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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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경영
  • 라오스 SK 건설 댐 붕괴 현장을 다녀와서
    라오스 SK 건설 댐 붕괴 현장을 다녀와서      웬만한 4륜 SUV 차량이 아니면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손상된 진흙 도로가 끝없이 보였다. 나름 아스팔트가 깔린 라오스 메인도로를 벗어나 2시간 이상 달렸다. 곳곳이 파이고 물이 차올라 시속 10킬로 내외로 조심스레 운전하지만 덜컹거림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다.    깊게 파인 물웅덩이를 지날 때면 의자에서 몸이 붕 떠버려 강한 연쇄 충격을 받아 몸과 머리가 따로 놀아 머리가 멍해지기도 했다. 그 와중에 실어놓은 장비 짐들이 고장 나지 않도록 손으로 단단히 눌러야만 했다.   진흙에 바퀴가 빠지면 장정 여럿이 앞에서 밀고 뒤에서 밀고를 몇 번이나 반복해야만 육중한 차를 겨우 빼낼 수 있었다. 물이 넘쳐흐르는 곳에서는 차를 멈추고 통과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워낙 물살이 세서 조심스레 발을 담가보며 수심을 체크했다.    세피안-세남노이 수력발전 보조댐이 무너진 지 5일째이자 현지 취재 사흘째인 7월 28일, 최악의 환경에서 취재를 이어가는 우리 모두는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다. 이때 전날 SK건설 측에서 사고 난 댐까지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알려왔다.   산사태로 통제되었던 길목을 겨우 뚫었다는 것이다. 이에 현지에 급파된 한국 취재진들은 동이 트자 각자 마감시간에 뉴스를 데기 위해 서둘러 출발하였다. 차량이 댐 어디까지 접근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최대한 가능한 곳까지 달려야만 했다.    댐 안내 표지판이 보였다. 표지판 이후부터는 길이 더 좁아지고 험난해졌다. 산 골짜기를 막아놓은 댐이라 경사도 점점 심해졌다. 어느 순간 선두에서 안내하던 차량이 멈춰 섰다. 밀림 속에 공사를 위해 만든 길이라 주변 상황 파악이 어려웠다.    차가 갈 수 있는 곳까지 다 온 것인가 생각하고 모두들 차에서 내렸다. 웅성거리고 있는 선두 대열로 가보니 우리를 안내하던 도요타 픽업트럭 본네트가 열려있었다. 엔진 이상인지 더 이상 운행이 불가한 것같았다. 여기서 운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엔진 열을 식히는 것뿐이었다.    출발할 때 예상한 것보다 훨씬 멀고 험난한 여정이었다. 퍼져버린 선두 안내 차량을 뒤로하고 다시 댐 현장으로 달렸다. 이날 장비가 많아 4륜 픽업트럭을 놔두고 밴을 타고 온 우리팀은 점점 마음이 불안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붉은 진흙으로 덮인 난코스의 언덕길이 보였다.   입자가 너무 고운 데다 물을 한껏 머금고 있어서 밴이 치고 올라가기에는 불가능할 것 같은 길이 나타난 것이었다. 다른 픽업트럭들은 굉음을 내며 흙탕물을 사방으로 튀기며 올라갔다. 시계를 보니 벌써 한국 시각으로 2시가 넘었다.   촬영을 마치고 송출이 가능한 지역으로 가려면 적어도 3시간은 잡아야 했다. 출발 전 오늘 하루는 수월하게 취재를 마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나의 어설픈 낙관적 예상은 100% 빗나갔다. 초조와 긴장만이 감돈 채 최소한의 장비만 챙기고 차에서 내려 무작정 걸어야만 했다.    날은 덥고 습했다. 볼라벤 고산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한국보다는 기온이 낮다는데 위안을 삼으며 묵묵히 걸어갔다. 다행히 한 고개를 넘으니 드디어 댐 현장이 멀리서 보였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메인 댐이 아닌 물이 차오를 경우 흘러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골짜기에서 골짜기를 막은 새들댐(보조댐)이었다.   그러나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으로 짐작컨대 무너지기 전에는 꽤 거대한 보조댐이었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수압으로 댐에 틈이 생기고 윗부분이 쓸려나가면서 결국에는 자연의 힘을 이기지 못했다.    단단하게 밑에서부터 사다리 모양으로 댐을 다진 후 그 위에 도로로 이용하기 위해 아스팔트를 깔아놓은 형태였다. 하지만 아스팔트는 16미터 아래로 조각나 부서져 있었다.    당시 쏟아졌던 1100mm 비의 양은 서울의 1년 강수량과 맞먹었다. 아직 원인을 명확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이 어마어마한 대자연의 수압이 대한민국 건설사가 시공한 16m 댐을 처참하게 붕괴시켜 버린 것이었다. 인근 마을 주민들의 목숨과 생활터전 모든 것을 순식간에 집어삼켜버렸다.   주변국으로 전력 수출을 하여 외화벌이를 하겠다는 라오스 국가의 대계획으로 인해 평온했던 수천 명의 삶의 터전이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이것저것 꼼꼼히 따져가며 촬영하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하였다. 쉼 없이 움직이며 촬영해 기록했다. 동시에 무수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전날 수몰된 마을을 어렵게 다녀왔었다. 그곳에서 주민 한 명을 마주쳤다.   아직까지 물이 다 빠지지 않아 안전상 위험구역으로 정해져 군인이 통제했다는 곳이다. 민간인이 접근하지 못한다는 그곳에 살림살이 하나라도 건져보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집안 곳곳을 찾는 라오스 주민. 너무 많이 울어 눈물이 말라버린 눈동자. 서둘러 댐 촬영을 마치고 차에 올라타 돌아오는 길에 내 머리 속에서 그의 뒷모습이 아른거리며 잊히지 않았다.   배문산 / SBS         
    2018-10-18
  • 도박에 빠진 청소년들
    도박에 빠진 청소년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더운 여름날‘ 청소년 도박의 심각성’에 대해 취재하게 되었다. 폭염에 지쳐 있을 무렵이라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청소년들이 이렇게 도박에 빠져있습니다.’ 하고 겉핥기식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불법 사설 도박 사이트, 연관되어 있는 불법 대부업자 등 깊게 파고들만 한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본사와 달리 매일 뉴스 메꾸기도 벅찬 지역 총국 인력 사정상 두 명이 고정으로 빠져야 되는 것이 가능 할까 걱정부터 들었다.    그렇게 걱정을 안고 취재를 나갔다.    대전에 있는 모 고등학교 앞에서 학생들이 나오길 기다렸다. 하교시간에 맞춰서 학생들이 하나 둘 나왔고 우린 무작정 가서 물어봤다. 물어보는 학생들 마다 스마트폰 도박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었고, 해 본 경험이 있다고 했다. 이 정도까지는 예상한 바였다. 처음에 물어본 학생들은 깊이 있게 얘기해주진 않았다.    두 번째로 만난 학생들은 그야말로 깊게 빠져본 학생들이었고 현재까지도 스마트폰으로 도박을 한다고 했다. ENG카메라를 보고 호기심이 생겼는지 아이들은 물어보는 족족 다 얘기해주었고,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한 얘기들을 들려주었다.    학교 학생들의 대부분이 스마트폰 도박을 한다고 한다(반에서 2/3정도는 게임하듯이 다 한다고 했다). 물론 이들이 하는 것은 불법 사이트에서 이루어지는 불법 도박이다. 처음엔 용돈으로 시작해서 조금씩 돈을 따기 시작한다.   돈이 불어나기 시작하면서 베팅하는 금액도 점점 늘어나고 그만큼 잃는 금액도 커진다. 잃었다 땄다를 반복하며 서서히 중독이 되고, 빚이 생기기 시작하고, 처음엔 용돈으로 시작했다가, 친구들에게 빌리기도 하고, 없는 시간 쪼개서 아르바이트까지 한다. 빚이 적은 사람은 200만원에서 많게는 4000만원까지 있다.   직장인들도 빚이 4000만원이면 갚아나가기 힘든 것이 현실인데 학생들이 그 정도의 빚이 있다고 하니 입이 떡 벌어졌다. 이들이 성인 도박 중독자들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나도 BETMAN이라는 국내 유일의 합법적인 사이트에서 가끔 베팅을 해 본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내 돈을 걸고 베팅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 경기들은 이미 결과가 나와 있다.    행복회로가 200%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매번‘ 이건 확실해‘’, 이번엔 무조건 땄다’ 가 이어지면서 중독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돈은 어디서 충당할까? 정말 충격적인 이야기였는데 그들이 사채까지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빚이 수천만 원이라는 점도 믿기 힘들었는데 이번엔 사채란다. 어떻게 그들이 사채에까지 손을 뻗을 수 있었을까, 페이스북을 통해서 소액으로 몇 백만 원씩 대출해주는 소위 ‘형’들이 있다고 했다. 그 ‘형’들은 돈을 빌려주고 이자는 40%씩 떼어간다며 불만을 표했다.   심지어 그 ‘형’들은 학생들 중에 몇 명을 뽑아서 총책을 시키고 40만원씩 용돈을 준다고 한다. 아침에 회사를 나오며 생각했던 것 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구나 느꼈다.    역시 정답은 현장에 있었다. 애들이 도박을 하면 얼마나 할까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 당사자들에게 직접 듣고 나서 확 바뀌었다.    뉴스 제작을 위해 돌아가면서 취재기자와 피드백을 나눴다. 단발성 뉴스로 끝낼 것이 아니라 좀 더 깊이 파고들어 학생들에 고리로 돈을 빌려주는 ‘형’들과, 사설 도박업체를 운영하면서 스포츠 문화를 좀먹고 있는 사람들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말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취재하며 열정이 이만큼 끓어올랐던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후속 취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날 만난 학생들이 다시 만나기를 거부하는 점도 있지만 그것은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다른 학교를 가거나, 다시 그 학교로 가서 학생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취재기자들이 한 아이템을 깊게 파고들 수 있을 만큼 환경이 좋지 않다. 매일 매일 그 날 뉴스 만들기도 인원이 부족하고, 그 때문에 성과가 부족할 때는 위에서의 압박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분위기이다.   우리 촬영기자들도 인력 부족에 허덕이며 인력 충원에 목말라 있지만, 취재기자들도 양질의 취재를 위해서 인력 충원이 절실하다. 하루하루 시간을 메꾸기 위한 뉴스를 하다 보면 취재기자도 안일해지지만, 촬영기자들도 매일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다 보면 그 상태에서 고착화되기 쉽다.    청소년 도박의 심각성에 대한 얘기가 지역 기자들의 인력난으로 끝났지만, 이렇게 깊이 파고들어 오랜 기간 취재가 필요한 아이템의 경우는 구성원들의 희생과 양해가 없는 이상 지역 총국에서는 이루어지기 힘들다.    그렇지만 아직 이 아이템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빠른 시일 내에 다시 한 번 이 문제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고쳐가고 싶다.    유민철 / KBS대전       
    2018-10-18
  • 군국 일본의 언론통제
    군국 일본의 언론통제      우리나라는 과거 군사정권 시대에“ 여론지도”라는 미명 하에 국민을 국내와 세계가 돌아가는 정보로부터 고립시키고 나아가 정권유지를 위한 수단으로써 언론통제가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졌다.    군사정권 하에서 이루어진 언론통제는 군국 일본의 제도와 관행을 대부분 모방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군국 일본에 봉사한 수많은 친일파들이 1948년 정부수립 이후에 중앙정부, 경찰, 군대에서 일하게 된 것에 유래한다.    일본에서 언론통제를 조직적이고 제도적으로 시행한 시초는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직후인 1920년 육군성 내에 신문반을 설치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문반이 전쟁을 미화하고 해외팽창주의로 나가기 위해 만든 자료 중에 1934년 10월 1일에 발간한 <국방의 본의와 그 강화의 제창>이라는 소책자가 있다. 책자 내용 중에 섬뜩한 문구가 있는데“ 전쟁은 창조의 아버지, 문화의 어머니”가 바로 그것이다. 전쟁에“ 문화”라는 단어를 입혀 파괴와 살육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문화로 포장한 것이다.    일본은 중일전쟁 발발 1년 후인 1938년에 국가를 총력전 체제로 만들기 위해 기존의 신문반을 정보부로 확대, 개편하고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감행되기 직전에 육군과 해군이 보도부를 각각 신설하였다. 이와 별도로 정부는 1940년 12월 기존의 내각정보부를 정보국으로 개편하여 본격적인 언론검열과 선전선동 체제로 돌입했다.    일본 정부가 정보국을 신설한 이유는 예상되는 다가올 미국, 영국 등 서방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국내 언론을 통제하고 나아가 국내·외 프로파간다를 체계적으로 실시하기 위함이었다. 언론통제는 국민을 대상으로 한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두뇌통제이나 프로파간다는 적극적인 세뇌인 셈이다. 일본 관료들은“ 실과 바늘” 사이인 언론통제와 프로파간다가 서로 결합되면 가장 효력을 발생시킨다는 사실을 나치독일의 언론통제와 프로파간다 기법에서 벤치마킹한 것이다.    “언론통제의 작전본부”로 불린 정보국은 신문, 방송, 잡지 등 국내 언론의 전반에 걸쳐 간섭하고 개인주의, 자유주의, 공산주의 등 군국 일본의 이념에 배치되는 사상을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소위 일본판“ 사상전”이 본격적으로 가동된 것이다.    또한 1940년 12월에는 동경출판협회, 일본잡지협회 등 유력 출판단체가“ 자발적”으로 해산되고 일본출판 문화협회를 설치하였다“. 출판”이라는 단어 앞에“ 문화”를 입히는 관례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쟁은 창조의 아버지, 문화의 어머니”라는 육군의 사상이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 출판문화”라는 단어가 들어간 기관이 있는데 이는 바로 일본 군국주의의 언어적 산물이다. 또한 일본 육군은 정신문화연구소의 설립도 지원했는데 일본에서 육사를 졸업한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8년에 설립된 한국정신문화연구원도 “정신문화”를 강조한 일본군의 언어적 유산이다.    “정신문화”를 강조한 군국주의자들은“ 정신문화” 개조의 대상으로 우선 지식인을 표적으로 삼았다. 군국주의자들에게 일반 대중은 논리성이 없어 권위주의적이고 일방적인 주장이 쉽게 먹히는 존재였다. 이와 반면에, 지식인은 자유주의, 개인주의, 사회주의 사상을 가져 사상적 조국을 가지지 않은 부류로서 국가에 대한 절대적 신념 부족, 국가의 역사적, 민족적 발전에 무관심, 신과 종교 부정, 국제주의적 세계관에 따라 자국의 국시를 분석,“ 국체”(천황제)를 부정하고 궁극적으로는 공산주의 사상에 다다른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국체”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의“ 온상”인 지식인이 과녁이 된 것이다.    군국 일본은 언론통제의 법률적 도구로써 언론인들 사이에서“ 신문박멸법”으로 불린“ 언론2법”인 출판법과 신문법을 제정하였다. 전쟁을 독려, 미화하고 천황제 유지와 전근대적인 가족주의적 사회질서를 온존하여 궁극적으로는“ 신성한 천황제 지배구조의 유지”가 궁극적인 목표였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3개월 전인 1941년 9월 일본 정부는 기존의 사후 검열 체제를 사전 검열 체제로 전환하였다. 단적인 예로 신문이나 잡지에서 사진을 게재하려면 정부가 정해주는 컷만 사용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는 사상에서 사고방식 그리고 사람에의 통제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당국의 언론 지도와 더불어 어용평론가에 의한 대필이 횡행하는 등 전시 하의 학자, 언론인, 평론가, 예술가, 저널리스트는 일본의 가장 암흑시대에 열성적인 부역자이자 군국주의의“ 나팔수”로 전락하였다.    이상 살펴본 언론통제는 과거 일본 군국주의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나라도 군사정권 시대에“ 언론지도”의 이름으로 언론통제가 악명이 높았던 나라였다. 2017년 3월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기무사 문건에“ 언론통제”와“ 검열”이라는 문구가 나온 것을 보면 우리 사회 일부에서 과거 군사정권과 같은 언론관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 끔찍하다.                               장회식 뉴욕주립대학교 박사, 역사학자·국제정치학자    
    2018-10-18
  • 낯익은 길, 하지만 아직 걸어보지 못한 길
    낯익은 길, 하지만 아직 걸어보지 못한 길  6·12 북미 정상회담은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역사적인 이벤트였다. 각국에서 싱가포르로 파견한 취재진만 최소 3000명에 달했다고 전해질만큼 취재 열기도 뜨거웠다. 이 와중에 우리는 적잖이 불편한 사건 하나를 접하게 된다. 사전 취재차 북한 대사관저에 접근했던 KBS 인력 가운데 두 명이 현지 경찰에 의해 억류되었다가 6월 9일 밤 비행기로 귀국하게 된 것이다. 비록 자진출국 형식이기는 했으나‘, 무단 침입’에 이은‘ 억류’와‘ 추방’이라는 자극적이고 불명예스러운 단어가 이들의 어깨 위에 지워졌다.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을 갈망하던 국민들은 행여나 이런 사태가 현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까 노심초사했을 테다. 그래서일까, 냉소를 넘은 분노가 표출됐고, 취재진의 행동은 시쳇말로 기레기의 전형처럼 취급됐다.  이를 두고‘ 적잖이 불편한 사건’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 행동의 불법성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이 사건은 의외로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관행과 현지법의 충돌 이상의 문제가 내포해 있기 때문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동일한 사안에 대한 기자들과 대중의 시각 차이가 선명하다는 점이 문제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백이면 백 어떻게 그런 몰상식한 일을 저지를 수 있냐고 할 테다. 그러나 기자들이라면 십중팔구 취재 현장에서 언제든 일어날 법한 해프닝으로 간주할 것이며, 오히려 싱가포르 현지의 과도한 대응에 대해 불만을 품었음 직하다. 정보 공개에 인색한 북한, 자유로운 취재 활동 보장과는 거리가 먼 싱가포르의 특성을 고려할 때, 기자들의 이런 인식에는 이해할만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천 가지 만 가지 사유를 들어 북한 관련 보도 행위의 어려움을 설명하려고 한들, 이미 불법으로 낙인찍힌 행위에 대해 조금이나마 공감해줄 대중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취재 현장의 고충과 대중들의 차가운 인식 사이에 놓여 있는 이 심대한 간극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 불행히도 그에 대한 답 역시 단순하지 않다. 기자와 대중을 가르는 깊고도 넓은 골짜기는 오랜 기간 침식되어 온 신뢰의 문제로 귀결된다. 약간 궤가 다르기는 하지만, 지난 연말에 개최됐던 한중 정상회담 당시에도 이와 비슷한 문제가 대두됐던 바 있다. 미디어에 호의적이지 않은 중국 공안이 현장 통제에 부응하지 않는 한국 기자들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했다. 자칫하면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되는 것은 물론 한반도의 엄중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 정부의 노력이 무산될 수도 있을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다. 다행히 더 이상 문제가 악화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깔끔하게 해결된 것 역시 아니었다. 한국 대중들은 우리 기자를 두둔해주지 않았다. 과잉한 취재 경쟁과 현장 통제에 응하지 않은 기자들의 행태를 문제 삼는 목소리가 더 컸다. 미운 놈이 당한 일은 그 미운 놈 탓일 거라는 심리가 작동했음은 물론, 그런 심리를 뒷받침해줄 만한 정보를 찾는 일에도 대중은 적극적이었다. 이처럼 높은 불신의 벽이 허물어지지 않는 한, 그리고 대중들이 결코 정보 약자로서의 지위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 한, 취재 현장과 대중을 가르는 심연의 골짜기가 메워지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 해결을 향한 기자들 스스로의 노력은 시작되어야만 한다. 특히 문자가 아닌 영상이 저널리즘의 생산과 소비의 핵심이 된 매체 환경에서는 영상 취재와 보도에 관련된 엄격하면서도 현실적인 윤리 준칙이 세워져야 할 뿐 아니라 기자들 스스로에 의해 적극적으로 준수될 필요가 있다. 물론 보도 윤리에 관련된 논의는 그간 여러 방식으로 진행되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각종 협회와 여러 언론사 단위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보도윤리에 대해 고민한 결과를 가이드라인 형식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기자들이 말 그대로‘ 갑’일 수 있었던 시대와는 달리, 윤리적 취재와 보도 행위의 중요성에 대한 현장의 인식이 제고되고 있으며, 그만큼 민감성과 책임 의식도 어느 정도는 개선된 측면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와 같은 가이드라인의 존재와 필요성에 대해 실질적으로 공감하며 실천하는 비율은 그리 높지 못할 것이다. 윤리 준칙을 지키는 것보다는 그것을 어겨서라도 특종을 따내는 것이 더 큰 보상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단독 보도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쓸 만한 뉴스거리와 영상을 얻어오지 못한 채 데스크로부터 꾸지람을 듣는 일은 현장의 기자라면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싶어 할 일이다. 이른바‘ 물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윤리 준칙을 준수하려는 태도가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기에는 우리 언론 현실이 너무나 경쟁적이고 거칠다.  우리가 흔히 선진적일 것이라 짐작하는 해외의 사례를 보더라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언론인들이 취재보도 윤리를 지켜 칭송을 받는 것보다 그 반대의‘ 기레기 짓’으로 비판받는 사례가 압도적으로 많다. 모범적 행위보다 잘못이 더 쉽게 눈에 띄게 마련이며, 취재와 보도 과정에서의 윤리성은 겉으로 부각되기 어려운 탓이다. 우리와 그들이 다른 점이 있다면, 좀 더 윤리적이고 품질이 높은 보도를 수행하는 측과 그렇지 못한 측이 일종의 분할된 시장 형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흔히 권위지라고 부르는 품격 언론(quality press)과 기타의 황색언론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황색언론의 비윤리적인 행태를 비판하면서도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저품질 저널리즘을 소비한다. 황색언론 역시 그 생리를 정확히 알고 있다.  명확히 불법적인 행태에 따른 법적 소송을 당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필요에 따라 윤리를 어기는 데 주저함이 없으며 사람들도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품격 언론의 경우는 다르다. 탈법적 행위는 말할 것도 없고, 윤리에 어긋나는 취재보도는 품격 언론의 시장성을 직접적으로 갉아먹는 요인이 된다. 이들에 대한 신뢰, 그에 뒤따르는 권위, 그리고 경쟁적 매체 환경에도 불구하고 얻어지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시장 지위는 그만큼의 엄격함을 요구한다.  따라서 좋은 영상 보도 준칙을 수립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행위는 믿을만한 언론과 그렇지 못한 언론을 가르는 것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모든 언론이 윤리적 이리라 기대하긴 어렵다. 윤리적 저널리즘 행위에 따르는 구체적인 보상, 즉 신뢰를 얻고 권위를 확보할 수 있다는 기대가 없다면, 잘 만들어진 영상 보도 준칙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구현은 여전히 요원한 일이 될 터이다. 이런 점에서 국가와 공공기관의 목적의식적 협력이 긴요하다. 매체 폭발의 시대에도 상대적으로 소수의 언론에게 더 원활한 정보 접근 권리가 주어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국가와 공공기구는 단순히 기득권 언론을 순치하기 위한 당근으로서 취재 특권을 용인하기보다 윤리적 저널리즘을 통해 대중적 신뢰와 권위를 확보해줄 수 있는 언론을 촉진하고 육성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좋은 영상 보도 준칙을 수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실효성을 가질 수 있는 장치를 언론과 사회가 함께 마련해가는 것도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언론에 대한 대중들의 감성적 반응은 전문적 관점에서 보면 그다지 일관적이지 않으며 심지어 올바르지 않을 경우조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모종의 시대정신이 흐른다. 믿고 의지할만한 정보, 권위를 위임할 수 있을만한 언론에 대한 여전한 열망이 그것이다. 저널리즘 윤리는 불법과 합법을 구별하는 법적 지침이나 선과 악을 가르는 도덕적 준칙이 아니라,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 정보의 생산과 유통을 가능케 하는 구체적 행위의‘ 상호적’ 기준이다. 그동안 잘 검토되어온 여러 사례가 있는 한편, 아직도 판단과 실험을 요하는 모호함도 그득하다. 언론의 위기는 기성 언론의 패망으로 이르는 닫힌 길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이어져 오지만 변화된 환경에 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언론 행위의 수립으로 나아가는 열린 길이다. 두렵지만 과감히 그 길을 먼저 걸어가는 것이 책임 있는 언론과 저널리스트들의 숙명이 아닐까. 정준희 겸임교수 /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2018-10-18
  • 영상 저널리즘의 위기와 기회
    영상 저널리즘의 위기와 기회  1912년 타이타닉호가 침몰했을 때 생존자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베인즈 뉴스 픽쳐스(Bain’s News Picture)를 통해 공개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사진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생존자 중 아마추어 사진가가 있었고, 그를 통해 미학적으로는 조악하지만 현장의 생생함이 전해지는 사진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약 100년이 지난 현재 영상 저널리즘은 그때와는 훨씬 더 개방적이고 대중적인 영역이 되어 가고 있다. 오늘날 현장을 이야기할 때 흔히들 영상 저널리즘은 위기라고 이야기한다. 시민들보다 적은 특권을 누리는 현장, 정보를 직접 컨트롤하는 정부와 기업들, 이미지의 쓰임은 압도적으로 늘어났지만 이를 엄격하게 연출하려는 권력, 거짓 이미지가 쉽게 만들어지는 기술적 배경. 분명 이 모두에 둘러싸인 영상 저널리즘은 방송뉴스에서 가장 변화와 부침을 겪고 있는 영역 중에 하나일 것이다.   실정은 외국도 다르지 않다. 미국에선 퓰리처상을 탄 베테랑 사진 기자 존 화이트(John white) 조차 해고되기도 하고, 영국 BBC 취재 기자 출신의 한 교수는 BBC에서도 영상의 품질보다는 영상의 있고 없음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우리와 다르지 않은 분위기를 설명했다. 또 영국 주류 방송사인 ITV의 베테랑 카메라 기자 역시 아이폰이 우리의 적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더 넓은 시장을 가진 영미권의 주류 미디어의 어려움이 이 정도이니 우리가 겪고 있고 또 겪게 될 어려움은 더욱 혹독할지도 모른다.   이 시점에서 답답한 점은 현재의 상황을 위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이를 극복할 대안의 모색과 새로운 시도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지난 5년 회사가 시대착오적으로 부서를 없애고 영상의 새로운 포맷과 플랫폼에 투자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사 밖에서 그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발견한 흥미로운 지점은 영국과 미국 등 서구 미디어 기업들은 20여 년 전부터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문제점에 대한 고민과 대안을 모색해 왔다는 점이다. 이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시도의 방향은 단순한 스타일과 포맷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두 가지 이슈를 건드리고 있다.    첫 번째는 보도하는 자의 자격의 문제인 주체(subject)의 문제로, 쉽게 말해‘ 너희가 누구인데 우리를 관찰하고 우리를 규정할 권리를 갖는가’의 이슈이다. 새로운 촬영기기 등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서구의 매체들은 주체의 자격 문제를 끊임없이 건드려왔다. 현재 일반적인 뉴스의 포맷은 정보의 효율적 가공과 전달에는 용이하지만, 보도하는 자와 보도되는 자 사이에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내재되어 있다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한 대안적 시도들은 새로운 기술과 장비가 등장할 때마다 계속되어 왔다. 보다 객관적인 제작자의 위치를 찾기 위해 시도된 다이렉트 시네마(Direct Cinema)에서부터 객관의 한계를 인정하고 제작자의 개입을 인정한 시네마 베리테(Cinema Verite)를 넘어 진실을 체험적 주관적 범위로 좁힌 1인칭 다큐멘터리의 등장 모두 제작자와 취재원의 비대칭적인 권력관계에 대한 대안적 양식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주류 미디어에 대항할 수 있는 표현의 창구를 가진 시청자들의 반응 역시 일방적 커뮤니케이션(Top-down)을 거부하고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하는 흐름 안에 있음을 카스텔스(Castells) 등 뉴미디어 연구자들 역시 강조하고 있다.    서구 미디어 혁신의 두 번째 방점은 새롭게 등장한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의 플랫폼과 어울리는 새로운 스토리텔링(Storytelling)에 대한 이슈이다. ‘매체가 그 시대의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 양식을 규정한다’라는 플루셔(Flusser)의 말처럼 새롭게 등장한 플랫폼은 커뮤니케이션의 패러다임 전체를 바꾸고 있고 영상은 그 핵심적 재료가 되고 있다. 문제는 영상 촬영이 대중화된 시대에 현장의 생생함은 타이타닉의 사례에서처럼 점점 더 시민의 카메라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흐름은 새로운 제작방식을 요구한다.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감독이 전 세계 시청자들이 제공한 이미지로 만든 콜라 주식 다큐멘터리‘ 하루 동안의 삶(Life in a day)’은 이미 십여 년에 시도되었고, 영국 가디언(Guardian)이나 미국 뉴욕 타임스(Newyork Times) 등 혁신을 통해 생존을 모색하는 다양한 영상 에세이들과 프로젝트는 지금도 끊임없이 영상중심의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이 두 가지 교점 위에서 미디어 기업들이 그리는 공통된 전략은 결국 시청자와 어떻게 더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수평적 눈높이에서 올바른 포맷과 기술로 대응할 수 있는가로 요약할 수 있다. 2016년 로이터 연구소(Reuters Institute)가 BBC 등 30여 명의 주류 미디어 경영진과 매체 전략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 담당자들은 생존을 위한 핵심어로 시청자와의 관계 맺음 (Audience Engagement)을 꼽았고 그 지점에 상당 부분 공을 들이고 있다고 응답했다. 이런 흐름은 영상이 생산되는 방식의 중요한 변화를 요구한다. 지난 방송산업은 부침은 있을지언정 호황의 시기를 지나왔고 그래서 영상기자들은 혁신의 필요성을 크게 체감할 기회가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현장의 특권적 지위와 포디즘(Fordism)식의 효율적 표준화를 기준 으로 했던 영상 저널리즘은 피할 수 없는 커다란 변곡점에 와있다. 이는 비단 우리 직종만의 문제가 아니며 이 시점만의 문제도 아니다. 지금 4차 산업혁명의 파고는 모든 직종에게 각 직종이 고등 지식 산업에 편입할 수 있는가 아니면 단순노동으로 표준화될 것인가를 묻고 있다. 이 질문에 응답하면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지금보다 혹독한 부침을 겪을 것이다. 분명 답은 기존의 낡은 방식으로 도달할 수 없는 언덕 너머의 혁신 위에 있다.    김우철 / MBC          
    2018-10-18
  • 평화, 새로운 시작 4.27 남북정상회담 취재기
    평화, 새로운 시작  4.27 남북정상회담 취재기  6.13 지방선거가 있었고 대한민국은 파란 나라가 된 듯하다. 평창올림픽부터 시작된 평화의 무드, 전번의 우라질 정권이 망쳐놓은 평화적 외교적 관계들이 점차 제자리를 찾는 느낌이다. 우리 청와대 출입 기자들은 그 한가운데 서 있다. 뭐, 이미 2차 정상회담에 북미회담까지 마친 마당이니, 다 아는 얘기는 빼자. 역사적 그날! 새벽 세시 반에 집에서 나와 춘추관에서 마련한 버스를 타고 판문점 도착, 일곱 시다. ▶   평화의 집 앞에서 필자  조금 있으면 초등학교 시절 반공 포스터에 늑대 얼굴, 피 묻은 빨간 손으로 그렸었던 그. 그의 손자가 우리나라 대통령을 만나러 우리의 땅을 밟는단다.  청와대 풀팀은 각 위치를 배정해 위치별 시간대별로 임무를 지정했고 나는 단독으로 북측으로 가는 것이 성사되었다기에 자원등판 하였다. 오전 8시 30분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중계 담 당 한 명과 사진기자 한 명, 그리고 나였다. ▶   판문점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북측 판문각 앞에서 두 정 상을 취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필자  보병 1사단 출신이고 수습 때부터 국방부 판문 점 담당이었으며 북측 통일각도 가보았고 해서 예 전 생각들, 흥분된 상황들이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북측 경호원. 약간은 예스러운 양복 차림에 바지통이 15인치는 족히 되어 보였고 그 바지 안에 는 칼이며 표창 같은 무성 무기들이 가득할 것 같은 분위기. 양손의 정권은 혹독한 단련의 증거인 마냥 크기가 대추만했고 피부가 벌겋게 까져있었다.  이런데 나올 정도면 당연히 훈련을 많이 한 무적의 정예요원이겠지… 잠시 후 검측. 휴대용 금속탐지기와 맨손을 이용한 몸 검사가 끝나고“, 이거 건반 좀 다 눌러 보시라요.”“, 네? 뭘 눌러요?”“, 건반을…”“, 건반?? 아 ~스위치요.” ENG카메라에 있는 스위치를 모두 켜고 끄고, 그가 알아듣든 말든 그 스위치가 그 건반이 어떤 기능임을 모두 설명하여야 했다. “그… 렌즈 좀 빼 보시라요.”‘, 나 참 기가 차서.’ 렌 즈를 뺄 수도 있었지만, 살짝 기분이 상하던 터라 짜증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그의 주먹이 더 크게 보여서 그러지도 못하고, 기술적인 문제가 생긴다며 버텨서 통과. 가방 검사.  자잘한 장비들은 통과. 아침에 안 먹 고 아껴 놓았던 음료수. 종이이며 속지가 은박으로 된 컴퍼지션4로 의심될만한 비주얼의 직육면체 포도주스가 금속 탐지기 소리를 계속 내게  했다. 남북은 서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혹시라도 자존심 건드릴까 봐 드셔도 된다는 소리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한참을 들고 들여다보 던 북측 담당자는 결국 통과를 선언한 듯 말없이 건네주었다. 이제는 생수. 마셔보란다. 마셨다. 사진에 찍힌 물 마시는 사진은 목이 말라서가 아님을 밝힌다. ▶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북측 판문각 앞에서 물 마시는 필자  TOT는 다 되었고 남으로 넘어오는 김 위원장의 모습을 상상하며 준비를 하고 있는데, 북측담당 자가 위원장님 내려오실 때는 보기 싫은 게 앞에 있으면 안 되니 장비만 놓고 사람은 숨어 있어야 한단다.  며칠을 머릿속에 그리고 나름 몸 컨디션 도 만들었는데 이게 뭔 말이요? 말이요? 당나귀요? 두 정상이 만나서 악수하실 때 나가서 북쪽을 보실 때 촬영하고 남쪽으로 몸을 돌리시면 피해야 한단다. 이건 말이요 막걸리요? 물리적으로  시간상으로 언제 달려나가고 언제 준비하고 언제 찍냐고! ▶   남측 문재인 대통령과 북측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5월 27일 오전 판문점 군사분계선(MDL)에서 상봉했다. 문 대통 령은 김 위원장의 안내에 따라 군사분계선을 표시하는 콘 크리트 턱을 넘은 뒤 북측 판문각을 마주 보고 기념촬영을 했다.  이제 그 시간이다. 우르르 사람들 지나가는 소리가 나고 나와도 된다는 사인을 받고서 뛰어나 간다. 트라이포드는 펴볼 엄두도 안 나는 찰나의 시간. 약속에는 없었던 북한 기자… 북한 애들 둘 이 앞에 바짝 붙어서 촬영을 하느라 우리 대통령이 가린다. 이제 두 정상이 남쪽으로 돌아서면 끝이다.  아 혈압! 그 두 북한 기자들이 큰소리로 촬 영 끝났다고 90도로 인사를 하며 자리를 이탈한다. 두 정상이 돌아선다.  남측 포토라인의 그림을 위해 두 정상의 뒷모습에서 도망치듯 아까 숨어 있던 자리로 복귀, 끝. 폭망, 굴욕, 짜증, 허탈, 이럴거면 왜 오라고 한 거니…우리는 남북 정상의 역사적 판문점 만남을 취재 하고 또 취재했고 가슴엔 왠지 모를 뜨거움이 채워져 갔고 돌이킬 수 없이 슬프게 지나간 시간들 에 대한 가슴 저림을 경험해야 했다.  청년이었던 남편은 소녀였던 부인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서까지 만날 수 없었다. 사전답사, 망원렌즈, 사다리, 몸싸움, 기싸움, 송 출, 중계, 달리기, 기다림, 또 기다림. 원맨시스템. 풀단의 세분은 평화의 집에서 하루를 보냈고 자 유의 집현관에서, 옥상에서, 팔각정 위에서, 나무심는 앞에서, 남북이 이어진 길 옆에서 코리아 풀은 한반도 평화의 소식을 전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기록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의 가슴은 더 뜨겁고 더 안타까운가 보다.                                                                                                                                                        박승원/SBS
    2018-07-04
  • 싱가포르 북미회담 취재기
    싱가포르 북미회담 취재기  회담만큼 이슈가 된 날씨        지난 6월 12일, 정전협정 이후 65년 만에 북한과 미국의 두 정상이 만나는 역사적인 회담이 싱가포 르에서 개최됐다. 북미 정상의 만남을 담고자 한국 취재진은 물론 세계 유수의 언론사 취재진이 싱가 포르에 집결했다.   ▶ 리센룽 싱가포르 대통령궁‘ 이스타나’ 앞에서 취재하기 위해 국내외 언론이 집결하고 있는 모습. 얼굴은 필자  나 역시 회담을 이틀 앞둔 10일 새벽 싱가포르에 도착해 김정은 국무위원장 입국 당일과 맞물려 공 항취재부터 서둘러 투입됐다. 휴식을 충분히 맛볼 틈새 없이 긴장감을 품고 싱가포르 창이 공항‘ VIP COMPLEX’라는 VIP 전용 입구 앞에서 김 위원 장 차량 행렬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소위‘ 뻗치기’를 시작하는데 싱가포르의 날씨부터 모든 취재진을 힘들게 했다. 알고 보니 적도 근처에 있는 나라였고 기온은 35도를 넘나들며 습도는 80% 이상의 고온다습한 환경이었다.   오랜 시간 기다리며 김 위원장의 싱가포르 첫 도 착을 경호 문제로 먼발치에서 맞이했고 힘겨운 날 씨에 고통스러워하는 주변 취재진의 얼굴이 더 인 상적일 정도로 본격적인 회담 당일 취재에 대한 걱정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6월 12일 북미회담 당일 김 위원장이 머무는 세 인트 레지스 호텔 앞에서 새벽 4시부터 기다림이 시작됐다. 호텔 주변의 도로는 전부 통제되었는데 1톤 정도의 무게에 길이는 1.5m 정도 되는 콘크리 트 블록이 호텔 주변을 모두 감싸고 있었다.    군인과 경찰은 기관총으로 무장을 하며 첫날보다 더 삼엄한 통제와 경호로 취재진을 맞이했다. 호텔 옆 건너편 보도블록이 김 위원장의 출입과 차량을 취재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모든 취재진이 한 곳에 밀집하여 답답하게 붙어있을 수밖 에 없는 상황이었다.    옆 동료와 불편한 환경을 투 정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어보지만, 새벽부터 누적 된 피로와 언제 나가고 들어올지 모르는 기다림의 긴장감, 가만히만 있어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습 하고 더운 날씨가 더욱 심신을 지치게 했다.   ▶  김정은 국무위윈장 숙소인‘ 세인트 레지스호텔’ 블록 앞에서 필자의 모습    김 위원장이 호텔을 빠져나간 12일 늦은 밤 함께 취재하던 YTN 박한울 영상기자는 마지막 취재를 마침과 동시에 그간의 더위와 취재 스트레스로 쌓 인 데미지로 갑자기 쓰러져 응급처치까지 받는 긴 박한 상황도 있었다.   심지어 한 타사 동료는 온몸 에 빨간 두드러기 발진이 일어난 사진을 보여주며 좋지 않은 컨디션을 증명했다. 본인도 평소에 없던 치통까지 발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놀라움 을 금치 못했다. 당일 레지스 호텔 앞은 그야말로 그늘 한 점 없는 가장 열악했던 포인트 중 한 곳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생중계 경연의 장    북미회담 개최지 선정과 북한 선발대 취재 등으 로 5월 초부터 파견된 취재팀부터 이틀 전에 파견 된 취재진까지 싱가포르에 속속 모이며 회담장 중 심으로 곳곳에 취재 포인트를 자리 잡기 시작했다.   회담 당일 트럼프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차량 이 동이 유일하게 보이는 베이 호텔 루프탑을 비롯하 여 샹그릴라 호텔, 센토사섬 카펠라 호텔 입구, 세 인트 레지스 호텔, 백악관 프레스센터, F1 국제미디 어센터 등에서 LTE 생중계로 포인트를 잡고 시시 각각 특보상황에 맞춰 중계했다.    이번 싱가포르 회담취재는 영상기자가 LTE를 이용해서 온종일 현장 라이브를 진행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회담일정 상황전개에 따라 생중계를 급하 게 물릴 때가 많았다.   특히 회담 하루 전날 11일 미 국 측 성김 주 필리핀 미국 대사와 북한 측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실무회담이 톱뉴스였던 만큼 LTE 생중계가 많았는데 실무 회담자가 회담을 마칠 것 이란 소식이 퍼질 때쯤 기자 LTE 생중계와 현장취 재를 동시에 짊어져야 하는 딜레마적인 순간이 찾 아온 것이다.    기자 LTE 생중계를 코앞에 두고 있었 지만, 실무회담자들 간에 어떤 중요한 협상들이 오 갔는지 기자들의 적극적 질문 공세가 예상됐기 때 문에 동료 기자와 긴급히 상의 후 실무회담자 현장 커버를 먼저 했고 곧바로 기자 LTE 중계 스탠바이 로 역할을 전환했다.    북미회담 당일에도 김 위원장이 회담장을 가기  위해 호텔을 나서기에 앞서 LTE 생중계가 수시로 이루어지는 상황이었고 현장취재도 동시에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모든 취재진이 김 위원장의 머리 카락 한 올이라도 포착하기 위해 망원렌즈는 물론 탑포트, 사다리 등을 이용해 초점을 맞췄지만, 경 호원들의 움직임만 보였을 뿐 대체로 김 위원장이 차량을 탑승한 후의 행렬만 포착됐다.   LTE 기자 생중계를 앞두고 스탠바이를 하던 상황에 김 위원 장의 경호원들이 분주한 움직임이 포착되면서 이 동을 감지했다.   곧바로 현장취재의 앵글이 라이브 로 전환돼 서울에 방송되고 있다는 전달을 받았고 혹여나 USIM 데이터, 배터리 소진상태 이상으로 LTE가 중간에 끊어지지 않을까, 예견치 않은 실수 가 있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순간도 있었다.    김 위원장이 회담을 마치고 숙소로 갈지 공항으 로 갈지를 놓고 모든 언론사가 예측만 난무하던 찰 나 중계 순서에도 없던 현재 상황을 특보로 전하라 는 사인을 받은 동료 기자는 임기응변으로 라이브 중계를 해내기도 했다.   이런 예상치도 못한 요구에 신속히 응답하는 우리도 믿기 어려웠고 사고가 안 난 것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곁에 있던 외신 기자들 도 현재 상황을 정신없이 실시간 보도하느라 좁은 공간 탓에 각자의 앵글을 침범하는 불쾌할 만한 상 황도 있었지만, 모두가 동병상련이었기에 가벼운 미소로 서로를 응원했다.   이런 현장 상황은 앞으로도 자주 발생할 일이고 사전에 합의된 룰에 의해 LTE 중계상황에 대처하 거나 룰을 벗어났다면 영상 기자의 순발력 있는 판 단을 요구하는 순간이 온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사 안이 중요한 큰 이슈 현장에서는 영상기자 2팀이 현장취재와 LTE 라이브를 각각 운영해야 안정적 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인력난이 해결되면 이런 부분은 차츰 충족될 것이라 기대를 해본다. 또한 현장에서 스탠바이 상황으로 장시간 LTE를 켜놓고 있다 보니 데이터가 빨리 소진되어 많은 유 심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싱가포르 통신사는 Singtel, Starhub, M1 3개 회사가 대표적이다. Singtel이 제일 큰 통신사고 나머지는 비슷한 규모 였다. LTE유심도 50%이상 Singtel 것으로 사용 하는 것이 안정적이라 판단했다.   LTE장비에 사용 하는 마이크로 USIM은 현지 통신사 대리점이나 편의점에서 쉽게 구입 가능하고 매장에서 유심 등 록을 해줘 LTE장비나 휴대폰에 끼우면 바로 개통 됐다. 단 외국인(여행자)은 5일, 7일, 10일, 15일 등 단기간 사용하는 유심을 시용해야 하며 1인당 3개 밖에 구입을 못하는 조건이 있었다.   Singtel이 안 정적이다 보니 취재진이 몰린 숙소 주변 편의점에 는 모두 동이 나서 차로 20~30분 거리의 편의점을 찾아 나서 공수해 오기도 했다.   이번 출장 기간 동 안 장시간 LTE중계로 다량의 유심이 필요해 취재 기자, 중계 스태프 등을 통해 대리 구매해 조달까지 하며 현장중계 취재에 임했다.    싱가포르 현지 영상기자 팀장을 필두로 영상기자 6팀이 서로의 얼굴을 마지막 날에 겨우 볼 수 있을 정도로 일정이 녹록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다 설명 할 수 없을 정도로 각자 자기 포인트에서 일어난 여 러 고충을 다 싣지 못하는 상황도 아쉽기만 하다.   대체로 충분한 준비 없이 급히 해외 출장을 가는 것이 우리 부문의 현실적인 여건이지만 이러한 여 러 모습을 상기하며 영상취재 부문이 세계적인 이 슈 취재를 앞두고 선제적으로 출장 TF팀을 꾸려 대응하는 모습을 차근차근 해나갔으면 한다.    해당 국가의 날씨, 종교, 인종 등 사회 문화적 취재 여건 을 미리 파악해서 사회문화적 충돌에 대비하고 합 법과 불법의 경계를 명확히 가늠하여 취재하는 방 안도 강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영상기자의 LTE 생중계 비중이 높아지면서 LTE 의 효율적 운용과 긴급 상황 대처법, 취재 대상의 정보와 접근법, 다각도적 차별화 등을 사전에 충분 히 논의해 나간다면 그 전보다 더욱 효율적이고 덜 소모적인 선진적 취재가 될 것으로 본다.    입사 후 그 어느 때 보다 손에 꼽을 만큼 힘들었 던 해외 출장이었지만‘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에 대 한 성공적인 회담’에 일조했다고 자부하며 위안을 삼는다. 그 날, 무엇보다 무덥고 혹독했던 날씨 속 에서 함께 땀 흘린 모든 영상기자들에게 정말 고생 했고 자랑스러웠다고 전하고 싶다!                                                                                                                                                 정인학 / MBC    
    2018-07-04
  • 협회 장완익 자문변호사, 사회적참사특조위 상임위원장에 선출
    협회 장완익 자문변호사, 사회적참사특조위 상임위원장에 선출     ▲인사말하는 장완익 상임위원장.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진제공>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 자문변호사로 활동했던 장완익 변호사(법무법인 해마루)가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회적참사특조위) 상임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사회적참사특조위는 지난 3월 29일 제1차 전원위원회를 열고 장완익(55) 상임위원을 신임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장 위원장은 "가습기살균제참사와 4·16세월호참사는 생명보다 돈을 더 추구했던 자본의 탐욕, 국민의 생명에 위해가 가해지는 상황을 방치했던 국가의 무책임으로 발생했다"면서 "참사의 진상규명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또 장 위원장은 "진실이 드러나지 않으면 생명 경시로 인한 참사가 또다시 발생할 것이고 평범한 우리 중 누군가가 또 다른 사회적 참사의 희생자가 될 것"이라며 "진실을 밝히지 못하는 사회는 안전한 사회가 아니므로 피해자에 대한 치유와 회복도 사회가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장완익 신임 위원장은 지난해 본 협회의 자문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영상저작권 입법화에 대한 자문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반대 집회 당시 카메라기자 폭행 가담자에 대한 경찰 고발, 'MBC 블랙리스트' 영상기자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성명서 발표, KBS, MBC파업 당시 성명서 발표 등 협회에 대한 법률자문을 해 왔다.      협회는 장완익 자문변호사 후임으로 법무법인 해마루에서 활동하고 있는 장홍록 변호사를 새로 위촉했다. 장 변호사는 앞으로 협회의 각종 법률을 자문한다.   
    2018-07-04
  • 러시아 월드컵 현장
    러시아 월드컵 현장   월드컵을 향하여  어린 시절, 러시아는 공산주의 붉은 장막에 가려 있었다. 또 동시에 소비에트 깃발의 낫과 망치, 구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얼굴 등 섬뜩하고 무시무 시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러시 아 영토 안에 진입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 던 시절이었다. 20세기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 는 체제 대결, 냉전시대는 1980년대 말 고르바초 프에 의해 막을 내렸다. 그런 러시아로 향했다. 북미정상회담에 나라 안팎의 이목이 쏠려 러시아 월드컵은 시종일관 무관심 속에 놓여 있었다. 활주 로를 이륙해 서해와 베이징 쪽으로 방향을 튼 비행 기는 몽골 울란바토르, 바이칼 호수 서안 상공을 날 아 비행했다. 작은 비행기 창문을 열 때마다 눈부신 태양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기내 TV 화면상의 서 울은 점점 암흑으로 덮여가고 있었지만, 러시아의 광활한 땅은 여전히 환했다. 나는 어둠으로부터 쫓 기며 서쪽의 태양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듯했다. 약 9시간 만에 러시아 서쪽 모스크바에 내렸다.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SVO)은 약간 흐리고 쌀쌀 했다. 첫날, 숙소는 공항 근처‘ 홀리데인 인’이었다.  늦은 밤이 되자 호텔 방 창밖으로 묽은 천연색의 노을이 만개했다. 백야다. 침엽수 교목들의 숲 너머 로 광활한 하늘 전체가 묽은 주황색 루즈로 쓱쓱 칠한 것 같다. 공항 주변의 고독하고 황량한 대지 에 펼쳐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겔렌지크의 흑해  스웨덴 대표팀이 묵게 될 호텔은 겔렌지크에 있었 다. 나는 스웨덴 팔로우여서 모스크바에서 겔렌지 크로 날아갔다. 겔렌지크는 모스크바로부터 남쪽 으로 약 1200km 가까이 떨어져 있는 작은 휴양지다. 드문드문 풀이 나 있는 황량한 활주로에 비행 기가 내려앉자 기내에 있는 러시아인 승객들이 안 도감에 젖은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낯선 장면이었 다“. 구소련 개방 초기에 비행기 사고가 몇 차례 있 어서 무사히 착륙하면 이렇게 박수를 칩니다. 지금 은 많이 줄긴 했는데 여전하네요.” 가이드가 멋쩍 은 표정을 지으며 설명한다.  다음날 오후 2시쯤, 우리 일행이 스웨덴 대표팀 이 묵을 켐펜스키 호텔 로비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다. 전통의상을 입은 공연단 과 호텔 관계자들이 가장 먼저 온 한국 취재진과 함께 로비에 있었다. 외신 기자들은 한 명도 보이 지 않았다. 잠시 후 우리가 스웨덴 팀이 공항을 출 발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직후 FIFA 관계자라는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붉은색의 피파 단복(소 매 없는 폴로 티셔츠)을 입고 무전기를 들고 있었 는데 전체적으로 경험이 없고 어리숙해 보였다.  짧은 머리에 약간 겁먹은 듯한 큰 두 눈이 풍기는 무 언가 즉흥적인 느낌 때문에 우리는 어떤 상황이 와 도 잘 넘어갈 수 있으리라고 자신감을 가졌다. 하지 만 오산이었다. 사내는 우리에게 다가와 취재 신청 명단을 보여주며‘ 당신들은 이 신청자 명단 안에 없으므로 나가야 해’라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물론 우리는 항의했다. 그러나 어설퍼 보였던 그의 얼굴이 이내 단호해지더니 곧바로 호텔의 건장한 시큐리티 요원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었다. 분위기 가 험악해졌다. 결국 한국 취재진(신문이든 방송이 든)은 전부 쫓겨나다시피 호텔 로비를 나와야 했다. 그날 저녁 7시부터 스웨덴 대표팀의 공개훈련이 예정돼 있었다. 스파르타크 스타디움은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낮은 언덕에 있었다.  스타디움 입구 에는 구경하려는 현지인들이 제법 긴 줄을 서 있었다. 선수들은 스타디움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1시간 훈련을 마칠 때까지 객석을 완전히 채운 1,000 여 명 현지인의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흑해 연안 에 외떨어진 휴양지 마을 주민들에게는 스웨덴 대 표팀 공개 훈련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큰 이벤트 가 된 모양이었다. 훈련 후 저녁 8시경 스웨덴 감독과 주장 선수가 기자회견을 가졌다. 방송카메라는 한국과 외신(대 부분 스웨덴일 것으로 추측)이 각각 절반씩이었다. 뒤쪽에 방송카메라를 위해 마련된 작은 단상은 얇 은 나무판자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 바닥이 불안정 하고 흔들렸다. 누군가 한 발짝만 걸어도 카메라가 흔들렸다. 초반 몇 분 정도만 영어 질의응답이 오 갔을 뿐 그 이후부터는 스웨덴어 잔치였다. 스웨덴 기자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아니었지 만 아무래도 그들 자국의 취재 열기가 우리들보단 뜨거워 보였다.  송출은 대부분 미디어센터에서 했다.(러시아는 영 토가 워낙 넓어 호텔 내 전송 속도는 제각각이다.) 미디어센터의 전송 속도는 나쁘지 않았다. 출발 전 부터 웹하드가 아닌 구글 드라이브를 이용하기로 정리가 돼 있었다. 최대한 필요한 부분만 작게 잘라 작은 덩어리로 나눠 보내는 방식을 택했다. 밤 11시가 되도록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이들은 전부 한국 기자들이었다. 어딜 가든 가장 늦게까지 남아 일하는 한국인들의 근성(?)이란. 다음 날 역 시도 미디어센터에 가장 먼저 도착한 건 대부분 한 국 기자들이었다. 나 역시 다섯 번째 이내로 미디 어센터에 도착했다.  미디어센터 내에는 (스웨덴 측 에서 마련한) 음식들이 비교적 풍족했다. 연어 샌 드위치와 소고기 샌드위치, 조각 케이크, 캡슐커 피, 탄산수와 탄산음료 등이 항시 준비돼 있었다. 특히 커피가 나를 흡족하게 했다. 나는 미디어센터 에 머물며 하루에 적어도 6개 이상의 캡슐 커피를 마시고 점심도 샌드위치로 때웠지만 만족스러웠다. 니즈니로 이동하기 전날 밤, 포르투갈과 스페인 의 경기가 있었다. 우리 일행은 내 호텔 방에 모여 송출을 걸어놓고(속도가 엄청 느렸다) TV로 경기 를 봤다. 나의 동기는 기사를 정리하느라 분주하고 나 역시 영상클립 전송을 살펴보며 짐을 챙겼다. 그 와중에 호날두가 해트트릭을 해 포르투갈은 스 페인과 비겼다.  잠들기 직전 동기와 나는 호텔 방 아래 펼쳐진 황 홀한 빛의 흑해 물을 바라보았다. 바닷물은 말이 없이 잔잔했다. 어디에선가 흘러나오는 요란한 음악들 이 서늘한 바람을 타고 호텔 발코니로 모여들었다. 해변 백사장과 앙상한 나무들이 있는 인도 위로 사 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내 옆에서 발코니 난 간에 팔꿈치를 대고 서 있는 가이드가 말한다.“ 겔 렌지크는 소치, 상트와 함께 러시아 3대 여행지에 속해요. 러시아 사람들은 평소에 바다를 구경하기 힘들기 때문에 겔렌지크를 많이 찾는 거예요.” 스웨덴과의 1차전, 니즈니  비행기는 오후 5시경 니즈니 공항에 내렸다. 모 스크바도, 니즈니도 산 없이 드넓은 평원 지대였 다. 니즈니는 한때 구소련의 디트로이트라고 불릴 정도로 중공업이 번성했던 지역. 건물들은 대부분 5층 미만 높이에 낡고 오래된 것들이었다. 구도심 에는 아직도 전기선을 이용한 트램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구소련 시절 자동차인‘ 라다’도 시내 여기 저기에서 볼 수 있었다. 궁 성벽 뒤쪽 아래로 볼가강이 장대하게 흐르고 그 뒤로 아득한 평원이 펼쳐져 있다. 성벽이 있는 언덕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니즈니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언덕 위에서 볼가강변에 위치한 노브고르드 경기장도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우리와 스웨덴의 1차전이 열리기로 돼 있는 곳이다. 드디어 스웨덴과 1차전 당일. 예상은 했지만 FIFA 측의 통제와 관리는 삼엄하고 촘촘했다. 촬 영은 경기장 상단 플랫폼, 피치 위 골대 뒤쪽, 이렇 게 두 군데만 허용됐다. 미리 수령한 비표는 플랫 폼용과 피치용, 믹스드존 용이 모두 구분돼 있었 다. 피치 위에는 카메라기자 한 명만 허용될 뿐 그 이외의 사람은 즉각 내보냈다.  우리 가이드도 곧바 로 쫓겨났다. 전반, 후반 내내 담당자가 그렇게 계 속 검문하고 확인했다. 주파수 혼선 방지 때문에 와이어리스도 미리 허가받지 않은 경우는 쓸 수 없 었다. 경기 당일, 미디어센터 출입구부터 와이어리 스 장비를 통제했다. 우리의 경우, 혹시 모를 상황 을 대비해 가지고는 들어갔지만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제 우리의 취재 방식도 과거에서 벗어나 공동 의 취재 규칙을 지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경기 2시간 전 리허설 때 미리 가면 양 팀의 진영 을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우리는 한국팀 이 어느 쪽인지 확인했고 경기 시작 전에 한국이 공격하는 방향(스웨덴 골대)에 미리 가 있을 수 있었다. 하프타임 때는 반대편 골대로 이동했다. 경기 후 믹스드존 구역도 역시 검색이 삼엄했다. 비표가 위조인지 등을 치밀하게 확인하고 소지한 비표는 주최 측이 회수해 감으로써 하나의 비표를 두세 명의 기자들이 돌려쓰지 못하도록 했다. 믹스 드존에서는 지상파 기자들끼리 두 그룹으로 나눠, 동시에 두 명을 인터뷰할 수 있도록 짰다. 상트  2차전인 멕시코전이 열리기 며칠 전, 대표팀의 베 이스캠프인 상트로 이동했다. 니즈니에는 소나기 가 내렸다. 러시아에 온 뒤 처음 내리는 비였다. 상트의 우리 대표팀 훈련 캠프는 스웨덴 캠프보 다 훨씬 더 검문이 까다로웠다. 긴 줄을 섰고 검색 대를 통과하기까지 1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게다가 미디어센터 시설도, 인터넷 시설도 열악했다. (스웨 덴 측이 제공했던 간식도 없었다.) 기자회견장으로 마련된 작은 가건물이 미디어센터로 같이 활용됐다. 테이블 없이 의자뿐인 회견장 여기저기에 취재진이 바닥에 앉아 노트북을 껴안고 작업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한국 기자들, 어디에든 가장 많다.  취재 열기가 가장 높은 것은 언제나 한국 취재진 이었다. 스웨덴 첫 공개 훈련 때는 스웨덴 취재진, 외신들, 카메라 취재진 등이 많이 보였고 현장(훈 련장)에서의 생방송 시도도 많았다. 하지만 그때가 다였다. 심지어 스웨덴 독일전이 끝난 뒤 기자회견 장에는 기자들이 가득 찼지만, 카메라는 4대뿐이 었는데 1대는 HBO였고 나머지 두 대가 한국이었다. (나머지 한 군데는 모르겠다.)  종합해 보면 우리는 전략이나 강약이 없다. 현재 우리의 뉴스 방식은 지나치게 영상이 전체를 커버 하도록 요구한다. 이러한 방식은 카메라기자들의 비효율적인 노동이 투입되어야 한다.  노동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노동은 효율적이어야 한다. 난사되 고 광범위하게 접근하는 방식에서 타깃형, 목표추 구형으로 바뀌어야 한다. 종합 편집형 리포트가 지 속되는 한 카메라기자들의 과도한 노동 부담은 덜 어질 방법이 없을 것이다. 온 마이크 촬영도 지나 치게 많다. 경기장 내에서 온 마이크를 잡으려고 보안과 눈치 싸움을 벌이는 것은 우리를 제외하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볼 문제다. 분투하는 인간의 아름다움  6월 28일 대한민국 월드컵의 여정은 끝이 났다. 우리 대표팀은 독일과 경기해서 이겼으나 3위에 그쳐 조별 예선에서 탈락했다.  그렇지만 나는 대표 팀의 험난한 도전을 바로 곁에서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악조건 속에서 무언가 이뤄내고자 분투하 는 선수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전율을 느끼게 해주 는 것이었다. 선수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삶 속 에서 단지 이기는 것이 목적이 될 수는 없으리라. 인간에게는 승리하고 쟁취하고 가장 맨 꼭대기에 오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많다.  축구도 그 렇고 인간사도 그렇고 또 우리 언론도 그렇다.  취재기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이 말을 덧붙이 고 싶다. 우리 언론도 지난 10년 동안 실패와 역경 을 경험해야만 했다. 하지만 포기나 체념이 언론을 지배하지는 못하도록 지금도 우리는 분투하고 있 다. 어쩌면 16강 도전에 실패한 선수들이나 또 우 리 언론이나 모두 실패를 맛보며 어딘가를 향해 계 속해서 전진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대한민국 축 구의 미래에, 또 우리 한국 언론의 미래에도 선전을 기원한다. 김정은 / KBS
    2018-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