서 제공의 그림과 인터넷에 올라온 제보영상이 주를 이룬다. 기자가 현장에 없다면 기자라고 할 수 있는가? 현장에서 기록하고 사실 그대로를 전달해야 한다. 가보지도 않고 글을 쓰거나 영상을 받는다면 스스로의 영역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비록 그 곳이 전장이거나 재해현장 일지라도 반드시 현장에 있어야만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 카메라기자이다. 물론 최대한 안전하게 취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해 통계를 보니 지구촌에서 분쟁 취재 등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기자의 수가 백여명을 넘어섰다. 현장에 존재하되 안전을 확보하고 기자의 책무를 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변성중: 구체적인 꿈은 아니지만 아버지께서 조언해 주신대로 겸손, 성실, 예절 등 초심을 잃지 않고 맡은 바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는 참된 기자가 되고 싶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자랑을 해 달라   변성중: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너무 엄하셔서 장기간 출장을 가시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눈치 안 봐서 좋고 돌아오시면 선물 많이 사 오시니 좋고... (웃음) 집에서는 아버지이지만 사회에서는 카메라기자 선배이기 때문에 많은 조언들을 구할 수 있어 좋다. 아버지는 풍부한 유머감각과 위트가 있으셔서 제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분위기가 살아 친구들이 아버지를 무척 따르고 좋아한다.   일찍 자리에 온 변성중 기자는 스킨스쿠버 오픈워터 과정의 서적을 읽고 있었다. 이번 휴가 때 필리핀에서 자격증을 딸 예정이라고 한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참으로 행복하고 화목해 보이는 아버지와 아들, 가족의 모습이 보였다. 대담: 박현철 이정남 기자
    2012-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