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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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상기자와 MNG 저널리즘
    영상기자와 MNG 저널리즘     ▲ 영상기자와 MNG 저널리즘    현재의 MNG(Mobile News Gathering)는 고화질 원본 영상을 HEVC 코덱(H.265)으로 압축한다. 모바일 통신망(LTE, 3G 등)을 통해 송출하는‘ 저용량 고효율’ 방식을 사용한다. 불과 1~2Mbps의 대역폭에도 화질과 관계없이 연결 가능하고, 3Mbps 이상의 대역폭에는 방송 가능한 고화질 영상을 실시간으로 연결할 수 있다. 기술적으로 SNG를 100% 대체할 수 없지만, 비용과 편의성 측면에서 강점이 뚜렷하다. 연결 안정성이나 화질 또한 점점 개선되고 있어 긴급한 재난·재해 및 사건·사고 현장에서 적극 활용되는 추세다. 특히 북미정상회담, 헝가리 유람선 침몰 사고 등 현장 생중계에 적극 활용되면서 해외 중계를 위한 핵심 솔루션이 되고 있다.    MNG는 2010년 3월 29일 ‘천안함 침몰 사고 해상 연결’을 시작으로 중계차 및 OFDM 장비를 활용할 수 없는 현장에서 사용되었다. 3G 통신망을 통해 (저화질이지만) 생중계가 가능했다. LTE 통신망 개통으로 인해 가용 대역폭이 증가하면서 고화질 영상 전송 가능, 연결 안정성 상승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MNG를 이용한 실시간 영상 송출 수요 역시 급증하고 있다.    통계적으로 볼 때 생중계보다 실시간 송출 목적의 사용이 더 많다. 영상취재 워크플로우도 이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기존에는 취재 시점부터 여러 가지 송출 과정을 거쳐 뉴스에 반영되기까지 물리적인 시간차가 존재했지만, 이제는 취재 현장을 연결해 뉴스에 실시간으로 반영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다만 MNG 송출 장비와 수신 서버가 한정되어 이를 운용하는 영상 데스크의 부담이 높아졌다.    KBS 보도본부는 5대의 MNG를 운용 중이다. KBS의 경우 특정 기간 (2018년 10월 1일~2019년 4월 13일) 중 평일과 대형 이벤트가 발생한 주말(141일) 간 사용된 횟수는 639회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 기간 1일 사용 횟수는 4.53회에 이른다. 운용 장비의 사용 횟수가 증가하면서 장비가 급속하게 노후화되고 고장 빈도도 역시 더 늘어났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KBS는 신규 장비 5대를 추가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7월 중 도입 예정이다.)    MNG는 ‘저용량 고효율’ 방식으로 고화질 영상을 송출할 수 있는 효과적인 장비이지만, 아직은 기술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많다. 현장 모바일 통신망 사정을 예측할 수 없어서 음영지역이나 오지에서는 연결 안정성을 보장할 수 없다. 이는 치명적인 단점이다. 현장의 영상기자가 이러한 위험 부담을 온전히 떠안아야 하는 것 역시 문제다. 현장에 파견된 영상기자 1인이 delay, bit rate 등을 조절하여 최적의 운용 조건을 맞춰 가며 장비 단점을 극복해야 하는 실정이다. MNG 운용과 관련된 모든 직종 관계자들의 장비에 대한 이해도가 장비를 실제로 윤용하고 사용하는 영상기자들에 비해 여전히 많이 떨어진다. MNG 사용의 현실적 문제점들에 대한 인지 역시 부족하다. 이러한 환경이 영상기자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장비 자체의 기능적 한계로 인한 방송 사고의 가능성을 언제나 열어둬야 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책임이 현장 영상기자 1인에게 전가되는 실정이다. 방송사고 시 현장 영상기자를 질책하고 운용 미숙을 의심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도 했다. 향후 나아지기는 하겠지만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전원 공급 문제 역시 현장의 영상기자들을 괴롭힌다. 항공기 탑승 시 160Wh 이하의 배터리 기내 반입을 1인당 2개로 제한(ENG 부착 배터리 제외)하고 있어서 해외에서 MNG를 장시간 사용해야 하는 생중계 시에는 뚜렷한 대책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고화질 영상의 실시간 송출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다. 곧 카메라에 MNG 기능이 부착되는 것이 가능해지리라 예상은 했었지만, 생각보다 빨리 현실화되었다. SONY는 이미 4K 카메라에 Dual Link Streaming 기능을 적용한 제품(PXW-Z450, Z280 등)을 출시했다. 유심 2개를 장착한 XDCAM Air를 이용해 영상을 실시간으로 연결할 수 있다. KBS 제주방송총국이 이미 2019년 4월 1일 ‘4·3 기획-일본 오사카 코리아타운 연결’에 XDCAM Air를 이용해 일본을 현지 연결했다. 아직 MNG에 비해 화질이 낮고 연결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추후 유심 슬롯이 많아지고 5G 통신망을 활용하게 된다면 MNG의 강력한 대체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MNG가 모든 영상기자 개인에게 지급되는 날도 머지않아 도래할 것이다. 모든 기술의 발전이 그렇지만 MNG 역시 영상기자들에게는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 이 진보된 기술 장비를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 예컨대 영상기자 개개인의 취재 자율성은 상당히 큰 위험을 직면해야 할지 모른다. 일반론이지만 데스크와 현장 영상기자의 관계는 구조적으로 대등하지 않다. 데스크나 책임자, 혹은 상급자가 모든 취재현장에 개입하고 통제할 수 있는 중앙 집권적 성격의 업무 형태를 불러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영상기자들이 자칫하면 오퍼레이터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MNG가 영상기자를 단순 오퍼레이터로 전락시키는 도구가 되도록 해서는 곤란하다. 영상기자 스스로 현장을 취재하고 판단하는 역할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윤대민 / KBS       
    2019-07-02
  • 기억의 상처를 안고
    기억의 상처를 안고     ▲ 한강에서 구조대원들이 시신을 수습하고 있다.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시커멓게 변한 한강은 점점 수위를 높이며 주변 공원들을 삼켜나갔다.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폭우에 취약시설이 붕괴되고 저지대가 침수되는 사고가 이어졌다. 턱 밑까지 물이 차오른 팔당은 견디다 못해 수문을 열었다. 커다란 입에서 쉴 새 없이 흙탕물이 뿜어져 나왔다. 방류를 시작한 댐과 침수 위험에 노출된 주변 마을... .    취재를 위해 차에 올라탔다. 잿빛으로 변해버린 강을 거슬러 한참을 올랐다. 거센 빗줄기가 차창을 때렸다. 늘 보던 한강의 모습이 아니었다. 공원의 농구 골대엔 수림만 겨우 보였다. 비가 얼마나 내린 걸까? 겁이 덜컥 났다.    땀이 난 손으로 카메라를 부여잡고 2시간쯤 달려 댐에 이르자 응급구조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차에서 얼른 내려 구조대원에게 물었다. 그는 별 말없이 손가락을 쭉 뻗어 시커먼 강가 수풀 쪽을 가리켰다. ‘등’이었다. 사람의 등. 발뒤꿈치부터 정수리까지 모든 세포가 빳빳하게 서는 기분이었다.    물 위에 둥둥 뜬 등은 중년 남자의 시신이었다. 곧이어 또 한 대의 구급차량이 도착하고 대원들이 시신을 수습하러 황급히 강가로 갔다. 댐에서 가까운 유속이 빠른 상류이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구조대원들까지 전부 휩쓸려 내려갈 수 있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시신 수습에는 그만큼 시간이 걸렸다. 물을 잔뜩 머금은 시신은 무겁고 미끄럽다고 했다. 구조대원들이 로프로 시신의 허리와 팔다리를 감아서 뭍으로 간신히 끌어올렸다. 거대한 나무줄기를 당겨 올리듯 구조대원 대여섯 명이 맞잡고 안간힘을 썼다.    뭍으로 올라온 시신은 익사 후 시간이 꽤 흐른 듯 보였다. 시신은 사후 경직으로 인해 팔을 앞으로 곧게 뻗은 채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물에 빠질 당시에 입고 있던 반팔 상의와 짧은 바지 그리고 샌들까지 그대로였다. 마네킹처럼 핏기없는 새하얀 팔다리가 옷가지 사이로 삐져나와 있었다. 카메라 영상으로 담기는 했지만, 뉴스로는 내보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끔찍한 광경에 고개를 돌렸다.    과학수사대의 간단한 현장 부검과 사망 판정 후 시신은 구급차에 실려졌다. 경찰은 며칠 전 가평에서 불어난 강물에 실족으로 인해 휩쓸려 실종된 50대 남성이라고 추정했다. 구조에서 시신 수습까지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지만 내가 본 장면들이 너무도 강렬하게 남았다. 주변에 최초 목격자와 경찰을 인터뷰 했다. 어느 순간 발을 떼려는데 카메라에 얹은 손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부지불식 간에 팔에 힘이 너무 들어갔던 모양이다.    차를 돌려 서둘러 서울로 복귀하는데 허탈감이 밀려왔다. 비에 젖은 옷가지는 금세 말랐지만, 현장의 끔찍한 기억이 한동안 머릿속을 헤집으며 나를 괴롭혔다.    이듬해 여름, 결혼을 앞두고 와이프와 신혼집 청소를 하기로 했다. 청소도구를 사서 약속 시각보다 한 시간 먼저 아파트로 향했다. 주차장 출구 쪽 화단 앞에 경찰들과 주민 몇몇이 모여 있었다. 슬쩍 끼어들어 살펴보니 투신 현장이었다. 아파트 10층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자신의 집 테라스에서 몸을 던진 것이다. 추락하면서 부딪혀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고 시신은 화단에 쓰러져 있었다. 1년 전 팔당에서 본 시신이 생각났다. 트라우마 탓인지 (카메라도 쥐고 있지 않은) 오른손이 또 다시 굳어졌다. 속이 울렁거렸다. 휴대전화를 이용해 주변 상황을 찍고 최초 발견자와 평소 가깝게 지냈다던 지인들을 인터뷰 했다. 휴대전화기를 쥔 손이 계속 떨렸다. 투신자는 통장으로 활약할 만큼 평소 동네에서도 활달한 성격이었지만 근래 들어 급작스럽게 우울증을 호소했다고 했다. 아마도 끝내 우울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투신하여 목숨을 끊은 듯했다.    당직자에게 내용을 보고하고 신혼집으로 올라왔다. 투신 사고 취재가 처음은 아니다. 아주 끔찍한 사고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그것도 사고 직후에 모든 장면을 목격하게 될 줄을 몰랐다.    그곳에서 2년을 살면서 그 화단을 지날 때마다 과거가 소환되었다. 팔당댐 익사사고와 투신사고와 겹쳐져 투영됐다. ‘그냥 지 나칠 걸, 못 본 척하고 가던 길을 갈 것을......’ 끔찍했던 당시 기억이 떠오를 때면 후회도 했다.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귀가 때마다 화단을 빙 돌아서 가기도 했다.    ‘트라우마’는 의학적 용어로 큰 범주의 ‘외상’을 의미한다. 심리학에서는 트라우마를 ‘정신적 외상’, 즉 영구적인 정신장애를 남기는 충격으로 규정짓는다. 강렬한 경험에 따른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내상을 입는 것.    참혹한 사건 현장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영상기자들은 늘 ‘트라우마’ 가운데 살아간다. 비슷한 취재 환경에 놓이거나, 훗날 사건 현장을 다시 지날 때,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런저런 기억의 퍼즐들로 힘겨워한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사그라져 갔을 생명들. 그들을 제때 도와주지 못한 도의적 책임, 혹은 죄의식. 눈을 감기엔 너무 이른, 꿈과 미래가 창창한 가녀리고 여린 생명들, 그들을 떠나 보내는 슬픔. 남겨진 가족들의 찢어지는 고통....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사라질 줄 알았던 기억 조각들은 가슴 깊숙이 박혀서 때가 되면 또다시 아물지 않고 욱신거린다. 영상기자들 중엔 정기적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 이들도 다수 있다. 현장을 거부하거나 마다할 수가 없어 생긴 상처들 때문이다. 영상기자들의 직업적 숙명이기도 하다. 기자는 힘과 용기가 있어야 하며 현장에 대한 목격자로서 기민해야 한다고 배웠다. 현장을 거치며 생긴 마음의 상처들은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씨앗이라고 생각하라고. 그 씨앗이 지금은 싹을 틔우기 위한 몸부림으로 힘겹지만, 분명 밝은 미래로 아름답게 꽃 피워 보답해 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기를 바랄 수밖에. 조각조각 쓰라린 가슴 한편으로 우리는 또 다른 트라우마를 심는다.     김원 / MBN             
    2019-07-02
  • 뉴미디어 새내기가 본 영상기자의 역할
    뉴미디어 새내기가 본 영상기자의 역할        뉴미디어 부서 생활 6개월, 이곳에 있다 보니 영상기자의 역할이 어디까지인가 고민하는 일이 잦아졌다. 물론 뉴스 영상을 책임진다는 일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우리가 만들던 뉴스가 TV를 벗어나 여러 형태로 확장되면서, TV뉴스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영상기자의 역할도 변화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TV 앞에서 뉴스를 기다리던 시청자들은 이제 스마트폰을 들고 뉴스를 선택하고, 조회수나 구독자 수로 그 매체를 평가한다. 시대가 변했고, 뉴스도 변했다. 그렇기 때문에 영상기자의 역할에도 변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에 대한 대비는 대체로 부족했다. 아마도 매체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내가 일하고 있는 <비디오머그팀>은 유튜브, 페이스북 등의 뉴미디어 플랫폼에 데일리 뉴스 영상을 재가공하거나, 직접 제작한 콘텐츠를 업로드 한다. 이곳에서의 제작은 기존의 뉴스 제작 시스템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다. 우선 보도국보다 훨씬 다양한 구성원들이 제작과정에 참여한다. 취재기자, 영상기자, 작가, 편집 PD, 디자이너, 에디터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한 콘텐츠에 참여해 서로 소통하며 콘텐츠를 만든다. 제작 과정은 심플하지만 더 세밀하고 깊이가 있다. 조직의 문화도 사뭇 다르다. 보도국에서는 대부분의 결정을 간부들이 모인 편집회의에서 하지만 이곳에서는 구성원 모두가 아이템 결정에 참여하고, 자신의 의견을 가감 없이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이 콘텐츠를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 <비디오머그>에는 3명의 영상기자가 일하고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콘텐츠 제작의 모든 부분에 참여하고 있다. 먼저 데일리에서 취재된 영상으로 어떤 콘텐츠를 만들지 고민해 아이템을 발제한다. 언제든 영상 아이템에 대한 정보를 다른 구성원에게 공유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이슈를 팔로우하고 있어야 하는 작업이다. 또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할 때는 기획부터 섭외, 영상구성, 촬영 등 모든 부분에서 영상 코디네이터로서 참여한다. 인터뷰 싱크를 풀거나, 구성상 필요한 연기도 하고, 내레이션을 읽는 등 세세한 업무까지도 역할을 한정하지 않고 다양한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 어떤 역할을 더 할 수 있을지는 현재도 여전히 탐구 중이다.    우리가 만드는 콘텐츠에서 기존 뉴스 형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게 나야’ 같은 시리즈물은 예능적 성격을 띠기도 하지만, 때로는 ‘Scope’ 같이 아주 진지한 다큐적 성격의 콘텐츠를 제작하기도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곳이 작은 방송사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예능도 하고, 교양도 하고, 뉴스도 하는 것이다. 매번 달라지는 프로그램의 성격에 따라 영상기자들의 역할도 다양하게 변화한다. 영상취재에는 ENG 한 대보다 간편하고 단순한 장비를 여러 대 사용하는 것이 유리할 때가 많다. 기사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영상과 싱크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구성에 맞추려면 여러 상황을 놓치지 않고 효과적으로 커버할 수 있어야 한다. 매번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지만 무엇이 정답인지는 단정 지을 수 없다.     ‘영상기자만이 할 수 있는 일’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다른 직군과 마찬가지로 영상기자 직군에도 불안감을 준다. 뉴미디어 시장에서 ‘영상기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현재까지의 경험으로 내린 나의 결론은 영상기자로서의 강점은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로 이유를 말할 수 있겠지만 가장 크게는 소통과 경험, 그리고 노하우의 측면을 들 수 있다.    첫째 소통의 측면. TV뉴스와 마찬가지로 뉴미디어에서도 영상기자가 취재한 영상이 없으면 할 수 있는 것이 매우 제한된다. 결국 콘텐츠의 핵심이 되는 영상은 현장의 영상기자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현장의 영상기자와 가장 잘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은 영상기자이다. 청와대, 국회, 검찰 등의 출입처나 사회, 경제, 스포츠뉴스 등의 현장에 있는 영상기자와 현장 상황을 즉각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뉴미디어 다른 구성원들에게 이 내용을 전달함으로써 콘텐츠 제작에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더 나아가면 현장의 영상기자에게 뉴미디어의 필요를 전달함으로써 원 소스를 생산하는 사람과 가공하는 사람을 이어주는 필수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두 번째, 보도영상에 대한 이해력. 뉴미디어 특성상 영상취재를 나가는 시간만큼 인제스트 된 영상을 확인하는 시간이 많은데, 영상기자는 같은 영상을 보더라도 누구보다 현장 상황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볼 수 있다. 직전까지 본인이 하던 일이었기 때문에 어떤 생각으로 이것을 촬영했는지, 영상에 나오지 않는 주변은 어떤 상황인지 잘 알 수 있다. 풍부한 현장의 경험에서 나오는 통찰력은 콘텐츠를 기획하거나, 아이템을 선별하고 제작하는데 큰 역량이 된다.    세 번째, 영상제작의 노하우. 보도영상 촬영의 특성상 갑작스러운 변수에 대처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제작을 이뤄내는 것이 중요하다. 제아무리 촬영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사전에 세팅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신속하게 판단하며 촬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뉴스를 예능 혹은 다큐처럼 촬영하면서 취재원에 대한 배려와 취재에 대한 윤리적인 부분도 함께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영상기자만큼 역량을 확보한 제작진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강점들이 향후 영상기자만의 역할로 남으리라는 법은 없다. 뉴미디어 환경은 생물과 같이 계속 변하고 있고, 어떤 변수가 우리를 위협할지 모른다. 현재의 자리를 잃지 않으려면 지금 담당하고 있는 역할에만 안주해서는 안 된다.    결국 정답은 도전이고 시도이다. 영상기자라는 직군이 변화하는 시대에 살아남고, 역할을 계속 진화시켜 가려면 할 수 있는 어느 길이든 도전해 봐야 한다. 나아가 할 수 없는 어떤 길도 개척하려는 시도와 용기가 필요하다. 도전하지 않고, 시도하지 않고 변하는 시간 속에 생존할 수 있는 것은 없을 테니까.     김승태 / SBS       
    2019-07-02
  • [고성 산불 취재기] 화마와의 사투
    화마와의 사투     ▲ 지난 4월 강원도 고성군 야산에서 발생한 산불(사진)    그동안 수많은 화재현장을 취재해 봤지만 이처럼 빠르게 번지고 피해지역이 광범위한 경우는 처음이다. 처음 인제에서 실화로 산불이 발발했고, 고성군에서 다른 산불이 또 붙었다. 고온 건조한 날씨와 강한 바람으로 인해 불은 삽시간에 다른 지역으로 옮겨 붙었다. 급기야 속초 도심까지 불이 번졌고 주변 다른 지역도 화마가 휩쓸었다. 하룻밤 사이 주민 수천 명이 피난길에 나섰고 수많은 이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화재가 있었던 4월 4일 오후, 압수수색 취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 메인뉴스 모니터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부서 전화기가 울렸다. 취재기자가 다급한 목소리가 말했다.    “지금 빨리 고성에 가야 해요. 산불이 계속 번지고 있어요.”    퇴근 한 시간 전이었는데. 야근 근무자는 출근 전이고 강원에 지사도 없었기에 갈 사람은 나뿐이었다. MNG, 사다리, 안전모, 조명을 부리나케 챙겼다. 보도차에 몸을 던져넣었다. 고속도로 달리는 중간중간 실시간 재난상황을 체크하며 산불이 번지는 곳을 체크했다.    화재 지역에 가까워질수록 핸드폰에 ‘대피 안내’ 문자가 더 자주 날아왔다. 어디서부터 취재를 시작해야 할지 마음이 조급해졌는데 차는 벌써 속초 톨게이트를 지나고 있었다. 인근 산에서 능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산불이 보였다. 마치 화산에서 흘러내리는 용암처럼. 하늘엔 도깨비불처럼 불씨가 날아다니고, 나무 타들어 가는 소리, 사이렌 소리가 뒤섞여 고막을 때렸다. ENG 카메라 모니터 창이 타오르는 붉은 화염으로 가득 찼다. 시내로 이동하자 LPG 충전소 뒤로 불이 옮겨 붙고 있었고,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소방대원들이 필사적으로 화재 진압에 나서고 있었다. 나도 그 장면을 담기 위해 뛰어갔다. 하지만 열기와 연기로 눈은 뜨기 힘들었고 날아드는 불씨에 머리카락 타는 냄새도 났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순간 산에서 타고 내려온 연기로 가득 찼다. 시야 확보도 어려운 데다 미세먼지 마스크를 쓰고 있어 호흡도 어려웠다.    “여기로 빨리 나오세요!!”    누군가 소리쳤다. 그쪽으로 뛰어나가자 겨우 호흡할 수 있었다. 위험한 상황이기에 원거리 촬영을 할 수도 있지만 야간인 데다 소방대원이 화마와 싸우는 모습을 줌(Zoom)을 당겨 담을 수는 없었다. 영상기자의 숙명이다.   ▲ 산불현장 일대 곳곳에서 차량이 불에 타는 피해가 발생했다 (사진).    시내는 가옥과 차량들 심지어 라디오 방송국도 전소되었다. 폭격 맞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취재가 끝나고 산불을 피해서 주민들이 대피한 임시 대피소를 찾았다. 고성과 속초 각 마을과 아파트 단지 인근까지 번진 불길에 대피한 주민들의 상실감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힘들었다. 현장에서 꼬박 밤을 새우고 동이 트자 처참한 광경이 드러났다. 시커먼 재가 된 현장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이재민들의 한숨소리만 남았다.    동해안은 매년 크고 작은 산불이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산불은 규모 면에서 피해가 컸다. 해마다 반복되는 산불을 막을 구체적인 대안 마련이 시급해 보인다. 그나마 초대형 재난으로 이어질 뻔했던 산불이 빠르게 진압될 수 있었던 것은 목숨을 걸고 화재 현장으로 달려온 소방관, 군인, 시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산불 취재를 하면서 몸은 고달팠어도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생생한 사건 현장을 담고, 전달하는 것이 기자의 책무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조영민 / MBN       
    2019-07-01
  • [고성 산불 취재기] 고성 산불 그 후
    고성 산불 그 후     ▲ 불에 타 무너져 내린 집을 떠나지 못한 피해주민이 망연자실하고 있다(사진).   ▲ 그을린 나무와 잿더미를 뚫고 대나무 죽순이 다시 자라나고 있다(사진).    산림 2천832ha를 잿더미로 만들고, 1천289명의 보금자리를 앗아간 동해안 산불. 현장을 취재하던 기자에게도 악몽 같은 하루였는데 이재민들과 피해 주민들의 마음은 어떨까?    무너져 내린 삶의 터전에 현재도 복구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자연이 스스로 치유하기를 포기하지 않듯 사람들은 산림을 복원시키고 무너진 집을 일으켜 세우는 노력에 매진하고 있다. 전국에서 성금이 모이고, 자원봉사자는 1만 3천여 명이나 됐다. 관광이 곧 자원봉사라는 지역민들의 외침에 관광객들이 다시 이 지역을 찾고 있다. 고무적인 광경이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동해안 산불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친정아버지께 물려받은 집이 잿더미로 변한 모습을 보며 울고 계셨던 어머니, 옷이며 신발이며 맨발로 뛰쳐나와 목숨은 부지했는데 라면하고 물은 이제 물려 그만 드시고 싶다는 할아버지, 틀니를 집에 두고 나와서 그나마 지원되는 라면도 드실 수가 없는 할머니. 이분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서 미래가 불투명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출하를 앞둔 물건들이 전부 다 타 버렸고, 영업장은 물론 거래처까지 잃은 상인들과 외상장부가 다 타버린 도매업자, 횟집 수족관에 있던 대게가 전부 쪄진 상태로 바닥에 나 뒹굴던 모습. 그러한 단상들이 이전의 평화로웠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여전히 험난한 난관과 고비를 넘겨야 할 것 같다.    이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더해졌다. 아직 피해 원인과 보상에 대한 결론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가족사진 하나 찾으려 타버린 집기를 뒤지던 피해주민들에게 일단은 치우고 보자는 식의 무심한 행정이 지속되고 있다. 물적 지원도 문제가 많다. 터전을 잃은 이재민의 슬픔은 모두 같고 그 끝을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작은 집을 잃으신 할머니와 수십억의 영업장을 잃으신 상인, 반파된 집이라 복구지원도 되지 않는 아버님 모두 같은 지원금이 통장에 들어온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한데 물적 지원에 온도차도 존재한다. 복구도 해주고 집도 마련해주고 돈도 줘서 우리나라 좋다는 할머니가 있지만, 정확한 원인규명과 약속 없이는 안 된다며 무너진 집을 걷어내려는 포크레인을 막으며 한숨을 토하는 어르신도 있다. 길거리로 나와 속초 한전 지사 앞에 비상대책위를 차려 매일같이 외치는 사람들도 있다. 명암이 극명하게 엇갈린다.    화재가 있었던 곳은 이전의 금수강산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어졌다. 마치 삭막한 흑백사진을 보는 듯하다. 코끝에 전해져 오는 재 냄새가 아직도 진동한다. 다 타버린 산림을 보고 있노라면 남대문이 타들어갈 때 느꼈던 울컥함과 비통한 감정이 재현된다. 2017년 강릉 대형 산불의 복구도 여전히 완결되지 않았는데 2019년 산불로 재가 된 산림은 언제쯤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산불 피해자들에게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은 조속한 보상과 원인 규명이다. 그리고 책임있는 결론이다. 그래야 미래에 대한 설계가 가능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당국자들의 굳은 약속도 필요하다. 반드시 국가가 책임진다는 것, 국가가 마지막까지 애정의 손길을 놓지 않으리라는 것.    그을린 나무와 잿더미를 뚫고 대나무 죽순이 다시 자라나고 있는 것처럼 화마의 아픔을 뚫고 다시 새 희망이 싹트기를 기대한다.    두터운 잿더미를 뚫고 새 순이 나오고 있다. 미약하기는 하나 초록이 다시 산을 물들이고 있다. 다시 찾아본 마을에 이장은 ‘그래도 살아야지’ 라며 삽을 들었다. 희망의 싹트고 있다. 정부 대책 역시 그러한 봄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홍성백 /  G1강원민방       
    2019-07-01
  • 해양 탐사선 ‘이사부 호’ 동승 취재기
    해양 탐사선 ‘이사부 호’ 동승 취재기     ▲ 남태평양 항해 중인 이사부호(사진)    미국령 괌에 가는 출장이 갑작스럽게 잡혔다. 경남 거제항에서부터 북위 6도 부근 적도 해역까지 항해하며 연구 활동을 한 대양 탐사선 ‘이사부 호’의 전 일정을 동승 취재하게 되었다.    괌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닌, 12일이라는 긴 일정을 배를 타고 간다는 것에 덜컥 겁이 났다. 물론 ‘답은 현장에 있다.’ 영상기자라면 누구나 그렇게 말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직접 그 일을 감행하려니 보통 일이 아니다, 생각이 들었다.    첫 촬영은 드론이었다. 출항하는 배를 하늘 위에서 담고자 했다. 달리는 배에서 드론을 올리고 내리는 것도 문제지만 드론이라는 장비를 이용해 내가 원하는 구도를 잡는 것이 어려웠다. 아마도 경험해보지 못한 분들은 모르시리라.    출항을 시작으로 태평양 바다를 달리는 배의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다섯 번의 항공촬영이 있었다. 드론이 배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해 드론을 잃을 뻔 한 적도 있었다. 그야말로 식겁해야 할 위기들의 연속이었다.    무사히 12일간의 항해 일정과 영상 기록을 마치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목적지는 괌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2시간을 가야 하는 미크로네시아 연방 축(chuuk) 주의 우에노 섬이었다. 축 주는 2차 세계대전의 전쟁터였으며 세계 최대 환초지역으로 바다 아래 전쟁 당시의 배들과 추락한 비행기와 함께 산호초 군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출발하기 전 우리의 가장 큰 고민은 해양을 주제로 하는 다큐멘터리에서 바닷속 영상이 없다면 전달력이 있을까 하는 것이었고 고민한 끝에 직접 들어가 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이를 위해서는 스쿠버 다이빙 교육이 필요했고 수중 촬영 장비도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아야 했다. 나에겐 큰 난관이 아닐 수 없었다.    출장을 다녀오고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방송이 나갔다. 촬영 당시 현장에서도 느꼈지만 방송을 보면서 확실한 깨달음을 얻었다. 영상기자도 전문성을 키워야겠다는 것. 항공 및 수중 촬영 분야에서도 전문적인 지식과 실력이 있다면 어떠한 상황이든 대처할 수 있고 영상 기록이 가능할 것이다. 이번 특집 촬영을 통해 수박 겉핥기 수준의 항공 및 수중 촬영을 해본 것에 불과하지만 큰 경험이 되었다. 기본기부터 차근차근 쌓아가야 하리라. 화이팅!     최진백 / KBS       
    2019-07-01
  • 하노이 회담, 그 기억의 단편
    하노이 회담, 그 기억의 단편       호텔, 양국 정상의 잠자리    북미 2차 정상회담이 예정되었던 날짜보다 2주가량 이르게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시작한 취재는 정상들의 유력 숙소지, 회담 장소 등이었다. 멜리아, jw메리어트, 메트로폴 하노이, 인터콘티넨털 레이크사이드, 크라운 플라자, 팬 퍼시픽 등 전부 나열하기도 벅찬 이 호텔들 모두 하노이 내에 위치해 있다. 서울에 있는 호텔들도 제대로 본 적이 없는데 북미 정상이 묵을 수도 있는 이 호텔들을 전부 뒤졌다.    국내 다수 언론들의 동선이 대부분 겹쳤다. 국내에서 두 정상의 유력 숙소 후보지를 기계적으로 보도했기 때문이다. “이곳이 김정은 위원장의 숙소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이 트럼프 대통령의 숙소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국가 컨벤션 센터(NCC)는 유력 회담장이라는 이유로 야외스튜디오 섭외 장소 1순위가 되었다 - 하지만 NCC에서는 끝내 회담이 열리지 않았다. 영빈관, 북한대사관 등도 취재진들로 붐볐다. 소형캠 혹은 몰카를 든 취재진들은 호텔들 로비나 국가 컨벤션 센터 등에서 너무나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궁금증이나 취재 열기와 정반대로 양국 정상의 숙소에 관한 어떠한 내부 정보도 나오지 않았다. 회담 며칠 전까지 회담장 유력지 보도만이 난무할 뿐이었다. 하노이로 지정되기 전에는 다낭이 유력하다며 (오보 아닌) 오보를 쏟아내고 유력 호텔 앞에는 어김없이 라이브 연결이 전파를 탔다.    회담의 예상 논제, 협상 성사 가능성 등 주요 내용들은 소홀히 다뤄졌다. 그 빈자리를 보여주기식 흥미 위주 소식이 채웠다. 수많은 호텔 중계엔 대부분 팩트란 게 결여되어 있고 단순한 추측, 재미 추구형 만담 등만 나열되었다.      ※ 모든 방송사가 관심을 보이므로  ※ 이목을 끌기 위한 흥미 위주의 내용    협상의 결실이 없이 북미 정상이 결별한 것 이상으로 우리의 보도 역시 어떤 결실조차 보여주지 못했다.   동당역과 국영방송사 그리고 공안    김정은 위원장이 비행기를 타고 오느냐, 아님 할아버지인 김일성처럼 기차를 타고 오느냐 하는 것도 언론의 주요 관심사였다.    기존 싱가포르 북미 1차 회담 때 이용했던 비행기가 아닌 기차를 타고 중국 내륙을 지나서 베트남으로 오는 건 북한이나 베트남에 모두 의미있는 일이었다. 55년 만에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베트남을 방문하는 기념비적인 이벤트이자 과거 김일성 주석과 호찌민 주석의 우정을 복원하는 의미까지.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이 이용했던 열차를 타고 김정은 위원장이 온다면 과거를 재현하며 선대의 우정을 다시금 양국이 되새길 기회가 될 터였다.    “김정은 위원장이 기차 타고 온다는데, 근데 동당역이라고 중국과 베트남 국경지에 있는 그 역까지만 타고 온대”.    동당역은 하노이에서 차량으로 3시간 30분에서 4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그럼 1박 2일로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한국에서 베트남 하노이까지 출장을 왔는데 베트남에서 또다시 출장을 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하노이에서 동당역까지는 거리상 170km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도로 상황이 열악한 데다, 대부분이 (편하고 시야 확보가 용이한) 직선도로가 아니기 때문에 만만하지 않은 일정이었다.    4시간 걸려 도착한 동당역 앞은 이미 각국 취재진으로 장사진을 이뤘고 트라이포드 놓기 쉽지 않은 상태였다. 김정은 위원장이 기차에서 내려 나올 입구는 하나였다. 곧 모습을 드러낼 김 위원장의 예상 가능한 동선을 두고 자리 다툼이 치열했다. 촬영상 가장 좋은 자리 앞에 1차로 옹기종기 취재진이 모여 있었고, 그 자리를 놓친 언론사들이 바로 그 뒤에, 그 다음은 다시 그 뒤에 자리를 잡았다. 취재 대기 행렬이 3열, 4열 계속 두터워지고 자리가 뒤로 밀릴수록 트라이포드와 간이 사다리 높이가 점점 높이 올라가야 했다. 촬영 장비를 두고 부러움 어린 말도 오갔다.    “이런 건 어디서 구했어? 나도 준비해 올 걸.”  국내 취재는 영상기자, 사진기자 공히 인정하는 현장의 룰이 적용된다. 누가 좀 더 일찍 와서 자리 잡으면 그 노력을 인정하고, 늦는 경우 좀 더 높은 위치에 설 수 있는 장비를 가지고 온다. 각사 취재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경쟁하고 또 인정하는 문화가 있다. 베트남에서는 이러한 문화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베트남 국영방송인 VTV 관계자는 취재진이 모여 있는 자리 뒤쪽으로 높은 단상을 세웠다.    “저기 자리를 잡으면 앞에 자리 잡은 취재진 때문에 밑에는 안 보일 텐데?”    다들 의아함 섞인 우려를 표시했다. 하지만 그건 단지 국내 취재진의 순수한 우려에 불과했음이 곧 드러났다. VTV의 높은 단상이 설치된 직후 베트남 공안이 나타나더니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손짓 발짓(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다)으로 자리를 재조정했다. 애써 잡힌 취재 대오가 일거에 뒤로 밀렸다. 베트남 공안의 정리는 그야말로 막무가내였다. 미리 잡은 자리가 속절없이 엉키고 포토라인이 VTV 단상에 맞춰서 그어졌다. 우리 입장에서야 울분을 토할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곳은 사회주의 국가 베트남이니!   트럼프 차량 행렬과 재밍    “아…. 중요할 때 또 깨지네”  부조와 통화하기 위해 끼워둔 이어폰에서 탄식이 들려왔다. 트럼프 대통령 숙소 앞에서 여러 번 들었던 소리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두 정상이 숙소에서 회담장으로 떠나기 전 숙소 앞 풍경, 그리고 회담장 풍경은 둘 다 실시간으로 전달을 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두 곳의 환경이 많이 달라 취재진은 애를 먹었다.    그 이유는 트럼프 대통령 차량과 가까운 거리에서 이동하는 ‘재밍 차량’ 때문. 재밍 차량? 생소한 단어다. 이 차량은 대통령이 탄 차량에 위협을 가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VIP가 탄 차량과 함께 움직이며 원격으로 주변 전파를 방해한다. MNG 장 비로 실시간 라이브를 하게 되면 이 차량의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재밍 차량이 등장하게 되면 그 이전과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자 지금 트럼프 숙소 앞으로 해서 라이브 물릴게요.”      부조의 요청에 흔쾌히 응답하고 꽤 긴 시간 동안 분주히 움직이는 경호원들과 참모들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전달한다. 그러다 트럼프 차량을 맞이하기 직전 부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어어 화면이 깨지네요.”  “네? 왜 그러죠?”  “직전까지 문제없었는데. 아, 저거 재밍 차량 때문인가, 다른 방송사도 똑같군요.”    갑작스러운 화면 깨진다는 이야기에 당황했지만, 모든 것이 재밍 차량 때문임을 알게 됐다.    “저 차가 지나가면 MNG 속도가 확 떨어지거나 속도가 아예 0으로 바뀌네!”    재밍 차량 덕분에 중요한 순간에 몇 번이나 깨지는 화면이 전송됐다. ‘한국이었으면 VIP가 지나갈 때 재밍 차량이 뻔히 있는데 이렇게 MNG로 라이브 할 생각을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북미 2차 회담은 아무 결실도 없이 끝이 났다. 하지만 이번 회담으로 북미 회담이 끝난 것은 아니다. 또 다른 회담들이 열릴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다. 언제 어디에서 회담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바로 그 자리에 반드시 영상 기자들이 있으리란 점이다. 실패든 성공이든 이런 경험들을 토대로, 좀 더 나은 영상 뉴스를 시청자들께 전달해드리고자 하는 바람, 또 그런 마음이다.     전범수 / MBN         
    2019-05-08
  • ‘극한출장, 베트남 2차 북미정상회담’
    ‘극한출장, 베트남 2차 북미정상회담’     ▶ 할롱베이 크루즈 투어 나서기 직전 크르주 안에서 건배를 제의하는 북한 리수 용 노동당부위원장.   ▶ 할롱베이 투어를 떠나는 북측고위급대표단. 북측대표단이 할롱베이를 찾았다는 것 은 북한이 관광산업단지를 육성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2월 27일 베트남 하노이 오전 6시, 상쾌한 아침이었다. 취재장비를 차에 싣고 하노이에서 할롱베이 어딘가로 향하는 이른 일정. 마음이 가볍고 육신이 소생하는 기분이었다. ‘중년이 되니 아침잠이 없어졌나. 이른 일정인데 기분이 꽤나 상쾌하군...’ 물론 이런 건 아니다.    2월 24일 베트남으로 출발. 하지만 실상은 ‘김정은 위원장 숙소’와 ‘미국 협상단 숙소’ 앞 길바닥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뻗치기.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쌀국수 - 라이브 - 쌀국수 - 몸싸움 쌀국수, 이런 과정의 반복이었다. 베트남 입국 며칠 만에 삭신이 쑤셔왔다. 아침 일찍 할롱베이로 향하는 차 안에서 잠시 밤의 휴식을 생각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추운 겨울날 뜨끈한 욕탕에 들어갈 때의 기분? 다시 잠들 시간을 떠올리며 하루 하루를 버틴 것.    베트남 하노이에서‘ 제2차 북미정상회담’ 공식 일정이 시작되는 첫날 오전. 김정은 위원장과 북한 대표단 시찰단의 일정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SBS 현지 출장팀들은 위원장과 시찰단 일정 파악에 애를 먹었다. 베트남 내 한인 기업인과 대사관 등을 취재한 결과 이들이 하이퐁 경제단지와 관광지인 할롱베이를 찾을 가능성이 높았다.    취재단은 일단 차로 3시간 거리에 있는 할롱베이로 무작정 출발했다. 할롱베이 내에 대기하고 있다가 정보가 입수되면 붙겠다는 계획으로.    오전 8시 30분쯤(한국시간 오전 10시 30분), 취재진 일행은 할롱베이 진입 직전이었다. 마침 고속도로 뒤편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짧은 차량 행렬이 사이렌을 울리며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왔구나!’  차량들은 순식간에 우리 팀 취재차량을 앞질러 경주마처럼 빠르게 질주했다.  “붙어!”    우리 차량도 그들 꽁무니에 붙어 내달리기 시작했다. 놓칠 듯 말 듯 그들의 꽁무니에 붙은 채로 가까스로 선착장까지 다다랐다. 멀리 정면으로 북한 관계자들이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차 안에서 레코딩 버튼을 누르고, 차 문을 열고, 달렸다. 곧바로 환영인파와 북측 촬영단, 주관방송인 베트남 VTB, 지역 사진기자들이 엉켜 붙었다. 인터내셔날 몸싸움이 벌어지는 현장이었다. 우린 북측 대표단에 바짝 붙었다. 선두에 선 리수용 노동당 부위원장 얼굴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뒷걸음질 치는데 옆구리에 ‘악’ 하는 통증이 느껴졌다. 갈비뼈 사이로 뭔가 훅 하고 두툼한 통증이 파고들었다. 북측 영상기자가 복부를 가격한 것이었다. 북측 영사기자의 엘보우 킥이 지속적으로 날아들었다.    “저리 가라우!” (엘보우 킥을 날리며)   “아씨... 저리 좀 가라니까!”(다시 엘보우 킥.)  단잠으로 회복된 내 소중한 생명에너지가 북측 영상기자의 엘보우 킥으로 소실되고 있었다.    팔로우는 할롱베이 관광용 크루즈 입구를 지나 크루즈 안까지 계속되었다. 리수용 노동당 부위원장이 현지 관계자들과 대화하고 건배하는 모습을 담는 중에도 북측 영상기자의 엘보우 킥은 쉬지 않고 날아왔다. 타격 부위가 정확하고 강도가 매번 같아 북한 특수부대 출신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 영상기자의 고통이여!    북측 대표단은 베트남 선상 근무원들에게 남측 취재진 퇴선을 요구했다. 그 순간에도 나는 엘보우 킥을 맞고 있었다. 마침내 선내에서 쫓겨나는데 현송월 삼지연 관현악단 단장 모습이 눈에 띄었다. 카메라를 밑으로 내렸다. 동시에 베트남 선상 근무원에게 짧은 영어를 내뱉었다.  “Wait, please. Just a moment. Can you speak English?”    물론 내 영어는 미끼이고 카메라에는 현송월 단장의 얼굴이 담기고 있었다. 배에서 쫓겨나자마자, 티브이 유로 영상을 송출했다. 중간 중간 촬영 원본이 한 번씩 출렁거린다. 27일은 모든 방송국에서 특보 방송을 내보냈지만 당시 방송시간대에는 아직 딱히 새로운 정보, 새로운 영상이 들어오지 않던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건진 소중한 단독 영상이었다. SBS만이 새롭게 입수한 영상을 내보냈다.    하노이에선 영상기자들이 하루 종일 길바닥에서 라이브 연결 등으로 힘든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만큼 부족한 인력을 짜내 내가 할롱베이로 급파된 것이었다. 그래서 더 부담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단독 영상까지 포착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가? 현명한 결단을 내리고 하노이 상황을 막아 준 동료들과 그리고 무엇보다 북한산 엘보우 킥에 버틴 나의 튼튼한 갈비뼈에 단독 영상의 영광을 돌리고 싶다.    하노이로 돌아온 늦은 밤. 숙소에서 동료들과 회포를 풀었다.  “내가 수원 사람인데 이참에 수원 왕갈비 가게나 차려볼까?”    베트남에서 정상회담 취재로 노고 많으셨던 모든 영상기자 여러분, 수고하 셨습니다.     설치환 / SBS       
    2019-05-08
  • 39년 만에 광주를 찾은 전두환
    39년 만에 광주를 찾은 전두환        아침 일찍 눈이 저절로 떠졌다. 3월 11일. 전두환 씨가 광주 법정에 서는 날. 기자 생활 14년 동안 수없이 자료화면을 통해 보고 편집하며 만나온 그의 ‘실물’을 직접 취재한다는 사실이 묘한 긴장감과 설렘을 주었다.    오후 2시에 시작되는 재판이지만, 오전 일찌감치 광주법원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광주법원은 이미 경찰들과 전 씨의 사과를 요구하는 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스마트폰 생중계 소리들이 뒤엉켜 귀가 따가웠다.    오후 12시가 막 넘었을 무렵, 전 씨가 탄 차가 광주 IC를 지나 10분 후면 광주법원에 도착한다는 소식이 왔다. 현장엔 긴장감이 감돌았다.    곧 검은색 에쿠스 리무진 차량이 광주지방법원 법정동 후문에 도착했다. 차량이 보이는 순간부터 나는 뷰파인더에 시선을 고정하고 그의 동선을 따라 팔로우 했다. 인파에 둘러싸인 차량 문이 열리고 드디어 전두환 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십 대의 카메라가 그를 비추고, 취재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공간과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압력과 긴장감이 최고조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소음들 속에서 처음으로 들어보는 전 씨의 음성이 이어폰을 통해 내 귀에 생생하게 전달됐다.    “이거 왜 이래?”    짜증 섞인 그 한 마디. 그는 그 말 한 토막을 남기고 법정동으로 다급히 들어가 버렸다. 시민들의 외침, 울부짖는 소리가 내 가슴 한 구석을 무너뜨렸다.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법정 내부에서 방청객들이 하나 둘 나왔다. 그들은 밖에서 기다리던 시민들에게 재판 분위기를 전했다. 일관되게 검찰의 공소사실을 부인한 전 씨 측의 대응이 전해지자, 시민들 사이에서는 일제히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 자리에서 분노가 들끓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전 씨가 타고 온 차량에 시동이 걸리자,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차량으로 움직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전 씨 차량을 따라 법정동 정문 쪽으로 향했다. 정문 주변은 이미 경찰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 경찰들 뒤로 분노한 시민들이 가득 모여들었다. 거대한 그물망을 친 듯한 풍경.    법정동 정문에 전두환, 이순자의 모습이 나타나 자, 시민들은 울부짖는 목소리로 외쳐댔다.    “전두환 살인마!”  “전두환을 처벌하라!”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시민들은 전 씨가 탄 차량에 물병을 던지고 몸으로 차량의 앞을 막아섰다. 꽤 한참 동안 격렬한 대치가 이어졌다. 나의 뷰파인더 안에서 시민들이 탄식하고 울부짖고 있었다. 표정들을 담는데 정신이 없었다.    30분 정도가 흐른 뒤에야 전 씨의 차량은 법원 밖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제서야 나 역시 뷰파인더에 묻었던 눈길을 거두었다. 허탈감이 밀려왔다. 그 허탈감은 나 자신을 넘어 그 공간 전체를 배회했다.    39년 만에 이뤄진 전두환의 광주 방문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번에는 사과를 하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를 걸어온 광주시민들의 가슴에는 다시 대못을 박혔다.    역사는 한 시대가 저문 뒤에도 여전히 마감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역사의 매듭은 언제나 그렇듯 단지 피해자만이 아니라 그 사회 전체가 매달리고 해결하려 할 때 풀릴 것이다. 그날이 속히 오길 희망한다.     이정현 / 광주MBC       
    2019-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