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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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청년의사의 항변
    아래 내용은 문화방송 홈페이지 뉴스인뉴스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한 청년의사의 항변 김 철영 (문화방송 영상취재 1부 ): zarathus@imbc.com 서울 중앙병원 내과 레지던트 4년 차 한 상택 씨. 벌써 두 달여 째, 중앙병원 내과의국이 아닌 의사협회내의 참의료진료단에 출근하여, 전국의 진료단 현황과 응급실 상황들을 점검한 뒤 자신이 책임진 구역으로 황망히 발걸음을 옮긴다. 예년 같았으면, 전문의 국가고시 준비와 외래진료, 후배 레지던트들의 교육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시간이겠지만, 요즘은 국가고시 준비는 사치스런 생각이라며, 오히려 전공의 생활보다 더 여유가 없다고 털어놓는다. 의사 폐업사태를 취재하는 현장에서 만난 그는 이번의 의료폐업사태가, 특히 젊은 의사들의 공포심과 미래에 대한 절망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개정된 약사법에 약사의 조제장부 기록 의무화 조항이 없어 의사의 사전 동의 또는 통보 없는 대체조제가 가능하게 됐고, 그에 따른 의료사고의 발생·책임을 고스란히 의사들이 떠맡게 되는 상황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의료사고의 책임소재에 관계없이 자기자신이 느끼는 중압감만으로도 의사 생활을 하기가 어려워졌다는 항변이 이어졌다. 정부는 정부대로, 약사는 약사대로, 특히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정부와 의사집단 사이에 끼어서 장기간에 걸쳐 엄청난 피해를 보는 환자들 모두가 할 이야기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폐업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의사 측에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이유를 근본부터 이해하기 전에는 이해당사자 간에 합리적인 타협과 양보가 어려울 것이라는 점에서 취재현장에서 만난 의사들의 이야기를 들은 대로 전달해 보고자 한다. 이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네티즌의 몫이다. 의료보험 수가문제 취재현장에서 만난 의사들의 문제점 지적은 '의료 수가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70년대 후반 도입된 의료 보험 제도는 출발부터 '저수가-저지급' 이라는 생색내기용 선심정책이었으며 이때문에 보험료를 낸 만큼 혜택을 받도록 하는 진정한 의미의 '의료보험증'이 아니라 정부의 복지정책을 홍보하기 위한 '의료할인증'에 불과했다는 것이 의사측 주장이다. 별 돈 안들이고 복지생색을 내기위해 정부가 도입한 의보수가 제도의 근본적 모순의 누적에 대해, 약품 판매 마진과 리베이트라는 편법에 기대어 부족한 소득을 보충해 온 의사집단이 작년 11월부터 시행한 실 거래가 상환제도로 바뀌면서 직업적 절망감과 함께 그야말로 '생존권'이 달린 분노의 폭발로 이어졌으며 결국 의사폐업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현상화했다는 것이다. 의약품납품 과정에서 생겼던 리베이트를 차단하고 대신 정부가 '보험수가'를 올려주어 의사들이 리베이트 등의 비정상적인 수입에 의존하지 않게 한 '실거래가 상환제도'는 그 인상분 자체가 부족할 뿐 아니라 대형병원들에만 거의 집중되어, 일반 개업의들을 노동시간의 연장과 노동강도의 강화, 그리고 적은 시간에 더 많은 환자를 기계적으로 치료하게 강제하는 문제점을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 80년대 이후 성장한 의료자본과 사적 영리의 목적으로만 기형적으로 팽창한 '의료산업'은 의료제도의 '공공성'이라는 본원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부재와 정부의 소극적 대처로 일반의사들을 손익분기점에 대한 계산을 강요케 하는 소상인으로 전락시키거나 대형의료자본(특히 재벌을 끼고 있는)의 틈바구니 속에서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몰아 넣고 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이 때문에 일반의사들과 병원, 특히 대형병원들과의 이해관계는 분리해서 사고해야 한다"라는 주수호 의쟁투 위원장의 지적은 동네 병원의 위기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전국민 의료보험제도의 실시 이후 기본적 진료기관인 동네병원(특히 메이저 4기본과 중에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들이 대형의료자본에 의해 침식되어 몰락해감으로써 의료체계의 근간부터 붕괴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의약분업의 현실적 여건 의약분업 도입의 문제점 가운데 또 다른 현실적 문제로는 사회문화적 환경을 들 수 있다. 쉽사리 병원에 갈 수 없는 처지의 바쁜 일상을 사는 사람에게는, 약국에서 편하게 약을 지어 먹을 수 있는 그간의 기형적 약조제가 편리할 수 밖에 없다. 의사들이 아무리 최신 의료행위로 환자들을 돌본다고 하더라도 의료서비스의 대상인 환자들의 노동환경이, 자 원칙적 진료를 받고 처방전을 받아서 다시 약국에서 약을 탈 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허락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한국적 열악한 노동환경의 풍토에서는 문자 그대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노동환경이 기본적으로 마련되지 않는다면, 설사 의사들의 주장대로 원칙적 진료를 정부정책으로 가능케 한다 하더라도, 그 수혜자의 폭이나 수는 일부 여유계층에 국한될 것이라는 것이 의사측의 현실진단이다. 의사의 절망, 의료제도의 절망, 그 탈출구는? 취재현장에서 접한 많은 의사들의 주장을 위에서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또 의사들이 현재의 의약분업의 대안으로 내놓은 완전의약분업요구안을 보면 그 자체로 상당히 이상적인 면을 많이 담고 있으며 제도적 정당성을 많은 부분 담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환자없는 의사가 존재할 수 없는 이상, 생명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의사라는 직업의 속성상 그들의 단체행동이 제한되야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는 점에도 의사들은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구조적이고 복합적인 모순의 결집체적 성격을 띈 의료 제도의 문제점이 폐업으로 드러난 것은 우리 사회에 교훈을 던져 준다는 의미가 있지만, 왜곡된 의료체계라는 점을 알고도 수 십년 동안 별 목소리를 내지 않고 편법으로 자신의 소득 보전에만 힘써 왔던 의사집단이 갑자기 국민건강 수호라는 명분으로 돌입한 폐업과 그 이유들에 대해 국민들은 쉽사리 납득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최근 의사집단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사적의료보험제도의 도입과 미국식 의료체계의 도입에 대한 주장에 대해서도 시민단체 등에서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가속화로 전체인구의 15%가 아무런 의료보험과 보호혜택을 못 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뼈대만 남은 한국의 공적의료보험제도를 사적 의료보험제도로 대체하자는 것은 전공의 협의회나 의쟁투에서 주장한 내용과 배치될뿐더러 제도적 정당성과 명분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정부도 문제의 본질을 돈으로만 환원하여 의사처방진료의 인상으로 의사집단을 달래려 한 정책이 오히려 그들의 분노만 더 키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최근 의보수가 인상의 주요인이 약사의 조제료 450%인상과 주사약 조제료에 기인하였음에도 이를 호도하기에 급급한 정부의 태도는 의약분업에 있어 기득권을 쥐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의사집단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사태를 해결하려는 안이함에 다름아니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한 상택씨는 최근 전공의들 사이에 미국의사 시험 공부가 붐을 이루고 있다고 귀뜸했다. 자신도 이민의 유혹에 대해 솔직히 쉽게 떨치지는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현재의 의.정 강경대치 상황이 계속되어 의대생들의 집단자퇴 결의와 함께 전공의들이 집단유급을 당한다면 종합병원 치료와 수술의 60%를 담당하는 현 의료제도하에서 전공의 수급 자체가 중단되고 전체 의료인력의 수급에 막대한 지장을 받을 것은 불문가지이다. 뛰어난 의료체계지만, 의료 서비스 제공에 대한 대가가 너무 적어 유학생들이 의과대학의 학생들 중 50-60%를 차지하는 영국의 예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미래가 절망뿐이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어느 청년의사의 한숨은 역시 취재현장에서 맞닥뜨린 환자들의 고통과 아울러 한국의 미래 의료상황에 대한 나의 전망을 더욱 어둡게 했다.
    2003-02-24
  • 사랑이 담긴영상
    아래 내용은 문화방송 홈페이지 뉴스인뉴스에서 발췌한것입니다. 사랑이 담긴 영상 정연철 카메라 수습기자 mpeople@imbc.com 영상 매체의 절대적인 힘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는 지금, 영상의 중요함을 다시 말한다는 것은 번거로운 일입니다. 일례로 TV에 나온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성금이 쏟아진다든지, 뉴스에서 보도했던 방법으로 모방범죄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영상을 보고 그에 공감하고 반응하게 됩니다. 저는 지금 전국의 오천만 시청자가 보는 뉴스 영상을 그려내고자 이 자리에 도전했습니다. ▶ 그려내고 싶은 삶의 모습들은 너무나도 많은데... '카메라'라는 기구를 들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그림은 이 세상에 얼마든지 많습니다. 내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일들, 어린아이가 순수하게 웃음 짓는 모습이며, 주름 투성이의 아주머니가 시장에서 콩나물을 파는 모습, 그런 평범한 모습에서부터 노숙자들의 생활 모습이나, 역사의 한 현장에 서서 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악수하는 모습까지 내가 들고 있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나의 눈을 통해, 그리고 나의 마음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즘에 한창 전세계의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엘살바도르의 지진 피해자의 눈물 한 방울, 그리고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오지에서의 삶들의 모습 그런 모습들도 그려보고 싶습니다. 연수 생활동안에 저의 이런 생각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된 계기는 저널리스트로서의 뉴스의 공정성과 객관성에대한 강의였습니다. '과연 내 마음을 통해 한 번 걸러진 영상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포함하면서 공정성과 객관성을 유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또한, 편집 데스크에 앉아서 걸려오는 시청자들의 항의 전화를 받아 보면서 '내가 만든 잘못된 영상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게 될까' 하는 걱정 또한 들었습니다. ▶마음까지 찍어낼 수 있는 기자가 되겠습니다. 마음을 여는 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갑갑한 도시 속에 살면서, 또 각박한 세상을 헤쳐가면서 닫혀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제가 만든 영상으로 살짝 열어보고자 하는 욕심을 부려 봅니다. 하지만 먼저 제 맘속에 있는 걱정들을 떨쳐버려야겠죠. 훌륭하다기보다는 올곧은 저널리스트가 되기 위해 지금은 고민하고, 공부하고,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그려내는 영상이 MBC라는 타이틀을 걸고 나갈 때 결코 우리회사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합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보도 본부의 여러 선배님들을 봤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그 옆에서 멀뚱하게 서있는 제 모습을 봅니다. 저도 그 안에서 바삐 돌아가는 동료가 되려고 합니다. 같이 웃을 수 있는 정을 느끼며 뉴스의 영상을 그려내겠습니다. 언젠가는 제가 그려낸 영상으로 우리 모두가 한 번 웃을 수 있고, 한 번 울어줄 수 있는 꿈을 꿔 봅니다. 사랑이 담긴 영상... 그것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2003-02-24
  • 국민의 눈이되겠습니다.
    아래 내용은 문화방송 홈페이지 뉴스인뉴스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국민의 눈이 되겠습니다. 문화방송 박지민 카메라 수습기자 jmcool@imbc.com 부산에 사는 한 소년이 있었으니 그는 'TV 맹신론자'였습니다. 그는 누군가의 말처럼 TV를 통해 현실을 인식하였습니다. 소년의 부모가 TV를 '바보상자'라 말하고 소년과 TV를 격리시키려한 것은 아마 소년의 이런 행동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TV를 통해 세상을 느꼈던 소년 소년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었습니다. 우리 나라 국민들의 주린 배를 채워준 한 위인이 암살되었고 소년은 TV 속 사람들과 함께 무척이나 울었습니다. 그런 소년의 아픈 마음을 뒤따라 찾아온 위대한 군인들이 어루만져 주었고 소년은 그들을 존경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국민을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는 그들에게 버릇없는 방해꾼이 있었으니, 그들은 흔들리는 TV화면 속 남포동 거리 한가운데서 화염병을 던지기도 했고 착한 순경아저씨를 각목으로 때리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 우리 국민에게 큰 도움을 주던 미국인들의 사무실을 태우기도 했습니다. 소년은 그들을 경멸했습니다. 소년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습니다. 국가를 위해 한 지붕에 모인 세 사람이 있었고 TV 속 그들의 의기투합은 참으로 멋져 보였습니다. 반면, 뉴스 한 귀퉁이에서 초라한 유세를 하던 지금의 대통령은 정말 나약한 존재로 느껴졌습니다. 이것이 끝은 아니였습니다. 소년은 찢어지는 사운드와 거친 화면의 흔들림 속에서 지하철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동시에 밝은 조명 아래 단정한 옷차림으로 국민에게 사과하는 (국민의 발을 담보로 파업을 일삼는 이들을 대신해)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소년은 그렇게 성장했습니다. TV 속 기자들의 어려운 말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TV 속에 투영된 이미지로 세상을 이해할 따름이었습니다. 소년에게는 세상을 바라볼 지적 능력도 방법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카메라기자는 소년의 눈을 위탁받아 대신 세상을 바라봐 주었던 것이였습니다. 그런 소년이 카메라기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다른 수많은 소년들을 대신해서 조그마한 '뷰파인더'를 통해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주관이 아닌 객관의 눈으로 이런 막중한 임무를 떠올릴 때면 부족한 나의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될 많은 사람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특히 며칠 동안 바라본 선배들의 일상은 마치 '시간과의 전쟁'과 비슷한 것이어서 더 많은 걱정이 앞섭니다. '대학시절에 기자는 전문직이라고 배웠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데스크의 지시에 따라 이곳저곳으로 취재처를 옮기는 상황에서 어떤 지식과 확신을 가지고 취재에 임해야 하나...?', '내가 카메라기자로서 숙련되지 못한 기간 동안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왜곡된 현실을 보게될까...' 나는 적어도 카메라기자에게 사건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할 시간과 취재계획을 세울 여유는 주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선배들처럼 뉴스가 곧 일상이라면 문제가 달라지겠지만 초보자인 나에게 이런 현실은 무척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나의 부족한 부분들을 말초신경이나 자극하는 것들로 보완하진 않겠습니다. 대신 몇 가지 목표를 실천하며 내 눈을 시청자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카메라기자의 눈으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불편 부당한 영상취재를 위해 기존의 편협된 사고를 버리고 수많은 보통사람의 입장에 서볼 것입니다. 사형수에게도 인격은 있다는 생각으로 모든 취재원을 대할 때 같은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지킬 것입니다. 이제 몇 달 뒤 내 어깨 위에는 카메라가 있을 것입니다. 그 순간 내 눈은 나의 눈이 아닌 것입니다. 나의 눈은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나를 믿고 내게 위탁한 그들의 눈입니다. 나는 어떤 국민의 눈도 소홀히 혹은 특별히 여기지 않을 것이며 나의 눈도 '수천만 명의 눈 중 하나'로 여길 것입니다.
    2003-02-24
  • 백두산취재기
    한국방송 영상취재부 이상구 출발부터 순조롭지는 못했다. 김포공항에서 보딩 티켓을 받고 화물을 실으면서 우리는 항공사 직원들의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애써 외면하려 했다. 승객은 고작해야 일곱 명인데 산더미 만한 짐이 32개나 되었던 것이다. 취재장비만 해도 만만치 않을텐데, 혹한에 대비해서 방한 커버와 소형 발전기까지 챙긴 데다, 겨울 산행을 위해 방한복은 물론 고글이며 알파인 스틱까지 꽉 차있으니 짐을 어떻게 더 줄일 수도 없었다. 할인된 항공 티켓이라 해도 짐 값을 따로 내고 나니 결국 더 비싸게 비행기를 타게 됐다. 백두산을 가려면 심양까지 갔다가 다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연길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심양 공항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물론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에 비하면 그다지 큰 일은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우린 당황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화물 중 하나가 없어진 것. 공항 직원과 화물 찾는 곳을 여러 번 뒤져보았지만 허사였다. 게다가 이미 서울에서 2시간 정도 늦게 출발한지라 비행기를 갈아탈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없어진 품목과 수량을 체크하고 그냥 연길로 향하기로 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이번에는 다른 데서 문제가 발생했다. 중국 국내선 보안 검색대에서 대뜸 우리 짐을 풀러 봐야겠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카메라 보온을 위해 준비한 손난로용 연료가 문제가 된 것이다. 김포 공항에서는 물론 아무문제가 없었다. 당황한 우리는 별로 위험 물질이 아니라고 영어로 손짓까지 해가며 설명하였지만 막무가내였다. 영어가 통하지 않을 뿐더러 자기네들끼리 뭐라고 수군대자 더 많은 공항직원들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아직 취재도 시작하지 않은 시점에서 문제가 더 커질 것을 우려한 우리는 힘들겠지만 현지에서 구해보기로 하고 손난로용 연료를 일단 포기하기로 했다. 없어진 화물은 현지 여행사 직원에게 찾아 달라고 부탁해놓고, 손난로용 휘발유를 압수 당한 채 우리는 연길로 향했다. 백두산 천지 정상과 그 일대는 면적이 전라북도에 견줄만한 크기. 그곳을 몇 개 구역으로 나누어서 관리한다. 서백두 취재를 위해 우리는 백두산 서쪽 구역을 관할, 보호하는 직원들이 겨울 동안 임시 숙소로 사용하는 위동잠을 빌렸다. 위동잠은 우리 나라 산에 있는 산장과 비슷한 모양으로, 붉은 벽돌로 지은 단층 건물에 재래식 아궁이가 있고, 화장실이나 부엌은 따로 떨어져 있었다. 그리 넓진 않았지만 방 2개에 탐사대 20명이 그럭저럭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짐을 풀고 나서야 긴장이 좀 풀리기 시작했고, 위동잠을 베이스 캠프로 하고 왔다 갔다 하는 일정이라면 그런 대로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다음날, 산에서의 첫날은 이른 새벽에 시작되었다. 비록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에 취재팀이 모여 취재계획과 내용, 일정 등을 어느 정도 협의하고 온 상태였지만 현지에 와보니 사정은 많이 달랐다. 평소 운동을 많이 했던 사람들도 아니고, 더구나 하루 6∼7시간의 눈길 산행은 바로 육체적 한계에 다다랐다. 날씨만 춥지 않았더라면, 계곡을 오르락 내리락 하고 원시림 사이를 헤치고 다니는 일쯤은 그런 대로 견딜 만 했겠지만 때마침 북서쪽에서 내려온 한기류에 기온까지 급격하게 떨어졌다. 정오에 온도를 측정해 보니 영하 24도였다. 매섭게 불어대는 바람에 체감온도는 더욱 낮아졌고, 시간이 갈수록 근육통이나 관절염 재발 정도는 이제 문제가 아니었다. 갑작스레 오른 혈압에 숨이 가빠지고 몇몇 사람은 겨울 산행용으로 등산 장비를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손과 발 그리고 얼굴에까지 동상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사람보다 기계였다. 해발 2천4백 미터 청석봉, 천지 아래에 도착해서는 카메라 한 대가 아예 추위에 얼어버린 것이었다. 해가 막 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옆으로 길게 한 번 화면을 담고, 해를 클로즈업해서 촬영하려는데 카메라에 경고 등이 들어왔다. 난감했다. 뷰파인더 상에는 하얀 벌판위로 20세기의 마지막 해가 자취를 감추고 있었지만 테입은 돌아가지 않았다. 추위에 대비해 방한커버를 씌웠음에도 불구하고 낮에 5∼6시간 눈 속을 이동하는 동안 카메라가 속까지 얼어버린 모양이다. ENG카메라와 핸디캄을 이용해 입체적인 취재를 하려던 우리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는 듯했다. 심양 공항에서 압수 당한 손난로 생각에 분통이 터졌다. 할 수 없이 그곳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했다. 텐트 안에까지 얼음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고, 초조한 마음으로 내일의 일출 촬영을 위해 밤새 조그마한 버너 옆에서 카메라를 껴안고 밤을 지샜다. 이대로 잠들었다가는 이 눈 속에서 다시 깨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생각에 모두들 잠을 못 이루고 뒤척거렸다. 다음날 조심스레 카메라를 테스트한 결과, 다행히 카메라가 돌아갔다. 그러나 날씨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눈보라가 계속됐다. 결국 천지위로 떠오르는 붉은 해를 촬영하지 못한 채 아쉬움을 안고 하산해야했다. 천지의 장엄한 모습과 그곳에서의 일출을 촬영하지 못했다는 부담감에 우리는 다른 아이템이라도 좀 더 취재하기 위해 팀을 두 개조로 나누어서 움직이기로 했다. 한 개조는 정상 정복을 시도하고 다른 한 개조는 주변의 비경을 취재하기로 했다. 인원이 줄어든 만큼 이동 시간도 빨라졌지만 그만큼 개인 당 짊어져야 할 짐이 늘어나고, 그에 따른 위험부담도 커졌다. 우리는 좀 더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더욱 악화된 날씨로 어느 한 쪽도 순조롭게 일이 풀릴 것 같지가 않았다. 백두의 북쪽 정상까지는 관광지로 개발이 되어 길이 닦여 있었지만, 군데군데 눈이 쌓여있어서 스노우 모빌이나 자동차, 어느 것으로도 접근이 불가능했다. 또다시 걷는 수밖에 없었다. 쉽게 접근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북백두도 역시 만만치가 않았다. 정상에 거의 이르러서 흑풍구라는 지역을 통과 할 때에는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갑자기 돌개바람이 일면 일행 모두는 배낭을 짊어진 채로 그대로 땅에 철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 갑작스런 돌개바람에 대원 중 2명이 손목과 발목에 부상을 입었다. 그렇게 여러 번 위기를 넘기고서야 우리는 겨우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다른 조는 장백 폭포로 향했다. 국내에 방송CF 등으로 이미 많이 알려진 장백 폭포도 여름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마스크를 벗고 기자 스탠드업을 하는 것은 모험이었다. 백두의 세찬 겨울 바람에 노출된 안면부위는 금새 얼어버렸다. 그러나 폭포 앞까지 얼어 있어 우리는 사상 최초로 장백폭포 바로 밑에서 근접 촬영하는 행운을 얻었다. 일주일 여를 백두산에서 지내면서 우리는 그동안 국내 언론에 소개되지 않았던 백두산 서쪽 지역(진주온천, 금강폭포. 금강대협곡, 노호배, 청석봉)과 한 겨울에 보는 백두산의 북쪽 비경(장백폭포, 지하삼림, 소천지, 천문봉)을 모두 취재할 수 있었다. 비록 백두산일대는 백두산 보호국의 협조를 받아 무사히 취재를 마쳤지만 중국 당국의 공식 취재 비자를 받아서 입국한 상태는 아니었기에 우리는 마지막까지 긴장의 고삐를 늦출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 심양 공항을 통해 외화 반출이 예상된다는 첩보를 입수한 중국 세관원들은 가방을 하나하나 열어보며 검색을 철저히 하였다. 우리 차례에 와서는 테입 상자를 열어보며 촬영 여부까지 세밀히 물어왔다. 등골이 오싹했다. 만약에 촬영한 테입을 압수 당한다면 백두산에서 고생한 우리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감은 물론이고, 외교적 문제로까지 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비무환이라 했던가.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른 후, 전날 심양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촬영한 분량만큼 베타 테입을 구입해 촬영 원본을 빼돌려 놓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백두산이 우리에게 달아준 훈장인 두 볼과 코끝의 동상은 귀국해서도 한동안 없어지질 않았다. 겨울 백두산 등정 취재에 나섰던 우리는 서로의 거뭇거뭇해진 얼굴을 보면서 산 속에서의 일들을 회상해본다. 그 험하다는 지옥훈련! 훈련은 잘못되어도 훈련으로 끝날 수 있지만 백두산 탐사취재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었기에 더욱 비장할 수밖에 없었다. * 글쓴이 이상구 기자는 KBS 24기 촬영 기자로 이제 4년차가 되었습니다. 작년, 밀레니엄 특집을 위해 취재기자 3명과 장익환 촬영기자 선배와 함께 백두산 취재에 나섰다가 정말 많은 고생을 하고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KBS 원단기획으로 연초에 방영되었습니다.
    2003-02-24
  •  F-16 전투기 탑승 촬영기
    차원 공간의 체험 - F-16 전투기 탑승 촬영기 KBS 보도본부 영상취재부 김병길 기자 "F-16" 우리 공군의 최신예 전투기이다. KBS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F-16" 편대의 동서횡단 비행 임무를 방영함으로써 이제는 국방력의 중심에 선 공군이 영공뿐만 아니라 영해, 영서 까지도 수호한다는 것과 아울러 분단의 현실을 다시한번 되새겨 보는 기회를 제공하고 촬영기자가 직접 전투기에 탑승하여 편대임무를 촬영하기로 기획 했다. 초음속 전투기의 동승촬영은 처음 있는 일로 그 자체 만으로 상당한 리스크를 내포하고 있는 기획이다. 그러면 누가 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 "나"로 귀착됐다. 이유는? 아마도 내가 대학 시절 항공운항학을 전공하였고 경비행기이지만 실제 조종을 해본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 이유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막상 임무를 부여받고 보니 긴장도 되고 많은 부담을 느꼈다. 전투기 탑승 촬영에 대한 know-how가 전혀 없었고 실패할 경우 재시도가 불가능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 자신 전투기를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다는 것도 카메라의 무게를 몇 배나 더 무겁게 만들었다. 첫 경험 "F-16" 전투기의 기동을 영상으로 창출하는데는 일상적인 피사체를 촬영할 때와는 다른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른다. 기체 자체가 고속, 고공으로 비행하면서 급격하게 기동하는 데다가 조종석(cockpit)은 비좁고 또 몸에 묶인 낙하산에 의해서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조종사에 준하는 신체조건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실제 전투기 탑승시의 상황, 그리고 비상상황 등에 대해 시뮬레이터를 통한 적성검사를 거쳐야 한다. 이 과정중 "저압실 비행"이라는 것이 있다. 비행기가 고공으로 비행할 때는 공기압력이 지상의 ⅓ 또는 그 이하로 낮아지고 밀도도 희박해진다. 이러한 상황을 밀페된 시뮬레이터 안에서 시행하는 것이다. 나는 수년 내지 10년 이상의 비행경력을 가진 베테랑 조종사와 같이 이 과정에 참여했다. 교관의 신호와 함께 비행기는 고공으로 상승을 계속한다. 바람을 완전히 빼고 끝을 묶어 공기이동을 차단시킨 채, 저압 실험실 안에 매달아 둔 고무장갑은 지상에서는 완전히 달라 붙어 있다가 고도가 상승할수록 저절로 점점 팽창하여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그 만큼 기압이 낮아졌다는 증거다. 배도 고무장갑과 마찬가지로 점점 불러와 배불뚝이가 된다. 뱃 속의 개스가 팽창하는 것이다. 아울러 방귀도...... 고도 3만 피트 근처에 이르자 착용하고 있던 조종사는 산소 마스크를 벗도록 지시했다. 이 때의 공기밀도는 지상에서의 ⅓에 불과하다. 그러나 산소부족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산소 마스크를 벗은 상태에서 자신의 이름을 계속해서 써 내려가는 과정을 거친다. 이것은 유사시 고공에서 산소공급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의 내성을 테스트하는 것이다. 몇 초나 지났을까? 맞은 편에 앉아있던 10년 가까이 비행을 한 조종사가 코피를 흘린다. 수 십 초가 지나자 또박또박 써 내려가던 내 이름은 그저 구불구불한 의미없는 선으로 변해버리고 만다. 제대로 쓰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되질 않는다. 얼마가지 않아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졸도를 한 것이다. 옆에 있던 조종사가 얼른 산소마스크를 씌워준 덕에 잠시 후 제 정신을 차렸다. 그 졸도라는 것이 전혀 고통이 없이, 마치 동남아 어느 나라 갔다 온 기분이었다. 첫 경험치고는 괜찮았다. 숨이 막혀 어찌된 사람은 쾌감을 느낀다는 말을 알 것도 같았다. 이 밖에도 혈압, 시력, 심전도 검사 등을 거쳐 드디어 적성검사를 통과했다. 콘 티 D-day는 정해졌다. 촬영장비는 여러 가지 악조건을 고려해서 소형 8mm 카메라로 준비했다. 그러나 어떻게 찍을 것인가? 참고할 자료 그림도 없다. 전투기에 탑승해서 제대로 된 영상을 촬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조언도 들었다. 그러나 방송은 나가야 한다. 상상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 책장을 덮은지 10년도 넘은 대학교재를 꺼내 항공기의 기본 운동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 다음 콘티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5∼6페이지 분량의 가상콘티가 완성되었다. 3∼4분 방송용 치고는 너무 많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차피 '봉사 문고리 잡는' 식의 콘티니 어쩔 수 없다. '비책'을 가슴에 품고 동부전선의 전투비행단에 도착한 것은 비행 전 날. 내가 탈 비행기의 조종사와 편대장 및 편대원들을 소개 받은 다음 비행에 대한 브리핑을 들었다. 그리고 촬영용 전투기 조종사와 콘티를 검토했다. 그 과정에서 상당부분을 수정해서 2차 콘티를 작성했다. 다시 피사체인 편대의 편대장과 촬영계획에 대한 협의를 거쳐 최종 콘티를 요약 완성했다. 그래도 두 페이지 정도의 분량이다. 다 외울 수도 없고, 그래서 계기판에 붙여 놓기로 하고 항로에 따라 필요한 shot에 대한 메모를 만들어 두었다. 이 메모는 정작 비행 때는 기내에 흐르는 바람에 날려서 조종석 밑으로 빨려 들어가는 바람에 볼 수 없게 되버렸지만 여러 번 콘티를 작성하고 shot을 구상하는 과정은 많은 도움이 되었고 그 다음 비행 때도 밥은 굶어도 콘티만은 반드시 챙기게 되었다. 평소 출장이라면 저녁 때 으레 한 잔술을 마다 할 수 없었지만 그 날은 집에서 가져간 알람시계를 머리맡에 두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음주를 할 경우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문제지만 더 중요한 것은 체내에 알콜이 조금만 남아 있어도 고공에서는 그 영향력이 배가되므로 조종사들은 비행 전 날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세고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창문을 열었다. 소풍가는 날 아침에 하늘을 쳐다 보는 기분으로. 새벽별이 초롱초롱 했다. 됐다. 첫 번째 조건, 즉 기상은 이상 무! 처녀비행 - 지구는 돈다. 아침식사를 해야만 전투기에 적응하기 쉽다는 충고에 억지로 아침을 먹고 동해안 일출을 촬영하기 위해 일찌감치 비행장에 도착했다. 아직도 사방은 깜깜하고 출격 준비중인 비행기의 엔진소리만 요란한 활주로. 전날 몸에 맞춰 준비해 둔 헬맷, 조종복, G-suit를 착용하고 격납고로 향했다. 특별히 강릉국 촬영기자가 나의 탑승 촬영을 취재하기 위해 나왔다. 늘 카메라 뒤에만 서다 모처럼 앞에 서니 괜히 몸이 굳어지고, 어색했다. 하지만 방송용이니 나름대로 포즈를 취하고 후방석에 올랐다. 조종석에 올라 교신방법과 비상탈출에 대한 간단한 교육을 받고 낙하산이 부착된 의자에 몸을 붙들어 맸다. 준비해 간 콘티는 계기판에 부착하고 다시 한 번 점검했다. 교신을 위해 산소 마스크는 저공에서도 반드시 써야만 한다. 산소 마스크를 통해 전방석 조종사의 숨소리가 비행기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린다. 드디어 조종사의 오른손 엄지 손가락이 하늘을 향하고 서서히 캐노피가 닫힌다. 비행기가 격납고를 벗어나면서부터 셔터를 넣었다. 몸이 급격하게 뒤로 젖혀지는 충격과 함께 비행기는 활주로를 벗어나 하늘로 솟구쳤고 곧 고막이 아파왔다. 나의 전투기 처녀비행(Virgin Flight)이 시작된 것이다. 침을 삼키고 통증을 해소하는 사이 비행기는 동해로 향했고 편대와 합류하고 있었다. 전투기로 동해를 거쳐 울릉도, 독도까지 가는데는 20분도 채 소요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몇 가지 그림을 연출해야 한다. 그러나 동해쪽 하늘은 온통 구름으로 덮혀있고 몇 군데 구멍 뚫린 땅과 바다가 보일 뿐이다. 이렇게 되면 일출 촬영은 틀린 일이다. 뿐만 아니라 독도, 울릉도, 설악산, 휴전선 이북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재촬영을 위한 추가 비행은 불가능하므로 일단 구름위를 날아 독도로 향했다. 희다 못해 푸른 여명의 구름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냥 뛰어 내리고 싶은 충동이다. 그 위를 날고있는 편대 또한 조물주가 만든 그 어느 새보다도 이상적인 새처럼 보인다. 우선 지상은 포기하고 기본적인 그림부터 촬영했다. 편대는 4대가 대형을 이루어 안전상 거의 일정한 Format을 유지하면서 비행하기 때문에 촬영기가 전후, 좌우, 상하로 이동하면서 촬영을 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촬영기의 기동은 편대의 그것보다 배 이상 급격하고 비행거리 또한 휠씬 길다. 이를테면 상승하는 편대를 촬영하려면 편대는 수평비행을 하는 상태에서 촬영기가 하강을 하게 된다. 상대속도의 개념이다. 방향도 마찬가지다. 촬영기가 좌로 움직이면 편대는 우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8mm 카메라의 Focus가 Auto인지라 편대의 초점이 수시로 흐려져 기본대형을 촬영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Focus가 비행기 canopy에 맞거나 구름에 맞아버리는 것이다. Zoom 또한 너무 느려 그때그때 적절한 Shot을 잡기는 역부족이다. Camera 뿐만 아니라 몸이 말을 듣지 않을 경우는 재간이 없다. 비행기가 급격한 기동을 할 경우, 이를테면 급상승을 하게 되면 손은 저절로 무릎까지 내려와 꼼짝하지 못한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맨 손 조차도 들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전투기 탑승시 신체에 가해지는 몇 가지 힘(압력)을 소개하기로 한다. 나는 지금까지 다섯 번의 전투기 탑승경험이 있는데 다섯 번째 촬영을 순조롭게 끝내고 기지로 귀환하는 길에 조종사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 그것은 최대의 중력가속도(G)와 무중력 상태에 대한 것이었다. 그 제안을 받았을 때 내심 걱정(?)도 되었지만 피하고 싶지 않아서 한 번 해보자고 했다. 물론 그러한 조건하에서 촬영은 불가능한 것이다. 먼저 최대의 G에 대한 것이다. 자동차가 급선회 할 때 몸이 한쪽으로 쏠리는 원심력과 유사한 것이다. 조종간을 급작스레 당기는 순간 혈관이 파혈되거나 졸도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착용한 G-suit가 팽창해서 허벅지와 허리를 조여온다. 이 순간 숨을 쉴 생각은 아예 하지 못한 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모든 힘을 복부에 모았다. 그러지 않으면 배가 터질 것 같고 등뼈를 도려내는 듯한 통증을 견 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오기도 동하고 해서 앞에 붙여놓은 콘티를 보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결국은 한 자도 읽지 못했다. 그저 졸도 하지 않고 버틴것만도 평균적인 사람보다는 월등히 잘 버틴 것이라는 것이 조종사의 말이었다. 이 때의 중력가속도는 7G. 쉽게 표현하면 10kg짜리 카메라인 경우 실제로 신체에 느껴지는 무게는 7배인 70kg가 되는 것이다. 카메라를 어깨에 맸다면 갑작스런 충격으로 어깨를 다쳤을 것이다. 무중력 상태는 상승하던 비행기가 갑자기 자유낙하하듯이 하강을 하면 몸이 조종석에서 떨어져서 공중에 떠 있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다. 이때는 심한 고통은 없으나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다. 우주인이나 하는 경험을 한 것이다. 독도 상공에 도착했지만 구름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냥 돌아갈 수도 없고 연료의 한계가 있으니 구름이 걷힐 때 까지 기다릴 수도 없다.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낮게 깔린 구름을 뚫고 내려가는 것이다. 깜깜한 구름을 뚫고 내려가자 또 다른 구름을 머리에 인 자그마한 바위섬이 보인다. 처음 보는 독도다. 정말 반갑다. 우선 독도 촬영을 한 다음 독도 위를 비행하는 편대와 독도를 한 Frame에 담기 위해 대형을 정비했다. 수면 위 몇 십 미터로 저공 비행을 하자 고공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비행기의 속도를 느낄 수 있었다. 독도를 구심점으로 편대, 촬영기의 순서로 늘어서야 하는데 눈 깜짝 할 사이에 편대는 저 멀리 사라져버리고 만다. 한 번 사라진 편대와 촬영기가 다시 만나려면 몇 분이 소요된다. 어렵게 원하던 Shot을 촬영하고 다시 울릉도, 설악산을 촬영하고 동해안을 따라 낙하하기 시작할 때 구름위로 붉은 기운이 솟구쳤다. 바다의 일출은 실패했지만 구름 위의 일출도 그에 못지 않은 장관이다. 편대를 몰아 태양 속으로 집어 넣고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촬영기를 상승, 하강시켰다. 물론 편대는 하강, 상승하는 그림으로 Finder에 나타난다. 이 그림은 나중에 애국가에 한 동안 삽입되어 익숙한 그림이 되었다. 이제는 전투기 편대의 특성인 기동성을 보여 줘야 할 차례이다. 촬영기의 출력을 급속히 증가시키자 하늘이 옆으로 기우는가 싶더니 머리 위에 땅이 나타난다. 이때는 비행기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어야 하나 본능적으로 몸을 바로 세우고자 지탱할 것을 찾았다. 허둥대던 왼 손에 무엇인가가 잡혔다. 순간 헬맷으로 귀를
    2003-02-24
  • 남극취재기2
    칠레는 12월 12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현 대통령은 프레이. 후보는 좌파계열의 리까르도 라고스와 우파계열의 호와낀 라빈 두명이었다. 주선생으로부터 들으니 서민층에서는 라빈을, 중산층 이상에서는 라고스를 지지한다고 했다. 우리가 찾은 곳은 산티아고의 시민 운동장이었다. 그곳은 라고스의 선거 유세가 예정돼있었다. < 라고스의 유세 선전물 : 거의 실제 크기 > 선거 유세가 시작되기 몇시간 전부터 유권자들은 자리를 매우기 시작했다. 자발적으로 구성된 유세원들이 전통음악에 맞춰 살사 춤을 추며 입장하는 유권자들을 맞았다. 유세장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마을의 축제 같았다. 질서정연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원봉사자들의 자신의 임무에 따라 분위기를 돋우고, 물품을 팔고, 전단을 나누어줬다. 우리가 취재의사를 밝히자 흔쾌히 도와주며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우리가 취재하려 한 것은 세계의 선거 모습이었다. 남극 취재 프로그램에 사용할 것은 아니었고, 1999년 말 세계 각지에서 실시된 선거의 모습을 취재해 보도하려는 또 다른 특집 프로그램을 위해 칠레쪽을 맡아 취재하는 것이었다. 유세장에서도 남미인들의 열정적인 모습은 그대로 표출되었다. '아메리칸 사운드'라고 하는 칠레 최고의 밴드가 유세 전에 나와 남미 특유의 음악으로 청중의 흥을 돋구자 모두 일어나 노래에 맞춰 춤을 추기도하고 라고스의 이름을 연호하기도 했다. 한 시간 여의 사전 공연이 환호 속에 끝나자 각계 인사들의 지지 연설이 이어졌다. 칠레의 유세와 우리 나라가 다른 점이 있다면 가족 단위의 청중들이 많았다는 것. 자원봉사도 가족 단위 참여가 많았고, 남녀노소 누구나 할 것 없이 참가하여 한바탕 축제를 만끽했다. 지지자들의 연설이 끝나고 드디어 라고스가 등장. 관중은 열광했고 후보자의 한마디 한마디에 환호했다. 세시간 여의 행사 내내 라고스를 지지하는 열정으로 청중들은 하나가 되었다. 행사중 선관위 직원들을 인터뷰했는데 전통적으로 유세에 선관위는 별로 개입을 안하며 와도 할 일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말이었다. 산티아고 거리 곳곳에는 두 후보의 선전물이 경쟁하듯 널려있고 개인 집의 담벼락에도 지지하는 후보의 이름을 크게 써놓기도 했다. 한바탕 유세가 끝나고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다. 사람들은 한차례 재밌는 공연을 보고 돌아가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선관위 직원들과 인터뷰하고 있는데 칠레의 방송 취재팀이 우리를 취재하기도 했다. 세시간여의 취재로 얼굴, 이마는 벌겋게 타버렸다. 산티아고의 전경을 위해 산크리스또발(St. Columbus) 산에 올랐다. 우리나라로 치면 남산같은 산인데 산티아고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빌딩과 아파트가 숲을 이룬 신도시와 개발이 필요해 보이는 구도시의 차이는 뚜렷했고 멀리 안데스의 만년설도 보였다. 고등학교 선생님이라고 하는 한 칠레인은 예전에 비해 안데스의 만년설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말했고 우리는 만년설을 배경으로 그를 인터뷰했다. 저녁에는 세종기지 13차 월동대원들과 함께 칠레 전통 음식을 먹기로 하고 주선생이 예약해놓은 '로스 아도베스 데 아르고메도(아르고메도의 기와집)'라는 음식점으로 갔다. 넓직한 것이 외국인 관광객들을 전문으로 맞는 음식점 같았다. 우리는 '빠리자다'라는 칠레 전통음식을 주문했다. 소고기의 각 부분을 신선로 같은 그릇에 담아, 데우면서 먹는 독특한 음식이었다. 우리는 삐스코 샤워라는 술로 목을 축였다. 잠시후 사회자가 나와 각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소개했다. 각국에서 온 사람들을 소개하며 그 나라의 말로 간단하게 환영인사 해 주었다. 주선생이 사회자에게 미리 얘기해 뒀는지 사회자는 우리 팀을 부르더니 꼬레아의 월동대라고 소개하고 곧 남극으로 간다고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잠시후 칠레 전통 춤이 무대에서 시작되었다. 춤이라고 해봐야 짝을 이룬 남녀 10쌍 정도가 전통 의상을 입고 나와 빙글빙글 돌면서 박수 치고 손수건을 머리위로 돌리고 하는 것이었다. 간단한 공연이 끝나자 무용수들이 무대 밑으로 내려와 손님들을 무대위로 끌고 올라갔다. 전통의상을 입히고 모자를 씌우고 다시 음악이 흐르면서 아까와 같은 춤을 추었다. 간단하고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에게는 재미있고 흥미로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모두들 흥겨워하며 춤을 추는 사이 같은 공연이 몇 번은 반복되었다. 식사 후 월동대원들은 곧있을 1년간의 연금 생활을 의식했는지 모두가 한마음이되어 술집으로 향했고 우리는 호텔로 돌아와 짐을 챙겼다. 다음날 오전 11시 우리는 산티아고 공항을 떠나 아메리카 대륙의 땅끝 마을 푼타 아레나스로 향했다.
    2003-02-24
  • 남극취재기
    남극 취재기1 - '출발 : 서울에서 산티아고까지' (1999년 11월 - 12월) ------------------------------------------------------------------------------- 밀레니엄 특집을 위한 남극 취재 출장 명령이 떨어졌다. 제목은 '남극을 선점하라!' 남극? 펭귄이 노니는 그곳? 눈과 얼음의 나라? 지구의 끝? 세종기지가 있는곳?! 그렇다. 바로 남극으로의 출장이었다. 남은 기간은 2주일. 11월 18일 출발하여 한달 정도 계획으로 떠나는 것이었다. 취재팀은 이주형 취재기자와 정명구 촬영기자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이었다. 우선 남극이라는 곳을 알아보기 위해 남극 세종 기지 홈페이지(http://sejong.kordi.re.kr)를 찾았다. 아! 사람이 살고있었다. 그것도 세계 각 국의 꽤 많은 사람들이 연구 활동을 목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다.그래, 사람이 살고 있다면 아주 못 갈 곳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펭귄과 물개가 있는 곳, 점점 남극이 친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겨울인 우리 나라와는 반대로 남극은 여름이었다. 세종 기지를 기준으로 기온은 영하 10도 내외, 하지만 바람의 영향으로 체감 온도는 훨씬 낮다고한다. 2주일의 준비 기간 동안 세 명의 남극 취재진은 아침마다 모여 회의를 거듭했고 드디어 1999년 11월 18일 김포공항을 떠나 남극으로 가는 대장정을 시작하였다. 남극까지의 여정은 이랬다. 김포공항 출발, LA도착, 트랜짓 후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2박. 다시 출발, 칠레의 땅 끝 마을 푼타 아레나스 도착, 일단 여정을 풀고, 일정이 되는대로 칠레 공군기를 타고 세종 기지가 있는 킹조지 섬으로 가는 것이다. 18일 공항, 세종기지에서 근무하고있는 12차 대원과 임무 교대를 하기 위해 남극으로 떠나는 13차 대원들과 간단하게 상견례를 하고 오후 3시경 서울을 출발했다. 대한 항공 KE017 비행기는 날짜 변경선을 넘어 현지 시각 18일 오전 8시 30분, LA에 도착했다.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고 갖다주는 기내식만 먹으며 10시간 넘게 비행기에 앉아 있었더니 여간 피곤한게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가 갈아탈, 칠레 산티아고 행 Lan Chile 601편이 오후 1시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공항에서 꼬박 4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다. 불행하게 미국 비자가 없는 관계로 공항 직원의 삼엄한 경계 속에 4시간을 대합실에서 대기했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Lan Chile(칠레의 국적기)를 타고 다시 산티아고로 향했다. 중간에 페루의 라마를 거쳐 12시간 여를 가서 현지 시각 아침 6시 40분에 산티아고에 내렸다. 입국 수속을 마치니 우리가 만나기로 한 가이드 주신기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주신기씨는 어려서 칠레에 이민 왔고, 몇 년 전에는 세종 기지의 월동대원으로 근무했었기 때문에 세종 기지로 가는 한국 연구원들을 맞는 가이드 역할을 해오고 있었다. 주선생의 차에 장비를 싣고 숙소로 가서 여장을 풀었다. 묵을 곳은 산티아고 쎈뜨로 지역에 있는 '뚜빠우에 호텔'. 산티아고는 여름이라 그런지 햇볕이 세고 따가왔다. 호텔로 가는 차 안에서 본 산티아고는 우리나라 70년대 모습을 보는 듯했다. 70년대 후반 공장 지역 분위기가 났는데 주선생의 말로는 구도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담벼락에는 낙서와 곧 있을 대통령 선거관련 글귀가 많았고 단정한 교복 차림의 학생들도 많이 보였다. 안데스 산맥이 멀리 보이지만 부옇게 스모그가 낀 것이 공기가 아주 탁해 보였다. 안데스 산맥, 꼬스따(coast) 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주선생의 설명이었다. 신도시는 상대적으로 깨끗하고 사람은 별로 없어 한산해 보이기까지 했다. 차는 많고 길은 좁아서 운전하는 모습이 아슬아슬해 보이기까지 했다. 남미인들은 낙천적이기 때문에 쓸만큼만 벌고 나머지는 생활을 즐긴다고 한다. 칠레의 인구는 1470만명 정도, 한인은 약 1500명 정도이고 중국인이 6000명 정도 거주한다고 한다. 일본인도 5-600명 정도 있는데 거의 상사 주재원이라고 한다. 산티아고에서도 할 일은 있었다. 2박 3일간 머무른 후 땅 끝 마을 푼타 아레나스로 떠나는데 그동안 우리는 칠레의 대통령 선거 유세를 취재 했다. 남극취재기2로 계속됩니다.
    2003-02-24
  • 일본러브호텔
    일본 러브호텔을 돌아보고 ( 2000년 10월 ) -------------------------------------------------------------------------------- KBS 영상 취재부 유민철 기자 지금 고양시에서는 러브호텔 때문에 난리가 났습니다. 시에서는 화들짝 놀라 이미 내 준 허가를 취소하겠다고 하고 주민들은 그걸로는 안 된다며 납세거부운동까지 벌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일본 러브호텔 취재를 다녀왔습니다. 정확히 러브호텔 '규제실태'를 취재하고 왔습니다. 짧은 시간 설명과 화면만으로는 비교가 곤란한 부분이 있어서 보충설명을 적겠습니다. KBS 뉴스 홈페이지 오프더레코드에도 올려놨으니까, 그쪽이 읽기 편하실 겁니다. = 단칼에 없애지 않는다 = 뉴스에서 보셨겠지만 (일본 신주쿠나 시부야에서) 학교, 주택가와 러브호텔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사실 직선거리로 20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고 있는 일산의 경우보다 훨씬 가깝습니다. 이차선 차도 하나를 사이로 주택가와 상업지구로 나뉘어져 있고 주택가에서 이백미터도 안 떨어진 상업지구에는 러브호텔이 들어서도 됩니다. 서울보다 훨씬 복잡, 조밀하고 땅값이 훨씬 비싼 동경과 서울, 일산을 물리적인 거리로 비교하는 것은 러브호텔 규제실태를 파악하는 데에 소용이 없습니다. 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 러브호텔의 사회적 기능이 한국과 다르다는 점도 일대일 비교가 곤란한 점입니다. 일본과 우리나라의 차이는 일단 러브호텔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직 일반여관과 '러브호텔'의 개념이 구체적으로 분류되어 있지 않은 우리나라와 다른 점입니다. 우리 뉴스에서 '러브호텔을 허가해준...', '러브호텔 허가 취소를 요구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이건 엄연히 잘못된 문장입니다. 왜냐면 우리나라엔 애당초 러브호텔이 없기 때문입니다. 외부 장식도 다르고 - 안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 일반 숙박객이 머물기엔 좀 이상한 장소에 들어선 여관들이 '러브호텔'의 기능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러브호텔 취재를 하면서 제일 먼저 놀란 것은 일산의 초등학교 앞 러브호텔 소동과 똑같은 일이 일본에서는 이미 1957년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40년이나 뒤진 게 하필이면 러브호텔이라니... 1957년 도쿄시내 '하토모리'라는 초등학교 앞에 러브호텔 10여개가 들어섰습니다. 주민들의 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결국 그 러브호텔들은 일년을 못 가서 문을 닫고 맙니다. 이후 시민들은 시위등 지속적인 영업방해를 펼치고 관공서, 경찰등은 끊임없는 감시로 새로이 들어서는 러브호텔을 견제합니다. 이렇게 40여년을 지나는동안 러브호텔에 관한 법률은 추가와 수정을 거듭하면서 아주 세련되게 다듬어집니다. 일본에서 러브호텔이란 풍송영업법의 규제를 받는 숙박업소를 말합니다. 일반여관과 소위 '러브호텔'이 분화되어 있지 않은 우리나라와 다른 점입니다. 천장에 거울이 붙어있다거나 회전하는 침대가 있다거나 길에서 현관이 안보이는 등의 호텔들은 풍속영업법의 규제를 받는 소위 '러브호텔'로 분류가 되고 일반 호텔/여관과는 다른 규제를 받게 됩니다. 외관에는 간접조명시설만 사용해야 하고 경찰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언제든 동의나 영장 없이 검문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경찰에서는 러브호텔을 필요악 같은 걸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러브호텔이 대략 유부남, 유부녀들의 불륜의 장소로 인식되어 있는데에 비해서 일본에서는 그 기능말고도 젊은 남녀들의 만남의 장소, 일부 매춘의 기능까지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우리 나라와 달리 공개적인 매춘장소가 없는 일본에서 러브호텔이 각종 범죄를 줄이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존재를 인정하는 대신에 철저히 경찰의 통제권안에 놓겠다는 겁니다. 경찰은 러브호텔 업주를 6개월 마다 경찰서로 혼자 불러 각서를 받습니다. 풍속영업법의 테두리로 정해진 사항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지 않지만 매춘을 안하겠다는 등의 법으로 정해진 불법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게 합니다. 엄정하기로 이름난 일본 경찰과 독대를 하는 것 자체가 업주들에겐 대단한 부담이라고 합니다. 이 각서는 나중에 법정시비가 되었을 때 업주를 꼼짝 못하게 하는 단서가 됩니다. 일단 주택가에 러브호텔이 들어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시민이나 공무원이나 한결같이 말합니다. 지도를 펴놓고 학교와 직선거리로 100미터면 100미터 - 학교의 운동장 중심부터가 아니라 학교의 담벼락 모서리에서부터 호텔의 담벼락 모서리까지를 말합니다. 겹치면 허가가 안나옵니다. 심지어 시전체에 러브호텔을 불허하고 있는 도시도 있습니다. 그리고 상업지구에라도 문을 연 러브호텔들은 위에서 얘기한대로 귀찮을 정도로 지속적인 견제를 받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발생하면 그 때마다 조례를 바꾸던지 시행령을 바꾸던지 S해서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는 러브호텔을 새로운 법규로 규제합니다. 일본의 러브호텔 관련법이 세련되게 다듬어졌다는 것은 한편으로 그만큼 시정할 문제가 많았다는 얘기도 되는 것입니다. 외국인 매춘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하고 혼자 들어와서 자살을 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서 골치를 썩기도 한답니다. 담당공무원의 얘기는 '한 칼에 치려고 하지마라. 불가능하다. 지속적인 견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허가를 취소한 한국의 예를 얘기해주자 반색을 하며 '그걸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검토해 보았지만 법정으로 갈 경우엔 100% 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는 할 수 없다' 40년전 시위에 참가했던 마을 노인의 얘기도 '쉽게 안 없어진다.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반대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심스러운 일본인들의 성격과 맥을 같이하는 얘깁니다. 주택가에 들어서 있는 기존의 러브호텔들은 새로이 개정되는 풍속영업법에서 규제를 받습니다. 합법적으로 영업을 계속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 자체가 매우 피곤한 일이 됩니다. 결국 많은 러브호텔들이 문을 닫고 전문학교, 노상주차장등으로 용도전환을 했습니다. 존재를 인정해주고 법적인 테두리도 만들어 주기는 했지만 사실은 철저히 통제권 안에 놓고 지속적으로 피곤하게 만들어서 업주가 제풀에 지쳐 떨어지게 하는 어찌 보면 더 무서운 방법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필요한 배경조건이 공무원과 경찰의 거의 완전한 청렴입니다. 과자 한 조각도 안받는 다는 것입니다. 공무원은 법에 정해진 권한 안에서는 최대한으로 법을 행사합니다. 경찰과 업주와의 유착관계는 생각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이 법으로서의 효력을 가지면서 러브호텔을 규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얘깁니다. 지금 일산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학교를 마주보는 아파트 주택단지에 '이상한' 여관이 들어선 것은 일단 문제지만 앞으로가 더 중요합니다. 잘은 모르겠으나 업주 입장에서는 사유재산 침해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앞으로 전국 어느 곳에서나 러브호텔 전업을 희망하는 여관들이 생겨날 텐데 그 때 마다 시위와 납세거부 운동으로 그 여관들을 없앨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지금은 러브호텔을 당장이라도 부술 듯이 시민들도 반대운동을 하고 있고 언론도 동참하고 있습니다만 이게 언제까지 계속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때 그 때 마다 분노의 정서에 바탕을 둔 반대시위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합법적인 규제 - 업주가 꼼짝 못하는 - 방법이 생기고 공무원, 시민들의 '지속적인' - 이게 중요합니다 - 반대운동과 규제가 있어야만 우리가 우려하는 러브호텔의 문제점을 막을 수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왔습니다. 물론 이렇게 된다면 러브호텔이라는 막연한 개념이 구체적인 실체로 자기 자리를 잡게 된다는 또 다른 문제 - 법적이라기 보다는 사회통념, 윤리상의 문제 - 가 새로이 생겨나겠습니다만....
    2003-02-24
  • 몽골취재기3
    2. 몽골의 한국바람 2 * 한국 화장품, 한국 공산품 몽골은 자연자원이 풍부한 나라지만 이를 개발할 만한 자본과 기술력이 없고 운송비용이 워낙 많이 들어 1차, 2차 산업이 발달 된 게 없읍니다. 원유, 구리, 육류, 가죽, 캐시미어등이 주된 수출 품입니다. 반면 거의 모든 공산품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읍니다. 여기에 한국산 제품의 인기가 매우 좋습니다. 한국산 화장품은 값이 비싸서 선뜻 살 수 없는 상품이며 한국산 의류, 신발등이 인기가 좋아서 가짜 한국상품이 나돌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전제품은 일제가 시장을 선점하고 있어서 한국산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 녹색 혁명 - 김치와 채소 우리도 한 때 양식당에 가서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설익은 쇠고기 스테이크를 먹는 것을 은근히 과시하던 시절이 있었읍니다. 요즘 몽골에서는 한국식당에서 가서 김치를 비롯한 채소를 먹을 줄 아는 것이 중상층 문화의 상징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우선 몽골 식당보다 대여섯배나 비싼 한국 식당에 출입하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부의 과시가 되기 때문입니다. 몽골의 대졸초임은 우리 돈으로 60, 000(육만)원 정도인데 현지 한국식당의 값은 식사 한 끼에 5,000원 정도니까 대단히 비싼 값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 채소를 먹을 줄 안다는 것으로 선진문화를 받아들인 깨인 사람 축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김치와 채소음식을 건네자 동물이나 먹는 음식을 사람에게 준다며 화를 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채소를 끝내 삼키지 못하고 뱉어내는 사람도 있었답니다. 이런 몽골인들의 인식이 바뀌어 이제는 시장에서도 각종 채소를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 녹색혁명의 아버지 - 이해식 교수 몽골인들이 채소를 먹기 시작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가축 방목이 전부였던 몽골의 1차산업에 농경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것입니다. 겨울 석달 동안은 불모의 동토가 되지만 나머지 기간은 몽골은 거대한 초지가 됩니다. 이렇다할 2차 산업이 없는 몽골에서 농산업은 필요성이 매우 크고 가능성도 있는 분야입니다. 이를 인식하고 농산업 보급에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이 한국인 이해식 교수입니다. 몽골 국립 농대에 취임해서 어려움을 이겨내고 비닐하우스등을 도입해 각종 채소 재배를 성공시켜 농업에 대한 정부의 인식전환을 이끌어낸 인물입니다. 이해식 교수는 매스컴등을 통해 김치보급에도 애를 쓰면서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 교민사회의 대부 - 전의철 박사 수교 10년째인 현재 교민들의 수는 600여명. 음식업, 상업, 여행사등 여러 방면에 진출해 있읍니다. 몽골 교민사회는 여타 다른 나라의 교민사회와 비교해서 아주 모범적입니다. 이리 저리 나뉘어 서로를 헐뜯거나 적대시하는 모습들이 없다고 합니다. 숫자가 적은 이유도 있겠지만 전의철 박사의 덕이라는 것이 만나본 사람들의 공통적인 의견입니다. 전의철 박사는 선교의 일환으로 연세의료재단에서 설립하고 한국에서 건너간 자원봉사 의사들이 운영하고 있는 연세병원의 원장입니다. 교민사회에서 전의철 박사의 권위와 신망은 대단한 것이어서 교민들이 반목없이 화합하는데에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순을 넘긴 나이에 한국에서 존경받으며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는 분임에도 몽골이라는 오지라면 오지일 수 있는 곳에서 의료봉사로 헌신하고 있읍니다. 기독교 선교의 일환으로 운영되고 있는 이 병원에는 전의철 박사 말고도 여러명의 젊은 한국의사들이 식구들까지 같이 이주해서 도시의 소외계층과 오지에 의료봉사를 하고 있읍니다. 저는 기독교 신자는 아닙니다만 열악한 환경에서 고생하면서도 봉사에서 커다란 보람을 찾고 있는 의사들의 모습에 머리가 숙여졌읍니다. 지금 얘기한 것들은 몽골의 아주 작은 부분들이지만 어쨌거나 몽골은 급변하고 있고 그 중심에 한국이 자리잡고 있읍니다. 한국에 대한 친근감, 불법취업자들이 전파해온 한국 문화, 수교 초기에서부터 진출한 교민등 여러 요인이 합쳐져서 지금 한국은 가장 가고 싶은 나라이고 기회의 나라가 되었읍니다. 과거 몽골의 지배를 받았던 시절이 있지만 지금은 또 다른 양상으로 한국과 관계를 넓혀가고 있읍니다. 비행기로 세시간반. 중국을 사이에 두고 있는 몽골은 그렇게 멀고도 가까운 나라였습니다.
    2003-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