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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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경영
  • 멀티형 카메라기자 과정 연수기
    멀티-'한개 이상의', '다중의'의 의미를 갖는 접두어로, 영어의 접두어인 'multi-' (많은, 여러, 다중의, 한개 이상의, 다양한, 곱절의)에서 유래되었다. 멀티+촬영기자=멀티형 촬영기자 란 무엇일까? 지난 6월 7일부터 이틀동안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와 방송기자연합회 주관으로 목동 방송회관에서 멀티형카메라기자 연수가 있었다. 방송기사작성법, 뉴디바이스 활용, 방송언어, 소셜미디어의 이해등 5개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현재 촬영기자들은 이미 멀티형기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방송환경과 기술의 변화로 방송초창기의 촬영기자의 역할과 지금은 단순비교가 힘들다. 해외출장시 뉴스제작과 송출을 인터넷을 통해 송출하고 있으며 MNG를 이용해 실시간 현장중계까지 하는 시절이다. 이는 기술적 발전이 촬영기자의 역할을 변화시킨 경우이다. 우리나라가 응용과학분야에서는 뛰어나지만 세계를 이끌고 갈 만한 기술력을 갖지 못한 것은 기초과학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방송기술발전에 따른 응용기술은 쉽게 따라 갈 수 있지만 뉴스를 만드는 촬영기자로써 응용기술만이 아닌 뉴스제작의 기초를 다질 수 있는 기회가 멀티형 촬영기자 연수였다고 생각한다. 첫 시간은 MBC보도제작국 김학희 국장이 강의하신 방송기사작성법이다. 방송기사에 대한 기본적인 강의와 단신기사 작성 실습이 이어졌다. 촬영기자들은 영상으로 뉴스를 표현하는데는 익숙하지만 글로써 표현하는 것은 그렇지 못하다. 취재기자들이 작성한 기사는 매일 접하지만 직접 작성해 보려하니 쉽게 펜이 움직이지 않는다. 훈련이 부족한 탓이다. 틈틈이 단신기사 작성법을 연습해 둔다면 뉴스를 제작하는 기자로써의 능력도 더욱 높아질 것이다. 뉴디바이스활용 수업에서는 류상수 감독이 제작한 제주 해녀이야기를 다룬 ‘숨비’(해녀들이 물질을 마치고 물 밖으로 올라와 가쁘게 내쉬는 숨소리)제작기를 들려주었다. 중요한 점은 DSLR인 5D Mark 2 카메라를 이용해 모든 수중촬영을 소화했다는 것이다. 실제 보여준 영상은 전문 수중카메라 못지않은 영상질감을 보여줬고 편리한 휴대성으로 다양한 앵글을 시도한 점이다. 단 수음은 카메라의 한계성으로 인해 별도로 했다. 비용적인 부분도 독립영화에서 큰 고려대상 이었다고 한다. 방송언어는 유형서 OBS아나운서 팀장의 강의로 발성의 기본인 복식호흡과 기사읽기 연습이 이뤄졌다. 뉴디바이스과정2는 모션그래픽과 컬러 그레이딩의 이해 및 애플 키노트 프로그램을 활용한 그래픽작업 강의가 이어졌다. 끝으로 얼마 전 퇴직하신 KBS 최기홍선배의 SNS와 방송카메라기자라는 강의에서는 뉴스혁신팀장의 경험을 살려 아카이브시스템 구축과 그 과정에 대한 강의가 이뤄졌다. 요즘 미디어생태계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생태계는 계속 변화하고 진화한다. 종합편성채널의 등장과 함께 셀 수 없이 많은 인터넷 미디어들이 오늘도 생기고 있다. 방송기술 또한 하루하루 급변해가고 있다. 오늘 쓰고 있는 포맷이 과거처럼 십수년 활용되기 힘든 시절이다. 변화하고 진화하는 미디어생태계속에서 촬영기자의 역할과 변화점은 무엇인지 고민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이다. 그러나 기본이 중요하다. 뉴스(NEWS)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점에서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와 방송기자연합회가 주관한 멀티형 카메라기자되기 연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본을 채워 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KBS 보도영상국 김상민
    2012-07-24
  • '재난위험지역 전문취재' 과정을 마치고...
    국제경쟁력강화 프로그램 '재난위험지역 전문취재' 과정을 마치고... SBS 뉴스텍 영상취재팀 서진호 기자 2011년 3월 11일 14시 46분 일본 도호쿠(東北) 지방에서는 일본 관측 사상 최대인 리히터 규모 9.0의 지진이 발생했다. 강진 발생 이후 초대형 쓰나미가 센다이시 등 해변 도시들을 덮쳤고, 도쿄(東京)를 비롯한 수도권 일대까지 건물 붕괴와 대형화재가 잇따르며 피해가 속출했다. 특히 지상으로 밀려든 대규모 쓰나미로 인해 전원 공급이 중단되면서 후쿠시마현에 위치한 원전의 가동이 중지되면서 방사능이 누출되는 사고까지 발생했다. 이 날 발생한 지진은 1995년 6000여 명이 희생된 한신(阪神)대지진(규모 7.3)의 180배 위력이자 1960년 발생했던 규모 9.5의 칠레 대지진, 1964년 9.2의 알래스카 지진, 2004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지진(9.1) 등에 이어 1900년 이후 세계에서 네 번째로 강력한 지진으로 기록됐으며 2011년 12월 현재까지 사망자와 실종자가 2만여 명, 피난 주민이 33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렇듯 과거부터 크고 작은 지진이 많은 나라 일본에서는 그에 대한 대비 시스템이 나날이 강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동일본 대지진을 통한 또 한번의 큰 희생 겪으면서 그에 대한 경각심은 더욱 커졌다. 연수 기간 중 처음으로 방문했던 록본기의 대표적 명소 록본기 힐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기업, 쇼핑몰, 호텔, 영화관 등이 즐비한 대규모 상업단지로 유동 인구가 매우 많은 곳이다. 여기의 중심인 MORI Building의 재난 대비 시스템은 잦은 지진에 대비해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다고 했다. 철저한 내진 설계를 통해 지어진 이 곳은 유압식 충격 완화장치와 보조 기둥을 세워 지진 발생시 상하좌우로 발생하는 진동에 의한 건물 붕괴를 최소화 하였다. 또한 100% 자가 발전을 통해 전력을 충당하며 보조 장치로 가스,석유를 이용한 발전 시설을 갖추었고 최후에는 경우에만 동경 전력과의 연결망을 통해 전력을 충당한다고 한다. 그리고 입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연간 2회의 대규모 훈련과 50회 이상의 크고 작은 재난 대비 훈련을 실시 하고 있단다. 비상용 지하수는 물론 입주민이 3일 동안 버틸수 있는 식량도 비축하고 있다. 자체적으로 지진 측정기, 긴급 지진 정보 시스템, 지진 발생시 조직도 변경 매뉴얼 등 수없이 많은 대비 시스템을 자랑한다. 이러한 철저한 대비를 통해 지난 동일본 대지진 때에도 정전 없이 입주 기업은 정상적인 업무를 볼수 있었고 동경 전력에 거꾸로 전력을 공급한 바가 있다고 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생긴 안전 체험관과 같이 지진 등 각종 재난 발생시 침착하게 대처 할수 있도록 여러 상황을 체험을 통해 훈련할 수 있는 도쿄 방재센터에는 최근 방문객이 급격히 늘어 하루 300명 이상이 방문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일행에겐 가장 큰 관심이었던 일본 국영방송 NHK의 재해, 재난 방송 시스템에 대해서 NHK 재해, 재난 보도 담당자 '사카이'상은 재해, 재난 방송은 첫번째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고 말했다.     NHK는 전국의 54개 지사와 14개의 네트워크를 통해 피해를 최소화 하고 발 빠른 원조와 복구를 이룰수 있게 한다고 한다. 지진과 모든 재해, 재난은 기상청에서 관할하며 기상청과 NHK는 직통 망으로 연결되어 정확한 데이터를 통한 방송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고 진도 7도 이상인 경우 모든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재해, 재난방송 태세로 돌입한다고 한다. 재해, 재난 방송은 신속 할수록 좋으며 정부 발표 후 1초 뒤에 곧바로 기상청의 정보를 방송 할수 있는 구조라고 한다. 또 전국에 470여개의 리모트 콘트롤 카메라를 운용하여 보다 효과적이고 안전하게 방송에 활용할수 있게 하는데 이번 동일본 대지진에서도 그것들의 활약은 빛을 발했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몰려온 쓰나미가 마을을 덮치는 영상은 NHK만의 유일한 헬기 영상으로 전 세계에 방송되었는데 이는 14대의 헬기를 보유하고 도쿄와 오사카의 경우 24시간 가동대기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가능 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계획된 준비와 투자, 그리고 무엇보다 경험이야말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제 역할에 충실 할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러나 준비와 경험이 재난과 재해를 100% 막아주진 못하는게 현실이다. 재난과 재해는 그 유형이 매우 다양해서 겪고 나서야 적절한 대비책을 세울수 있는 만큼 재해와 재난은 되풀이 되고 있다. 지진의 가능성이 대두되는 가운데 만일 지진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수 있을지 또 우리는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더 늦기 전에 한번 심각하게 고민해 볼 때인거 같다. 지난해 뉴스 영상을 통해 보았던 쓰나미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마치 컴퓨터 그래픽은 아닐까 의심이 들었던 그 영상이 휩쓸고간 미야기현 동부에 위치한 이시노마키시는 도시의 약 46%가 침수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1년 6개월이 지난 그곳은 재건은 커녕 아직도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고 곳곳에 쌓아 놓은 자동차와 쓰레기는 산을 이루고 있었다. 최대 10m가지 수몰되었던 바다와 가까운 곳의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여기저기 흩어져 놓여있는 시든 꽃다발은 얼마나 많은 영혼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는 지난 2003년 9월 태풍 '매미'로 인한 마산 해일 피해를 기억할 것이다. 바닷물이 1m가량 차올라 18명이 희생된 마산과 비교해 무려 그에 10배에 해당하는 이시노마키시의 피해는 상상했던 것 이상 이었다. 이상 연수를 마치고 그 동안 큰 재해, 재난이 없었던 우리의 안전 불감증에 대해서 다시 한번 돌이켜 봐야 할것이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을 최대 목표로 한다는 전제 하에 신속과 정확이란 두 단어를 두고 망설임이 없어야 할것이다. 책임 있는 방송기자로서의 사명과 안전에 대한 확고한 매뉴얼도 필요할 것이다. 사진 설명 이시노마키시 방문
    2012-07-24
  • 여수엑스포 취재기
    여수엑스포 취재기 – KBS 순천방송국 서재덕 2002년 12월 3일 모나코 현지. 올림픽, 월드컵만큼이나 국제적인 행사로 꼽히는 세계박람회의 2010년 개최지가 결정되는 순간. 큰 기대감이 순식간에 탄식으로 이어졌습니다. 여수시가 탈락하고 중국 상하이로 결정된 것입니다. 여수는 상하이와 최종 4차 투표까지 가면서 접전을 벌였지만 세계박람회 유치에 실패했습니다. 인구 30만의 작은 도시 여수는 상하이와 모스크바 등 세계적인 대도시들과 대등하게 경쟁하며 선전했지만 결국 중국의 벽을 넘지 못해 아쉬움을 남기고 말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라는 여수시의 다짐만을 영상에 담은 채 돌아서야 했습니다. 5년이 지난 2007년 11월 27일 프랑스 파리. 국제박람회기구 총회에서 140개 회원국의 2차 투표를 거쳐 경쟁국 모로코를 제치고 결국 여수시가 2012년 세계박람회 유치에 성공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모로코 탕헤르와 접전을 벌인 끝에 2012박람회 유치에 성공한 여수는 두 번째 도전 끝에 이뤄낸 성공인 만큼 그 감동은 두 배 이상이었습니다. 실패의 아픔을 딛고 한마음 한뜻으로 오랜 기간의 준비 끝에 박람회 유치를 이끌어 내 그 현장은 감동과 환희로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2012년 5월 12일 여수 신항에 104개 참가국 국기가 들어오면서 엑스포 사상 최초로 바다에서 여수세계박람회가 공식 개막 선언과 함께 닻을 올렸습니다. 4년여의 준비 끝에 바다와 인간의 공존과 소통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최첨단의 볼거리가 여수 신항에 펼쳐졌습니다. 여수엑스포는 자연재해나 자원고갈과 같은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바다 환경을 지키면서미래 자원을 얻어내는 선진해양 기술을 선보이고 해양강국으로서의 위상도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여수엑스포장 최대 볼거리로는 국내 최대 규모의 아쿠아리움, 하늘에 떠오른 바다 엑스포 디지털 갤러리와 빛과 물, 불이 어우러져 바다 이야기를 엮어내는 빅 오(Big-O) 해상분수, 시멘트 보관 창고였던 높이 67m의 스카이 타워는 바닷물을 먹는 물로 바꿔주는 거대한 담수시설로 재탄생했으며, 깊은 바다 속, 심해 개발을 주도할 미래형 로봇도 선보입니다. 엑스포의 전시관들은 바다를 통해 환경 보존과 인류의 미래를 모색하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브랜드 가치를 더 한층 높여줄 2012 여수엑스포에 세계인들의 시선이 한국의 남해안 여수에 쏠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상대적으로 개발이 뒤쳐졌던 남해안권에 여수박람회는 이 지역이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균형발전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 기대해봅니다. 2012여수 세계박람회가 개최되기까지 근 10년간의 준비 기간을 함께 지켜본 산 증인으로써 여수 엑스포가 8월에 닻을 내리기까지 순항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안고 오늘도 박람회장으로 향합니다.
    2012-07-24
  • 공정방송 그리고 시청자의 소중함
    MBC 파업을 말한다 한겨울 칼바람에 땡땡 언 손으로 피켓을 들며 시작했던 MBC 파업이, 이제 뙤약볕 아래 나날이 까매지는 피부를 걱정해야하는 계절에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투쟁은 진행형이며, 공정방송을 향한 조합원들의 열의는 쨍한 태양만큼이나 뜨겁습니다. 무엇이 저희를 이토록 단단하게 해주었는지 돌이켜보니, 가슴 속 단 하나의 다짐이 있었네요. 정권이 아닌 국민의 품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 이 약속의 준엄한 무게가 저희를 여전히 싸우게 하고, 눈물 흘리게 하고, 또 다시 다짐하게 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MBC 조합원들은 거리에 있습니다. 그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저희의 빈자리를 채운다는 명목으로 이름도 생소한 취재PD, 시용기자 들이 대거 MBC에 들어와 맹(?)활약 중입니다. 회사는 줄기차게 징계를 남발해, 벌써 해고자만 8명에 정직과 대기발령까지 합치면 백여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원치않던 훈장을 달고야 말았습니다. ‘허리’우드 액션으로 유명해진 보도본부장으로 인해 조합원들이야 말로 ‘정신적 충격’을 강하게 입었으며, 김재철 사장님은 ‘2014년까지 임기를 채우겠다’며 국민적 사퇴여론을 일축하셨습니다. 또한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공영방송 MBC를 지켜달라며 각계 각층의 정말로 다양한 인사들이 뜨거운 지지와 후원을 밝혀왔습니다. 얼마 전 시작한 ‘MBC살리기 백만인 서명운동’은 벌써 목표치의 절반을 넘기고 있고, 이제는 온라인에서도 그 열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파업 중인 MBC기자회는 ‘일을 안 하고 있다’는 아이러니한 이유로 방송기자연합회 특별상을 타기도 했고, ‘제대로 뉴스데스크’와 ‘파워업 PD수첩’은 조회수 수십만을 상회하는 인기동영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남은 일도 분명합니다. 공영방송 MBC를 정상화하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 바로 김재철 사장의 사퇴입니다. 아울러 방송문화진흥위원회 이사님들께도 촉구합니다. 비정상적인 상황을 그저 수수방관만 하는 것은 책임있는 관리감독기구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방송을 보고 싶다는 시청자들의 원성을, 언제까지 외면만 하실건가요? 파업이 남기고간 상처는 깊고 휑합니다. 하지만, 상처 못지않게 깊은 깨달음도 얻게 됩니다. 매일 매일 시간이 쫓기며 한편으론 간과하고 있었던 ‘공정방송’의 소중함. 한 컷 한 컷을 고민하고, 매 순간 깨어 있어야 한다는 사명감. 그리고 무엇보다 ‘시청자’ 라는 단어가 갖는 절실함이 그것입니다. 부끄럽지만, 카메라를 놓고 나니 비로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후회는 때늦었지만, 반성은 빨리 할 수 있어 다행이네요. 장마가 곧 시작된다고 합니다. 오랜 가뭄을 해결해 줄 꿀같은 비가 되겠지요. 지독한 가뭄 끝에 단비가 뿌려지듯, MBC의 파업도 그렇게 해결 될 것입니다. 목마름이 깊었던 만큼 해갈의 환희도 클 것입니다. ‘나만 바라 봐’를 외치는 어느 가수의 노래처럼, 국민만을 바라보며 일할 수 있는 그 날, 계절과 상관없이 저희들은 뜨거울 것입니다. 박주일 MBC 영상취재부
    2012-07-24
  • 방송콘텐츠 유럽 전역 확산을 위한 시도
    이번 행사는 헝가리에서 개최되는 신생 방송콘텐츠 거래시장(NATPE Budapest 2012)과 영국 방송콘텐츠 쇼케이스를 연계하여 우리 방송콘텐츠의 유럽시장 개척을 지원하기 위해 계획되었으며, KBS, KBS미디어, MBC, SBS콘텐츠허브, EBS, CJ E&M, 아리랑TV, YTN, CU미디어, 대한미디어월드 등 10개 방송사업자가 참가한다. 방통위는 “NATPE Budapest 2012”행사에 국내 방송콘텐츠 상담룸을 설치하여 방송사업자들의 마케팅 활동을 지원하고, 국내 방송사업자와 해외 주요 바이어와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한류를 전파하여 동유럽 권역 신규시장 개척의 기회로 활용할 계획이다. 또한, 우리 방송콘텐츠의 영국 시장 개척을 지원하기 위해 오는 29일 영국에서는 처음으로 방송콘텐츠 쇼케이스를 런던에서 개최할 계획이다. 특히 이번 방송콘텐츠 쇼케이스에서는 KBS의 ‘누들로드’, EBS의 ‘신들의 땅, 앙코르’, YTN의 ‘고수비급’ 등 다큐멘터리에서부터, KBS의 ‘아이리스’, MBC의 ‘닥터진’, SBS의 ‘유령’ 등 인기드라마, CJ E&M의 ‘코미디빅리그’, 아리랑TV의 ‘POPS IN SEOUL’, CU미디어의 '펫스토리‘ 등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 등 70여편의 다양한 방송콘텐츠와 27편의 3D를 콘텐츠를 적극 홍보하여 우리 방송콘텐츠의 영국시장 진출을 모색할 예정이다. 아울러, 방통위는 이번 행사에서 헝가리의 공영방송인 MTV, 방송통신규제기관인 미디어정보커뮤니케이션청, 영국의 민영방송사인 ITV 등 국가별 주요 방송사와 정부기관 면담을 통해 유럽 지역에 우리 방송콘텐츠를 적극 홍보하고 현지 방송관계자들과의 인적네트워크를 구축할 예정이다. 방통위 관계자는 “방통위는 이번 유럽 쇼케이스를 통해 방송콘텐츠의 진입장벽이 높은 유럽 지역에 우리 방송콘텐츠를 적극 홍보하고, 나아가 한국 방송콘텐츠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정남 기자
    2012-07-24
  • 고프로 카메라 공동 구매 건
    본 협회는  카메라감독연합회와 공동으로 요즘 핫이슈가 되고있는 정식수입 고프로카메라 (워런티 1년)를 권장소비자가격에서 15~12%할인된 가격으로 캠09(www.cam09.com) 지원을 받아 공동구매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특히 이번 공동구매는 회원님들의 부담을 줄여드리고자 신용카드 무이자 할부도 함께 진행 됩니다. 다만, 현금과 카드 결제는 할인율은 차이가 있는점 양해 부탁 드립니다. 기간 : 2012년 6월 1일 부터 6월 9일 자정까지 참여방법 : 1. www.cam09.com 접속   2. 아이디 패스워드 협회 문의 (02-3219-6477) 3. 구입을 원하시는 제품을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4. 제품 상세 페이지에서  [전체쿠폰다운받기] 클릭 하셔서 쿠폰을 다운 받습니다. 주의. 고프로 상품에서만 쿠폰이 보입니다. 5. 장바구니 가셔서 [전체상품주문]  클릭 6. 배송지정보에 회원님의 정보를 입력 합니다. 7. 결제정보 쿠폰 할인 [쿠폰선택] 클릭 8. 새창 - 상품별 쿠폰적용 - [해당쿠폰] 을 선택 합니다.    주의. 반드시 [쿠폰적용하기] 클릭 하셔야 합니다. 9. [결제하기] 클릭 현금은 [무통장입금], 신용카드는 [신용카드] 선택 하시면 할인된 금액이 보입니다. 주의. 반드시 결제 방식에 따른 아이디로 로그인 하셔야만 할인 처리 됩니다. 10. 공동구매 제품은 로젠 택배로 발송 됩니다. 11. 기타 문의 사항은 아래로. 파츠넘버나인 대표 안세환 홈페이지 : http://www.parts09.com  (모터사이클)                   http://www.cam09.com  (카메라) 이메일 : sehwan.an@parts09.com 사무실 : 1661-8709 팩 스 : 02-6280-8709 핸드폰 : 010-2928-9999 주 소 : 서울 강남구 청담동 112-30 파츠넘버나인
    2012-05-31
  • 일제의 억압 속에 자라난 자주적 영상기록의 갈증
    새롭게 보는 한국보도영상사4 일제의 억압 속에 자라난 자주적 영상기록의 갈증 해방의 순간, 한국 사회 카메라를 들어, 영상뉴스를 만들다.   ‘1945년 8월 15일. 삼천리 방방곡곡을 휘몰아치던 광복의 감격에 벅찬 민초들의 얼굴들’. 우리는 이 얼굴들을 상상하지 않고도 해마다 광복절만 되면 TV특집프로그램들에서 만날 수 있다. 이제는 빗물내리는 화면 속의 흑백 영상이 되어버린 이 영상들을 보면서, 영상기자라면 한 번쯤은 ‘저 영상의 기록자들이 과연 누구일까?’하는 의문을 품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1945년 8월 15일, ‘민족해방의 날’을 기록한 이 영상들이 우리 민족의 영상인들에 의해, ‘민족의 광복’이라는 엄청난 사실과 기쁨을 전 사회가 함께 공유해야한다는 확실한 저널리즘적 목적성을 갖고, ‘뉴스’라는 이름으로 기록,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1940년대 일제에 의해 조선의 민간영화사들이 통폐합되어 만들어진 조선 유일의 영화조직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영상인들은 해방과 함께, 곧바로 뉴스대를 조직해 격동의 순간들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뉴스영화로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조선영화건설본부’나 ‘10월 영화공장’과 같은 자생적인 영화인단체가 조직되어 ‘해방뉴스’를 시작으로, ‘10월영화뉴스’, ‘민족전선’, ‘전진대한보’ 등과 같은 뉴스영화들을 잇달아 내놓게 된다. 이렇게 해방공간에서 영상뉴스의 취재와 제작이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35년의 일제강점기간 동안 ‘영상’이라고 하는 수단을 통해 자주적으로 현실을 기록하고, 이를 통해 우리 시각의 다양한 정보와 메시지를 공유하고 싶어 하는 ‘근대적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갈망이 한국사회에 팽배해 있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독립운동으로서 애국계몽운동과 영상에 대한 적극적인 활용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1910년 일제의 국권 강제병합의 과정을 거치면서, 일제에 대한 독립운동은 항일무장투쟁이라는 강력한 물리적 투쟁과 애국계몽운동이라고 하는 온건한 투쟁의 두 가지 양상으로 전개되게 된다. 이 중 애국계몽운동이 택한 중요한 도구의 하나가 ‘영화’였다.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향상을 목적으로 시작된 학교설립운동의 모금회에 대중을 모이게 하는 방법으로 영화가 상영되었고, 애국부인회나 대한실업장려회와 같은 단체들은 각 종 계몽적 활동이나 애국사상 고취를 위해 고종이나 영친왕이 등장하는 다양한 영상물들을 전국에 순회 상영하면서 대중의 울분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했지만 ‘영상’이라는 근대적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을 이용해 대중이 정보를 취득하고, 공감하고, 해석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이 개념화되고 고민되기 시작했다. 1910년대 영화 보급의 활성화와 뉴스영화의 소개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제와 일본인들의 조선진출이 본격화 되면서, 서울과 부산 등지의 대도시에 본격적인 영화 상영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 영화관들에서는 미국과 프랑스,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제작된 다양한 영화들이 상영되었다. 이들 영화들은 극영화가 중심을 이루었지만, 강제합병 한 한국사회를 순치 시키거나 일본국민들과 국제사회에 대해 자신들이 벌인 대한제국에 대한 국권침탈 행위를 미화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나 일제의 국가기관들이 직접 제작한 <해뜨는 나라(1917)>, <부산경성의 전경(1918)>, <금강산대활동(1919)> 등과 같은 선전용 기록영화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1910년대 중반부터 일본에서 본격적인 뉴스영화의 제작이 시작되면서, 일제강점기 한국사회의 영화관에서도 이들 뉴스영화의 상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부산지역의 영화자료를 살펴보면, 1917년 부산의 보래관(寶來館)에서 <오사카 마이니치필름 제4호(大阪每日フィルム通信第4號)>가 상영된 이래 영화관에서 뉴스영화의 상영이 계속되어 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1910년대 일제가 제작한 각 종 기록영화와 뉴스영화를 접하면서 식민지 조선인들의 머릿속에 시사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영상에 대한 개념화와 우리 시각으로 제작된 기록영화와 뉴스영화들의 필요성이 싹트게 되었다. 3.1독립운동 이후, 조선인이 제작한 뉴스기록영화의 등장   박승필의 <고종인산실경>,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전선여자정구대회>, <조선일보 뉴우스>   일제강점초기 조선총독부에 이뤄진 무단통치는 항일독립투쟁은 물론이고 사회 전반에 걸친 억압으로 이어졌다. 10년 가까운 강압통치의 결과는 마침내, 1919년 3.1독립운동이라는 조선민중들의 강력한 대중적 독립투쟁으로 나타나게 된다. 전국적으로 펼쳐진 3.1운동에 대한 커다란 위기의식 때문에 일제는 조선총독부의 통치방식을 ‘문화통치’로 전환하게 된다.   ‘문화통치’의 대표적인 조치 중에 하나로 기존에 강력하게 억압해오던 언론과 문화 전반에 대한 통제를 어느 정도 완화시켜줌으로써, 조선인들에 의한 언론사 설립이 가능해지고 영화, 문학, 예술분야의 활동에 일정한 제약들을 풀어지게 되었다. 이런 조치가 가능했던 이유에는 강압적인 무단통치로 인해, 지하언론이 활성화되고, 그에 따른 일제에 대한 반감이 점점 커져가는 것을 막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   3.1독립운동이라는 민족적 저항을 통해 우리 민족은 한시적이나마 제한적 자유의 공간을 획득할 수 있었고, 이 기간을 통해 영상이라는 근대적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싶어 하는 근대적 욕구들도 조금이나마 현실에서 실험되고, 그에 따른 결과물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1907년 단성사를 인수해 민족영화의 제작을 꿈꿔온 영화제작자 박승필은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최초의 영화로 기록되는 연쇄극 <의리적 구토(1919년 10월 27일)>를 만들어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연극의 중간에 조선의 풍광을 촬영해 만든 영상을 상영하는 <의리적 구토>의 제작시기에 박승필이 제작한 또 하나의 영화가 기록영화 <고종인산실경(1919년)>이다. 고종황제의 국장을 카메라로 기록한 10분 분량의 이 영화는 일제강점의 상황에서 우리사회의 영상가가 ‘고종’의 죽음이라는 시사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사건을 영상으로 기록했다는데서 보도영상사적으로 큰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문화통치가 본격화되었고, 한국사회에 불어 닥친 가장 큰 변화는 민간신문의 허용이었다. 1920년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사일보의 창간이 허용되면서 조선인들이 만든 언론사의 활동과 경쟁이 본격화 되었다. 새롭게 시작한 한국사회의 신문사들은 조직이나 영업활동을 위해 일본의 신문사들의 지면과 조직, 영업활동들을 많이 참고했고 이를 통한, 새롭고 빠른 뉴스를 전달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1921년 동아일보는 백두산 탐험대를 조직해 활동하면서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의 사진을 신문지면을 통해 보도하게 된다. 이 보도사진을 계기로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역사조작에 대한 조선사회의 반론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각 신문에 노동자와 민중들의 시위를 취해한 사진이 실리면서 조선사회 전체에 큰 파장이 일자, 총독부가 사진기자들의 취재를 제한하고 사진을 검열하는 통제가 가해졌다. 이런 사진기자의 활동과 보도사진의 영향력이 본격적으로 인식되면서, 신문사들은 그 과정에서 일본의 신문사들이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뉴스영화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신문사의 뉴스영화에 대한 첫 관심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1924년 동아일보에서 제작된 20분 분량의 기록영화인 <전선여자정구대회(全鮮女子庭球大會)>이다. 여자테니스대회를 취재한 스포츠뉴스 형식의 기록영화로 전해지는 이 기록영화가 조선사회에서 뉴스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이 모색되게 되었다.   1920년대 중반, 경영난과 사회주의 사상 기자들에 대한 문제로 폐간위기까지 치달았던 조선일보는 금광사업으로 성공한 방응모가 신문을 인수하면서, 막대한 자본을 투여해 본격적인 상업적 경쟁의 길을 추구하게 된다. 이를 위해, 조선일보가 눈을 돌린 새로운 사업이 뉴스영화분야였다. 조선일보는 신문지면을 그대로 옮긴 뉴스영화의 제작을 추진해 1929년 사내에 활동사진반을 설치한다. 그리고 대대적인 신문홍보를 펼치며 1929년 6월 조선극장에서 최초의 민간뉴스영화인 <조선일보 뉴우스>를 상영하게 된다.   <조선일보 뉴우스>는 조선일보가 펼친 생활개선캠페인, 상공인대운동회, 유치원연합 대원유회 등의 내용을 담은 10분 분량의 영화를 전국을 돌며 무료 상영 했다. 우리 민족의 손으로 만들어진 뉴스영화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하지만 조선일보뉴스는 1회 제작 이후, 추가 제작을 이어가지 않았다. 동아일보 역시, 1921년 뉴스영화형식의 기록영화제작이후 본격적인 뉴스영화 제작의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   이렇게 1920년대의 우리 언론사들이 뉴스영화의 제작을 시도하거나 제작했지만 이후 계속되 되지 못한 데에는 뉴스영화에 대한 언론사들의 고민이 첫째는 언론사간 경쟁의 관점에서 사세과시라는 사업적 홍보에 집중되었고 일본언론사들에서 시작된 뉴스영화 제작이 언론사업으로서 성공가능한 지를 실제 테스트해 보고 싶은 의도에서 기획되어졌기 때문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조선총독부가 자생적인 조선의 민간 뉴스영화를 계속 유지하는 데 대한 불편함과 우리 언론인들이 언론사의 존폐를 걸만큼, 영상이라는 수단을 통한 커뮤니케이션과 저널리즘을 만들어가려는 절실함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영화령과 전시체제하의 민간 뉴스기록영화의 궤멸   3.1운동 직후 조선총독부가 내세운 문화통치의 기치아래, 조선사회에 숨통이 트이기는 했지만 그와 함께 검열, 감시, 제약을 일상화하는 다양한 규제장치들도 계속해 만들어 졌다. 조선총독부는 직접 ‘활동사진반’을 만들어 민간의 언론영화활동을 견제했다. 1920년부터 1936년 까지 조선총독부의 활동사진반이 국내외 보급을 목적으로 제작한 영화들은 241편에 이른다. 하지만, 그 내용들은 <경성교외 전경>, <조선여행>과 같이 조선정책의 성공을 알리는 것부터 일중전쟁과 관련된 전쟁사황을 알리는 선전영화들이 대부분이다. 1930년대 일본의 전시동원체제가 본격적으로 구축되어가면서 영화 전반에 대한 규제검열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마침내, 1940년에는 조선영화령이 시행되면서 조선의 모든 민간영화사들과 영화인들이 조선영화주식회사로 통폐합되고, 태평양전쟁과 천황체제를 선전하는 영화들만이 쏟아 지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1910년 일제강점의 시기에도 그치지 않고 진행되었던, 영상을 통한 자주적 역사 기록과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을 추구했던 한국사회는 이런 갈망을 멈춰야 했고, 그 사회적 갈증들은 1945년 8월 15일의 역사적 대반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준영 / MBC 영상취재1부 차장
    2012-05-04
  • 제19차 유엔 인권이사회 취재기
    <제19차 유엔 인권이사회 취재기> 남과 북의 충돌로 외신의 관심이 집중된 취재   파리에서 TGV로 3시간 30분... 스위스 제네바에 도착했다. 탈북자 송환 문제로 유엔 인권이사회를 참관하는 우리 국회 대표단을 취재하기 위해서 였다. 제네바는 국제적인 회의가 많이 열리는 관광 도시이지만 취재를 목적으로 방문하기에는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은 곳이다. 비싼 물가와 열악한 인터넷 환경, 가격 대비 특색 없는 음식 때문이다.   다음 날, 인권이사회가 열리기로 예정 된 제네바 유엔본부. 참관인들과 기자들이 출입 등록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줄지어 서 있다. 종편과 보수 언론사 취재진 등 10여명의 한국 취재진이 보였다. 오전 10시경, 북한 대표가 회의장에 먼저 모습을 나타냈다. 그로부터 10여분 후에 김형오, 안형환, 박선영, 이은재 의원으로 이루어진 국회대표단이 참관을 위해 본부에 도착했다. 참관만 하려면 이 멀리 왜 왔을까 하는 의문도 잠시, 도착 인터뷰에 응한 안의원은 "이준 열사가 된 심정으로 북송저지 운동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촉구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 고 말했다.   이준 열사!!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루스만 북한 인권 보고관의 보고가 끝나고 북한 대사의 반론이 이어졌다. 탈북자 강제송환이 이뤄지고 있다는 보고서의 내용은 근거 없이 날조된 것이라는 거였다. 우리국회 대표단이 손짓으로 북한 대사를 가리키며 바쁘게 움직였다.   서대평 북한 대사가 자리를 뜨는 순간 국회의원단이 북한 대사를 향해 나아갔다. 렌즈도 급히 의원단 쪽으로 향했다. 안의원, 박의원이 북한 대사를 향해 거침없이 말을 쏟아낸다. "탈북자들을 북한으로 송환하지 마십시요", "그러면 안 됩니다."   순간 회의장의 모든 시선이 뒤쪽으로 집중되었다.   당황한 북한대사... 그러나 참으로 냉정하게 침묵으로 일관한다.   뭐 이따위냐!라며 거칠어진 북한 측과 나가지 말라고 소리치는 의원단 간에 몸싸움이 일어났다. 유엔회의 사상 최초(?)사태였다. 혼란한 회의장에서 가장 당황한 건 보안 요원들이었다. 급기야 안의원은 팔이 꺾여 벽 모퉁이로 몰아 붙여졌다. 쿵! 부상이 염려 될 만한 큰 소리가 들렸다. 안의원이 제압당하자 박선영, 이은재 의원이 카랑카랑하게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북쪽 인사들과 보안 요원들이 의원들과 취재진을 막아서자 북한 대사는 회의장을 빠져 나갔다. 이렇게 공격적으로 북한 대표를 향해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었던가?. ... 9시뉴스 네 번째 꼭지란다. KBS를 제외한 다른 방송사들은 시간상, 편성상, 전략상 메인 뉴스제작을 포기했다.   송출을 마친 오후, 기자회견장으로 향했다. 안형환, 이은재 의원이 붕대를 두르고 유엔본부 밖을 서성이고 있었다. 출입을 거부당한 것이다. 회견장에는 생각보다 많은 외신이 참석해 있었다. 참관만으로 끝날 수 있었던 상황이 남과 북의 충돌로 인해 외신의 관심을 끌어내는 데는 성공한 셈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있었다. 발언권이 보장되는 국제회의장에서 ‘대한민국 국회 방식’으로 문제 제기하는 게 합당할까 하는 것이었다. 우리에겐 매년 몇 번씩 볼 수 있는 너무도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대부분의 외신들은 상당히 놀란 듯 했다. 회견장에서 만난 한 외신기자는 국제회의에서는 언제나 조용히 대응하는 나라가 마지막에는 웃는 법이라고 대응 방식을 꼬집는다. 하지만 회견 내내 우리 의원단은 상당히 고무된 표정이었다. 왜일까? -제네바 유엔본부 취재 팁- @ 회의장은 뒤 쪽에서만 촬영이 가능하고 오디오 픽업 단자가 마련되어 있으며 규모가 크기 때문에 발언자의 녹취를 위해서는 ENG로 취재가 필수입니다. @ 인터넷 속도는 대부분의 유럽이 안 좋지만 특히 스위스가 더욱 열악합니다. 물론 호텔마다 차이가 있지만 300K 이상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 행사가 많은 도시인 제네바의 숙박비는 싱글 룸 기준으로 200유로(한화 32만원)정도가 됩니다. 출장비에 여유가 없으시다면, 실비 정산이 안 된다면 제네바에서 30분정도 벗어나 프랑스 국경도시 Annemasse에서 묵으면 숙박비용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김승욱 / KBS 파리특파원
    2012-05-04
  • 핵안보 정상회의 HB(주관방송)취재
    기분 좋은 스트레스 - 핵안보 정상회의 HB(주관방송)취재 내가 촬영한 영상이 전 세계 뉴스에 방송된다   HB(Host Broadcaster)는 행사를 개최하는 특정 국가의 주요 방송국이 행사에 참여하는 모든 방송사들의 혼잡과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방송 제작 업무를 대행해서 처리해 주는 제도이다. 국가적인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HB제도가 활용되는데, 이번 핵안보 정상회의 취재는 KBS가 HB를 담당했다. 나는 정상회의장을 취재하는 HB팀의 막내로서 이번에 정상회의 취재라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HB의 취재방식은 기존에 우리가 행하던 취재방식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내가 KBS의 촬영기자가 아니라 행사를 위해 별도로 고용된 ‘국적불명의 촬영기자’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 대통령이 아니라 정상회의에 참석한 모든 나라의 정상들이 내 조국의 대통령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촬영에 임해야 한다. 영상을 제공 받는 나라입장에서는 그 나라의 정상을 중심으로 뉴스가 나갈 것이기 때문에 각 나라의 정상들을 공평하게 촬영해야 한다. 이 때문에 HB팀들은 다른 방송사보다 먼저 행사장에 들어가 좋은 위치를 선점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물론 의장국을 포함한 주요국 정상들의 비중이 더 큰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내가 맡은 섹터에서 촬영할 수 있는 정상들의 원샷을 반드시 담아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취재환경이 그리 녹록치는 않았다. 정상회의가 시작 될 때까지 회의장 내의 보좌진들은 분주하게 움직였고, 정상들 역시 자신들의 외교를 펼치느라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들은 카메라의 시선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카메라 앞을 가리기 일쑤였다. 이들을 피해서 순식간에 원하는 포인트를 잡아내어 촬영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오바마 미국대통령이 마이크를 손으로 가리는 장난 섞인 제스쳐를 잡아낸 것 또한 수많은 사람들을 피해서 어렵게 촬영한 영상이다.   회의가 시작 된다는 장내 멘트가 나오고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 착석하면, 그때부터 뉴스에 사용할 수 있는 정돈된 영상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때 HB에게 주어지는 시간이 짧다는 점이다. 신속, 정확하게 각 나라의 정상들을 일일이 촬영해야한다.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사이즈를 담아내는 것 또한 기본이다. 숨 가쁘게 촬영을 하다보면 어느새 경호팀 사람들이 뒤에서 소리 없이 다가와 ‘이제 나가주시죠~’하며 압박을 가한다. 늘 그렇지만 나갈 때는 혹시나 놓친 장면은 없는지, 실수한건 없는지 돌이켜보며 마지못해 아쉬운 발걸음을 떼게 된다.   이렇게 VIP들이 모이는 행사를 취재하면 경호팀이나 기획단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실제로 이번 정상회의 취재 때도 사전협의에 문제가 생겨서 취재를 방해받은 일이 있었다. 사전에 기획단과의 회의에서는 각국 전속카메라맨들이 취재를 다 마치고 나가면 HB에게 따로 취재할 수 있는 시간을 주겠다고 협의가 돼있었는데, 갑자기 경호팀에서 다 나가라고 압박을 가하는 바람에 같이 취재하던 한 선배가 떠밀려서 쫓겨나기도 했다. 사전에 협의가 돼있던 사항인데, 경호팀에서 착각하고 HB촬영기자들까지 나가라고 한 것이다. 물론 강력하게 항의하여 나머지 HB팀들은 마지막까지 취재를 할 수 있었지만 사전커뮤니케이션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낄 수 있었던 대목이다.   내가 촬영한 영상이 전 세계 뉴스에 방송된다는 책임감은 국내 뉴스를 취재 할 때와는 또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러한 책임과 무게감이라면 촬영기자로서 한번쯤은 느껴볼 가치가 있는 기분 좋은 스트레스라고 생각한다. 내가 촬영한 영상이 전 세계에 방송된다고?! 촬영기자의 책임감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줬던 좋은 경험이었다. 이재섭 / KBS 보도영상국
    2012-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