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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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기고 한반도 주변 불안정과 달러 위기의 연관성
    한반도 주변 불안정과 달러 위기의 연관성   1999년 유로화 탄생 이후 국제정세 불안정의 이면에는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의 위기와 연관성이 깊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이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 미국의 달러 패권을 둘러싼 통화전쟁과 안보상황과의 연관성 분석을 통해 한반도 위기의 본질을 파악하고 안보위기에 대응할 때 참고할 필요가 있다. 통화전쟁과 세계 불안정 사이의 연결고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일달러’(Petro-Dollar)와 ‘달러순환’(Dollar-Recycling)의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여기서 순서대로 제시되는 ‘오일달러’와 ‘달러순환’ 메커니즘은 대학에서 가르치지 않는 금기사항으로서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구조이기 때문에 주의 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유거래 시 달러로 결재(1974년 경 미국-사우디아라비아 간 비밀협약으로 ‘오일달러’ 정착) ‧각국에서 원유 수입을 위한 달러 수요 증가 ‧미국에서 달러 대량 인쇄 ‧달러의 글로벌화 ‧달러 남발로 인한 가치 하락 ‧기축통화 유지를 위해 달러가치 유지 필요 ‧한반도, 중동 지역 등 불안정(전쟁) 유도 ‧원유가격 상승으로 ‘오일달러’ 수요 증가 및 해외 달러 자산의 미국 유입 ‧해외 달러의 미국 국채(안전자산) 및 주식에 투자 ‧유입된 달러로 불안정 지역의 기업 등 자산 헐값에 매입 및 미국의 적자재정 운영 계속   이후 지속적이고 원활한 ‘달러순환’을 위해서는 주기적인 세계 불안정화, 금 가격 조작(금은 달러의 적), 달러의 경쟁 화폐 때리기(유로, 위안화 등), ‘탈달러화’ 방지(중국, 러시아, 이란 등 견제)가 계속된다. 만약 세계 대다수 국가가 원유 등 각종 무역거래에서 달러 사용을 중지할 경우 예상되는 추이는 다음과 같다.   ‧달러 가치 급락 ‧미국인이 국내 소비재 구입 시 높은 가격에 구입 ‧미국인의 삶의 질 저하 ‧현재와 같은 적자재정 불가능 ‧군대 축소 및 해외 기지 폐쇄 ‧‘제국’의 몰락   달러의 위기와 전쟁의 연관성은 미국 전직 고위관리의 주장에서 드러난다. 2015년 6월, 미국의 前 국가안보국(NSA) 및 중앙정보국(CIA) 국장인 마이클 헤이든(Michael Hayden)은 통화전쟁 전문가인 제임스 리카즈(James Rickards)에게 “21세기에 통화전쟁은 전쟁의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며 미국과 다른 나라와의 통화전쟁이 진행 중임을 확인했다. 현재 달러 위기를 맞고 있는 미국의 전략은 달러에 도전하는 지역에 군사적 긴장을 악화시키는 것으로서 그 최전선은 바로 중국의 주변국과 중동 지역이다. 주요 타깃은 작년 12월 트럼프 행정부가 발표한 ‘국가안보전략’에서 ‘수정주의’ 국가로 지목된 중국과 러시아다. 한반도 주변국인 두 나라는 ‘탈달러화’를 추진하는 선두국가다. 미국은 두 나라 견제를 목적으로 군사력 강화를 위해 20조 달러라는 심각한 국가부채에도 불구하고 2018년도 국방예산을 540억 달러 증액(전년 대비 10%)한 상태다. 한반도 주변은 중국, 일본, 한국 등 세계에서 달러 보유와 자본이 가장 집중된 지역으로서 불안정화는 달러의 기축통화 유지와 미국의 국익추구에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그리고 산유국이 많은 중동은 ‘오일달러’ 체제유지에 매우 중요한 곳이다.  두 지역은 안보위기가 발생할 경우 대규모 달러자본 유출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미국의 통화전쟁에서 주요 견제대상인 중국의 ‘출구전략’은 ‘오일달러’ 체제 이전 시대(1971년)로 돌아가는 것으로서 에너지와 주요 상품 가격을 달러에서 금-달러 연동제로 전환하는데 있다. 이것이 바로 ‘오일위안’(Petro-Yuan) 체제다. ‘오일위안’ 체제는 궁극적으로 위안화 국제화의 중요한 기반이 된다. 그러나 중국이 ‘오일위안’을 계속 추진할 경우 과거 ‘오일달러’를 이탈하거나 시도한 이라크의 후세인(2003년)과 리비아의 카다피(2012년)가 제거된 사례와 같이 미국은 “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하도록 부추기거나 북한을 침공하는 등 세계기축통화인 미국달러를 지키기 위해 어떤 것도 할 것”이라는 것이 미국 금융전문가인 맥스 카이저(Max Keiser)의 예측이다. 또한 미국 골드머니연구원 원장인 알라스데어 맥클레오드(Alasdair Macleod)에 의하면, 1990년 대 이후 시작된 북핵과 미사일 위기가 새삼스러운 위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실험을 이유로 “북한을 [군사적으로] 위협함으로써 한국과 일본에 대한 달러결재 무역과 투자”가 미국 국채로 전환되도록 하는 것이 한반도 위기 조성의 실체라고 주장했다. 결국 한반도 주변 위기가 심화될수록 정세 불안정으로 인해 외국인의 중국 투자도 격감이 불가피 하여 중국경제가 위기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미국이 경제적‧군사적 근간인 달러가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고 판단할 때는 달러를 위협하는 상대국에게 강력한 군사적 펀치를 날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향후 우리 정부가 주시해야 할 사항은 적어도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일반적으로 달러 약세가 지속된 이후 미국이 금리인상을 본격적으로 추진 시 한반도 주변상황의 악화를 예상할 필요가 있다. 현재 달러의 상태와 한반도 위기 상황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 둘째, 달러를 위협하고 있는 중국의 부상이 계속되는 한 미국에 의해 지속적인 위기상황이 조성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 주변 지역 불안정화를 통한 중국 국력의 분산 전략이다. 특히 중국 동‧서‧남쪽 지역, ‘일대일로 프로젝트’ 참여국, 중국의 에너지 수입 대상국, 親 중국 지역 및 해역이다. 셋째, 앞으로 중국의 ‘오일위안’ 및 위안화 국제화 추진 등에 따른 견제 차원에서 미국은 중국 주변부 불안정화 전략이 더욱 적극적으로 펼쳐질 것이다. 이 경우 일본과 중국의 전쟁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한국도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장회식 뉴욕주립대학교 박사 역사학자·국제정치학자
    2018-03-15
  • KBS 이사회, 고대영 사장에 대한 본격 해임절차
    KBS 이사회 해임제청안 상정 지난 10일 KBS 이사회는 서울 여의도 KBS에서 비공개 임시 이사회를 열고 고대영 사장에 대한 해임제청안을 이사회에 공식 안건으로 상정했다. 129일 동안 지속된 파업을 끝내고 공영방송 정상화가 가능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앞서 지난 8일 여권 추천 이사 5명(김서중·권태선·장주영·전영일·조용환)이 고 사장에 대한 해임제청안을 이사회에 제출한 지 2일 만이다. 이사회는 이날 고 사장에게 오는 15일까지 해임제청안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또한 고 사장에게 같은 날 임시 이사회에 출석해 대면으로 소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했다. 고 사장 해임제청안 최종 결정은 고 사장의 소명과 함께 15일 임시 이사회에서 다시 논의된다.   KBS 이사회는 ▸KBS 조건부 재허가 합격 점수 미달에 대한 책임 ▸신뢰도와 영향력 추락 ▸파업 사태 초래 및 이로 인한 직무 수행 능력 상실 ▸보도국장 재직 시 금품수수 의혹 등을 해임 사유로 담았다.   현재 KBS 이사회는 여권 추천 이사 6명, 야권 추천 이사 5명으로 구성되어 있어 고 사장 해임은 시간문제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재적이사 11명 중 과반수를 차지하는 여권 인사 6명이 동의하여 해임을 제청할 경우 최종적인 해임은 문재인 대통령의 재가로 결정된다.   그러나 고 사장은 “해임 사유가 모두 억지 주장이며, 사실 관계 파악조차 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주변에서는 오는 15일 이사회에 고 사장이 소명에 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시각도 많다.   한편 당초 진행을 맡기로 한 이인호 이사장은 모친상을 이유로 참여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변석찬 이사가 이사장을 대신하여 이사회를 진행했다.   김병관 / 인턴기자
    2018-01-12
  • 더불어 사는 '살기 좋은 공간' - 스마트 시티 <下>
      ‘함께 살아가는 방법’   그러면 이런 살기 좋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인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사는 C 씨, 그의 옆집에 사는 아저씨를 그 동네에선 ‘오꾸빠(Okupa, 영어의 Occupy)’라고 부른다.    오꾸빠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하거나, 직장에서 퇴출당하거나 은행에 압류를 당해 파산한 경우, 자신이 사는 집, 또는 비어있는 집에 무단으로 거주하면서 집주인 또는 은행에 집세를 내지 않고 사는 사람을 지칭한다. 바르셀로나시 산하의 사회복지 단체 UCER(Unidad Contra la Exclusión Residencial)는 이런 사회적 약자 오꾸빠들이 필요로 하는 전기와 수도 그리고 주거를 유지하기 위한 협상을 지원하고 도와주는 단체이다. 2015년에는 2천 6백 6십만 유로의 투자로 591개의 보조금이 주택 개혁을 위해 지급되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이 오꾸빠를 구제해주는 것은 비단 지방정부와 시민단체의 역할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꾸빠는 각종 공과금을 내지 않기 때문에 주거시설에 대한 수리를 요청하는 보험에서도 보장을 받지 못한다. 따라서 오꾸빠를 이웃으로 두고 있는 사람들은 그 집이 고장 나서 자신의 집에 피해를 줘도 자비로 처리해야 한다. 때문에 오꾸빠를 퇴출하지 않고, 이웃으로 같이 살아가는 것은 존경스러운 그 지방 주민 스스로가 그렇게 선택해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이다. 이런 바르셀로나에도 미래에 대한 걱정은 산재해 있다. 차량소음과 공해로부터 보호하고 특정 지역에서 보행자와 자전거 같은 이동수단을 안전하게 장려하고,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슈퍼블록(Super blocks) 구역을 지정했지만, 일부 시민의 반대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이런 경우, 사회적 합의를 위해서 주민의 요구를 충분히 수용하는 시민참여 방법이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의 의견이다.   영국과 같이 ‘시민참여 정책 결정’ 선도 국가는 각종 위원회에 전문가 그룹 안에 인문계 학자를 포함해 자칫 기술 중심의 개발 정책을 경계하고, 인문학적, 철학적 고찰을 통해 전문가 의견을 탄탄하게 구성한 다음 시민참여단의 토론과 합의를 끌어내는 전통을 갖고 있다. 이런 시민참여단의 모습이 최근 우리나라에도 선보였다. 바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그것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슈퍼 블록과 주민반대 현수막   네덜란드에서도 이와 비슷한 임대인 보호 정책이 있다. 암스테르담시 바론(Ger Baron) 최고기술 책임자(CTO)는 그들의 정책이 4차 산업에 접어들면서 시의 복지 정책은 보호(Care)에서 도움(Help)으로 전환하고 있다고 한다.   암스테르담에서도 임차인이 3달 동안 집세를 내지 못하면 쫓겨날 수밖에 없지만, 시에서는 은행과 공동으로 협력해서 임차인이 2달 동안 집세를 못 내면 은행에서 독촉장을 보낼 때, 시에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안내문을 같이 보내어 임차인을 도와줄 수 있다고 한다.    위 사례는 과거 우리가 겪었던, 전 재산인 현금 70만 원을 집세와 공과금으로 놔두고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메모를 남기고 자살한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세상에 빚을 지기 싫다며 꼬박꼬박 공과금을 제때 내왔던 이들에게는 정부가 취약계층을 발굴해 지원하는 제도가 허사가 되었던 아픈 기억이 있다. 그들이 현재의 네덜란드에 살았더라면, 결과가 바뀌었을까? 아니면 미래에는 가능할까?    ‘미래의 복지정책과 해법’ 제4차 산업 시대를 사는 현재의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영국의 Future City Catapult의 프로젝트 중 하나인 북아일랜드 도시 벨파스트 프로젝트에서 어떤 기대를 해볼 만하다.    이 프로젝트에는 구체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개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다만 시에서 사용되는 데이터인 전기, 상수도, 하수도, 일반 이동시간, 직장 이동시간 데이터를 추적해서 세금을 탈루하는 기업을 추적하고 세금을 추징하는 프로젝트다. Future City Catapult의 Belfast 프로젝트 기존데이터는 기업데이터로 여러 개의 센서를 설치해서 모집했고, 시간당 전기량이 아니라 전력공급 가능량을 의미하는 것으로 물과 전기를 5년, 15년 후까지도 얼마가 필요할지를 예측하고 알려줄 수 있으므로 어떤 설비를 만들지 기업과 도시 전략 계획 팀이 결정할 수 있게 하는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상업화를 전제로 구체적으로 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해서 시에 도움을 줄 것인가를 기획한 프로젝트이지만, 그 알고리즘은 개인의 데이터와 공공데이터를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방향만 바꿀 수 있다면, 어려움에 부닥친 위기의 가정을 찾아내는데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먼저, 전기와 상하수도, 가스, 폐기물 등의 데이터는 Catapult에서 사용했던 방식으로 접근하고, 은행의 각종 데이터는 암스테르담시가 협력했던 방식으로 입·출금 내용, 카드사용 내용에 덧붙여서 건강보험 자료인 의료비 지출내용을 포함한다면, 각 가정에서 필요한 에너지 소비량과 가계 예산이 산출되고, 이상 징후가 나타날 경우, 제4차 산업의 데이터 정보에서는 그 가정에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지켜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지방정부의 사회복지 담당자가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게 방문할 수 있을 것이다.   Catapult는 시(City)와 도시 IOT 프로젝트를 향상하고 발전시키고, IOT 플랫폼을 연결해서 기업들이 함께 일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전자부품 연구원, 성남시, 서울특별시가 파트너로 선정되어 있다.   이제 제4차 산업 아래에서 송파 세 모녀와 같이 자신은 어렵지만, 남에게 폐를 끼치기 싫었던, 그래서 더 가슴 아픈 사연의 우리 이웃 이야기를 뉴스에서 접하지 않아도 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   다가올 미래, 우리가 해야 할 일   제4차 산업은 전 세계적인 공감대가 형성되고, 그 실험 무대가 스마트 시티로 귀결되고 있다. 스마트 시티는 인간의 확장인 도구에서 공간을 도구로 사용하는 가시적인 공간실천 모형이 될 것이다. 그 때문에 인간이 이동하고, 생각하며, 교류하는 것 모두가 스마트 시티에 같이 적용되고 운용될 것이다. 그래서 그것의 최종 목적이 살기 좋은 공간, 행복한 공간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산업의 변화와 도시의 변화는 즐거운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부와 권력, 자본의 불균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지리적 불균등 발전이 가속화된다면, 우리의 미래 경쟁자는 기계 속 보이지 않는 가상의 데이터와 싸우는 힘든 전투가 될 것이다.   예전의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에서 예견한 기술발전에 따라서 공산주의가 했던 ‘예술의 정치화’, 파시즘이 했던 ‘예술의 심미화’에 영향을 미치게 한 것과 같이 말이다.   그래서 우선순위에 공간은 희망을 담고 있어야 하며, 공간이 생산한 모든 생산물은 공동의 생산물이 되어야 하고, 최대한 기본 생산을 균등하게 분배받는 것이 앞으로 다가올 4차 산업과 살기 좋은 공간으로서의 스마트 시티가 목표로 전진해야 할 방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종완 / YTN 후원 : 한국언론진흥재단
    2018-01-11
  • Into the sea, Under the sea
    바다 속 첫 경험은 그리 유쾌하지 못했다. 신혼여행에서 처음 해보았던 체험 다이빙은 나에게 아픔이라는 기억만 안겨주었다. 호주 바다의 아름다운 산호가 곳곳이 펼쳐있었지만, 귀의 통증과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의 부자연스러움은 공포로 다가왔다.   강한 모습을 보이고자 포기할 수 없었던 새신랑의 다이빙은 과도한 이퀄라이징(코를 막고 바람을 불어 기압으로 인한 귀막힘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코피를 불러왔고, 지금까지 바다 속은 내가 갈 곳이 아니다 라는 기억만 안겨주었다. 바다 기억을 그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다가가 보지 못한 바다 세계를 조금 더 알고 싶었다. 9월 11일 흥분과 두려움, 두 마음을 안고 속초로 향했다. 입사하고 10여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런 저런 이유로 단 한번 참여하지 못했던 수중 촬영 교육의 기회는 40살이 넘어서야 나에게 다가왔다.   현장에서 보던 반가운 얼굴들, 그리고 지리적 환경으로 이제야 처음 뵙는 타사의 카메라기자 선후배 동료들이 모였다. 동질감.... 카메라라는 매개체로 언제나 따뜻하게 모일 수 있는 우리는 카메라 기자다. 길게 20년, 짧게는 3~4년 그 위험한 현장을 누비며 다녔던 우리들은 바다라는 출입처를 뚫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 그리고 동해의 바다 바람은 곧이어 다가올 두려움을 잊으라는 듯 시원하게 불어왔다. OPEN WATER 과정 5명, 스페셜티 과정 9명, 총 14명의 3박 4일 일정은 짐도 풀기 전에 바로 시작되었다. 도착하자마자 장비를 챙겨 입고 바로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9명의 모습은 나에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나도 바다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무섭다. 두렵다.... 만감이 교차했다. 오픈워터 다섯 명, 잊을 수 없는 동료들이다. 극한의 공포와 생사의 갈림길에서 함께 했던 네 명은 오래오래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이론 수업 후 실내 풀장 교육을 시작으로 3박 4일 일정은 시작되고, 스킨스쿠버는 내 인생에 조심스레 발을 들여놓는다. 처음으로 슈트를 입는다. 가슴을 죄여오는 슈트의 탄력이 내 마음까지 눌러왔다. 산소통을 부착하고 수경을 쓰고 물속으로 뛰어든다. 풀장이지만 역시나 무섭다. 물속에서 산소호흡기 떼고 다시 넣기, 수경 쓰고 벗기, 부력조끼 벗었다가 다시 입기 등 타이트한 교육은 물속의 공포를 떨쳐버리기도 전에 계속 되었다. 수경에 습기는 계속 차고 시야는 흐려진다. 호흡은 가퍼지고 몸은 말을 듣지 않는다. 초짜 다섯 명은 서로를 응원하며 물속에서의 자신감을 조금씩 찾아간다. 다음날, 드디어 가까운 바다로 들어갈 준비를 한다. 수심 3미터.... 고작 3미터는 30미터 같은 깊이로 느껴진다. 어깨를 눌러오는 산소통의 무게와 걸음을 걸을 수 없게 만드는 오리발은 더욱 공포를 가중시킨다. 과연 할 수 있을까? 다섯 명의 얼굴엔 초조함이 느껴진다. 드디어 다이빙.... 바다 속 설치된 줄을 따라 교육 위치로 이동한다. 엄마 손을 놓지 못하는 어린 아기처럼 그 끈을 놓을 수 가 없다. 약 한 시간 동안 바다 속에서 머물렀다. 이퀄라이징도 되는 듯 하고, 수경에 차는 습기도 제거할 수 있고, 몸도 왠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있을 듯하다. 이제 다이버가 된 듯 한 착각을 잠시나마 하게 된다. 다음날 닥쳐올 일은 예상하지 못한 채.....   몸은 녹초가 되었다! 즐겁게 저녁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오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맥주 한 캔으로 긴장을 달래고 훈련소 훈련병 마냥 깊은 잠속으로 빠져든다. 다음날 드디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다. 30여분의 항해가 왜 이리 긴지...... 약간의 멀미도 동반한다. 전날 바다 훈련만큼 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은 도착하고 입수하자 무너진다. 첨벙~~ 발밑에 아무것도 안 보인다. 부력조끼에 바람을 빼니 몸은 가라앉는다. 귀가 아프다. 지금까지의 통증과는 차원이 다르다. 시야도 안 보인다. 멘붕이다. 올라가고 싶다. 들어 간지 1분도 안 돼 패닉 상태다. 극심한 고통에 이퀄라이징을 하니 약간 귀가 편안해진다. 그래 일단 강사 쌤을 따라 들어가 보자....  몸이 말을 안 듣는다. 바람을 빼면 쭉 가라앉고, 조금만 바람을 넣으면 몸이 훅 떠오른다. 게이지 체크를 하니 수심 10m가 넘었다. 올라가려면 5m 안전 정지도 해야 하는데....  배운 것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잡을 것이 없어 바다 속 바위를 손으로 만진다. 뭔지 모르지만 날카롭다. 손이 따끔하다. 정신없는 첫 바다 체험은 끝났다. 첫 화생방을 끝내고 나온 이등병 마냥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래도 무사히 귀환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몸은 만신창지만 성취감을 느낀다. 이렇게 스킨스쿠버가 힘들 줄이야....... 이렇게 무서울 줄이야.... 점심을 먹고 오후 마지막 다이빙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오픈워터 수강생의 의견이 갈린다. 오픈워터 교육생들 모두 정신은 안드로메다로 떠나버렸다. 그래도 우리는 포기를 모르는 전우! 다 함께 다시 바다 속으로 뛰어 들기도 했다. 스페셜티 과정생 모두와 함께 마지막 다이빙에 나선다. (가수 하림씨도 동참)   이번 교육의 마지막 다이빙, 아직까지 바다 공포는 없애지 못했다. 마지막 다이빙에서 결판나리라. 장비를 챙기고 교육생 전부 배에 오른다. 역시나 스페셜티 과정 전우들은 여유가 넘친다. 멋.... 있....다.....  우리 오픈워터 과정의 듬듬한 지킴이자 리더 이병주 선배가 있기에 여기까지 왔다. 그 사람이 멋있게 보이다니.... 저 여유, 저 아우라.... ㅋㅋ 오래 살고 볼일이다.   배를 타고 맨해튼 포인트에 도착. 하나 둘 멋지게 점프한다. 나도 점프~~~~ MBC 구본원 기자의 조언대로 들어가는 동시에 이퀄라이징을 하면서 입수하니 오전 같은 고통은 느끼지 못했다. 몸의 부자연스러움은 어쩔 수 없지만 바다 속 광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바다 속에서 플랜카드를 펴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그 사진의 일원이 될 수 있다니 뿌듯하기만 하다. 그리고 공정방송 투쟁을 외친다! MBC, KBS 모두 무사히 적폐를 몰아내고 무사히 파업 복귀하기를 다함께 빌어본다.   조교를 졸졸 따라 바다 속 체험을 시작했다. 아름답다. 동남아의 푸른 바다는 아니더라도 처음 느껴보는 바다의 신비에 빠져든다. 깊이 20m를 찍어본다. 뿌듯하기 그지없다. 정신없이 헤매다 보니.... 어느 덧 나 혼자 있다. 다들 어디 갔지? 산소통 게이지를 보니 50바가 남았다. 70바에는 올라갈 준비를 해야 하는데 이를 어쩐다. 당황스럽다. 그래도 동공을 확대하고 주변을 스캔, 여유로워 보이는 누군가에게 다가가 나의 산소통 게이지를 보여줬다. 그 다이버를 따라 5m 안전정지를 하고 상승... 배에 오르니 산소통 게이지 0!!! 큰일 날 뻔 했다. 제대로 사고 칠 수 있을 뻔 한 순간이었다. 다시 한 번 그 듬직했던 다이버 SBS 김승태 군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렇게 모든 교육은 끝났다. 이제야 바다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다. 마지막 다이빙으로 막연했던 두려움을 날릴 수 있었다. 나에게 공포를 주었던 호주 바다여 기다려라!! open water diver가 제대로 즐겨 주리라....   끝으로 투쟁 중에 참가하신 KBS 김수용, 고명기 선배, 역시나 힘든 투쟁을 또 하고 있는 MBC 김경락, 그리고 듬직한 SBS 최대웅! open water 과정을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조성진 / OBS 
    2018-01-10
  • 영상 부문 콘트롤타워 재건... '기본'으로 돌아가 공정하게 보여줄 것
    홍우석 MBC 뉴스콘텐츠 센터장 지난 7일 최승호 신임 사장 선임을 신호탄으로 MBC가 조직 재건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공정방송 회복, 프로그램 제작 지원 강화, 조직 슬림화, 뉴미디어 디지털 사업 강화를 목표로 조직 개편도 단행한 상태다. 특히 MBC는 공정방송 회복을 위한 방안으로 보도본부 안에 뉴스콘텐츠 센터를 신설했다. 뉴스콘텐츠센터는 2012년 해체한 영상취재부의 기능과,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영상 영상 자료의 운용을  담당하게 된다. 뉴스콘텐츠센터는 과연 지난 5년의 세월을 딛고 새로운 'MBC호'에 걸맞은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까? 영상 취재 부문의 콘트롤타워를 책임질 홍우석 뉴스콘텐츠센터장을 지난 22일 서울 상암동 MBC 보도국에서 만났다. 지난 2012년 여름 보도국 영상취재부가 해체된 지 5년 만에 영상취재 부문의 조직이 원상화되었다. 감회가 남다를 텐데 소감이 어떤가. '김장겸 시대'로  돌아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복원'이 아니라 '재건'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동안 워낙 사적, 개인적으로 운용되면서 조직이 해체된 상태였기 때문에 소회는 기쁘다기보다는 허탈하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고 조직도 생겼으니 어떻게해서든 정상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이다. ‘영상 부문’이라고 하면 취재 시스템, 장비 관리, 영상 자료 활용까지 한 곳으로 통합해 관리해야 하는데, 이번 조직개편에서는 이 부분까지는 이뤄지지 않았다. 보도제작국에 시사영상부가 따로 있는데, 자료나 인력, 장비 등이 통합 운영돼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시사영상부와 합해 보도본부 안에서 운영할 수 있도록 만들어 가야 한다. 옛 체제로 복원된 것은 맞는데 영상 부문이 완전히 통합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 조직의 필요성을 입증하고, 통합 운영을 위해 조직을 확대하는 게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줘야 할 것 같다.   5년 만에 조직을 추슬러야 하는 상황이라 어려움이 많을 것 같다.   콘트롤타워 부재의 가장 큰 문제는 미래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뉴미디어 시대에 대한 장비와 인력이 전해 준비돼 있지 않다. 현재 상태를 유지하기는커녕 미래 계획도 세우지 못하니 경쟁력에서도 뒤처지는 게 당연하다. 특히 인력 구조가 심각하게 왜곡됐다. 2011년 이후 영상 취재 쪽에서만 18명의 인원이 퇴직 등의 이유로 감소했는데,  (정규직) 신규 채용이 전혀 없었다. 이 빈 자리에 공채가 아닌 방법으로 대체 인력이 들어왔다. 이들은 영상 기자의 일 가운데 특정 부문, 예를 들어 뉴스 가치를 판단하지 않고 상부의 지시대로 개더링을 주로 한다. 왜곡된 인력 구조를 바로잡기 위해 내년 초 신입과 경력 기자를 적극 채용할 예정이다. 장비도 큰 문제다. 단순 유지보수만 해서 노후화돼 있다. 신기술 장비는 전혀 없고, 이에 대한 장기 계획도, 교육도, 투자도 없었다. 새로운 환경에 맞게 장비를 구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영상취재·편집’이 아니라 ‘뉴스콘텐츠센터’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는 기존 보도영상 취재·편집 부문의 콘트롤타워 기능에서 역할이 더 확장된 의미로 보이는데, 뉴스콘텐츠센터의 업무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해 달라.     뉴스콘텐츠센터는 뉴스콘텐츠취재1부, 뉴스콘텐츠취재2부, 뉴스콘텐츠편집부 등 3개 부서로 이뤄져 있고, 뉴스콘텐츠취재2부에는 디지털뉴스팀이, 뉴스콘텐츠편집부에는 디지털아카이브팀이 있다. 일단 부문 이름을 ‘영상취재·편집’이 아니라 ‘뉴스콘텐츠센터’로 바꾼 만큼 기존의 스트레이트 영상 취재와 편집 업무는 물론  ‘영상 자료를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재사용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과 해답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다. 단순히 뉴스 중심의 리포트를 포장하는 게 아니라, 뉴미디어 환경에 맞게 재가공해 ‘원 소스 멀티 유즈(One-Source Multi-Use)’를 통해 영상 자료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것도 우리의 업무 가운데 하나다. 영상취재부가 현장성을 강조한 의미가 컸다면, 지금은 보도 영상 측면에서 기획, 취재, 현장에서의 영상 취재, 포스트 프로덕션, 영상 자산에 대한 관리·운영 등 보도 영상 전체를 책임지는 센터라고 보면 된다.   현재 보도영상 콘텐츠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있고, 파급 효과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 지난 몇 년 동안 MBC 뉴스에 대한 신뢰도는 크게 떨어졌다. 이에 대한 내부의 진단은 어떻고, 신뢰 회복을 위한 방안으로는 무엇이 있는지?   자기가 일하는 방송사의 뉴스를 보지 않을 정도로 조직이 망가져 있었기 때문에 영상 부문뿐만 아니라 뉴스 시스템 전체를 복원하는 게 가장 큰 과제라고 본다. 뉴스가 제대로 정상화되려면 우리 부문 역시 경쟁력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의 가장 큰 원칙은 그동안 왜곡한 것들, 저널리즘 측면에서 보지 않고 화려하기만 한 포장지 역할을 했거나, 보도와 맞지 않는 취재나 편집을 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기본’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지난 5년을 돌아보면, 왜곡된 보도 영상들이 있었다. 이것은 참과 거짓이라는 가치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사적 이익에 따라 재가공해 왜곡하고 악용한 ‘범죄 행위’라고 본다. 앞으로는 우리가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니라, 시청자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을 가장 공정하게, 제대로 보여줄 것이다.   조직 개편 이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영상 부문을 담당하는 부서가 없을 때는 지시에 의한 수동적 움직임이 많았고, 의욕을 잃고 자괴감도 컸다. 그런데 센터가 생긴 이후로 영상 구성 아이템을 내는 등 자발적으로 적극 나서고 있다. 제천 화재 참사를 보더라도, 취약 시간대에 발생한 데다  지역MBC들이 아직 제작거부 상태라 네트워크 구성이 안 돼 있어 제보 영상이 가장 중요했는데, 구성원들이 스스로 자기 일이라고 생각해 온갖 네트워크를 동원해 영상 자료를 확보했다.   뉴스콘텐츠센터장으로서 앞으로 MBC와 지역MBC 간에 네트워크 회복도 중요해 보이는데, 이를 위한 복안이 있다면?   MBC는 본사-계열사 구조인데, 네트워크의 힘이 가장 강했다. 그런데 컨트럴타워가 없으니 네트워크가 다 끊겼고, 근근이 유지되는 것이라는 게 파업 와중에 집회 장소에서 얼굴을 마주치는 정도였다. 이걸 다시 조직해야 하는 상황인데, 내부가 어느 정도 추슬러지면, 보직자 위주로 광역별로 간담회도 하고, 계열사 영상 책임자 회의를 정례화하고, 전체를 아울러서 네트워크의 힘을 키울 회의나 세미나 등도 진행할 계획이다. 안경숙 기자
    2018-01-10
  • 다가오는 '본격' 지방자치시대 지역방송사, 무엇부터 준비해야 하나?
    문재인 정부는 지방자치의 활성화를 위해 ‘연방제’ 수준으로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실제로 정부내 이를 실현시킬 구체적 법과 제도를 강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정부의 의존도를 낮추고 지방의 균형발전을 위한 문재인 대통령의 의지는 확고하다.   지방정부에 그 권한이 많아지면 지역방송사의 역할도 비례하여 강화될 것이다. 문제는 현재의 지역방송사들의 제작인력, 제작방식으로는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를 준비하는데 한계와 심각한 문제점을 노출시키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지역방송사는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지방자치단체에서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홍보영상에 의존하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이것이 일종의 관행으로 정착하여 방송윤리강령에 위배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심각한 도덕적 불감증에 빠져있다는 사실조차도 무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역 방송사의 카메라 기자들은 “매일 3~4 꼭지 중 그날 발생된 뉴스가 적어도 2~3개일 경우 최소 한 명의 카메라 기자가 오전과 오후를 할애해 커버해야 하는 분량을 인력 운용의 효율성이란 이유로 시⋅군에서 촬영한 영상을 제공받아 방송되고 있는 실정이다”라고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는 전했다.   이런 현상은 단순히 지역방송사가 지자체로부터 영상자료를 의존하는 것에 그치지않고 병원, 대학교 등 주요 취재처로부터 제공받은 영상으로 뉴스나 다큐 프로그램에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방송제작 인력이 부족할 경우, 필요한 영상을 제공받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왜 심각한 문제가 있는지, 그 대안은 무엇인지 정리하려 한다.   가장 큰 문제는 방송법이 강제하는 공정방송, 자율방송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객관성과 공정성 부분을 보면 분명히 명시돼있다. 심의규정 제9조 1항은 “방송은 진실을 왜곡하지 아니하고 객관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제2항은 “방송은 사회적 쟁점이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된 사안을 다룰 때에는 공정성과 균형성을 유지하여야 하고 관련 당사자의 의견을 균형 있게 다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방송은 중앙, 지방 할 것 없이 ‘공정성과 균형성, 객관성’을 강조하며 출입처가 제공하는 영상이나 자료를 일방적으로 수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자체 제작하지 않고 특정 부처에서 제공하는 영상물은 공정성과 객관성을 담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방송의 생명은 공정성인 만큼 이 정도의 규정에도 부족하다고 판단해서 아예 지자체나 주요 출입처의 영상자료를 그대로 활용하는 것을 못하도록 직접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방송심의규정 공정성 제1조 제4항에는 “방송은 당해 사업자 또는 그 종사자가 직접적으로 이해당사자가 되는 사안에 대하여 일방의 주장을 전달함으로서 시청자를 오도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하고 있다.   지자체 등 주요 출입처에서 제작한 사진 등 동영상물을 전달받아 뉴스에 활용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방송사라면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다. 취재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시골 군지역까지 가서 취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영상자료를 제공받는 것은 이처럼 방송의 자율성과 공정성을 심대하게 위배될 원천적 문제를 안고 있다.   또한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방송사들이 취재처에서 제공받은 영상물에 대해 ‘출처명시’를 분명히 하지 않아 시청자들이 혼란에 빠진다는 점이다. 중앙방송사들조차 자체 촬영한 영상물인지, CNN 제공 화면인지, 미국 국방성에서 제공한 홍보영상물인지 출처를 명기하지 않아 시청자를 혼란에 빠트린다.   이는 시청자에 대한 정직한 서비스를 하지 않는 것으로 방송사들은 여론을 왜곡시킬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역시 방송심의규정은 금지하고 있다. 방송심의규정 제2절 객관성 부분, 제15조 제1항과 제2항, 출처명시에는 아래와 같이 규정하고 있다.   “제1항 방송은 직접 취재하지 않은 사실 또는 다른 매체의 보도를 인용하거나 자료를 사용할 때에는 그 출처를 명시하여야 한다. 제2항 방송은 보도내용의 설명을 위하여 보관 자료를 사용할 때에는 보관 자료임을 명시하여야 한다. 다만 시청자가 보관 자료임을 일반적으로 알 수 있는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   이렇게까지 출처를 명시하도록 밝히라는 주문은 방송서비스의 객관성과 정직성을 담보하여 국민에 대한 정확한 서비스를 하여 여론왜곡이나 진실호도를 원천적으로 배제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방송제작정신은 특히 영상물을 외부로부터 전달받아 사용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규정이 되고 있다.   전 세계 공영방송의 교과서로 불리는 BBC 역시 방송윤리강령과 BBC 프로듀서 가이드라인 등을 통해 영상제작의 객관성과 불편부당성, 정직한 서비스를 강조하고 있다. 지자체 등 주요 출입처의 영상물 제공과 같은 일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않고 있다. 대신, BBC 방송가이드 라인 불편부당성(Impartiality) 분야 ‘사실, 허구의 표시’ 조항을 보면,  “시청자의 드라마 성격을 알려주기 위해 안내고지, 예고편, 홍보자료를 이용할 때는 특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사실과 허구가 중첩될 때 그것을 잘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것은 ‘홍보자료’ ‘외부에서 제공하는 영상자료’ 등을 활용할 때 시청자가 오판을 하지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한국의 방송윤리강령이나 방송법 등에서도 이런 기본적인 규정과 요구가 존재한다. 다만 그 차이점은 선진국은 그런 윤리강령을 제작에 직접 활용하는데 반해 한국은 외부에 보여 주기식으로 선언적 의미에 그치고 제작에서는 제작비, 취재비를 절감하고 서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더 분명한 차이점은 영국에서 방송윤리강령 등 자율규정을 지키지 않아 법적인 문제로 비화될 경우, 혹독한 댓가를 치루게 된다는 점이다. 강력한 타율규제라는 법이 자율 규정을 뒷받침하는 모양새다. 한국은 자율규정 쯤은 지키지 않아도 현실적으로 별 문제가 없다. 이를 규제하는 방송통신위원회,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실질적으로 유명무실하여 존재감이 없기 때문이다.   국내 방송의 편파성, 불공정성, 불법성 등 방송제작의 독립과 자율성을 심의하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그동안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 실질적으로는 현재와 같은 문제를 키웠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대안은 매우 간단하다. 방송통신심의원회가 방송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고 국민에게 정직한 방송서비스를 하도록 규정을 적용하면 된다. 방송통신 심의 규정을 지키지 않아도 별 문제를 삼지 않을 때는 지금처럼 지자체나 출입처에 의존하게 되는 유혹에 빠지는 법이다.   그 전 단계에서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 등이 선제적으로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송제작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대비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방송같은 언론은 타율규제보다 자율규제에 맡기는 것이 선진국의 공통된 특징이다.   따라서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지역방송사의 자율성과 독립성, 그 품격과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라도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 같은 직능단체들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방송제작 가이드라인과 방송윤리강령 등을 논의, 강화하는 일이 급선무다.   정보화 사회의 부작용으로 가짜뉴스, 유사뉴스가 범람하고 있다. 간접광고조차 현실화되는 상황에서 진실과 허위, 정보와 홍보가 혼재하고 있다. 이를 가려주고 감시해야 할 지역의 방송사들이 인력부족, 예산부족이란 이유로 주어진 권한과 책임을 소홀히 한다는 것은 방송종사자의 책무를 유기하는 것이다.   방송통신위원회가 나서기 전에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 등이 먼저 나서야 하고 이 보다 더 먼저 심각성을 인지해야 하는 곳은 방송 종사자 개개인이다. 이들의 목소리가 모여 각방송사 자체 윤리강령을 만들고 그것이 모여 방송영상물 제작가이드 라인과 윤리강령이 만들어지는 것이 순리가 될 것이다.    김창룡 / 인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2018-01-10
  • 방송환경의 변화에 영상기자들의 변화
    방송사 입사하기 전에 방송사 취업을 준비하느라 어려움이 많았다. 대학에서는 방송과 다른 학과를 전공했고 주위에 관련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없어서 입사준비를 하긴 쉽지 않았다. 당시 입사 시험에 참고할 자료가 부족해서 그나마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현장 기자가 발로 쓴 영상저널리즘’의 책을 여러 번 읽었다. 또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에서 발간된 ‘미디어아이’ 협회보는 현장 기자들의 현안과 고민이 실린 내용이어서 당시 취업 준비생이었던 나에게 좋은 자료였다. 그래서 나는 시험 전에 3년 동안의 신문 내용을 복사해서 읽었다.   최근 급변하는 방송환경으로 변화하는 방송콘텐츠를 협회보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도전과 과제를 남기고 있다. 신생종편사와 포털, SNS, OTT(넷플릭스) 등 새로운 경쟁상대가 등장하고 있다. 또 정보기술의 발전 속에 더 강한 경쟁자도 몰려오고 있다. 각 사별로 체감하는 바는 다르고 대응도 다르겠지만 앞으로 다가올 변화의 충격과 파급력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변하는 환경 속에서 나도 뭔가 해야지 하면서도 어쩐지 제자리를 맴도는 느낌에 답답함을 느끼곤 한다.   이런 변화의 와중에 금년 4월27일 협회보(제106호)에 실린  SBS 심석태 뉴미디어 국장의 인터뷰 ‘영상에 스토리 붙이고 내레이션도....취재기자와의 경계 흐려질 것’ 이란 인터뷰 기사는 파급적인 방송환경의 변화를 말해 주고 있다. 뉴미디어적인 변화에 취재기자와 영상기자의 두 직종이 흐려지면서 새로운 직종이 탄생할 수도 있고 재미있는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해 줬다. 바로 비디오머그에서 보여준 SBS 영상기자의 활약은 디지털 분야에서도 영상기자의 한계가 없음을 보여줬다. SBS 활동을 벤치마크 삼아 타사도 심기일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금년 초 KBS 영상취재부에서 SNS 담당을 맡게 된 나에게도 큰 힘이 되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메마른 땅에 내리는 단비 같은 소식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이런 고민은 항상 협회보에서 논의되어 왔다.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멀티기자가 되어야 한다.” 지난 시절 선배들의 고민이 후배들에게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HD도입, NPS도입, 드론, VR등 세부적인 아이템은 계속 바뀌었지만 영상기자의 미래를 대비하고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협회의 역할은 계속되고 있다.   회사 내에서 인력도 자원도 넉넉지 않은 지금 각 회원사 별로 각개전투를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변화의 물결이 몰아치는 지금, 카메라기자가 방송환경에 대처해야하는 지혜가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하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카메라기자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서로의 실력을 키워 나가기 위해서는 협회가 네트워크 허부로써 중심이 되어 새로운 방송환경의 변화에 잘 대응 해주기를 바란다. KBS / 고형석  
    2018-01-10
  • 일곱 번의 연기 끝에 성사된 '조용필 평양공연'
    “조용필 선생을 불러주시오!” 무더위가 한창이던 2004년 7월 16일 오후, 중국 상하이에 연수 중 이었던 나는 베이징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김 참사의 전화였다. 그가 힘이 센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가왕(歌王) 조용필을 불러 달라니, 일단 그의 정확한 지위와 제안의 진정성에 대한 확인이 필요했다. 조용필 당시 평양공연 남북교류에서는 남북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비밀주의가 횡행한다. '최고지도자의 측근이다', '권력핵심부와 바로 통하는 사람이다', '군부실세와 친하다' 등 도무지 검증할 수 없는 말들이 진실여부와 상관없이 효력을 발휘하고, 정체불명의 브로커들이 활동한다. 이럴 경우 확인방법은 두 가지이다. 일단 그가 북한 노동당의 대남사업기관인 <통일전선부> 즉 통전부 소속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통전부 소속원은 보통 외부활동을 할 때에 <민족화해협의회> 혹은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협회> 소속이라고 밝히므로, 이 두 기관 사람이면 신뢰할 수 있다. 또 하나는 뻥을 치느냐 아니냐를 보고 확인한다. 북한의 기관원들은 할 수 없는 일은 애매하게 대답하지만, 할 수 있는 일도 애매하게 대답한다. 모든 의사결정이 한 사람으로 집중된 북한사회에서 어느 누구도 확언을 해 줄 수 없다. 잘못 입을 놀렸다가는 언제 설화(舌禍)를 입을지 알 수 없다. 진짜 북한사람은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일하기보다는 가능한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가능한 소극적으로 일한다. 따라서 큰 소리를 친다면 사기꾼일 가능성이 크다. 베이징과 서울에서 알려진 바로는 그가 혁명원로의 자제라는 것이었다. 최고학부인 김일성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고, 적어도 외국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몇 안 되는 북한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사무실에 가서 확인해본 결과 그의 주요사업은 무역업이었다. 그래서 김정일 위원장의 개인자금을 관리하는 <39호실> 소속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소속이 어디든, 중요한 것은 그가 조용필 공연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지였다. 나는 확인된 내용을 정리해서 서울 본사로 보고했다.   팬이 있는 곳이라면 가수는 달려가야지! SBS에서는 그와 협상을 계속하라는 답이 왔다. 김 참사는 지방공연도 가능하다면서 늦어도 9월 안에는 공연이 열리도록 해보자고 적극성을 보였다. 당사자의 의사가 중요했다. 나는 서둘러 서울로 돌아가 이남기 제작본부장과 조용필을 만나러 갔다. 이남기 본부장은 조용필과 직접 통하는 몇 안 되는 방송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조용필의 집은 방배동 서래마을의 고급빌라 3층이었는데, 저녁 시간이었지만 집 앞에는 소녀복장을 한 아주머니 세 사람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차를 보자 조용필로 착각하고 달려왔다가 이내 실망하며 돌아갔다. 그들의 손에는 여러 날 접었을 종이학을 가득 담은 바구니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아직도 인기가 이 정도인데 조용필이 굳이 고생스럽게 평양까지 가서 공연을 할 필요성을 느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준비를 하는 스태프들의 방문이 잦기 때문인지 조용필의 거실은 사랑방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작곡 작업을 위해 노트북 컴퓨터에 연결된 스피커, 두툼한 악보뭉치, 그의 오랜 손 떼가 묻은 듯한 기타, 십 수 년 간 모아 둔 트로피는 대중예술사에 기록된 그의 위상과 무게를 느끼게 했다. “조용필 씨, 평양 공연 한 번 가 봅시다.” “내가 지금까지 북한 공연을 제안 받은 것은 한 서너 번 됩니다. 어떤 때는 반 협박성 제안을 받기도 했고…. 그러나 평양 공연이 과연 가능하기나 하겠어요?” “조용필 선생님이 평양에 꽤 알려진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나는 남북한 관계의 불안정성 때문에 우여곡절은 있겠지만 북한 최고위층의 재가를 받아서 추진하는 사업이 분명하므로 실현 가능성이 크다고 설득했다. 조용필은 즉답을 피하고 술잔 내려놓은 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짧은 정적을 이남기 본부장이 깨뜨렸다. “가수는 팬이 있는 곳에 가야 할 의무가 있는 것 아닌가요?” 조용필은 갈등하는 듯 보였다.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이미 새벽 1시 반이 넘어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일단 공연제작진 구성부터 서둘렀다. 그리고 개성을 통한 육로방북을 추진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를 대비해 일단 항공사, 해운회사와 접촉했다. 과거 계약서를 기초로 가계약서 문안도 준비했다. 공연 일자는 여유 있게 추석 때인 9월 말로 잡았지만, 시간이 빠듯할 경우에는 10월 초도 고려해 보자고 김 참사에게 통보했다. 조용필을 만난 지 사흘이 지난 날, 이남기 본부장으로부터 급하게 호출이 왔다. 조용필의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조용필이 운영하는 YPC(YOUNG PIL CHO의 약자) 프로덕션의 김일태 사장도 동석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양은 못 가겠습니다. 나는 가수입니다. 대중가수인 내가 정치적인 논란에 휘말리는 건 큰 부담입니다. 게다가 남북한 관계가 좋을 때라면 한 번 시도해 볼 수도 있지만 남북관계도 최악 상황이라는데, 하필이면 내가 이럴 때 꼭 가야 됩니까?” “조용필 선생님은 이제 개인 조용필이 아니라 공인(公人) 조용필입니다. 공인은 공인으로서의 역사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남북으로 갈려 싸우고 있을 때, 공인인 조용필이 나서서 그 어려움을 타개할 역사적인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남북관계가 좋을 때 한가롭게 북한을 방문하는 것은 국민가수 조용필이 아닙니다.” 작곡용 노트북 자판을 가볍게 톡톡 치던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노트북을 닫더니 말문을 열었다. “좋습니다. 평양 공연 한 번 가봅시다. 그리고 이왕이면 북한의 지방 순회공연도 한 번 해봅시다.” 나는 곧바로 조용필 옆에 앉아 결정을 기다리고 있던 김일태 사장과 공연 일자를 상의했다. 당시 진행되고 있던 전국투어 ‘2004Pil&Peace’의 일정을 고려하면 예정대로 9월 20일 경이나 10월 초가 좋다고 했다. 이제 북한과의 일정 조정만 남았다.   수송 차량 36대 조용필이 결심을 한 이상 이제 장비수송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전의 다른 공연과 조용필 공연의 가장 큰 차이점은 평양까지 무대장비를 운송하는 일이었다. 2003년 10월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기념공연’ 때도 평양까지 무대장비를 운송했지만 그때는 육로를 통해서 인원과 장비가 모두 들어갔기 때문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육로 개방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다, 장비의 규모도 그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컸다.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조용필 공연 무대의 폭만 170m 정도로, 공연에 소요될 전체 장비를 모두 수송하려면 5톤 트럭 50대가 필요하였다. 이런 물량을 나르는데 필요한 배의 공간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은데다, 전자장비의 경우엔 배에 싣거나 내릴 때 자칫하면 파손이 되므로 특별한 수송 방법이 요구되었다. 다음날 나는 인천과 북한의 남포를 오가며 화물을 실어 나르는 ‘트랜스포춘’호에 출항일정과 화물 선적을 문의했다. 화물차 50대 분량이면 컨테이너가 25개 소요되는데, 인천-남포 왕복일 경우 총비용이 1억 원 넘게 들었다. 트랜스포춘호 측은 남포항에는 선적장비가 갖춰지지 않아 짐을 싣고 내릴 때 파손될 가능성이 크다고 알려주었다. 조용필 측에서는 정주영체육관의 규모를 고려하여 무대 규모를 줄이고 필수적인 장비만 가져가기로 해 5톤 트럭 26대 분량으로 줄였다. 그러나 방송사의 발전차 5대와 중계차 5대를 추가하니 수송 차량만 36대가 되었다. 공연단과 참관단을 싣고 갈 전세기 확보는 이전에도 경험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북한의 항공기는 150명 탑승에 비용이 8천만 원 정도 들었다. 남한 항공기는 300석 좌석에 비용은 6~7천만 원으로 오히려 적게 들었다. 우리는 남한 항공기를 선택했다. 항공사에서도 이런 역사적 행사에 자사 항공기를 이용하길 바라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나는 진행 상황을 정리해 베이징을 통해 평양으로 팩스를 넣었다.   7번의 연기 베이징의 김 참사는 여유 있게 10월 15일이나 24일로 공연을 열자고 수정 제안을 했다. 10월 17일에 청주공연이 잡혀 있던 조용필 측은 일단 판매된 티켓을 환불하고 10월 15일 공연을 준비하기로 했다. 공연팀은 방북공연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불탔다. 남한의 공연을 평양에서 선 보였을 때 과연 관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 했다. 이제 남한에서 진행되는 모든 공연은 평양공연을 위한 예행연습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매일 준비 상황을 체크했다. 그런데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아직 평양 쪽에서 확답이 오지 않았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9월 25일 이전에 답이 오지 않으면 10월 15일 공연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베이징에 전화를 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는 대답뿐이었다. 김 참사도 답답한 건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9월 24일 연락이 왔다. 그러나 11월로 일정을 또 미뤄야겠다는 내용이었다. 조용필도 각오를 하고 있었는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던 사이 10월 초가 지나갔다. 여전히 평양 측에선 별다른 기별이 없었다. 이러다간 11월 중순 공연도 불가능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조용필은 무한한 인내력을 발휘하며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중간에 선 나는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혹시 밤중에라도 연락이 올까봐 아예 전화기를 끼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던 중 부시 미국대통령이 북한은 ‘악의 축’이라는 발언을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11월 공연도 물 건너갔다. 다시 12월 중순으로 공연이 미루어지다가 결국 해를 넘겼다. 2005년 새해에도 남북관계는 별 진전이 없어 보였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면 남북관계에서 방송은 정치의 종속변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비단 방송뿐이 아니다. 일반적인 문화교류나 경제적인 거래도 늘 정치적 상황에 민감하다. 남한에서는 ‘민간교류를 늘려서 남북관계의 긴장을 해소하고 평화를 정착시키자’고 주장하지만, 북한에서는 ‘정치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민간교류도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이른바 남한의 ‘기능주의’와 북한의 ‘구조주의’의 의견대립이다. 둘 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지만, 당장 짧은 시간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구조주의적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그 사이 1월, 2월, 3월에 각각 한 번씩 만나 4월 공연에 합의를 했지만 또 무산되고 시간이 흘렀다. 봄날이 다 가고 다시 여름이 되었다. 여전히 북한 측으로부터는 소식이 없었다. 우리는 더 이상 타 들어 갈 속마저 남아있지 않았다. 조용필은 오히려 덤덤했다. 6월 30일 드디어 민화협 측으로 부터 팩스가 날아왔다. 공연을 8월 3일과 4일에 개최하자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7월 초 다시 개성 봉동관에서 만났다. 이번 협의는 이전보다 속도를 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준비가 철저히 된 탓이기도 했지만, 양측 모두 이번 기회를 놓치면 기회가 없을 것 같은 절박감 때문이었다. 북한 측은 품위 있는 공연 무대인 봉화예술극장에서 공연을 열자고 제안했다. 체육관에서는 체육을 해야지 공연을 하는 건 사리에 맞지 않다는 논지였다. 개성 봉동관에서 열린 협의  우리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남한 측이 공사한 류경정주영체육관에 대해 북한 측은 보안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따라서 요인들이 공연 참관을 하기에는 안심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봉화예술극장의 무대 폭은 38m로, 조용필이 준비한 ‘2005Pil&Peace’ 공연 무대 170m를 수용하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따라서 우리도 북한 측의 제안을 수용할 수 없었다. 우리는 물자의 육로수송은 양보할 수 있지만 공연 장소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고 버텼다. 북한 측과 협상을 해보면, 협상장에 참석한 북한대표는 자신들의 결정사항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협상이 더 이상 진전되기 어렵다. 양측의 입장이 워낙 첨예하게 대립되어서 회의는 일찍 끝나버렸다. 점심을 먹은 뒤 오후에는 별로 할 얘기가 없어서 서로 술잔만 기울이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봉동관은 비싼 식당이다. 덕분에 북한 식당 봉동관의 매출만 잔뜩 올려주었다. 7월 16일 현대아산 현정은 회장이 금강산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는 보도가 나왔다. 정몽헌 회장 사후 오랜 기간 불편한 관계에 놓여있던 현대아산과 북한 측의 갈등이 봉합되는 자리였다. 현대아산은 북한 측과 백두산 관광에 대해서도 합의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자신이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그 겨울의 찻집’ 등 조용필의 노래를 좋아한다면서, 공연을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어도 좋다는 허락을 했다고 한다(나중에 현정은 회장이 확인해 줬다). 베이징에서 김 참사가 ‘조용필 선생을 불러주시오’라고 말한 지 정확히 1년이 되는 날이었다. 류경정주영체육관 앞에서 기념촬영(오른쪽에서 필자, 조용필, 서득원 촬영감독, 윤성아 작가) 평양에서 다시 협의를 진행하자는 연락이 왔다. 7월 30일, 공연 무대 설비를 담당하는 YPC 측 스태프를 포함한 우리 쪽 인원 10명이 베이징을 통해 평양으로 들어갔다. 순안 비행장 주변 넓은 들에는 뜨거운 햇살에도 아랑곳없이 사람들이 분주히 풀을 뽑고 있었다. 뜨거운 햇살 아래 대동강의 푸른빛이 한층 더 강렬하게 빛났다. 이 도시 한 가운데서 조용필의 노래가 울려 퍼질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뭉클했다. 대동강 가운데 있는 양각도 호텔에서 양 측은 마주 앉았다. 장소 문제가 해결된 뒤라 다른 협의는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공연은 8월 23일 저녁 6시부터 2시간 동안 1회만 갖기로 했다. 지방공연에 대해서는 양측이 모두 부담을 가졌다. 인원은 양측 요구 안의 중간선인 163명으로 최종 확정됐다.  7번의 연기 끝에 최종 합의에 도달했다.   55분 거리 조용필은 경기도 광주의 연습실에서 마지막 연습에 들어갔다. 북한 측은 23곡의 노래 중 적어도 절반은 남북에 다 알려진 계몽기 가요(일제시대 대중가요)나 민요 혹은 북한노래를 불러주기를 요청했다. 조용필은 단호히 거절했다. 평양 관객들이 조용필의 노래를 들으러 오는 것이지 북한가요나 민요를 듣고 싶어서 오는 건 아닐 거라며, 미국가수 마이클 잭슨의 내한공연 때 우리관객들이 ‘그리운 금강산’을 듣고 싶어서 공연장을 찾았겠냐는 논리였다. 북한관객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예술가로서 조용필의 고집은 일리가 있어 보였다. 조용필은 북한관객을 배려해서 북한가요를 단 두 곡만을 부르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서 조용필은 100곡이 넘는 북한가요를 들었다. 그 가운데 인민배우 전혜영이 부른 ‘자장가’와 북한 가극의 삽입곡인 ‘험난한 풍파 넘어 다시 만나네’를 선택했다. 북한 측은 다시 ‘그 겨울의 찻집’과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공연 곡목 안에 꼭 넣어달라고 마지막으로 요청을 해왔다. 이번 요청을 수용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모든 연습과 준비가 끝났다. 8월 18일 오후 2시, 선발대 69명이 먼저 아시아나 전세기를 타고 평양으로 떠났다. 그리고 정확히 55분 뒤인 오후 2시 55분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했다. 서울과 평양의 거리는 결코 멀지가 않았다. (다음호에 계속) 오기현 / 전 한국PD연합회장, 한국PD연합회 통일특위위원장 
    2018-01-10
  •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 창립 30주년
    카메라기자의 권익과 영상 발전을 위해 노력한 30년   지난 11월 7일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가 창립 30주년을 맞이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권력의 탄압과 언론자유를 수호하는데 앞장서 온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1987년 11월 7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TV카메라기자회 창립총회 장면   1981년 칼라 방송이 본격화되면서 TV 뉴스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전국적으로 TV 보급이 확산되면서 역사의 기록자인“카메라기자”의 역할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까지 30여 명에 불과했던 전국의 카메라기자 회원 수는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 대회를 치르면서  1980년대 중반에는 회원 수가 10배 가까이 증가한 300여 명에 이르렀다. 민주화 운동이 뜨거웠던 1987년, 그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1987년 11월 7일, KBS와 MBC의 전국 카메라기자들이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카메라기자의 권익보호와 보도영상의 발전을 위해 “한국TV카메라기자회”(현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 이하 협회)를 창립했다. 한국TV카메라기자회 창립총회에는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 등 4당 대표와 많은 언론사 관계자가 참석했다. 초대회장에 MBC 故김익호 기자, 부회장에는 KBS 강명수 기자가 선출됐으며 회칙과 정관을 만들어 창립 취지문을 채택했다. 故 김익호 초대회장은 수락 연설에서 “KBS와 MBC 양사가 그간 현장에서 맞부딪치며 치열한 경쟁을 벌여왔으나 이제 부터는 합심하여 질적인 향상을 꾀하자”고 말했다. 창립 당시 임원진은 회장 김익호(MBC), 부회장 강명수(KBS), 감사 송행복(KBS), 김광목(MBC), 간사에는 박충 강철원(KBS), 이병구, 정철영(MBC), 홍보위원 민상기(KBS), 이수향(MBC), 운영위원 백승대, 이우승, 김창훈, 임찬식(이상 KBS), 최종걸, 김홍기, 조항민, 양윤모(이상MBC)였다. 창립 회원은 325명으로 KBS가 145명, MBC가 지역 계열사를 포함해 180명이었다.  창립 후 첫 번째 사업으로 <뉴스현장> 회보 발행과 TV뉴스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하고,  TV뉴스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한국방송카메라기자상을 제정했다. 초대 집행부는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1988년 서울올림픽 등 역사적인 현장에서 카메라기자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협회는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외신기자 초청 리셉션을 개최 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카메라기자의 역할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게 했다. 이수향 전 MBC 국장은 현장2호(1988.12.30.발행) 기고를 통해  “자유민주주주의 정착을 위한 자율의 몸부림이 대두되고 있던 시기에 <중략> 우리는 역사의 현장과 사회의 변화를 냉철하게 영상으로 기록하는 현장의 주역으로서 TV카메라기자의 위상 정립에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다.”고 제언했다. 1992년 11월 8일, SBS가 회원사로 참여하여 방송 3사가 협회를 이끌어가게 되었다. 1999년 6월 1일에는 청주방송(CJB)을 시작으로 인천방송(iTV), 전주방송(JTV), 대전방송(TJB) 등 지역민방이 회원사로 가입했으며, 2000년 1월 1일 YTN, MBN이 가입했다. 협회는 1998년 6월 방송직능단체 협의 기구인 한국방송인총연합회 결성에 참여하고,  1999년 방송회관 신축에 따라 현재의 한국방송회관으로 사무처를 이전했다. 소수의 카메라기자들에 의해 첫 발을 내디뎠던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는 3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전국 34개 회원사와 630여 명의 회원이 있는 협회로 발전을 했다. 협회 사업도 초창기 단순 친목단체 모임에서 벗어나 현재는 한국방송카메라기자상과 이달의 카메라기자상 시상을 주관하고 있다. 또 방송보도 관련 정기세미나와 지역 카메라기자 세미나 지원 등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회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카메라기자협회 신문 발행이나 다양한 출판기획 사업 등 학술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회원 재교육 및 연수 등 다양한 교육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협회가 3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나이를 먹을 만큼 영상 저널리즘의 발전과 그 맥을 함께한다. 협회는 다매체 다채널 시대를 맞이하여 방송카메라기자의 역할과 미래의 방향에 대한 문제를 법과 제도적 측면, 더 나아가 정책적 측면에서 풀어나가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협회는 현재 ‘영상보도윤리가이드라인’을 발간하는 작업과 카메라기자의 영상저작물에 대한 권익 보호, 초상권 문제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의 창립 30주년 기념행사는 2018년 2월 22일에 한국방송카메라기자상 시상식과 함께 개최할 예정이다.    이정남 기자
    2018-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