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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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와 권력 Image and Power
    <줌인>    이미지와 권력 Image and Power     유사 이래 이미지와 권력은 밀접한 관계를 가져왔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미지에 재현된 인물의 크기가 사회적 신분에 따라 달라졌고, 서양 중세와 르네상스 역시 아우라나, 구도, 혹은 원근법 등을 통해 이미지의 중심이 되는 곳에 지배적 주체들이 배치되었다. 로마와 비잔틴의 분리를 촉발했던 성상파괴(Iconoclasm) 역시 이미지의 재현과 그 제한에 대한 정치적 투쟁의 성격이 깃들어 있고 이미지 전쟁으로도 불리는 종교개혁과 프랑스혁명에서 사용된 팸플릿, 낙서, 회화 등에도 이미지의 정치적, 사회적 기능에 대한 고민과 다툼들이 녹아 있다. 이미지 생산의 대중화 시대를 열어준 사진은 정치와 이미지를 더욱 긴밀하게 연결해 주었다. 나폴레옹 3세와 링컨, 빅토리아 여왕 등 근대의 정치인들 조차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하기 위해 이미지를 활용했다. 이미지의 사용이 훨씬 빈번해진 현대 정치커뮤니케이션에서 영상과 관련된 또 다른 이슈는 이미지들의 변형과 가공이 훨씬 쉬워졌고 그에 따라 이미지와 영상이 점점 더 회화적인 표현 수단으로 변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2008년 미국 공화당의 미디어 담당관이었던 탄타로스(Andrea Tantaros)는 후보자로 완벽했던 오바마(Obama) 이미지와는 달리, 공화당 후보인 팰린(Palin)은 리터칭을 하지 않은 불완전한 이미지들을 부각하였다며 해당 미디어의 보도가 편향적이란 논평을 냈다. 디지털 시대 이미지는 이제 이미지가 사실인가 아닌가 하는 고전적 논쟁을 넘어 그 자체가 현대 정치마케팅의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커뮤니케이션과 권력관계를 연구하는 카스텔(Castells) 교수는 정부가 유사 이래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통제에 기초해서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때문에 항상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정부는 태생적으로 민감하다고 진단한다. 그의 말처럼 이미지가 정치의 핵심 요소가 된 영상 시대에 각 정부는 이미지의 자유로운 유통에 민감하다. 그리고 이미지의 영향력은 실제적이다. 일례로, 미국 병사들이 테러 용의자들을 장난처럼 고문하는 장면을 SNS에 업로드 한 아브 그라이브(Abu Graib) 수용소 사건 이후에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미국인의 3/4 정도가 전쟁 개입은 잘못되었다는 의견을 보였다. 베트남 전에 의해서 확증되고, 로드니 킹 같은 역사적 사건들이 보여주듯, 이미지는 휘발성이 강하고 정치적 동원력이 있기에 그만큼 권력은 이미지의 생산과 유통에 민감하다. 최근 영상기자들은 현장에서 통제를 받는 경우가 늘고 있다. 출입이 제한된 국제대회나 남북 이벤트뿐 아니라 일상적 취재의 공간에서도 영상기자들은 점점 더 통제되는 상황에 놓이고 있다. 또 이런 추세는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뉴욕대학교 리친(Ritchin)교수는 시리아의 가자지구 등 분쟁지역에서 영상기자들은 어떤 것을 촬영해야 하는지 미리 결정된 동의서에 사인을 해야만 현장접근이 허가되는 상황을 비판했다. 이런 경향은 미디어로 인해 여론이 크게 좌우되던 베트남전 이후 계속되어 온 문제라고 지적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매그넘 출신의 사진기자 필립 존스 그리피스(Philip Johns Griffiths)도 오늘날 현장의 포토저널리즘은 이미 예측 가능한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작업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상황은 언론사들이 선정적 사진들을 구걸하고 만들어서 내보내면서 독자들의 신뢰를 잃어가는 동안, 정부가 언론사를 패스해서 시민과 직접 소통하려는 움직임을 통해 더욱 복잡한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런 경향이 문제가 되는 지점은 이미지가 기억과 정체성, 그리고 사회의 이슈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상상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기억은 불변의 기록(script)이라고 믿고 쉽지만 연구들의 기억은 특히 오래될수록 변형과 왜곡에 취약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영국 워릭대학교는 미국 선거캠페인에서 존 캐리(John Kerry)가 배우 제인폰다(Jane Fonda)와 반전집회에 참가한 가짜 사진을 뉴욕타임즈가 사용했는데, 시간이 지난 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를 실제의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이와 유사하게 2010년 미국 온라인매거진 슬레이트(Slate)는 진짜와 가짜로 뒤섞인 정치적 사건의 사진들을 보여주고 그에 대한 기억을 하는 실험을 했는데, 절반 가까운 독자들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을 실제로 기억했다고 밝혔다. 더 나아간 비슷한 연구들 역시 이미지는 상상력과 기억을 지배하고, 이는 정체성과 소속감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맥락 하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보는가’를 정부가 결정한다는 점은 불편한 지점이다. 최근 기관들이 앞다투어 시행하는 기관 홍보와 뉴미디어 플랫폼을 이용한 직접 소통방식은 정보의 그릇된 전달을 막고 소통의 투명성을 높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프로파간다적인 일방향 커뮤니케이션의 위험한 뒷문 역시 열어 놓는다. 911 이후 미국 부시 정부가 이미지를 통해 존재하지 않았던 대량살상 무기의 시각화와 이슬람의 악마화, 그리고 이와 상반된 부시의 이미지 연출 정치는 결국, 이라크 공격에 대한 건강한 공론의 장을 훼손시켰다는 점에서 권력과 이미지의 올바른 함수관계를 성찰할 기회를 준다. 매일 쏟아지는 이미지는 우리의 인지와 사회적 감성, 그리고 상상력에 큰 영향을 미치고, 집단기억과 정체성으로 연결된다. 국가 권력이 점점 더 많이 행사를 연출하고, 이미지가 어떻게 보이는가를 통제하는 시대는 분쟁적이고 다원적인 의견의 다툼을 생명으로 하는 민주적 원리와도 맞지 않는다. 정치 홍보와 광고 촬영장, 취재 현장, 그리고 현장에서 사실을 구부리는 영상기자, 허구의 영화 장르가 논픽션의 기록물처럼 사용되는 토양, 이미지의 가치를 성찰하지 못하는 미디어 교육 모두가 위험하다. 정부와 언론, 그리고 시민 모두 영상에 대한 올바른 성찰이 필요하다.   김우철 / MBC
    2018-04-26
  • 공정보도와 보도영상조직의 역할
    공정보도와 보도영상조직의 역할   지난 10년간 대한민국의 방송보도는 암흑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KBS와 MBC 두 공영방송이 그러했으며 뉴스전문 채널 YTN은 지금도 투쟁중이다. MBC는 파업 참여에 대한 보복조치로 영상조직이 해체되는 시련을 겪었고 조직이 회복되기까지 5여 년이 걸렸다.   해체의 고난과 복원의 노력을 거쳤던 힘든 시간은 보도 영상조직과 방송저널리즘의 공정성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저널리즘의 가치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미국의 CCJ(Committee of Concerned Journalist)가 정리한 저널리즘의 9가지 원칙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진실추구와 시민에게 충실, 검증, 취재대상으로부터 독립, 권력의 감시자, 공개 토론장 제공, 중요한 이슈에 대한 전달, 포괄적이고 균형 있는 뉴스, 자신의 양심에 따르는 것이다.   방송저널리즘의 경우는 여기에 공적 영역으로서의 방송의 규범인 ‘공익성’,‘다양성’, 등을 반영하여 포괄적으로 표현한 <공정성>의 가치를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방송의 <공정보도>는 매체의 특성상 그 자체가 하나의 개별 프로그램이나 뉴스 콘텐츠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광의의 개념에서 보면 콘텐츠를 기획하고 취재와 구성, 생산, 전달하는 과정을 통칭하는 뉴스제작 과정의 공정한 시스템을 의미한다. 따라서 보도영상에서 <공정성>을 준수한다는 것은 생산된 뉴스콘텐츠의 의미적 공정성뿐 만 아니라 뉴스 제작과정 전반에 걸쳐 보도영상의 저널리즘의 가치가 구현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보도영상은 그 특성상 현장에서 영상취재의 객관적 사실을 기록함에 있어서의 의도의 공정성, 기술적 공정성, 행위의 공정성, 그리고 그것이 영상편집을 거치는 과정의 구성적 공정성을 모두 포함한다. 이러한 면을 고려할 때 현장의 영상기자들에게 가해질 수 있는 공정보도 침해행위는 영상취재의 자율성과 독립성에 대한 부당한 간섭과 편파, 왜곡된 영상에 대한 요구이다. 즉, 부서장이나 취재기자로부터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특정의도에 따른 과장, 축소된 현장의 영상을 요구받는다면 이것은 <공정성>의 침해이다. 영상편집과정에서도 2차적인 보도영상에 대한 공정성 침해행위가 자행될 수 있다. 의도적으로 선택과 배제된 영상을 편파적으로 구성하여 뉴스의 영상메시지를 왜곡시키는 행위가 벌어진다면 보도영상의 <공정성>이 훼손되는 것이다. 만일 보도영상조직이 독립되어 있지 않거나, 외부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면 보도영상의 공정성을 지키기는 어렵다.   MBC의 경우 조직해체이후 영상기자들이 취재부서에 배속되어 취재부서장의 지시를 직접 받아야 하는 비정상적인 상황 속에서 부당한 현장 취재 지시가 빈번하게 자행되었다. 특히 세월호 사건이나 촛불집회같이 정치적 이슈에 대해서 왜곡과 편파에 대한 요구가 매우 심했다.   보도영상조직이 해체되거나 종속되면 영상기자들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상실되고 뉴스생산의 기본조건인 뉴스의 제작시스템이 파괴된다. 사회 불의를 끈기 있게 추적하거나 긴박한 사건사고의 현장에 가장 빨리 달려가는 것이 취재기자와 영상기자가 함께하는 뉴스의 현장이다. 현장에서 취재된 사실(Fact)과 수집된 영상 (Video)에 의미를 부여하여 재구성하는 것이 방송뉴스 생산과정이다. 그런데 현장취재의 한 축인 보도영상조직이 붕괴되면 뉴스 제작 시스템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게 된다. 방송뉴스는 일반 방송프로그램과는 달리 속보적인 속성이 강하다. 당일 일어난 사건을 신속하게 취재하여 의미를 규정하고 현장의 영상과 함께 생동감 있게 재구성하는 것은 고도의 복잡성과 숙련성을 요구한다. 더욱이 뉴스라는 ‘공공재’의 특성상의 과정에 엄밀한 ‘사실 확인’과 엄격한 ‘윤리적 규범’을 준수해야한다. 따라서 제한된 시공간 속에서 뉴스의 신속성, 정확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뉴스제작 과정의 분업과 협업이라는 효율화된 시스템이 필수적이다. 보도영상조직의 붕괴는 취재, 영상, 편집의 전문가 집단이 일사분란하게 각자의 역할을 책임지고 협업하여 뉴스를 생산해내는 기본적인 뉴스제작기능을 불구로 만들어 버리게 된다. 영상기자가 자기의 업무에 책임을 지고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열외 시켜 버리는 것이다.   보도영상조직의 붕괴는 뉴스생산시스템의 붕괴뿐만 아니라 뉴스 생산자가 지켜야할 가장 소중한 규범인 저널리즘의 가치 역시 붕괴시킨다. 뉴스조직은 다른 기업조직과 달리 구성원들이 일반 노동자가 아닌 특별한 지위를 가진 기자들이다. 기자들이 갖는 특수성은 그들이 개별적으로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생산해 내는 뉴스가 일반 공산품이 아닌 뉴스라는 특수한 ‘공익적 의미구성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자들은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 또 윤리적, 기술적으로 ‘저널리즘’ 이라는 뉴스 생산과정의 규범을 준수해야할 의무가 있으며 자신이 생산한 뉴스에 대한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뉴스조직 역시 그 사회의 부분이므로 그 생산과정이 사회와 경제적 속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뉴스생산과정에는 생산의 효율성을 위해 통제하고자 하는 관리자와 독립성과 자율성을 주장하는 현장 기자들 간에 긴장과 갈등이 상존한다. 뉴스의 생산과정은 양자 간의 갈등과 협력 타협을 거치면서 수행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보도영상은 매우 중요하다. 방송뉴스의 특성상 ‘시각적 이미지’의 ‘의미화 과정’은 중요한 저널리즘의 생산과정이고 이 역시 치열한 갈등과 긴장을 통해 완성되는 저널리즘의 활동이다. 보도영상은 그 자체로 사실과 왜곡에 대한 견제와 감시의 저널리즘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보도영상조직의 해체는 단순히 기능적 파괴일 뿐만 아니라 보도영상이 가지고 있는 윤리적 기술적 저널리즘의 역할을 배제시켜버린 것이다. 이는 보도의 공정성, 객관성, 사실성, 공익성 등을 심대하게 침해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렇듯 보도 영상조직의 붕괴는 ‘뉴스생산 시스템의 붕괴’,‘영상 저널리즘가치의 파괴’, ‘방송뉴스의 공정성 몰락’의 연쇄적이고 파괴적인 결과를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방송보도의 공정성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상적인 뉴스 생산시스템이 작동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보도 영상조직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필요하다. 또한 미디어 기술의 혁명적 발달로 인해 영상취재와 편집은 방송뉴스 제작과정 전체를 통합하는 핵심허브의 기능을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영상취재와 편집의 융합과 일원화가 가능한 통합된 보도영상조직이어야 한다. 다양한 영상취재와 편집에 첨단 장비와 기술이 도입되고 있는 시기에 보도영상의 전문가로서 자리매김해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영상기자가 사명감을 갖고 자신의 일에 책임을 질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관리시스템의 영상조직이 있어야 한다. 동시에 공정한 뉴스를 만들기 위해 취재기자들과 건강하게 협력하는 뉴스제작의 협업시스템을 복원하기 위해서라도 서로가 자신의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책임을 지는 독립성과 자율성이 존중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보도영상부문은 공정방송의 초석을 다시 세우는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수조건이다. 잃어버린 방송보도 10년의 암흑기를 극복하고 뉴스시청자들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서 우리 영상기자들은 좋은 뉴스 제대로 된 뉴스조직을 만들어야할 의무와 사명이 있다. 책임지는 보도영상조직 재건을 통해 방송 뉴스정상화와 공정보도 강화에 응답할 때이다. 최경순 / MBC
    2018-04-26
  • 그들은 왜 조용필을 불렀나
    <조용필 평양공연 제작기 3> 그들은 왜 조용필을 불렀나  기립박수  공연시간이 30분 전으로 다가왔다. 무대 뒤 대기 석에서는 최종점검 회의가 열렸다. 수많은 무대에 선 조용필이지만 오늘만은 긴장된 모습이었다. 다 시 한번 순서를 확인하고 가볍게 몸을 푼 조용필이 스태프들에게 외쳤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거야. 화이팅!” 공연 시작 3분 전, 조용필은 불 꺼진 무대에 조용 히 올랐다. 반주자인 그룹‘ 위대한 탄생’과 두 명의 여성 코러스가 양편에 자리를 잡고, 조용필은 가운 데에 섰다. 반투명 커튼 너머로 보이는 관중들의 표 정이 코앞까지 바짝 다가왔다. 실내경기장을 개조 한 급경사의 공연장은 가장 가까운 관객과 무대의 거리가 3m밖에 되지 않았다. 관중의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였다. 무대 위 모든 사람들의 표정은 딱딱 하게 굳어 있었다. 커튼 저편의 사람들도 긴장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관객은 모두 7천여 명. 문화성 소속의 예술인과 통일전선부, 국가보위부 구성원들 이라고 했다. 예술인은 배우, 가수, 대학교원(교수) 등이었다. 실제 유명 공연단의 가수나 영화에 나온 배우들의 모습도 보였다. 공연에 앞서 윤현진 아나 운서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남에서 온 SBS 아나운서, 이곳에서는 방송원이라고 하죠, 윤현진이라고 합 니다. 반갑습니다.”  그러나 박수 소리마저 긴장 속에 파묻혔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드디어 이글거리는 태양을 묘사한 거대한 영상이 무대 뒤에 나타나고, 체육관 구석구 석에 설치한 스피커를 통해 입체음향이 폭발음처 럼 터졌다‘. 태양의 눈’ 영상과 음악이 체육관 전체 를 압도했다.   ‘어두운 도시에는 아픔이 떠 있고, 진실의 눈 속 에는 고통이 있고….’  조용필의 목소리가 조명을 타고 공간을 파고들었 지만 무대 앞의 모습은 변화가 없었다. 이제 관객들 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히트곡‘ 단발머리’와 ‘못 찾겠다 꾀꼬리’가 이어졌다. 빠른 템포로 관객들 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이어서‘ 친구여’의 편안한 리듬으로 긴장을 누그러뜨렸다. 이어 부른 노래는‘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그 겨울의 찻집’. 북 한에서도 잘 알려진 노래로 관객의 호응을 유도하 기 위한 배치였다. 그러나 평양 관객들의 표정은 여 전히 굳어있었다. 관객들의 반응에 조용필과 위대 한 탄생은 당황했다. 거울에 비친 낯선 얼굴을 쳐다 보듯 어색한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조용필의 노래에 이런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있구나.’  무대와 관객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꿈’을 부를 때부터 조심스럽게 따라 하는 관객이 나타났다. 열창을 마친 조용필이 잠시 호흡 을 가다듬는 동안 윤현진 아나운서가 다시 등장해 긴장이 덜 풀린 조용필에게 다가갔다.   “지금 느낌이 어떠세요?”   “지금 느낌이요…. 어렵습니다. 저도 음악 생활을 굉장히 오래 했습니다. 제가 37년을 음악 생활을 했습니다만, 나이가 지금 40이거든요”  소박한 농담이었다. 남한 정서로는 썰렁하기까지 했는데, 관객들 사이에서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 왔다. 이때부터 무대 위나 객석이나 긴장이 완전히 풀렸다. 북한 가요‘ 자장가’를 부를 때는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조용필은 계속 해서 북한 가요‘ 험난한 풍파 넘어 다시 만나리’를 불렀다. 이때 우리 카메라가 객석의 한 젊은 여성에 게 초점을 맞추었다. 그녀의 눈 주위는 곧 불그스레 해졌다. 눈물이 그녀의 분홍빛 한복 위로 떨어졌다. 이윽고 무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손짓은 무대와 교감이 이루어졌다는 신호였다.  이날의 클라이맥스는 가곡‘ 봉선화’였다. 일부러 조용필은 두 옥타브 높은음을 선택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인생의 간난신고(艱難辛苦)가 담긴 듯한 조용필의 깊은 목소리에 관중들은 호흡을 멈춘 듯 무대를 응시했다. 부드러운 목소리의‘ 봉선화’만을 들어왔던 관객들에게 조용필의 봉선화는 하나의 파격이었다.   22번째 곡인‘ 꿈의 아리랑’을 부를 때는 무대와 객석이 완전히 벽을 넘어‘ 정서적 소통’을 하고 있었 다. 나는 화사한 분홍빛 한복을 입은 젊은 여성이 마치 코스모스처럼 맑은 미소로 답하는 모습, 30 대 후반으로 보이는 부부가 행복감에 젖어 즐거워 하는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남쪽에서 온 한 남자 가 수의 독창으로 시작된 공연이 남북이 어우러진 합 창으로 끝맺은 것이다. 커튼이 내려왔지만 관객들 은 어느 한 사람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앞뒤 눈치 를 보던 사람들이 일어나면서 기립박수를 쳤다. 마 지막 앙코르곡은 몇 시간 전에 잠시 연습했던‘ 홀로 아리랑’이었다. 평양 관객들의 호응에 대한 보답이 었다. 조용필은 어떤 노래로도 평양의 관객과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제 무대와 객석은 맞잡은 손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그것은 이번이 마 지막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무언의 다짐이었다.     조용필은 왜 평양관객 앞에 섰나  조용필 공연은 시청률에서도 성공적이었다. 시청 률 조사기관 TNS의 조사에 17.9%의 남한 시청자 가 방송을 본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혁명의 심장부에서 울려 퍼지는 조용필의 목소리를 들었 다. 정확히 말하면 조용필의 노래가 휴전선 이북에 서 미치는 효과를 직접 목격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 론 그 효과는 바로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남한의 수많은 사람들이 조용필의 말대로‘ 음악은 통한다’ 는 것을 신뢰하고‘, 음악의 힘으로 남북한의 정서적 이질감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에 공감했다.  따로 9월 4일 밤 11시‘ SBS 스페셜’ 시간에‘ 조용 필, 평양에서 부르는 꿈의 아리랑’이라는 별도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다. 레이션을 맡은 성우 송 도영 씨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는 긴장감을 유지하 면서도 시청자들의 감성을 적절히 자극했다는 평 가를 받았다. 조용필의 시선이 5.1경기장에 고정되 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다는 팬들의 의견도 있었다.  공연 바로 다음 날 한 인터넷 매체에 비평기사가 실렸다. 대중문화평론가인 모 대학교수는‘ 북한 관 객을 배려하지 않은 조용필의 레퍼토리 때문에 북 한 관객을 사로잡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그러 나 앞서도 밝혔지만, 조용필이 당장 북한 관객의 갈 채를 받기 위해 평양에 간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 하면 장기적인 투자를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사실 가수가 공연장에서 관객의 호응을 얻기란 쉽다. 재 미있는 농담으로 긴장을 푼 뒤 잘 아는 노래로 호 응을 유도하면 된다.  그러나 조용필은 달랐다‘. 자신의 음악세계를 소 개하러’ 그 많은 장비를 들고 평양 땅을 밟은 것이 지‘, 평양 관객을 위문하러’ 간 것은 아니었다. 관객 가운데는 조용필의 노래를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 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조용필은 아는 노래로 평양 관객을 위문하기보다는, 모르는 노래를 통해 문화적인 충격을 주길 원했다. 북한 관객들의 가슴 속에 감추어진 문화적인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문화적 동질성이란 이질감의 확인과 극복 속에서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조용필 공연의 성과는 공 연장에서 당장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평양 관객이 깊은 문화적 충격에서 벗어날 때부터 서서히 나타 날 것이다.   평양 관객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평양 관객이 라면 목소리 좋은 남한 가수가 부르는‘ 북한 노래 를 듣는 공연장’을 선택할까? 아니면 남한 가수가 부르는‘ 남한 노래를 듣는 공연장’을 선택할까? 당 연히 후자라고 생각된다. 평양 관객들은 남한 최고 가수 조용필의 공연에서 조용필의 음악세계와 거 기에 묻어나는 남한의 문화형태를 발견하길 원했 을 것이다. 평양 관객은 이질적인 문화세계를 체험 하러 온 것이지, 남북한 문화의 동질성을 확인하러 오지는 않았다고 믿는다‘. 평양 사람들은 조용필을 통해 남조선을 보고 싶어 합니다’라는 탈북자의 얘 기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들은 왜 조용필을 불렀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조용필공연은 협의가 개시 된 이래 일곱 번이나 연기되는 우여곡절을 거쳐 일 년 하고도 한 달이 더 지난 뒤에야 성사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북한 정세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즉, 이것은 조용필공연이 남북관계의 전반적인 틀 위에서 진행되었으며, 아울러 북한 측은 남북 간의 경색국면을 돌파하는 주요한 사업으로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조용필 평양공연은 정세의 영향을 받 는 종속변수이자 동시에 남북관계의 개선을 위한 주요사업으로 서 독립변수이기도 했던 것이다. 북 한이 남한 가수 조용필의 공연을 요청했던 이유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주변 정황을 볼 때 몇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첫째, 조용필 가요에 대한 최고지도자의 개인적 인 선호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당시 김정일 위원장 이 조용필의 노래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을 표시했 다는 사실은 현대아산 현정은 회장을 통해서도 확 인된다. 또 공연 장소를 직접 결정했다는 점도 이 같은 추론을 뒷받침한다.   둘째, 북한 측이 공연 개최를 대가로 방송사로부 터 받는 비용, 즉 경제적 목적으로 공연을 추진했 을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다. 당시에는 남한 방송 사가 북한에서 방송을 제작할 때는 관행적으로 적 지 않은 대가를 북한에 지불했다. 남북문화교류에 대한 사명감뿐 아니라 방송사끼리의 경쟁의식도 한몫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입장료를 내야 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이런 상식은 남북관계에서는 통 하지 않는다. 그래서‘ 퍼주기’ 논란이 일고, 비용이 과다해 방송교류의 장애요인이 되기도 한다.   세 번째 이유는, 조용필이라는 남한 톱스타의 공 연방식에 대한 학습뿐 아니라 한류의 확산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말부터 중국의 연변지역을 통해서 남한 대중문화가 서서히 북한으로 파고들었다. 북한의 대남 전문부서의 엘리트들은 교류의 필연성을 인 식하면서도 교류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중이었다. 이들은 조용필이라는 걸출한 스타의 공연을 통해 남한 대중예술의 현주소를 체 크하고, 이를 통해 남북문화교류의 파급효과에 대 한 분석과 대응책을 마련했을 것이다.  당시 공연은 초청권이 있는 사람만 관람할 수 있 었는데, 우리 통일부 관계자는 당일 참석자 7천명 중 2천명은 대남부서인 통일전선부 일꾼, 2천명은 국가보위부 일꾼, 3천명은 문화성의 예술인이었다 고 전했다.  북한 측은 나름대로 면역력이 있는 계층 과 고급 예술인들에게 남한 대중예술을 접할 수 있 는 공식적인 통로를 만들어 주고 무대, 조명, 오디 오 장치, 음악적 성향 등의 다양한 예술적 특성을 파악하도록 했다고 생각된다.  북한이 조용필 공연을 유심히 관찰했다는 증거 는 7~8년 뒤에 나타난 모란봉악단의 공연 속에서 확인된다. 모란봉악단의 주요공연은 그들이 처음 에는 공연장소로 부적합하다고 주장했던 류경정 주영체육관에서 개최되며, 그들도 조용필 공연처 럼 LED 백 스크린을 활용한다. 그리고 조용필 공 연 때 처음 선보였던 종이꽃가루를 그들도 공연 피 날레 때 사용한다.  최고지도자의 개인적 요구, 정치적인 목적, 경제 적 이득 등을 염두에 둔 다목적 사업인 것이다. 이 것이 바로‘ 북한식’ 대남교류사업이다. 그런데 여기 에 비해 우리는 너무 단순한 목적으로 접근했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노련한 프로와 순진한 아마 추어의 만남이라는 지적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 리는 우리 식의 교류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 백 명이 넘는 가수, 매니저, 분장사, 의상코디, 연주자, 아나운서, 방송PD, 작가, 카메라맨, 엔지니어, 운전 기사, 행사기획자, 무대디자이너, 무대장비기술자, 특수효과맨, 오디오 전문가, 조명감독, 무대연출자, 방송기자, 카메라기자, 신문기자, 방송사 경영진, 여 야 정치인, 고급 공무원, 의사, 시민 단체 대표, 항 공기 조종사, 승무원 등 정말 여러 직종의 사람들 이 평양 땅을 밟고, 평양 사람들을 만나 짧은 시간 이나마 나름대로‘ 교류의 전도사’로서 역할을 수행 한 것이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시작된 문화공연 교류 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북한 측의 교류목적과 남한 측의 목적이 굳이 같을 필요는 없다.  상대가 있는 사업이라면, 어차피 다양한 구성원이 품은 목적의 식이 꼭 같을 수도 없다. 하물며 반세기 분단 과정 에서 적대적 대결의식만 키워온 남북 간에서야 얼 마나 합치된 이상을 도출할 수 있으랴? 비록 동상 이몽이지만 최대공약수를 도출하려는 성의와 노력 이 중요하고, 이를 통해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폭 이 조금이라도 넓힐 수 있다면 다행일 것이다. 오기현/전 한국PD연합회장, 한국PD연합회 통일특위위원장 
    2018-04-26
  • 제1차 정상회담 취재기 - “우리 민족의 기록입니다”
    <제1차 남북정상회담 취재기> "우리 민족의 기록입니다"    벌써 18년의 세월이 흘렀다. 파인더 속에서 맞잡은 두 손을 추켜올리며 환하게 웃던 남북의 두 정상은 이제 고인이 됐다. 방 한 구석의 상자를 뒤적이며 당시의 기억을 더듬는 기자도 이제는 환갑의 나이. 한참만에야 상자 안에 갇혀 있던 시간을 찾아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첫 만남(2000년 6월 13일 평양순안공항)      만세! 순안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약속대로 취재 포인트를 찾아 움직이던 내 눈에 함성과 함께 붉은 물결이 들어왔다. 순간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나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빨리” “빨리”라는 재촉에 쫓겨 급히 순안공항을 빠져나와야 했다. 방북 후 내가 맡은 첫 취재는 지붕이 뚫린 무개(無蓋)차를 타고 행렬의 선두를 맡는 것이었다. 공항 바깥의 취재 장소에 도착하자, 색색의 조화를 들고 도열해 있는 평양 시민 사이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판문점 취재 때 보았던 북측의 촬영기자다. “형님,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네니, 주변의 상황 때문인지 반가워하면서도 쑥스러운 모습이다. 행렬을 기다리며 마땅히 볼 것이 없던 군중들의 시선은 자연히 우리를 향했고 그들의 추측대로 우리는 그렇게 친근한 형님, 동생 사이가 되었다. 북측의 기자와는 얼굴이 낯익은 정도의 사이였지만 나는 왠지 그들 앞에서 호형호제 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잠시 후 마음의 여유를 찾고 고개를 돌려보니 연도의 북한 주민들은 모두 낯익은 우리의 모습이었다.    본대가 출발했다는 연락이 오고 선두의 무개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일제히 붉은 물결이 출렁인다.    만세! 우렁찬 함성 속에 분단 55년 만에 열린 첫 남북정상회담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평양 시내를 가르고 언덕을 넘어서도 환영 인파는 끝이 없고 함성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남아 있는 몇 장의 사진과 대표단 신분증을 만지작거리니 마치 먼 시간의 일인 양 아득하게 느껴진다.   ▲사진 좌측부터 KBS이희엽, SBS김홍식, YTN조항윤, SBS김영창(필자), KBS전한옥, YTN하성준, MBC김경배, MBC이문로    신문, 방송을 합해 총 50명으로 구성된 방북기자단 중에서 TV 영상취재기자는, 당시 청와대를 출입 중인 KBS, MBC, SBS, YTN에서 각각 2명씩 총 8명이 공동취재단의 이름으로 취재활동을 했다. 남측의 기자단이 머문 숙소는 평양 시내에 위치한 고려호텔이었고 사전에 협의한 대로 송출시설도 호텔 내에 설치했다. 평양 시내의 교통 사정은 차량이 드문드문할 정도로 한산했지만, 최대한 빠른 송출을 위해 취재한 테이프를 수송하고 송출팀을 상황에 따라 바꾸면서 특집방송에 대비하기로 약속을 했다.     일반적으로 대통령 해외순방 취재는 나라별, 일자별, 시간대별로 행사 일정이 사전에 출입기자단에게 배포된다. 그런데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해 방북 전에 기자들에게 통보된 일정은, 평양의 순안공항 도착 때 공항 영접과 본대의 근접, 행렬의 선두 취재 뿐이었다. 모든 건 그때 그때 정부 관계자에게 연락을 받고 1~2시간 전에 동행 출발해, 취재 장소에서 대기를 해야 했다. 방북 전에 상호 간 사전 협의가 있었겠지만 유동적인 상황과 경호 문제 등 보안 유지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취재 테잎은 고려호텔로 도착하는 즉시 편집 없이 원본을 그대로 송출했다. 분단 이후 첫 정상 간의 만남이니 매 순간이 뉴스였고 역사였다. 현장과 송출실을 바삐 오가다 서울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순안공항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두 손을 맞잡는 장면이 들어오자,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 마련된 프레스센터 안의 내⋅외신기자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고 한다. 당시 프레스센터 내에는 기자들을 위해 북에서 보내는 영상을 대형화면으로 볼 수 있게 해놓았다고 들었다.   또 다시 취재를 나갔다 오니 이번에는 송출한 영상이 편집 없이 TV에서 실시간으로 방송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우리는 촬영에서도 NG 컷이 없도록 신경을 썼고, 체제 선전이 우려되는 만수대 창작사 등의 취재는 촬영 분량을 크게 줄였다. 산수화 등을 제외하고는 정치 선전물 일색이니 안내원의 정성과 우호적인 분위기를 감안하더라도 전 국민이 시청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대로 내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한편으로 북이 감추고 싶은 부분 역시 배려를 했다. 당시 고려호텔에서 건너편 아파트를 보면 깨진 유리창을 비닐로 막고 테잎으로 마무리한 모습들이 보였다.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지만 카메라를 들지 않았다. 호텔 앞에서 거리 스케치를 할 때도, 이동 중에도, 행색이 남루한 사람들이나 광경에 앵글을 돌리지 않는 등 정상회담의 분위기를 흩트리지 않기 위해 뜻을 모았다. 취재진 모두 한마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이 잘 되기를 바랐고 희망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기록이에요. 이대로는 안됩니다. 우리 청와대 대변인을 불러주세요.”       6월 14일 오후 7시. 모란각에서 열린 남측의 답례 만찬에서 행사 앞 부분을 취재하고 만찬장을 나왔다. 대체로 대통령의 오찬이나 만찬 행사의 취재는 대통령 입장과 모두 발언, 건배까지 취재를 하고 빠지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이다. 이날도 건배까지 마무리 했으니 아무런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남북이 공동선언문에 합의했다는 모두 발언과 건배 취재 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서 잠깐 생각한 끝에 만찬장 밖의 북측 경호원을 붙들고 우리 대변인을 불러줄 것을 요청했다. 이런 경우 성사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포기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실랑이한 끝에 마침내 북측 경호원이 박준영 당시 청와대 대변인을 불러주었다. “분단 이후 처음 만난 남북의 정상이 공동선언문 합의까지 이끌어냈는데 그림이 너무 밋밋하다, 손이라도 한 번 잡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들은 대변인은, 이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전했고 결국 나는 만찬장에 다시 들어갔다.    다시 연단 앞으로 나온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김대중 대통령 - “우리 둘이 손잡고 하는 장면을 사진 찍는 분들이 못 찍었다고 다시 한번 해달라고 해서 김 위원장께 우리 배우 노릇 한번 합시다 했더니 좋다고 하셔서 합니다. 우리 두 사람이 공동성명에 대해서 완전히 합의를 봤습니다. 여러분 축하해 주십시오!”  ▲남북공동선언 합의 발표(2000년 6월 14일 모란각)      환한 웃음과 함께 두손을 번쩍 든 두 정상의 유쾌한 모습에 만찬장 내의 남북 주요 인사들은 기립 박수로 화답을 했다. 출연료를 받아야겠다는 농담을 하면서 흔쾌히 응한 김정일 위원장, 불편한 몸이지만 기꺼이 연단 앞으로 나온 김대중 대통령. 한껏 가까워진 두 정상은 이날 밤 늦게 6.15 공동선언문에 서명을 마치자, 자연스럽게 만찬장 때와 똑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이번에는 기자들 누구의 요청도 없었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6.15남북공동선언문 합의서명(2000년 6월 14일 백화원 영빈관)    이번 2018년 남북정상회담은 회담 장소가 판문점이라는 특수성과 남북의 정상이 군사분계선을 넘고 또 이를 기다렸다 맞이한다는 극적인 상황이 생중계될 예정이라 벌써부터 세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남북화해의 기반을 구축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던 1차 때와는 달리 4차 남북정상회담은 완전한 비핵화라는 분명한 과제가 있다. 또한 이 과제는 남북 간 합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연계된 북미정상회담에서 완결된다는 어려움을 안고 있어 회담 전망도 불투명하다. 취재진의 노력만으로 회담의 결과를 어찌할 수는 없겠지만, 현장을 지키고 있는 영상취재기자들이 최선을 다해 줄 것을 기대한다. 우리가 보고, 느끼고, 기록한 것은 그대로 우리의 역사가 되고 미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SBS / 김영창
    2018-04-26
  • 2007년 10월, 2차 남북정상회담 취재기
    <2차 남북정상회담 취재기>2007년 10월▲카메라에서 왼쪽부터 KBS 이홍우, KBS 홍병국(필자)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2차 남북 정상회담에 동행했던 영상기자로서 이번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리는 정상회담이 우리 민족의 통일과 공동 번영으로 가는 초석이 되길 바란다.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6⋅15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두 번째 남북정상회담은 2007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열렸다. 노무현 대통령은 10월 2일 대한민국 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평양에 들어갔다.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6⋅15 남북공동선언의 적극 구현, 한반도 핵 문제 해결을 위한 3자 또는 4자 정상회담 추진, 남북 경제협력사업의 적극 활성화 등을 골자로 하는 2007 남북정상선언문을 채택했다.    2007년 8월 8일 오전, 남북은 동시에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2007년 8월 28일부터 8월 30일에 걸쳐 개최될 것이라 발표했다. 그러나 2007년 8월 18일 북한은 수해로 인해 회담 일정을 연기할 것을 요청했고 구체적인 회담 일자 지정을 남측에 일임했다. 이에 남측은 2007년 10월 2일에서 10월 4일 동안 회담을 개최하기로 제안했다.    남북정상회담 계획이 발표되자 청와대 춘추관의 출입 기자들은 분주해졌다. 약간의 긴장감과 동시에 역사적 현장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들뜨고 있었다. 하지만 청와대에서는 회담 취재 인원을 최소한으로 조정하겠다고 발표하자 나는 혹시 이런 역사적 현장에 동참하지 못할까 봐 조바심도 느꼈다. 청와대에 출입하는 영상취재기자는 6개 방송사였다. 이 중에 YTN과 공중파 3사는 각사 2명씩, MBN과 KTV는 각사 1명씩, 송출담당을 맡은 KBS가 1명이 추가되어 총 11명이 남북정상회담의 공동취재단으로 동행하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 당시에 1, 2진이 취재에 동행했다. 그러나 2차 남북정상회담에서는 1진과 3진이 동행 취재하기로 되었다. 당시 KBS 3진이었던 나는 1진 이홍우 부장을 모시고 역사적인 현장을 취재하게 되었다. 남북정상회담 취재에서 카메라 기종 선택도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당시 SD급인 소니SX카메라를 사용하던 시기였는데 각 방송사들은 HD 전환을 고민하던 때였다. 남북정상회담은 역사적 자료로서 가치가 있으니 HD카메라로 취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최종적으로 테이프 방식의 HD카메라로 취재하기로 했다. 일부 방송사 중에는 HD카메라가 없어서 급히 구입하거나 리스하기도 했다. 당시 HD카메라는 초기 형태로 현재의 카메라보다 노출이나 포커스에서 관용도가 낮아 역사적으로 정말 중요한 현장을 기록해야 하는 영상취재기자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 사실 당시 취재된 영상을 보면 HD카메라에 적응이 안 되었는지 아웃포커스와 노출 문제 등 조그만 오류들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낯선 장소에서 낯선 장비로 엄청난 긴장감을 이겨내며 촬영한 영상취재기자들의 수고가 있었기에 당시의 영상을 지금도 HD화질로 볼 수 있게 되었다.    1차 남북정상회담과는 달리 2차 남북정상회담에서는 평양 개성 고속도로를 통한 육로 방문을 하기로 합의되었다. 나를 포함해 KBS, MBC 영상기자 4명은 선발대로 대통령보다 하루 먼저 평양에 들어가서 노무현 대통령 도착 이전의 환영 인파와 대통령의 도착 모습을 현지에서 취재했다. 선발대는 육로를 통해 남북출입 사무소를 거쳐 개성과 평양 간 고속도로를 이용해 평양에 들어갔다. 남북 출입 사무소 통과는 너무나 쉽게 이루어졌고 북측 지역에는 우리를 안내할 민족화해 협의회(민화협) 소속 안내원들이 승합차를 타고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전에 북한 취재 경험이라고는 금강산 취재 밖에 없었다. 그때 딱딱하고 경계하던 안내원들과는 달리 비교적 친절하고 부드럽게 맞이해 주었다.    우리는 민화협에서 제공된 승합차를 타고 개성 시내를 통과할 때는 방북단 환영하기 위해 분주한 시민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도로를 정비하고 집들을 수리하는 사람들과 아이를 업고 힘겹게 유리창을 닦는 모습의 광경을 바라보며 개성시내를 통과했다. 2시간 이상 도로를 달려 평양에 도착했지만 우리가 이동하는 동안 차량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아 놀라웠다. 평양에 도착하자 남측 취재진의 프레스센터는 고려호텔에 마련되었다. 대통령은 백화원 초대소, 수행원들은 유경호텔에 묵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일정 첫 날인 10월 2일 9시 5분 대한민국의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 원수로서는 최초로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어왔고 평양과 개성 간 고속도로를 이용해 평양에 도착했다. ▲옥류관에서 영상취재기자 풀단 왼쪽부터 MBC송록필 MBN정선호 KTV채영민 YTN김태형 MBC최세훈 KBS이홍우 SBS변영우 KBS김태산 YTN김영욱 KBS홍병국 SBS주범      우리 선발 취재진은 북측에서 제공한 무게 차에 나눠 타고 역사적인 만남의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새벽부터 준비했으나 먼저 북한에 들어온 선발대는 남북 정상이 만나는 모습을 멀리서 그냥 쳐다봐야만 했다.    북측은 경호를 이유로 첫 만남의 장소를 세 번씩이나 바꿨고 최종적으로 4·25 문화회관 앞에서 두 정상이 만나게 되었는데 그 모습은 대통령과 동행한 본대가 취재할 수밖에 없었다. 선발대는 대통령 일행이 평양 시내로 들어오는 모습과 환영인파를 취재하며 계속 바뀌는 만남의 장소를 쫓아다니며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 뒤에도 백화원 초대소에서 정상회담이 이루어졌는데 취재인원을 극소수로 제한해 영상 풀 취재단 한 팀이 청와대 전속과 함께 들어가서 취재를 했다. 영상 송출은 프레스센터가 있는 고려호텔의 조그만 방에서 민화협 관계자들이 모니터 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조선 중앙텔레비전방송과 KBS가 송출 키사가 되어 망을 구축했고 서울에 있는 프레스센터에서 영상을 수신했다.    북측에서는 평양시내의 스케치도 못하게 할 정도로 취재를 극도로 제한했고 취재 기자들의 스탠딩도 호텔 앞 인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통신 사정이 여의치 않아 남쪽의 프레스센터에서는 들어오는 영상으로 정보를 얻었다고 한다.    HD로 취재된 영상은 북한의 조선중앙텔레비전방송을 거쳐 송출되면서 화질이 SP급으로 다운되어 송출되었다. 회담 2박 3일 동안 영상기자 3진들의 주요 임무 중 하나가 여섯 벌의 HD 카피본을 만드는 것이었다. 남한에 복귀하자마자 각사는 특집 뉴스를 계획하고 있었고 송출된 영상의 화질이 좋지 않아 각사에 원본을 나누어 주어야 했다. 나를 포함해 3진들은 2박 3일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정상회담 외에도 대통령은 남포 갑문과 평화자동차를 방문했다.    둘째 날 점심엔 수행원과 기자단을 옥류관에 초대해 오찬을 함께 하기도 했다. 옥류관 냉면은 평소 평양냉면을 좋아했던 나에겐 잊을 수 없는 맛을 안겨 주었다. 옥류관의 접대원들은 장군님 방식이라며 면발에 식초를 두르고 육수에 겨자를 푸는 방식을 알려 주었다. 옥류관은 대동강 변에 자리 잡고 있어 아름답게 흐르는 대동강의 경치를 즐길 수 있었다. 저녁에는 대통령과 수행원들을 위한 아리랑 공연 관람이 있었다. 정말 운 좋게도 취재 풀 순번에 포함되어 수만 명이 동원되는 대집단체조 예술 공연인 아리랑을 직접 관람할 수 있었다. 아리랑은 집단체조를 기반으로 예술 공연의 성격을 가미한 종합 공연이다. 민족의 고난을 상징하는 아리랑을 소재로 하면서 ‘아리랑 민족’의 고난을 희망의 아리랑으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들어 있었다. 수만 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퍼포먼스도 놀랍지만 기예에 가까운 묘기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공연이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나고 복귀하는 길에 귀가하는 학생과 주민들의 힘겨운 발걸음을 보면서 체제를 선전하기 위한 공연을 위해 수만 명이 고생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더 크게 들었다.    일정 마지막 날인 2007년 10월 4일 오후 1시, 평양 백화원 초대소 영빈관에서 남북 정상은 6·15 남북 공동선언에 기초한 남북의 ‘평화와 번영’을 목표로 한 ‘2007 남북정상선언문’을 채택했다. 그리고 평양시민의 작별인사를 받으며 다시 한번 육로를 통해 남한으로 돌아오는 길에 대통령과 수행원, 취재진은 중간 휴게소에 들러 잠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개성공단을 돌아보고 북한의 노동자들과 파견 나온 남한 직원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임진각에 마련된 무대에서 대국민보고 형식의 발표를 하고 난 뒤 청와대로 돌아왔다.    북한의 평양에서 보낸 3박 4일은 영상기자로써 보낸 20년 그 어느 순간보다 더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생소한 광경이나 사람들 그리고 역사적 순간들, 돌아오는 길에 차창 밖으로 보이는 석양을 보면서 통일의 태양으로 떠오를 것 같은 기대감이 들 정도로 남북의 화해와 통일이 막연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정권이 바뀌면서 두 번의 정상회담의 성과는 멈추어졌다.    이번엔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속적으로 만나고 대화해서 결국에 통일의 초석을 다져가는 정상회담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홍병국 / KBS
    2018-04-26
  • 30년 만에 우리나라에서 열린 올림픽 ‘평창 21박 22일의 취재기’
    30년 만에 우리나라에서 열린 올림픽 ‘평창 21박 22일의 취재기’  북유럽 선수들도 놀란 상상 그 이상의 추위   영하 20도. 흔히 경험하기 어려운 날씨. 후발대로 출발해 평창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맞이한 건 칼바람이었다. 평창의 기온을 선발대로부터 통해 들었지만 실제로 피부로 느끼는 추위는 생각한 것 그 이상이었다. 뉴스 리포트나 기사를 통해서도 보았지만 추운 지방에서 온 북유럽 선수나 관계자들도 혀를 내두르는 추위였다. 인터넷 영상에서 나온 것처럼 수건을 물에 적셔 조금만 기다리면 꽁꽁 얼어붙어 버린 그곳. 바로 평창이었다.   북한 응원단의 도착   평창에서 약 2시간 거리의 인제. 북한 응원단은 그곳에 숙소를 정했다. 철저한 보안 속에서 이뤄졌던 북한 응원단의 도착 취재는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행사 관계자들도 응원단이 어디에서 내릴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모습에 각국의 취재진들도 동선이 꼬이긴 마찬가지였다. 차량이 통제된 곳이라 언덕을 몇 번이나 오르내렸지만 결국 북한 응원단의 버스 문이 열린 곳은 대부분의 취재진이 위치하고 있었던 곳의 반대편 언덕 아래 위치한 호텔이었다.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가는 각국 취재진들의 모습들은 바로 취재 경쟁의 시작이었다. 응원단이 숙소로 들어갈 때 일부 우리나라 사람들은 “반갑습니다.”라고 외쳤고 북한 응원단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경기   2월 10일. 역사적인 남북 단일팀 여자 아이스하키 경기가 강릉 관동하키센터에서 스위스를 상대로 열린 날이다. 이날 경기장에는 문재인 대통령 내외, 북한의 특사로 온 김여정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 등 거물급 인사들이 참석했다. 북한 응원단도 블록 별로 나눠 앉아 응원전을 펼쳤다. 중요한 이벤트가 있는 날인만큼 이날 역시도 취재 경쟁이 치열했다. 경기장 내에 ENG 존은 몇 자리 없었고 그중에서도 좋은 자리는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몇 시간 전부터 기다려야 했다. 비록 경기는 스위스에 0-8로 패했지만 남북관계의 개선에 큰 영향을 준 경기였다. 우리나라 관중들과 북한 응원단이 함께 단일팀을 응원하는 모습은 평소에 보기 어려웠던 장면들이다. 이런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내면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평창의 인기스타 수호랑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을 가장 빛나게 한 건 바로 수호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창올림픽 공식 기념품점인 슈퍼 스토어에서는 수호랑 인형을 비롯한 캐릭터 상품들이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이를 취재하기 위해 우리가 슈퍼 스토어를 찾았을 때 역시 사람들로 발 딛을 틈이 없었다. 수호랑 캐릭터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었으며 일부 상품들은 평창올림픽 중간에도 품절사태를 빚으며 인터넷에서 웃돈을 주고 팔고 사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다.   잊지 못할 추억들을 남겨준 평창올림픽   처음 경험하는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를 우리나라 평창과 강릉에서 취재했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큰 행운이었고 감사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흔히들 스포츠도 인생처럼 희로애락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경기장 안에서는 승리의 환호와 패배의 좌절을. 경기장 바깥에서는 추위와 싸움, 그리고 영국 IOC 위원 펭길리의 보안요원 폭행을 취재하며 분노를 느끼기도 했다. 앞으로도 우리나라에서 어떤 큰 스포츠 행사가 열리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평창올림픽에서 취재하면서 느꼈던 우리 국민들의 하나된 열정.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의 희생은 잊지 못할 것이다. 김한빈 / KBS   
    2018-04-26
  • ‘제31회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 시상식’ 축사
    존경하는 방송카메라기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박원순 서울시장입니다.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의 창립 3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 귀한 자리의 주인공이신 제31회 한국방송카메라기자상 수상자 여러분께도 천만 서울시민과 함께 큰 박수를 보냅니다.   언젠가 ENG 카메라를 들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무겁겠지’라고 막연하게 짐작은 했었지만 그 정도로 묵직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방송카메라기자 여러분들이 얼마나 큰 책임감과 열정으로 그 무게를 감당하고 계신지 새삼 존경의 마음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지난해는 그 어느 때보다 다사다난했습니다. 시대의 아픈 민낯을 직면하고, 이겨내야 했던 고통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매서운 추위에도, 한여름 무더위에도 그 결정적 순간들을 보도영상에 담아내기 위해 방송카메라기자 여러분들이 얼마나 혼신의 힘을 다했을지 감히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빛나는 취재정신 덕분에 그 모든 기록은 값진 진실이 되었습니다. 역사가 되었습니다.   짧게는 몇 십초, 길게는 몇 십분, 몇 시간에 걸친 보도 영상이 평범한 시민의 삶을 바꾸고, 시대의 새 길을 열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방송카메라기자 여러분들의 사명과 열의, 열정에 다시 한 번 감사와 존경을 전합니다.   특히 이제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가 서른 살이 됐는데요. 서른은 가장 치열하고 가장 열정적이며 가장 자신감 넘치는 나이입니다.   청년의 마음으로, 청년의 눈으로 세상 곳곳을 조명하고, 시대의, 사람의, 역사의 소중한 장면들을 보도영상에 담아내주시길 기대합니다.   아울러, 방송사의 시련의 시기가 아직 끝나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공정방송이라는 언론의 기본 권리, 언론의 정의를 회복하는 길이 참으로 멀고도 험난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반드시 도달하게 될 길이라는 점입니다.   여러분들의 곁에는 국민이, 시민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편에 저와 서울시가 늘 함께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박원순 서울시장
    2018-04-04
  • 조용필 평양공연 지켜지지 않은 합의서
    조용필 평양공연 지켜지지 않은 합의서  1달러짜리 커피의 맛 2005년 8월 18일 오후 2시 55분, ‘조용필공연’ 선발대 69명이 드디어 평양 땅을 밟았다. 평양 순안비행장에는 이미 가을을 재촉하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선발대는 서둘러 숙고인 고려호텔로 달려갔다. 공연 팀은 공연 팀 대로, 생방송 제작 팀은 생방송 제작 팀 대로 마음이 급했다. 일년간 준비해 온 공연이지만, 남북관련 사업이 의례히 그렇듯이 일정이 빡빡했다. 완벽히 준비하지 않으면 어디서 사고가 터질지 알 수 없었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하기로 되어있던 화물선이 선적이 늦어져 19일 새벽에나 남포항에 도착한다고 연락이 왔다. 게다가 하역작업 마저 늦어져 장비가 언제 공연장에 도착할지도 알 수 없었다. 남포항에 크레인이 갖춰지지 않아서 장비를 일일이 밧줄로 묶어서 내리는 중이라고 했다. 무대설치에 필요한 최소 시간이 적어도 72시간인데, 장비하역과 수송상황에 따라서 공연에 심각한 지장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일년이 넘은 준비기간이 무색했다. 마치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남북관계를 보는 것 같았다. 20일 새벽 1시, 장비가 곧 정주영체육관에 도착할 것이라는 전갈이 왔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선발대는 곧바로 류경정주영체육관으로 달려갔다. 공사가 중단된 채 처연히 써 있던 103층 류경호텔이, 달 빛 아래에서는 마치 평양을 지키는 수호신 마냥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체육관 사무실 한 쪽에서는 우리보다 한 발 앞서 나온 여직원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분주히 움직였다. 남한 손님들에게 팔려는 커피를 끓이는 중이었다. 한 잔에 1달러짜리 커피! 우리는 돈벌이에 눈을 뜬 평양시민들의 모습을 기꺼워하며, 평소 빈속에는 잘 마시지 않던 새벽커피를 사 마셨다. 속은 좀 쓰렸으나 수요공급의 원칙에 따라 시장이 형성된 남북경제협력의 작은 현장을 확인한 셈이다. 기다림에 지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긴 하품을 하며 졸음을 좇을 즈음, 엄청난 굉음이 평양 하늘에 울려 퍼졌다. 공연장비를 실은 40대의 트럭과 방송차량이 줄지어 체육관 마당으로 들어왔다. 짐칸에 실은 장비들이 힘에 부쳐 트럭이 내려앉을 지경이었다. 어떤 짐은 조금 더 달리면 뒤로 빠져버릴 듯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물질적 한계 속에서도 고난의 행군정신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북한의 생존방식을 보는 것 같았다. 통관시간 단축을 위해 남포항에 있어야 할 세관이 정주영체육관 후문 앞에 임시로 차려졌다. 북한세관측의 신속한 작업으로 세관검사는 2시간 만에 끝이 났다. 하지만 결국 전자오르간 한 대가 운송과정에서 고장 났고, 하역 장비가 없어서 밧줄에 묶여 배에서 내려졌던 4억짜리 중계차는 운전석 양옆 부분이 찌그러졌다. 쉴 틈도 없이 곧바로 무대 설치작업이 시작되었다. 조용필 도착시간까지 58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무대 설치팀은 수면시간을 반으로 줄이고 도시락을 먹으며 작업에 매달렸다. 북한 인력을 20명 지원받았다. 한 사람당 하루 일당을 150달러 요구했으나 결국 30달러로 합의했다. 길이가 총 170m나 되는 공연 무대는 체육관의 폭에 맞춰 60m로 압축했다. 류경정주영체육관은 모두 7,000명의 관객이 관람할 수 있는 공연장으로 탈바꿈되고 있었다.   세부합의서 11조 공연진과는 별도로 8시 종합뉴스, 출발 모닝와이드, 세븐데이즈, TV연예, 한수진의 선데이클릭 등을 방송하기 위해 취재진이 7팀 동행했다. 취재를 협조하기로 한 북한측과 합의내용에 따른 것이었다. 당장 19일 저녁 8시 뉴스가 편성되어 있어서 북한측과 협의가 필요했다. 북한측 파트너인 민화협의 리00부장을 찾았다. 리부장은 부하직원을 통해서 우리의 취재 요구사항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면, 일정을 잡아 답을 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조용필 가요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평가’, ‘북 측의 어려운 전력사정’, ‘7.1경제개혁개선조치 이후 나타난 북한의 변화모습-도매시장, 야외매대’, ‘핸드폰 사용현황’, ‘용천역 폭발사고 복구현장’ 등의 섭외를 요구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식사를 하고 취재진이 모두 로비에 대기했다. 민화협 참사 두 사람이 취재일정표를 들고 왔다. 첫 날은 만경대 김일성 주석 생가, 주체사상탑, 개선문 등이었고, 20일에는 김정숙탁아소, 평양지하철, 고려호텔 안에 있는 수영장과 이용원, 21일은 만경대유희장, 대동강변, 백화점, 조선중앙TV 등에 가는 것으로 잡혀있었다. 우리가 요구한 20여 곳 가운데 ‘조선중앙TV’만 들어가 있고, 나머지는 이른바 ‘체제 선전용’이거나, 매우 무성의한 아이템 이었다. 우리는 지금 북에서 제시한 장소는 남한에 이미 여러 번 소개되었으므로, 이번에는 우리가 요구한 내용을 취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아울러 북한체제를 비난하거나 정치적인 문제를 제기할 의사가 없으며, 평양의 어려운 전력 사정을 취재하는 것은 북한의 에너지난을 남한에 알려 남한 측의 지원을 끌어내보자는 의도가 있음을 충실히 설명했다. 그러나 안내원들은 오늘 예정된 장소는 이미 섭외가 된 곳이어서 바꿀 수 없으니 일단 출발하자고 재촉했다. 우리의 의사를 지휘부에 전달한 뒤 오후 일정부터 바꾸겠다고 했다. 고민하던 우리는 이들 안내를 맡은 참사들의 체면을 세워주어야 다음 취재가 원활할 것으로 판단하고 일단 오전 일정은 북 측의 요구대로 움직였다. 그런데 처음 방문지인 만경대에서부터 갈등이 빚어졌다. 만경대 김일성 주석 생가(고향집)에서 만경대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 기념품 매대가 있었다. 기자 한 사람이 수를 놓은 손수건을 고르다가 판매원에게 ‘물건을 많이 팔면 많이 판만큼 월급을 더 받느냐?’는 질문을 했다. 그러자 안내원이 계획서에 없던 질문이라며 카메라를 막았다. 우리는 강하게 항의를 하다가 안내원의 곤란해 하는 표정을 보고는 더 이상 승강이를 하지 않았다. 민화협 일꾼들에게는 별 재량권이 없다. 첫날부터 피곤하게 싸우기보다는 빨리 호텔로 돌아가 취재 범위를 넓혀도 좋다는 ‘지도부’의 지시를 받아내는 것이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만경대를 떠나 주체사상탑, 개선문을 들른 뒤 우리는 서둘러 호텔로 돌아갔다. 호텔 1층 ‘불고기랭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었다. 오후 2시30분 쯤 민화협 참사가 와서 오늘은 일정을 변경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원하지 않는 취재를 위해 안내원을 따라 나가지 않겠다고 호텔에서 버텼다. 그리고 합의서를 내보이면서, 이것을 지킬 수 없다면 지금이라도 전체 일정을 다시 협의하자고 요구했다. 합의서 제7조에는 ‘북 측은 공연 기간 중 공연단과 참관단의 활동에 대한 SBS의 취재와 평양 현지 위성생방송을 보장한다’고 명시되어있고, 세부합의서 11조에는 ‘보도 및 교양프로 현지 실황 중계방송은 SBS 측의 요구를 존중하되 그 시간 및 회수, 취재대상, 일정 등은 선발대 방문 시에 따로 결정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곤란한 표정을 지은 참사는 자신은 모르겠으니 지휘부를 찾아가서 따지라고 했다. 나는 곧바로 호텔 5층에 설치된 북한 측 지휘부를 찾아갔다. 그러나 5층 지휘부 입구에는 경비원이 서서 출입을 막았다. 할 이야기가 있으면 2층에 설치된 전화를 이용하라고 했다. 나는 한달음에 2층으로 내려와 전화를 했다. 그러나 리00부장이 자리에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민화협측의 의도가 명백해졌다. 애당초 취재진에 대한 배려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세부합의서 작성 때는 선발대가 왔을 때 이야기하자는 식으로 미루었다가, 막상 선발대가 왔을 땐 바쁘다는 핑계로 이리저리 피하며 시간을 끌 심사였다. 어차피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남한으로 돌아가야 한다. 북한 측은 취재활동과 상관없이 조용필공연만 성사시켜주면 비용을 받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현실을 바탕으로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간단한 회의를 통해서 우리는 북한측의 의도를 확인한 이상 무리하게 외부아이템을 취재하기 보다는 공연준비와 조용필씨의 동선에 초점을 맞추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커버해야 할 아이템이 급해서 그들만 원망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화약을 모두 수거하겠소! 8월 22일 낮 조용필을 비롯한 참관단들이 평양에 도착했다. 조용필은 짐을 풀자 마자 곧바로 공연장으로 달려왔다. 성실한 북한 근로자들의 도움으로 공연준비는 큰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악단 ‘위대한 탄생’과 악기를 세세히 점검하고 난 조용필은 객석 맨 뒤로 올라가 무대를 내려다보았다.조명을 켜자 평양 공연의 무대가 그 실체를 드러냈다. 월드컵경기장 공연 무대를 줄이긴 했지만 야외무대의 화려함과 위용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조용필은 그 자리에 서서 곧바로 리허설을 시작했다. 마이크를 잡은 조용필은 ‘태양의 눈’을 시작으로 레퍼토리를 한곡 한곡씩 불렀다. 그런데 밤 9시가 조금 지나자 북한 측이 갑자기 체육관 내 모든 남한 인력의 철수를 요구했다. 자정을 넘겨 연습하려던 조용필 측은 당황했다. 경호상태 점검이 이유였다. 완벽주의자 조용필은 북한 측의 일방적인 결정에 무척 불쾌해했다. 다음날 오전 호텔에서 긴장을 푼 조용필은 이른 점심을 먹고 공연장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오후 1시경 림동옥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이 나타나 2시간가량 준비상황을 점검했다. 그가 떠난 뒤 갑자기 나타난 북한의 보안 담당자들이 한 낯선 사내의 지휘로 ‘특수효과용 화약’을 다 수거해 가버렸다. 이 사내는 선발대가 평양에 도착한 이후부터 공연에 관한 모든 결정을 독단적으로 처리했다. 합의문도, 항의도 속수무책이었다.그는 특수효과용 화약은 공연 도중 불꽃을 내뿜는 재료로서 ‘요인경호’의 장애물이라고 했다. 우리는 북한의 고위관리들이 공연장을 둘러보고 화약을 수거해 간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참석 대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실제 김 위원장의 참석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이번 공연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건 사실로 보였다. 류경체육관 관중석 한 중간에는 내부가 보이지 않는 방탄유리로 덮인 VIP 관람석이 있다. 김 위원장이 눈에 띄지 않게 공연장에 나타났다가 공연이 끝나고 소리 없이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돌발 상황은 또 일어났다. 조용필에게 리허설을 한 시간 빨리 끝내 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조용필은 레퍼토리 전체를 불러보지 못하고 오후 3시경 리허설을 중단했다. 그 시간 조선중앙TV의 중계 카메라 6대가 일방적으로 설치되었다. 원래 합의서에는 SBS의 중계 화면을 조선중앙TV에서 받아쓰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SBS것까지 포함해 중계카메라만 열세 대나 설치되어 중계에 적지 않은 지장이 초래되었다. 그런데 생방송 중계는 카메라만 설치된다고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디오 라인이 따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 오디오와 관련된 모든 라인은 SBS가 관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전에 협의를 하지 않은 조선중앙방송에 오디오를 공급해 줄 수 없다고 버텼다. 그 순간 얼굴 한 번 보기 힘들었던 리00부장이 다급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오 선생, 나 좀 도와주오. 지금부터 오 선생이 요구하는 모든 내용을 들어주겠소. 취재팀도 새로 조직해 오 선생이 원하는 곳으로 안내하겠소.” 짧은 시간 고민하던 우리는 북한 측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어떤 방식이든 공연 내용을 북한 주민에게 보여주는 것이 행사의 취지이기 때문이었다. 리00부장은 그 뒤에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취재협의는 물론 할 수 없었다. 오기현  전 한국PD연합회장,  한국PD연합회 통일특위위원장
    2018-04-04
  • 영예상 수상자 최기홍 전 KBS디지털뉴스혁신팀장 인터뷰
    ▶ 협회 첫 영예상 주인공 최기홍 명예회원   "후배들이 공 인정해주니 고마워... 2~3년안에 뉴스 대부분 스마트폰으로 할 것"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아래 협회)가 제정한 첫 영예상은 최기홍(64·사진) 명예회원에게 돌아갔다. 영예상은 재직 당시 대한민국 방송발전에 공적이 많은 협회 회원과 명예회원을 대상으로 심사를 하여 선정한다. 협회는 지난 2월 22일 서울 상암동 스탠포드호텔에서 시상식을 열고 디지털 기반의 뉴스제작 프로세스 혁신에 공헌한 최 회원에게 영예상을 수여했다. 최 회원은 KBS에서 30여 년 동안 영상기자로 근무하면서 보도본부 영상편집팀장(국장급)과 디지털뉴스혁신팀장을 역임했다. 최 회원은 재임 기간 동안 인터넷 망을 활용한 뉴스영상 전송을 추진했고 파일 방식의 HD 뉴스제작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동안 방송장비와 기술이 앞서 간다는 일본 NHK가 KBS에 파일 제작 방식을 배우러 촬영기자와 엔지니어를 파견하기도 하는 등 대한민국 뉴스 제작 기반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하는 순간이었다. 2001년부터 2년 동안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장(15대, 16대)을 역임하기도 한 최 회원은 지난 2012년 현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퇴직 뒤에도 영상편집 교재를 만들어 후배 방송 제작자와 영상 편집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에게까지 무료로 제공하는 일을 이어가고 있다. 첫 영예상을 수상한 최기홍 회원을 지난달 25일 서울 염창동 골든서울호텔에서 만났다.   - 협회가 제정한 첫 영예상의 주인공입니다. 소감이 어떤지요.   “상을 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해 온 것인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상도 받게 되었네요. 직장 다닐 때는 상을 준다고 해도 거절했는데, 세월이 지나 그 공을 후배들이 인정해 준다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 파일 방식의 ENG 카메라가 도입되기 전인 2005년, 당시 뉴스 촬영에 쓰이는 ENG카메라와 노트북을 이용해 언제 어디서나 촬영한 영상을 제작할 수 있는 방법을 추진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 컴퓨터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자식들을 키우면서 앞으로 컴퓨터를 모르면 살아가기 어렵겠다 싶어 90년대 초에 286컴퓨터를 샀습니다. 컴퓨터를 배우러 다닐 시간이 여의치 않아 책을 사서 보기 시작했죠. 처음엔 봐도 잘 모르겠어서 더 쉬운 책을 찾아 읽고 컴퓨터 용어를 익히기 시작했는데, 영상 편집도 앞으로는 컴퓨터를 이용하게 될 거란 생각에 꾸준히 공부를 해 나갔습니다.” - 비선형 편집을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나요?   “2000년 즈음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들어와 ‘자기가 NLE(비선형 편집 시스템·non-linear editing system) 영업하는 사람인데, 오천만 원 정도 하는 장비를 한 달 동안 KBS에 무료로 빌려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 장비를 들여오고 사용법을 배울 교육 날짜를 정했는데, 내가 취재를 나가는 바람에 다른 친구들이 교육을 받게 됐죠. 그런데 이 친구들이 교육을 받은 뒤에 정보를 공유하지 않더라고요. 할 수 없이 매뉴얼을 달라고 해서 들여다보기 시작했는데, 보통 물건이 아니더라고요. 방송사가 할 수 있는 일을 컴퓨터로 다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퇴근 이후에 계속 공부하면서 직원들에게도 교육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죠.”   - 당시 KBS 직원뿐만 아니라 다른 방송사 관계자들에게도 교육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편집기 가격이 HD VTR 한 대가 7~8천만 원에 편집을 하려면 두 대가 필요한데, 1억5천만 원 이상이었죠. 당시 카메라기자협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모든 기자에게 필요하다고 판단했어요. 강의할 공간이 없다 보니 수원에 있는 KBS 연수원을 빌리기도 하고, 지인의 사무실, 심지어 컴퓨터도 없는 협회 사무실에서 각자 컴퓨터를 가져오게 해서 교육하기도 했어요. 기자들은 그런 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다 보니 강의를 듣고 싶어하는데 업무가 많아 참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컴퓨터랑 장소도 여의치 않고. 혼자서 다 알아서 해야 하던 때라 많이 힘들었지요.”   - 디지털 영상편집 교육을 선도하면서 재직 기간에 교재도 집필했는데요, 지금은 여러 교재를 무료로 배포한다면서요?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을 정리하다 보니 그것이 쌓여 책을 세 권이나 냈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베스트셀러 소설가처럼 인세를 많이 받는 것도 아닌데, 차라리 누구나 볼 수 있게 파일을 공개하는 게 어떨까 싶더라고요. 그래서 홈페이지에 PDF 파일로 올리게 됐죠.”   - ‘최기홍 NLE 연구소’라는 블로그(http://blog.daum.net/choikihong/)에 아예 ‘교재받기’ 카테고리가 있던데, 메일로 교재를 요청하면 보내준다고 돼 있더라고요. 블로그 내 방명록을 보니, 교재가 시중에 나와 있는 것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다는 얘기부터 무료로 나눠준 데 대해 감사를 표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던데요.   “그런 분들 때문에 힘이 나죠. 한 번은 아들이 학교 숙제를 하는 데 필요하다며 아버지가 프리미어 교재를 부탁해 온 적이 있어요. 교재와 함께 아들이 고전하고 있다는 대목과 관련해 ‘ 교재 몇 쪽에 있다’고 안내해줬는데, 이틀 동안 끙끙거리던 것을 한 시간 만에 마쳤다면서 감사 편지를 보냈더라고요. 미국에 산다는 일흔다섯 정도 되신 어르신의 메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은퇴하고 손녀의 동영상을 만들어 주느라 영상편집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제 교재로 아비드(영상편집 프로그램)를 배웠는데, 이제 에디우스 교재가 필요하다며 자료 요청을 하셨어요. UHD 장비가 나오기 전인데도 ‘세월이 지나면 HD가 화질이 떨어질 것 같으니 앞으로는 UHD 편집 기술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해서 저는 물론 젊은 사람들이 많이 긴장하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 스마트폰을 활용해 한 사람이 취재, 촬영, 편집, 송출을 할 수 있는 모바일 저널리즘을 체계화하고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 대한민국 영상보도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이 나온 지 10년이 됐는데, 2015년부터 UHD 촬영이 되고, 편집이 되더라고요. 스마트폰이 방송사 카메라보다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KBS 보도책임자에게 ‘취재기자도 스마트폰으로 촬영하고 편집하는 걸 배우면 활용할 데가 많을 것’이라고 메일을 보내기도 했어요. 스포츠도 외국 취재가 많은데, 감독 인터뷰는 스마트폰으로 찍어 바로 서울로 보낼 수 있거든요. 후배들에게도 내가 직접 테스트한 걸 보여주면서 페이스북 라이브를 활용하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JTBC가 하니까 다 따라가더라고요. 방송사라는 곳이 안정성을 추구하고 여러 부서가 얽혀 있다 보니 쉽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 지난 3년 동안 아시아 태평양 방송 연합(ABU·Asia Pacific Broadcasting Union) 회원사 기자들을 대상으로 NLE 편집과 스마트폰을 활용한 뉴스 제작 강의도 해 왔는데, 외국 기자들 반응은 어떤가요?   “무척 반응이 좋았고 활용 하려고 본국에 돌아가 자체 교육을 했다고 합니다. 필리핀 방송에서 아침 사건 기사를 스마트폰을 이용해 라이브 방송을 잘 활용하는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은 뉴스 제작에 있어서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앞으로 2-3년 안에 대부분의 뉴스는 스마트폰으로 할 것으로 보입니다.”   ‘보도 영상’이라는 한 길을 걸어오면서 아쉬움은 없나요?   “KBS에 있을 때 뉴스 제작을 쉽고 빠르게 하려고 기사 기반의 HD 뉴스제작 시스템을 파일럿 형태로 구축했습니다. 비디오 기반인 영상 편집과 달리, 뉴스는 기사가 기본이라 편집도 다르거든요. 기사에 영상을 드래그하는 방법을 선택했는데 편집 속도가 확연히 다릅니다. 뉴스혁신팀장을 맡았을 때 이걸 바꿔보려고 했는데,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됐고, 후임자가 이 사업을 이어가지 못하더군요. 아쉽지만 앞으로 후배들의 몫으로 남겨둔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지난해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 창립30주년이었습니다. 협회를 창립하는데도 많은 노력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공유하고 목소리를 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당시 MBC 이문노 기자와 함께 협회 창립을 논의하고 실무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 2001년부터 2년간 협회 회장을 역임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후배들을 가르친 게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협회가 돈이 없으니 몸으로 때워서라도 가르친 거죠(웃음). 사원을 교육시키는 체계적인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시기였는데, 후배들 가르칠 교재를 만들어야겠다 싶어서 편집기, 영상 이론 등에 대한 교재도 만들고 DVD와 비디오테이프도 제작했습니다. 사원 교육은 굉장히 중요한데, 아직도 대부분의 방송사가 제대로 된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MBC가 한창 파업일 때 제주MBC에 내려가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이런 말을 했어요. ‘국장 되고 사장 되는 게 출세가 아니다. 당신네 사장은 후배들이 나가라고 아우성인데, 나는 퇴직 후에도 이렇게 불러주지 않느냐. 내가 더 출세한 거다. 허허’ 나는 언제나 언론인으로서 제대로 역할을 했느냐, 거짓말 하지 않고 정도를 가려고 노력했느냐가 중요하다고 얘기합니다. 언론인은 그냥 월급쟁이가 아니니까요. 타협하지 말고, 아닌 건 거부할 수 있는 기자가 되어야 합니다. 문제가 생기는 게 싫어서 틀린 걸 알면서도 따르다 보니 방송사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겁니다. 기자로서 똑바로 서는 게 곧 출세라는 걸 후배들이 기억하기 바랍니다.”   취재 및 정리 / 안경숙 기자        
    2018-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