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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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포 2003” 취재기/그곳에 “북한 가려면...
    이재영 기자는 2003년 2월 17일부터 25일까지 "남북공동 일제 강제징용에 대한 전시회와 세미나" 취재차 중국의 북경을 거쳐 평양을 다녀왔다. 취재기는 젊은(?)기자가 바라 본 또 다른 북녘의 모습을 흥미있게 적어가고 있다. 르포 2003” 취재기/그곳에 “북한 가려면... 그곳에 가려면... “♬♬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요금 이 만원. 소련도 가고 달나라도 가고 못 가는 곳 없는데.....” 대학생 때 이 노래를 즐겨 부른 기억이 있다. 그런데 나는 평양은커녕 중국 비자 만드는데 벌써 이 만원을 다 써버렸으니 이거 뭔가 문제도 한참 문제다. 평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육로, 직항로등 몇 가지 방법이 있지만 흔히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노선이 중국을 경유하는 방법이다. 보통 하루 전에 중국에서 1박하면서, 주중 북한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아 다음날 고려항공을 타고 평양에 들어가게 된다. 중국비자는 나중에 평양에서 나올 때도 중국을 통해야 하기 때문에 -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고려항공과 중국공항은 연계가 되어있지 않아서 공항 내에서 TRANSIT이 안됨 - 꼭 복수비자를 받아야한다. 중국은 (내가 알기론) 취재비자 받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공항에서 ENG카메라를 갖고 나가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설령 무사히 공항을 빠져 나간다 하더라도 나중에 또 갖고 나갈 것을 생각하면 애초에 공항에서 신고를 하는 편이 낫다. 내가 들어간 곳은 북경공항이었는데, 1층 도착하는 곳 가운데쯤에 보면 “신보”라고 써있는 곳에 가서 내가 이러이러한 장비를 들고 왔다고 신고하면 된다. 중국공항 직원들은 대부분 영어가 잘 안되기 때문에 중국말이 안되면 손짓 발짓을 동원해야 한다. 카메라와 부수 장비를 서울에서 준비해간 장비 리스트와 함께 넘겨 주면 그쪽에서 뭔가를 열심히 써서 얇은 종이한장을 찢어서 준다. 나중에 2층 출발하는 곳 가운데쯤 가면 비슷한 곳(중국인들이 세관신고하는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받았던 종이를 건네주면 직접 갖다준다. 주중 북조선대사관에 가면 비자를 만들어주는데 다른 나라와 달리 비자를 여권에 직접 찍어주는게 아니라 따로 사증을 한 장 만들어준다. 때문에 잃어버리기가 쉬워서 특별히 관리를 잘해야한다. 그 사증은 나중에 평양을 떠날 때 북쪽에서 가지기 때문에 결국 내여권에는 북쪽에 갖다온 흔적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그곳에 가면... 배단물 한잔 마시고 잠시 눈을 부쳤다 떼니 고려항공은 이미 북쪽상공을 낮게 날고있었다. “평양공항” 멀리 보이는 김일성 주석의 사진아래 드디어 나는 평양에 난생 처음 첫발을 디뎠다. 이렇게 쉬운 것을, 이까짓 별것도 아닌 것을... 뭐가 그리도 힘들고, 뭐가 그렇게 어려웠는지... 평양은 생각보다 활기가 넘쳤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 넘쳤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웃는 얼굴로 나를 반겼다. 상점 판매원동무들은 남쪽의 백화점직원들보다 더더욱 매상 올리기에(환율을 현실화한 작년 경제개혁이후로 성과급제도 또한 도입했다 한다.) 열심이었고, 식당 의례원 동무들은 우리의 짓궂은 농담에도 수줍게 웃으면서 받아넘겼다. 거리의 아이들은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남쪽아이들과 다르게, 바위며 풀밭이며 할 것 없이 개구지게 놀고있었다. 하지만 최근 어려워진 전력상황때문인지 밤이 되면 도시는 적막에 빠졌다. 가로등하나 안 켜져 깜깜한 인도위로 뜨문뜨문 사람들이 무언가 한 짐씩 지고 들고 소리 없이 걸어다녔다. 음식은 대체로 정갈하고 담백했다. 특히 김치는 한 공장에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식당마다 비슷했다. 한겨울에 냉면을 네끼 연속으로 먹고 거기에 얼음 보숭이(요즘엔 에스키모라고도 한다)를 디저트로 먹으니 아무리 옥류관냉면 이라고 해도 고개가 절로 흔들어질 수밖에... 나중엔 다들 온반으로 메뉴를 바꾸었다. 묘향산의 칠색송어, 대동강의 숭어, 개성의 십첩반상, 평양의 단고기정식, 털게요리등등 맛난 음식들은 많았으나 먹을 때까지 뜨거움을 유지시켜주지 못하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평양에서 남북공동 일제 강제징용에 대한 전시회와 세미나가 있었다. 애초에 그 행사때문에 북쪽에 왔던지라 송출을 해야했다. 송출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위성청약을 해야하는데 Intelpax로부터 확정서가 도착해야 한다. PAL카메라를 휴대하고 갔기에 편집기 사용여부를 계속 타진했고, 잠깐은 사용해도 좋다는 말을 전해듣고는 위성시간을 10분간만 잡았다. 6시에 송출시간을 잡아놓고, 오디오 2개와 밑그림을 송출해줘야 했다. 그런데 데스크를 보고 스탠딩을 하고 조선중앙TV에 도착한 시간이 5시 40분이었다. “내가 평양까지 와서 초치기를 해야하다니(투덜투덜)...” 겨우겨우 오디오편집 2개를 하고 나니 6시, 바로 송출, 오디오2개 4분, 밑그림 겨우겨우 6분...그나마 조선중앙TV에는 남쪽으로 바로 국제전화를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더군다나 눈에 불을 켜고 “저 그림은 빼라우”를 외치는 안내원 동무의 방해공작을 조선중앙TV에서 근무하는 리광철 동무가 “그림 고를 시간이 없어, 그냥 보내게 하라우”하며 겨우겨우 막아주는 덕분에 무사히 송출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어찌나 고맙던지... 조선중앙TV에 내야하는 송출료는 1분에 40달러, 10분에 400달러였다. 편집기 사용료는 받지 않는걸 보니 역시 한민족은 한민족인가보다. 그 날 저녁에 손가락이 탈골됐다. 손가락이 빠진 사연이야 기구하나 여기서는 열심히 일하다가 다친 걸로 넘어가기로 하고, 어쨌거나 처음으로 전혀 교육받지 않은 북쪽사람들을 병원에서 만나게 되었다. 밤 10시쯤이라서 그랬는지 외래환자는 전혀 없었고, 응급실도 없어 보였다. 병원에 도착해서 뢴크겐사진(우리말로 X-Ray)을 찍는 데까지 1시간이 걸렸다. 뢴트겐 기사를 집으로 부르러갔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말만 들으면서... 어쨌든 환자 1명에 모인 의사가 5명, 간호사가 2명, 이렇게 황송할 데가...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아서 치료는 금방 끝났지만, 그 후가 더 유쾌했다. 김창학 외과과장은 치료비가 너무 비싸게 나와서(나는 그곳에서 외국인적용대상 치료비로 40유로를 냈다.) 어떻게든 깍아줄려고 내앞에서 고민하고 있었고, 담당의는 환자기록부 국적란에 어떻게 써야될지 몰라 고민 고민하다 결국 조심스럽게 “남조선이라고 적으면 되갔지요?”라고 물었으며, 간호사는 혈압을 재고 올라간 내셔츠를 조심스럽게 내려주고 심지어 단추까지 채워주고 있었다. 어쨌든 평양친선병원 개원이래 환자기록부에 이름을 올린 첫 남쪽사람이라하니 이일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개성은 평양보다 한층 더 인간적인 도시였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우리 나라 1970년대 말에서 딱 멈춰버린듯했다. 하지만 문화재는 아무래도 사람 손이 덜타서 그런지 원형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송악산을 보았다. 날씨 좋은날 남산에 오르면 개성 송악산이 보인다. 나도 2번 정도 촬영한 기억이 나는데 바로 그 송악산이 눈앞에서 펼쳐지니 감개가 무량... 송악산은 여인네가 누운 모습같이 선이 참 고왔다. 앞으로 개성공단이 들어설 자리에 가보니 그곳에서 판문점이 불과 4Km이었다. 개성에서는 날 좋은 밤이면 일산 신도시의 불빛이 한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또다시 북경공항을 경유해서 가느니 그냥 이대로 이길 따라 버스 타고 집에 가고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곳에서 나오며> 떠나는 날 아침엔 안개가 심했다. 보통강변의 나뭇가지들은 하얀 서리꽃을 피웠고, 그 아래 봇짐을 지고 걷는 이는 내누이 같았다. 모든 것이 똑같았고,,, 모든 이가 똑같았다... “그곳엔 사람이 살고있었다...” 자료출처: http://www.sbsnewstech.co.kr/kor/k-main.htm
    2003-07-15
  • 전통다큐멘터리의 톱을 지킨다
    전통다큐멘터리의 톱을 지킨다 톱프로덕션 톱프로덕션은 세계 최초, 세계 최고, 범세계적 영상을 추구하는 프로덕션이다. 불교TV에 방영된 한국의 명찰 100편을 비롯, MBC 거대한 유통의 바다, KBS 자동차 천만대 시대 등 굵직한 기획 프로그램을 제작한 이 회사는 최근 전통 한국 장인을 다룬 ‘한국의 장인’을 제작 방영중이다. 글| 김대영기자 자료출처: 비디오플러스 다큐멘터리 분야는 저렴한 비용으로도 제작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많은 프로덕션이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정통 다큐멘터리를 고집하고 있는 프로덕션은 많지 않다. 톱프로덕션은 영상미를 강조한 정통다큐멘터리를 전문으로 제작해 주목을 끄는 프로덕션이다. 서울 양천구 방송회관에 위치한 톱프로덕션을 찾았다. 톱프로덕션은 20년간 KBS 보도국 카메라기자 생활을 한 백승대 사장이 운영하는 다큐멘터리 전문 프로덕션이다. 지난 1994년 9월 설립된 이 회사는 불교TV에 약 3년에 걸쳐 ‘한국의 명찰’ 100편를 제작 방영한 것을 비롯, MBC IMF특집 ‘거대한 유통의 바다’, KBS ‘자동차 천만대시대’ 20편, 수요기획-‘청백리 박수량 백비에 부는 바람’, ‘장애를 이긴 주니어 골퍼 제임스 명’ 등을 제작했으며 최근에는 KBS ‘한국의 장인’과 보도 프로그램인 뉴스라인에 ‘더불어 사는 세상’을 제작, 방영하고 있다. 정통 다큐멘터리의 맥을 잇는다 “저는 74년 KBS 카메라기자로 입사해 꼭 20년을 채운 1994년에 회사를 그만두고 톱프로덕션을 차리게 됐어요. 제가 KBS에서 근무할 때만 해도 정통 다큐멘터리는 교양파트에서 다루지 못하고 보도국에서 다뤘죠. 당시 제가 촬영한 것이 ‘실크로드’, ‘신왕오천축국전’ 등이었어요.” 백승대 사장. 그는 26세 나이에 최연소 한국영화 촬영기사로 수편의 극영화를 촬영하고 월남에 종군하여 국방부 제작의 월남전선 문화영화를 제작하는 등 다양한 촬영경험을 가지고 있다. 1974년 KBS 보도국 카메라기자로 입사하며 본격 방송생활을 시작한 그는 다양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접하면서 다큐멘터리 장르에 매료됐다. 백승대 사장이 특히 정통 다큐멘터리 제작에 관심을 갖는 것은 ‘실크로드’, ‘신왕오천축국전’ 등 취재를 위해 인도에 4개월여 머물면서, 불교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공부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후 1988년 미국 특파원 생활을 하며 백사장이 느낀 것은 진정한 프로는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분야든 최고의 자리라면 주변 여건에 관계없이 홀로 설 수 있다는 것이다. 백승대 사장이 본격 프로덕션 설립을 생각한 것은 1994년. 직장에서 승진을 하며 일선직이 아닌 관리직으로 자리를 옮긴 백승대 사장은 현장에서 뛰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힘이 닿는 한 영원한 장인으로 살고 싶었어요. 관리직으로 내려앉아 일선 기자들이 촬영해 오는 영상물이나 보는 것은 체질에 맞지 않아요. 특히 제가 사직을 결심한 것은 불교방송으로 자리를 옮긴 선배의 권유 때문이었어요. 당시 불교방송은 일본의 ‘명찰순례‘를 본뜬 ‘한국의 명찰’을 기획프로그램으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선배가 제게 일을 맡아달라고 부탁한 거죠.” 이미 ‘신왕오천축국전’ 등으로 불교에 관심이 있던 터라 일을 맡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백사장은 최고의 영상미를 구현하는 수준 높은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결심으로 현재의 톱프로덕션을 설립했다. ‘한국의 명찰’은 국내 1천8백여 사찰 가운데 100개를 선정, 제작에 들어갔다. 3년간의 제작기간 동안 심혈을 기울여 100편을 완성했지만 백승대 사장이 느낀 것은 프로덕션의 열악한 현실이었다. “당시만해도 공중파 방송은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케이블 방송국이 재정적으로 어려워지며 프로그램의 질은 큰 문제가 아니었어요. 말 그대로 방송에는 일류가 필요없다는 것이죠. 그저 질은 다소 떨어져도 저예산의 프로그램이면 만족하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방송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최고의 영상을 보여주어야 하는 서비스 아닙니까” 약삭빠르게 시류를 타지 못하다 보니 직원 봉급 줄 수 있을 때가 제일 좋다고 할 정도로 회사의 재정상태는 좋은 편이 아니다. 그러나 톱프로덕션은 ‘한국의 다큐멘터리 영상은 이렇게 가야 한다’는 전형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에 그 흔한 6mm카메라 한 대 쓰지 않는다. “요즘 6mm가 좋다고 말을 하는데 사실 6mm는 심도가 낮아 방송화질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거기다 혼자서 찍다보니 화질이 더욱 떨어지는 게 자명한 일 아닙니까” 톱프로덕션에는 6mm카메라를 쓰지 않는다. 아무리 방송국의 제작비가 낮게 책정돼도 제대로 된 영상이 나오지 않으면 헛일이다. 특히 영상을 아는 사람에게 이러한 영상물은 스스로 격을 떨어뜨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영상은 정확한 연출가의 연출이 중요 “한 때 우리도 프로그램을 외국에 수출하고 싶어 깐느에서 열리는 프로그램 마켓에 나가봤어요. 그 때 하루동안 둘러보고 얼른 가방을 닫았어요. 흔히 프로그램 수출 이야기를 하는데 실제 외국시장에 나가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어요. 이 시장에 나온 프로그램들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공을 들여 제작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어요.” 백승대 사장은 아직 한국 프로덕션이 외국시장을 겨냥해 제작한 작품은 없다고 단언한다. 적어도 그 시장에서 팔기 위해서는 자연다큐멘터리 정도의 제작기간과 정성을 쏟아야 한다는게 백사장의 설명이다. 그러나 현재 프로덕션의 현실은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낮은 제작비에 맞추려면 제작기간을 단축해야 하고 비용을 줄여야 한다. 이것은 저급한 품질을 양산하는 주요인이다. 또 해외에서 팔릴 수 있는 상품은 세계적인 공감대를 가질 수 있는 콘텐츠이어야 한다. 주로 해외시장 진출을 노리는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도 세계시장에서 공감대를 얻기 어렵다.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숙련된 연출가의 정확하고 계산된 연출이 필수요건이다. 더욱이 주제는 범세계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제작되는 모든 프로그램은 국내용 정도다. 기껏 수출한다 해도 우리보다 떨어지는 동남아나 중국 정도다. 특히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6mm 프로그램의 경우 백사장은 더욱 우려를 나타낸다. 저예산에 근거해 6mm 프로그램이 많이 등장하고 있지만 사실 6mm의 최대 장점인 비용절감이라야 AD 등 2명 정도의 절약 효과밖에 없다. 그러나 영상의 질은 방송용 ENG의 수준을 따라오지 못한다. 더구나 일부 VJ들은 영상구도조차 제대로 잡지 못해 단지 질 낮은 프로그램의 양산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물론 6mm는 취재원의 거부감을 줄일 수 있다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장기간 촬영에 용이하다는 것은 ENG 장비로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로 6mm가 주역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게 백승대 사장의 생각이다. 촬영 용역 등 각종 수익사업도 병행 프로덕션이나 방송국이 6mm 프로그램을 선호하는 것은 저예산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백승대 사장은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요즘 프로덕션 중에 잘된다는 이야기 들어 보셨어요. 아마 없을 겁니다. 정부가 프로덕션을 문화산업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지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한 예로 저는 수년전 한국을 대표하는 영상을 만들겠다고 벤처허가를 냈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금 규모로는 제작 자체가 안돼요. 그래서 아직 손도 못대고 있는 현실입니다.” 백승대 사장이 기획한 것은 한국 고궁의 사계였다. 그러나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다는 백승대 사장은 언젠가는 꼭 한국을 대표하는 영상물을 제작하겠다는 결심이다. 톱프로덕션은 모두 3개 팀이 운영되고 있다. 현재 KBS 위성 2TV로 방영되는 ‘한국의 장인’을 전담할 2개 제작팀과 뉴스라인 ‘더불어사는 세상’을 제작하는 1개팀 등 10명이 뛰고 있다. 이와함께 운영중이 것이 카메라 용역이다. KBS 등 방송사의 카메라맨이 부족할 때 카메라맨을 지원하거나 미국과 일본의 협력회사의 촬영의뢰에 따라 촬영을 대행해 주는 일 등이다. 리스프로의 이동석 사장과 함께 제작한 현대그룹 홍보물 ‘아산 정주영’이나 LG의 ‘우리들의 성’, Q채널의 ‘한국인의 화장’, KBS ‘체험 삶의 현장’, ‘스프츠 파노라마’ 등이 그동안 촬영용역을 통해 만들어온 작품이다. 이밖에도 각종 홍보물이나 광고, 비디오 제작도 톱프로덕션의 주 사업이다. 정동호 의원 등 국회의원 홍보물이나 삼성전자 ‘비전 21C 3부작, 25주년 특집 3부작 등의 홍보물이 톱프로덕션을 통해 제작됐다. 또 중원산업의 ‘매직캡’, 한국코트랑의 ‘코트랑골드’ 등 CF나, LA현지 제작한 드라마 2편과 가수 소호의 뮤직비디오도 톱프로덕션이 제작했다. 그러나 이 회사의 주력은 역시 방송용 다큐멘터리다. 특히 1999년 KBS 수요기획으로 방영된 ‘청백리 박수량 백비에 부는 바람’이나 지난해 방영된 ‘장애를 이긴 주니어 골퍼 제임스 명’ 등은 프로그램 질과 함께 시청자들의 주목을 끈 작품이다. ‘장애를 이긴 주니어 골퍼 제임스 명’은 장래가 촉망되는 재미 골퍼 제임스 명을 다룬 작품으로 그는 한쪽 다리를 잃어 골퍼의 꿈을 접었지만 의족을 달고 다시 골프를 시작한 의지의 한국인이었다. 이밖에 KBS 위성 2TV를 통해 방영되고 있는 ‘한국의 장인’은 한국의 인간문화재 20명을 선정, 그들의 제작과정 등을 집착 취재하는 작품으로 현재 톱 프로덕션이 가장 힘을 기울이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장사꾼이 아니니 돈은 더 들어갑니다. 그러나 영원한 장인정신으로 정통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하는데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미·니·인·터·뷰 윤정현 PD ■ 자신을 소개한다면 톱프로덕션에 프리랜서로 참여, ‘한국의 장인’을 제작하고 있다. 불교TV에서 6년간 PD 생활을 하며 쇼, 교양,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당시 직접 제작한 프로그램은 94년 휴먼다큐 ‘우리 부처님 같이’ 등이 있다. 이후 프리랜서로 독립, EBS의 ‘수학으로 보는 세상’, KBS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등을 제작했다. 한 때 인터넷방송국에서도 근무했지만 현재는 뜻맞는 동료와 솔프로덕션에 소속돼 있다. ■ ‘한국의 장인’은 어떤 프로그램인가 총 20편이 기획중인 프로그램이다. 현재 7편이 제작완료된 상태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중요무형문화재급 장인들을 찾아 그들의 제작과정과 삶의 이야기를 내용으로 한다. 일주일 중 4일간 2명이 제작을 완료해야 하기 때문에 힘들다. ■ 에피소드는 역시 힘든 만큼 에피소드도 많다. 그들을 취재하기 위해서 현장에서 공부하랴, 프로그램 제작하랴 이래저래 바쁘다. 더구나 취재원 가운데는 취재에 적극 응해주지 않는 분들도 있어 선정작업 자체부터 어려움이 있다. 한 예로 한참 촬영중에 이제 그만 하자며 돌아가 버리는 경우도 있고 겨울에 작업해야 하는 것을 여름에 찍을 수밖에 없어 난감한 경우도 있다. ■ 앞으로 계획은 특별한 것은 없다. 현재 제작중인 ‘한국의 장인’이 20편 모두 무사히 제작되길 바랄 뿐이다. 단지 앞으로도 기회가 있다면 수준 높은 휴먼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보고 싶다.
    2003-07-08
  • 방북 촬영장비 준비
    방북 촬영장비 준비 ■ 강의제목에 대한 소고 먼저 이 방북 취재기의 제목에 대해서 잠깐 설명을 할까 합니다.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이것이 이번 연강의 제목인데 제가 평양에 7박 8일 동안 머무르면서 본 수많은 구호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시다시피 평양은 구호의 도시라 할만큼 각종 구호들이 온 거리를 뒤덮고 있습니다. 몇 가지 생각나는 걸 들어보면 "위대한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다"는 소위, 영생구호가 가장 많이 눈에 띄고 다음으로는 "혁명의 심장부를 목숨으로 사수하자",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 등등... 그 중에서도 특히 제 시선을 사로잡은 구호가 바로 이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였습니다. 최근의 북한의 어려운 경제사정과 집단주의적 성격을 잘 나타낸 구호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딱딱하고 강성일변도의 구호들 중에서 유독 그 구호만이 여유가 있어 보여서 눈길을 끌었던 겁니다. 그런데 아마 그 구호의 효험을 가장 크게 본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북한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취재팀일겁니다. 사실 평양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별의 별 생각이 다 들만큼 일이 잘 안 풀려서 고전을 했거든요. 일이 꽉 막혀서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갑자기 그 구호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는 "그래, 가는 길 험해도 이들처럼 웃으며 가자, 그러다 보면 뭔가 돌파구가 보이겠지... 정말 겉으로는 희망이란 하나도 없어 보이는 이들이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지금까지 이렇게 꾸려가고 있지를 않은가"하는 생각이 들고 그러면 마음을 좀 편하게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서울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그 구호는 그들의 자존심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북한사람들의 자존심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자존심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한번 생각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고르바쵸프의 등장과 소련의 개방정책, 그리고 그로 인한 사회주의 맹주인 구 소련의 붕괴, 그리고 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시작된 동구 공산권의 붕괴에도 굳건히 사회주의 체제를 굳건히 고수하고 있다는데서 오는 자존심입니다. 중국마저도 시장경제체제로 편입되고있는 이 시점에서는 북한이 사회주의 국가로서 가지는 자존심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평양에서 일을 할 때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은 피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선물을 주거나 금전적인 지원을 할 때도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방법을 잘 찾아서 해야지 잘못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이 다 그렇기는 하지만 특히 남북간의 일은 상대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아주 자존심 강하고 어떨 때는 막무가내며 또 까다롭기까지 한 상대 말이죠. 같은 말을 사용하면서도 전혀 다른 사고구조를 가진 사람들하고의 일에는 "이해와 인내" 말고는 달리 무기가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방북취재를 계획하는 방송인들에게 이 말,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는 말은 꼭 해주고 싶었기에 이번 강좌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 ENG카메라 기종 선택 이제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장비, 특히 그 중에서도 카메라 준비 이야기부터 해야지요. 우선 제가 실패한 경험담부터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물론 이건 작년 8월의 상황입니다만 아마도 그사이 북한의 사정이 크게 변하지는 않은 것 같으니 그 때의 경험이 아직 유효할 것입니다. 작년 8월에 MBC에서는 이미 DIGITAL BETACAM ENG를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취재팀도 당연히 일본 SONY사의 NTSC방식 DIGI-BETA CAMERA를 주 카메라로 챙겼습니다. 그런데 정작 평양에서 일이 생겼습니다. 북한에서 촬영한 모든 화면은 그날그날 북측 안내원의 검열을 받아야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불편해 하는 장면은 아예 삭제를 하고 돌려줍니다. 주로 삭제 당하는 화면의 종류와 또 우리가 촬영한 화면을 일일이 검열을 해야하는 그들 나름의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어떤 때는 해도 정말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30분 TAPE 한 권이 몽땅 다 지워져 돌아올 경우도 있다하니 알만 하시겠지요. 그만큼 남쪽에서 촬영한 화면에 대해서 평양사람들은 민감하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평양에는 DIGITAL BETACAM ENG장비가 없다는 겁니다. 즉 우리가 촬영한 화면을 그들이 전혀 검열할 수 없었던 겁니다. 이런 상황은 그들에게는 상상도 못하는 일인데 그게 바로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진 겁니다. 안내원들이 매우 당황해한 것은 물론이고 당장 우리 취재팀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디지털 ENG카메라가 북측 안내원들과 취재팀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신을 조장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 대가는 고스란히 취재팀의 몫으로 돌아왔지요. 곧바로 취재에 비협조적인 태도로 돌아선 안내원들에게서 그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북한의 사정상 가끔 한번씩 있는 남쪽 취재팀 검열을 위해 그런 고가의 장비를 구입한다는 게 무리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팀이 디지털 ENG를 최초로 평양에 가지고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도 아무런 준비를 못했던 겁니다. 화질에 대한 작은 욕심만 앞섰지 상대방의 사정을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했던 겁니다.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에서부터 신뢰가 시작된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평양 갈 때는 반드시 아날로그 베타캄 ENG를 가지고 가시라는 말씀! 아니면 사전에 장비에 대해서 충분한 협의를 거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혹시 그 사이에 평양에서 디지털 장비를 마련했는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그리고 예비로 6MM디지털 카메라도 SONY사의 PD150으로 한 대를 준비했습니다. 6MM카메라는 북경공항을 통과하기가 쉽기 때문에 중국 공항에서 촬영거리가 생기면 요긴합니다. 또 평양에서도 여러 가지로 요긴하게 쓰입니다. ■ 북경공항 장비 통과 이제 북경공항에서의 ENG카메라 처리문제입니다. 당연히 관광비자를 소지하고서는 ENG CAMERA를 가지고 북경 공항을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북경 공항을 통해서 중국에 들어갈 때 공항 세관원에게 평양으로 출국할 때 찾아가겠다고 말하고 ENG를 맡기면 됩니다. 다행히 서울에서 도착하는 비행기와 평양의 고려민항이 같은 청사에 있어서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리고 확실한 보관증을 받아두는 일과 보관을 하는 담당세관원의 이름 정도는 만약을 위해 반드시 알아 두어야합니다. 그리고 평양으로 떠날 때 공항으로 미리 여유 있게 나와서 공항세관원에게 보관증을 제시하고 카메라를 찾으면 됩니다. 이때 출국하는 비행기 티켓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평양행 고려민항을 미리 티켓팅을 해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카메라를 다시 돌려 받는 시간은 약 15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이 어디입니까? 중국 아닙니까? 그건 우리 취재팀의 경우였고 또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까 그 시간도 충분히 여유 있게 계산해서 공항에 미리 도착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카메라를 돌려 받은 즉시 그 현장에서 파워를 켜서 작동여부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마셔야합니다. 나머지 장비는 여타의 다른 해외출장과 같이 챙기시면 됩니다. 단지 소모품들은 조금 더 여유 있게 챙겨두시는 게 좋습니다. 가령 마이크용 건전지 같은 경우도 급하게 아무 곳에서나 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오지를 간다고 생각하고 장비를 준비하시면 됩니다. ■ 평양사람들은 까뮈XO와 던힐, 그리고 사진을 좋아한다 이제는 선물이야긴데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선물은 일반 평양사람들을 위한 선물이야기는 아닙니다. 취재진과 항상 접촉하는 북측 안내원을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취재도중에 직접 평양의 인민을 만나서 선물은 주고받고 할 경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북측에서도 남쪽 취재진이 인민을 집적 접촉하거나 남쪽의 선물을 전달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안내원들에게 전달하는 선물은 물론 그들이 다 차지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의 상급자에게 대부분이 전달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물은 북한의 고위인사들이 좋아하는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 거죠. 그게 바로 꼬냑인데요, 꼬냑 중에서도 특히 까뮈를 좋아하고 또 XO급의 최고급만을 찾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XO급이라면 반드시 까뮈가 아니더라도 상관은 없는 듯했습니다. 그래도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금방 알 수 있는 유명 상표여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담배 이야기인데요, 양담배는 던힐을 특히 좋아합니다. 우리가 평양에 도착해서 안내원들과 첫 대면을 했을 때 그들은 당당하게 우리 앞에서 던힐 담배 새 것을 꺼내서 취재팀에게 권했습니다. 아마 이런 것쯤은 우리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줄려면 이런걸 달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물어봤더니 실제로도 던힐을 가장 좋아들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지고 간 선물은 한번에 다 주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머무는 기간이 8일이니까 적당히 두어번에 걸쳐 나누어주는 것이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우리가 만찬을 주최해야하기에 그때 헤어질 때도 적당한 선물이 필요합니다. 아, 그리고 평양사람들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 까다롭고 사사건건 우리 행동에 제약을 가하던 안내원들도 사진이라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좋아하는 바람에 나는 사진을 찍어주고 카메라맨은 그 사이 슬쩍 촬영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즉석에서 사진이 나오는 폴라로이드형이 더 좋습니다. 가끔은 길거리에서 만난 평양사람들과도 사진을 찍을 기회가 있는데 바로 뽑아서 주어야지 언제 우리가 다시 가서 사진을 전해줄 기회가 있겠습니까? 서글프게도 말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폴라로이드 필름은 서울에서 출국할 때 공항 면세점에서 충분히 여유 있게 구입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도 10통을 가져갔는데 3일만에 동이나버렸습니다. 그 대부분은 안내원들이 찍었지요.(여기서 말하는 안내원은 민화협 소속 사람들을 말하는데 실제로는 북한 보위부 소속 공작원들입니다) 그래서 폴라로이드 필름을 구하느라 덤으로 평양의 백화점을 두 곳이나 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파는데 필름을 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외국인 상점에서 서울보다 서너 배는 비싸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반 카메라의 필름도 충분히 가져가셔야 합니다. 쓰다가 남으면 나중에 가벼운 선물로도 요긴하게 쓰이기 때문이지요.
    2003-07-08
  • 방북취재를 위한 국내의 서류절차들
    방북취재를 위한 국내의 서류절차들 이번에는 북한 방문 취재를 허가 받기 위한 국내의 구비 서류들과 그 절차에 대해서 알아본다. 북한을 방문하는 경로는 물론 판문점을 통과하는 육로도 있고 인천과 남포를 오가는 화물선, 그리고 금강산을 통하는 방법 등이 있으나 여기서는 가장 일반적인 경우인 "북경을 경유하는 항공편"을 모델로 해서 알아보자. 1. 북한 주민 접촉승인 신청서 접수 방송사의 방북취재를 관장하는 주무부서는 통일부 교류 2과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취재진이 북한 주민과 접촉하는 것에 대해서 허가를 받아내는 일이다. 통일부 교류 2과에서 신청서 양식을 받을 수 있다. 어떤 목적으로, 어떤 경로를 통해서 누구와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접촉을 할 것인가를 미리 밝혀야 한다. 그리고 만나려는 사람의 소속기관과 직위 등에 대해서도 기록해야 한다. 하지만 사전에 이 모든 사항들을 다 알 수는 물론 없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 알고있는 상황에 대해서 만이라도 충실하게 기록하고 담당자에게 그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면 별 문제없이 승인이 나온다. 그리고 일을 진행하다보면 미리 접촉승인을 받지도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북측 인사와 연락이 이루어질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때는 접촉 후 곧바로 통일부 담당자에게 그 상황을 알려주고 '북한 주민 접촉 결과보고서'를 상세히 작성해서 통일부 교류 2과에 제출하면 된다. 2. 북측의 초청장 북측의 유관 기관에서 보내온 초청장 원본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초청장에는 누구누구를 어떤 목적으로 언제부터 언제까지 북한 방문을 초청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어야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초청하는 사람들이 북한에 체류하는 동안 그들의 '신변안전을 보장'한다는 내용이다. 말하자면 초청장은 신변안전 보장각서의 성격을 가진다. 그리고 우리측에서 인정하는 유관기관은 '민족화해협의회(약칭 민화협)' 나 '아태평화위원회'정도이다. 그 단체의 위상이 초청한 남측인사의 신변안전을 보장 할 만한 위치에 있느냐가 그 기준이다. 이 초청장만 손에 넣으면 이제 본격적인 방북 절차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을 위해 초청장 등 주요 서류는 복사본을 보관해 두어야 한다. 3. 방북신청 북측에서 보내온 초청장과 통일부에서 요구하는 서류들(사업계획서, 신원진술서등)을 통일부 교류 2과에 접수시킨다. 방북 희망일보다 공무원 근무일수 기준으로 최소 20일 전에 접수시켜야한다. 처음하면서 한번에 모든 요건을 충족시키기는 어려우니 몇 번은 통일부를 들락거릴 각오를 해야한다. 그런데 방북 경험자나 특별한 사유가 인정되는 경우에는 보다 빠른 시간내에 방북허가가 나기도 한다. 그리고 방북 예정 기간은 실제보다는 약간 여유있게 잡아두는 것이 안전하다. 이는 입북이 실제로 이루어지기까지는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물론 신청한 기간 내에 방북이 이루어지지 못할 경우에는 기간 연장의 방법도 있긴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초청장 등의 서류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그리고 신청서가 처리되는 과정에는 방송위원회의 동의 절차도 들어있다. 통일부에서 방송사의 상급기관인 방송위원회에 방북취재에 대한 의견을 구하는 공문을 발송하기 때문이다. 사전에 방송위원회 담당자에게도 그 내용을 통보해 두는 것이 일을 빨리 진행시키는 방법이긴 하지만 방북 취재의 성격상 드러내놓고 공개적으로 일을 진행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때 그때의 상황에 순발력 있게 대처하는 것 말고는 뭐 달리 길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을 미리 예상하고 있으면 최소한 당황하진 않을 것이다. 4. 방북 사전교육 통일 교육원 (서울 4.19 묘지부근 수유리 소재 통일문제연구소 내에 위치하고 있음)에서 매주 화요일마다 실시하는 방북 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교육시간은 약 4시간 정도이며 오후 1시부터 시작하기에 많이 졸린다. 그 주된 내용은 최근 남북한관계나 북한정세, 북한에서의 행동요령 등인데 들어보면 실제로 도움이 되는 내용들도 많이 있다. 내 경험으로는 방북경험자가 하는 강의는 특히 귀담아 들을 만 했다. 교육을 마치면 교육 수료증을 그 자리에서 교부하고 수료자 명단은 통일부로도 자동으로 통보된다. 그리고 교육 신청은 통일부에서 대신 해 준다. 하지만 매주 한 차례뿐이기 때문에 사전에 시간을 잘 잡아야한다. 이런 절차가 끝나면 통일부에서 방문 목적과 기간등이 명기된 "방문증명서"를 발급해 준다. 이 증명서를 손에 넣으면 이제 일이 다 되어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북경을 거쳐서 비행기로 북한을 다녀 올 경우에는 한번도 이 증명서를 요구하는 곳은 없다. 이상하게도... 하지만 이 증명서는 일이 다 끝난뒤에 통일부에 반납해야하는 중요서류다. 5. 중국 복수비자 중국 비자를 복수비자로 받아 두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중국비자는 단수로 발급되는데 반드시 복수비자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평양으로 가기 위해서 한번 중국에 들어 가야하고, 다시 북한에서 나올 때도 중국을 통과해야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행사에서 중국 비자 발급을 대신해 주지만 역시 시간을 가지고 사전에 미리미리 해 두어야 할 일이다. 이때 취재비자를 신청할 것인지 아니면 그냥 관광비자를 신청할 것인지가 상당히 고민스럽다. 중국의 경우엔 취재비자는 매우 까다롭다. 그리고 시간도 많이 걸리고 비용도 발생한다. 그리고 한번 취재비자를 발급받고 나면 그 이후로도 관광비자는 나오지 않는다. 매번 취재비자를 신청해야하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그냥 관광비자를 신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리고 이때는 중국에서의 취재는 포기해야한다. 굳이 북경 공항에서 출발하는 장면이 필요하면 6mm카메라로 처리해야한다. 하지만 관광비자를 신청할 때도 복병은 있다. 무엇인가 하면 바로 미국취재비자다. 예전에 받았던 미국취재비자가 여권에 남아있는 경우에는 중국 관광비자발급이 거부되기도 한다. 그런 일이 내겐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 뭐 달리 방법도 없다. 이런 여러 변수를 감안해서 사전에 미리 충분한 시간을 두고 중국비자문제를 해결해야한다. 6. 입북비자 이제는 북경주재 북한 대사관 영사과에서 발급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비자를 받는 일이 남았다. 먼저 북경으로 가야 하는데 입북 예정일보다는 최소한 2일정도 미리 북경에 도착하는 것이 안전하다. 고려민항은 북경공항에서 매주 화요일 오전과 토요일 오전에 출발한다. 일주일에 단 두차례 뿐이니 놓치면 3-4일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고려민항의 이런 비행 스케줄은 국제 항공시간표에는 나오지도 않는다. 아무리 사전에 북측 인사들과 약속이 되어 있더라도 비자발급에는 변수가 많다. "평양 가는 일은 기다림이다" "고려민항기가 북경공항을 이륙해봐야 그때야 정말 평양을 가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 팀을 이끌고 가는 김윤영 국장의 말이다. 김국장은 이번 평양행이 두 번째였다. 처음 그 말을 김국장으로부터 들었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는데 그 말은 정말이었다. 사실 북측의 초청장도 다 받고 통일부의 방북허가도 다 마친 상태에서 북경까지 와서 입북 비자를 못 받아서 북경에서 몇 주를 기다린 사람도 있고, 결국은 그냥 서울로 돌아간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비자도 받았는데 고려민항기를 못 타서 방북 계획이 수포로 돌아 가 버린 경우까지 있다고 하니.... 이쯤 되면 원, '평양이 뭐라고...'하는 생각까지도 든다. 입북비자는 호텔을 미리 정하고 연락을 취하면 그들이 여권을 가지고 가서 다음날 별지로 된 비자를 가지고 온다. 우리 여권에는 물론 아무런 표시도 없다. 어떤 경우에는 이 때 비자와 함께 고려민항 티켓도 그들이 직접 가지고 온다. 사진 이야기가 빠졌다. 방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권용 사진이 최소 10장은 들어간다. 미리 사진을 여유 있게 현상해서 가지고 다녀야 한다. 입북 비자를 받을 때도 사진 2장이 필요하다. 북경 갈 때 사진을 몇 장 반드시 챙겨가야 한다. 7. 고려 민항 탑승 드디어 모든 수속이 완료되면 고려민항을 타는 일만 남았다. 북경공항 신청사에 수속 라운지가 있는데 나머지 절차는 고려민항이라고 해서 별 다르지는 않다. 먼저 예약 여부를 확인하는 여직원의 말투가 방송에서 듣던 바로 그 이북 말씨다. 반갑기도 하고 마음은 벌써 평양공항에 도착한 듯한 착각에 잠시 빠지기도 한다. 그리고 짐 부치고 좌석배정을 받고.... 이런 절차를 마치면 중국 관리들의 출국심사를 마치고 고려민항에 오른다고 한다. 여기서 갑자기 오른다고 한다라고 말이 바뀌는 것은 우리는 고려민항기 바로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북경에서 가 아니라 심양을 통해서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 복잡한 사정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자.
    2003-07-08
  •  북한관련 프로그램의 기획요령과
    북한관련 프로그램의 기획요령과 북측인사 접촉과정 북한 관련 프로그램의 기획은 당연히 일반적인 경우와는 큰 차이가 난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에도 여러가지 변수가 많이 발생하는 것이 방송프로그램의 기획이지만, 특히 북한과 관련된 기획은 아직도 어렵다.여기서 아직도란 말은 김대중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고 돌아온 지가 벌써 일년이 다 되어가는 이시점 까지도 라는 말이다. 하기야 그게 애시당초 하루이틀만에 해결 될 문제가 아니었다고 자위하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분단의 시대에서 방송의 사명을 남북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상호 신뢰를 이루어 내는데 기여해야한다고 믿고있는 우리로서는 참으로 답답한 심정일 것이다. 북한관련 프로그램 기획요령이란 단적으로 말하면 돈의 문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이 불확실한 계획에 얼마나 많은 돈을 지불 할 용의가 있느냐가 방북취재의 큰 틀을 결정한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북측과의 대부분의 관계가 경제적인 문제가 주된 관건이 된건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건 민간접촉도 마찬가지며, 정부 차원의 대북 협상도 다르지 않을것이다. 식량지원, 비료지원, 경수로 문제, 금강산 관광 입장료 협상 등등...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방송도 예외일 수가 없는것이다. 남북간의 방송교류분야에서는 그런 경제문제가 개입되지 않을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사실 방송을 이해하는 남북간의 시각차이에서 발생하는 문제이기도하다. 우리는 방송의 공익성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서 남북간의 동질성회복에 기여하는 방송이라면 멀리보면 우리 민족전체의 문제이지 남북한, 어느 일방의 문제이거나 어느 한쪽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사안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있다. 그렇기 때문에 돈과는 별개의 문제로 접근하려한다. 하지만 평양에서 볼 때는 사정이 다르다. 우리의 이런 접근은 평양사람들에겐 통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방송교류 역시 하나의 대남사업일 뿐이다. 사업이란게 뭔가? 이익을 남기자는게 아닌가? 돈을 벌자는 말이다. 그래도 북한이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만 남북간의 방송교류를 열어 두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냉전적인 사고일 것이다. 물론 그들 나름으로는 민족의 장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을 것이고 방송교류도 그런 차원의 속깊은 계산도 있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에겐 돈, 즉 달러가 필요한것은 사실이다. 최근의 악화된 경제사정과 군비, 식량난등의 산적한 경제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달러를 벌어들이는 것 뿐이다. 알다시피 북한은 극히 폐쇄적인 경제다. 즉 대외교역이 별로 없는 자족자급형 경제를 운용해 왔기에 국내 경제기반이 붕괴되었을 경우 외부에서 자금을 끌어 들일 방법이 없다. 그래서 외화벌이꾼들이니 하는 말들이 생겨났다. 그것은 비 정상적인 방법으로 달러를 번다는 뜻이다. 러시아 벌목공들의 마약밀매사건, 심지어는 북한의 대외주재 외교관들까지도 마약거래를 한다고 한때 의심받았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을 길게 설명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북측의 인사를 접촉했을 때 그들이 자본주의 시장경제 아래 살고있는 우리보다 더 돈 문제에 집착하는 배경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들과 터놓고 대화를 할 수 있다. "우리는 달러가 필요해요" "아, 달러가 있어야 인민을 먹여 살릴 수 있잖아요? 안그래요?" "어차피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하는 동포 아닙니까? 그러니 돈 많은 남쪽에서 미리 도와주시라구요" 그들이 이렇게 당당하게 말해 올때 당황하지 말아야 한다. 아마도 이건 그들의 진심일 것이다. 그리고 일의 순서가 좀 바뀌었는데, 어떻게 북측 인사와 접촉하는가가 문제다. 우선 통일부를 두드려야 한다. 통일부 교류 2과에서 언론사의 대북 교류를 관장한다. 먼저 "북한 주민 접촉 신고서"를 내서 사전 신고를 해야 한다. 시간이 없으면 사후 보고도 가능하지만 통일부와의 신뢰 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 사전 신고가 더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접촉 대상을 찾느냐하는 문제인데... 그건 좀 사실 까다롭다. 일반적으로 정해진 통로가 없다는 뜻이다. 즉 그때그때 방송사마다, 담당자 마다 각자가 루트를 개척해야 한다. 하지만 애초의 길은 대게 두 세 가지가 아닐까 한다. 먼저 한가지는 북한과의 다른 교류사업을 하고 있던 사업자가 북한을 왕래하는 과정에서 그쪽의 인사와 신뢰가 두터워지다보면 자연히 대북관련 다른 분야로의 영역 확장을 꿈꾸게 된다. 이때 그들 사업자가 우리 언론사들의 북한현지 제작에 대한 갈증을 알고서 먼저 자신이 중간에서 이 일을 성사 시키겠노라고 제의를 해 오는 경우다. 실제로 북한 관련 프로그램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으면 심심찮게 주변에서 이런 저런 제의를 해 오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이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다 믿으면 안된다. 그들은 사업가들이기 때문이다. 사업하는 사람들의 일하는 자세에 대해서 뭐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확실성 보다는 가능성에서 일을 출발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중 팔구는 성사가 어렵다. 하지만 출발은 다 그런 모양이다. 그들을 박대하지말고 양쪽의 조건을 타진하고 협상을 진행하다보면 자연히 길이 생겨나지 않을까? 옛말에 어느 구름에 비올지 모른다고 했던가? 대북관련 일에서는 끈기가와 인내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덕목일것이다. 다음 하나는 활발히 민간차원에서 북측과 인도적인 교류를 하고 있는 단체의 도움을 받는 길이다. 이들은 이미 상호신뢰가 확보되어있기에 일을 성사시키는 빠른 방법 중의 한가지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공동사업을 한다면 비용도 일정부분 절감되기도 한다. 가령 '우리민족 서로돕기운동본부' 또는 '어께동무' 그리고 각종 의료지원 사업단체나 식량지원단체들이 그들이다. 그리고 이런 방법들도 있다. 이미 방송교류를 하고있는 팀으로부터 매개인을 소개받는다든지 아니면 통일부 담당자에게 접촉방법을 직접문의 해 보는것도 역시 길을 찾는 방법들 중 한가지일 것이다. 자, 이제는 북측에서 부담없어하는 프로그램과 열어주기를 꺼려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물론 그런 부분들이 항상 일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시의 남북관계 그리고 북한 내부의 사정등 매우 복잡한 함수관계속에서 일이 결정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공통점은 있는 듯 하다. 우선 정치적인 문제 즉, 북한의 지도체제를 언급하는 것은 당연히 거절한다. 다음은 아마도 이산가족문제일것이다. 이건 나도 의외였다. 상상 밖으로 강하게 거부하는 데서 무척 놀라기도 했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거기에도 이유는 있을 법하다. 뭔고하니 바로 이산가족의 문제는 그 이산의 책임으로 연결되고 이는 곧 한국전쟁의 책임론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이산가족이 서로 껴안고 울고불고 하는 모습에서 당연히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이 연상되는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부담 없어 하는 분야는 단연 비정치적인 것들로 자연다큐멘타리나 명승지 기행, 역사 관련프로그램들이 아닌가 한다. 우선 첫 강좌는 부족하지만 이것으로 마치고 다음 강좌에서는 "방북을 위한 국내서류 절차와 준비과정"을 이야기 할까 합니다.
    2003-07-08
  • 고이즈미 내각의 신 탈아입구(脫亞入毆)론
    임병걸 도쿄 특파원 1.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의 탈아론(脫亞論)과 고이즈미의 개혁론(개혁론) " 오늘날 우리나라는 이웃 나라의 문명개화를 기다려 함께 아세아를 부흥시키려하지 말고 아시아를 벗어나 서양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 해야 한다. 나쁜 벗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함께 악명을 면하기 불가하니 우리들은 마음가짐부터 아세아 동방의 나쁜 벗을 사절(謝絶)해야 할 것이다." 1885년(메이지 18년) 3월16일 시사신보 후쿠자와 유기치 1853년 요코하마에 도착한 당시 미국의 동인도 함대 사령관 페리는 4척의 함선을 거느리고 미국 대통령 필모어의 국서를 제출하고 일본의 개국을 요구한다. 이미 쇠락한 도쿠가와 바쿠후는 전함의 위력에 주눅이 들어 이듬해인 1854년 이른바 미-일 화친조약을 맺고 시모다와 하코다테 항을 개항하고 이어 1858년 미일 통상조약을 맺게 된다. 미-일 화친조약을 조약을 계기로 외부로부터의 개혁을 강요당한 일본은 안으로 존황양이(尊皇攘夷)와 화혼양재(和魂洋才)를 기치로 내걸고 막부 타도와 천황중심의 근대입헌 국가로의 변신을 추구한다. 이 과정에서 후쿠자와 유기치와 니시 아마네, 가토 히로유키,니시무라 시게키 등 이른바 일본의 선각자들은 단순히 정부조직과 법률의 서구화 뿐만 아니라 문화와 생활관습, 사고방식 까지도 서양화 할 것을 촉구하는 이른바 '문명개화'를 주창하고 나섰다. 그러나 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후쿠자와의 서구화에 대한 추종은 도를 지나쳐 일본은 아예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화 한 몸이 되야 한다는 탈아입구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이런 주장은 후일 일본이 청일전쟁과 한일합방 등을 통해 아시아를 동반자가 아닌 침략과 수탈의 대상으로 삼고 대륙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게 된다. 당시의 외무장관을 역임한 이노우에 가오루 역시 제도뿐 아니라 국민들의 생활과 문화까지 철저히 서구식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이른바 구화주의(歐化主義)를 주창해 저 유명한 로쿠메이칸(鹿鳴館) 이라는 서양식 무도관이 도쿄 황궁 바로 옆 히비야 거리에 등장하게 된다. 서양식 드레스와 모자를 쓴 일본의 귀부인이 요한 스트라우스의 왈츠에 맞추어 무도회를 즐기는 모습은 서구화의 상징인 동시에 피폐한 백성들에게는 비아냥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어쨌던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근대화, 서구화에 성공했고 팽창의 에너지를 아시아로 분출해 주변국을 무차별 집어삼키는 탐욕스런 제국주의 국가가 돼 갔다. 그러나 2차 대전을 계기로 일본은 근대화의 모델이자 은인이었던 미국과 식민지를 둘러싼 이해관계의 충돌로 한바탕 격전을 치르게 됐고, 그 와중에서 아시아 국가들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후쿠자와 유기치가 탈아입구의 열변을 토했던 때로부터 116년, 일본에 다시 탈아입구론의 기치가 서서히 올라가고 있다. 쇠락해 가는 집권 자민당의 발복색원을 기치로 들고 나온 고이즈미는 도쿠가와 바쿠후를 타도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후쿠자와처럼 자민당을 개혁하고 매너리즘에 빠진 관료와 거대공룡 공기업 집단을 개혁해 일본을 새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메이지 유신에 버금가는 신 유신을 주장하는 고이즈미는 오랜 불황과 정치적 무능에 신물이 난 일본인들에게는 신천지의 복음을 전하는 메신저로 다가왔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일본열도는 열광하고 있다. 역대 총리 가운데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고이즈미는 과연 한세기 만에 부활한 후쿠자와 유키치인가? 공교롭게도 4월27일 취임한 이후 그의 석달 간의 행적은 아시아를 멀리하고 미국과 유럽에 다가가는 '탈아입구'의 묘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2. 친미외교로 일관한 고이즈미의 첫 미-일 정상회담 지난 6월30일 미국 매릴랜드 주에 있는 부시대통령의 별장 캠프데이비드. 부시 대통령이 선물로 준 가죽 점퍼를 입고 부시대통령과 야구공을 주고 받으며 파안대소하는 고이즈미 총리의 모습이 일본 텔레비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취임 이후 처음 미국을 방문하는데다 외교무대에서의 능력을 검증받은 바 없는 고이즈미 총리여서인지 일본언론들은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스포트라이트를 맞추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모두(冒頭)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 60년 미-일 안보조약개정 때 당시 외무위원장이었던 아버지가 이를 반대하던 데모대 앞에서 조약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새롭게 생겼다. 이후 나는 일관되게 일본에 있어서 미국과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해 왔다. 일-미관계가 다소 악화돼도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 보전되면 되지 않나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있을 수 없다. 일-미 관계가 좋으면 좋을수록 다른 나라와의 관계도 좋아질 것이다." 아무리 미국과의 친근감을 과시하려 했다고 이해하려 해도 일국의 총리로서는 낯 간지러운 언사가 아닐 수 없다. 미국과의 관계가 좋으면 좋을수록 다른 나라와의 관계도 좋다니, 마치 미국은 자국의 이해에 따라 움직이는 나라가 아니고 무오류의 전지전능한 국가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고이즈미는 한술 더 떠 1854년 미-일 화친조약과 제2차 세계대전을 언급했다. " 일본은 최초에는 외국으로부터 영향에 반발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잘 받아들였다"." 미국이 관대함과 정의감을 가지고 일본에 접근한 것이 일본인의 친미관의 근저를 이루고 있다 ". " 전쟁에서 패한 후 일본국민은 미국의 노예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은 관대하게 대접해 주었고 식량도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일본국민들은 미국이 일본을 구 일본군에서 해방시켰다는 감정이 강하다 " 고이즈미의 이런 발언이 알려지자 일본 언론들은 지나친 친미, 사대적 발언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아사히 신문은 7월2일자 워싱턴발 기사에서 솔직성이 지나친 친미관의 표명이라고 지적하고 고이즈미 류의 외교에 위험성을 보여주었다고 비판했다. 야당도 비판에 가세해 간 나오토 민주당 간사장은 일본에 있어서 미국은 여전히 성역으로 남아있으며 구 자민당과 전혀 변한 것이 없는 셈이라고 혹평했다. 시이가즈오 공산당 위원장도 미국 추종외교로 시종일관 했다고 비난했고, 도이 다카코 사민당 당수도 일본이 미국의 종속변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재삼 확인한 회담이었다고 폄하했다. 미국에 지나치게 유화적인 모습을 보인 현안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교토의정서 비준문제다. 지난 6월30일 캠프데이비드에서 있는 부시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이 미국의 의사를 무시하고 교토 기후협약 발효에 앞장서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교토협약은 1997년 168개국의 서명으로 일본 교토에서 체결된 국제 기후협약이다. 선진국의 과도한 에너지 사용과 유해 가스 배출로 지구 온난화 현상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지구촌 곳곳에서 기상이변이 일어나는가 하면 오존층의 파괴 등으로 전지구적인 생태계의 위협이 일어나자 전 세계국가들이 유해가스 배출을 줄이자고 합의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 협약의 이행 시기가 다가오자 미국의 막강한 석유재벌과 대기업의 압력을 받은 부시 정권은 이 조약을 보완해야 한다며 전격 탈퇴를 선언했다.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 이산화탄소이고 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기준으로 보면 미국은 1999년 현재 15억2천만톤으로 단연 1위를 차지하고 있다. 2위인 중국의 두배, 3위인 러시아의 4배나 배출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탈퇴를 선언할 경우 이 조약은 사실상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교토 의정서는 온난화 유발가스의 55%를 방출하는 55개국 이상이 비준할 경우 법적 구속력을 갖기 때문에 일본이 러시아와 유럽 국가들과 보조를 맞춘다면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협략은 효력을 발휘한다. 따라서 협약의 발효에 있어서 일본의 입장은 매우 중요하다. 일본내 여론과 유럽 등 다른 선진국의 입장을 고려해 협약 비준에 전향적이었던 일본 정부였으나 막상 고이즈미 총리는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탈퇴 입장을 이해한다 쪽으로 선회했다 출국전 기자회견에서 " 미국을 설득하지 못하다면 발효를 위한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고 사뭇 비장한 태도를 보이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공해 문제에 대한 규제라면 둘째가 서러운 일본이 개도국의 수입품에 대해서는 가혹한 기준을 적용하면서 미국의 으름짱에는 순순히 장단을 맞추는 꼴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지구상의 온갖 자원과 에너지를 가장 헤프게 쓰며 인류 사상 최대의 풍요를 구가하고 있는 미국이 에너지 사용과 이에 따른 유해가스 배출을 줄이지 않는다는 것은 지구 경찰을 자처하는 엉클 샘으로서는 비신사적이고 이기적인 행위다. 부시 대통령의 교토의정서 탈퇴선언 직후 일본의 국회의원들이 연명으로 미국의 주요일간지에 의견광고를 내 미국정부를 비판했던 당당함과, 교토 회의의 의장국으로서 환경 친화적인 선진국의 모습을 과시했던 일본의 입장을 떠올려 보면 고이즈미의 외교 행보는 친미 사대라는 비판도 나올법 하다. 3. 한국과 중국에는 오만한 일본 고이즈미의 대미 정책이 지나칠 정도로 유화적이고 우호적이라면 그의 등장 이후 한국과 중국 등 이웃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정책은 지나칠 정도로 오만하고 강경하다. 지난달 초 일본의 문부과학성은 한국과 중국 정부가 공식 요청한 후소샤의 역사교과서를 비롯한 역사교과서의 재수정 요구에 대해 사실상 전면 거부의사를 밝혔다. 표면적인 이유는 한국과 중국이 지적한 부분이 사실의 오류가 아닌 역사 해석의 문제이고 역사관이나 해석의 다양성에 대해서 일본정부는 집필자에게 수정을 강요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도오야마 문부과학성 장관은 동일한 항목에 대해서 만일 중국과 한국이 재수정을 요구해 온다면 더 이상은 응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고, 고이즈미 총리 역시 재수정 의향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여러 가지를 생각해서 결론을 내린 것인 만큼 더 이상의 수정은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른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라는 우익 아마추어 학자와 만화가 등이 만든 교과서는 철저히 일본 우월주의와 황국사관에 입각해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일본의 식민통치와 아시아 침략을 미화하고 군국주의가 저지른 범죄를 은폐하는가 하면 일본의 재무장을 공공연히 주장하는 위험한 교과서다. 이런 교과서가 버젓이 일본 정부의 검정을 통과하고 전례가 없었던 일반인 상대의 대대적인 시중 판매를 하는가 하면 교육일선에서 이 교과서를 채택시키기 위한 대 의회 청원과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한 압력과 로비 활동도 벌어지고 있다. 이 교과서의 위험성을 감지한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와 지식인, 시민단체와 교사 학부모들조차 교과서의 오류를 지적하고 불채택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점만 보아도 이 교과서의 검정 통과와 재수정 거부라는 일본 정부의 결정이 얼마나 아시아를 무시하는 행위인지를 짐작케 한다. 이 교과서의 등장은 지난 94년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범죄를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 이후 일본 정부의 과거사에 대한 공식입장을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고, 2차 교과서 파동이후 일본이 막대한 피해를 입힌 아시아 국가에 약속한 이른바 교과서 기술에서의 '근린조항'을 사문화 하는 무책임한 행위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재수정 거부 이후 비등하는 한국과 중국의 분노와 잇단 제재조치 발표에 대해 대수롭지 않다는 듯, 8.15 신사참배 이후 관계 개선을 모색하겠다는 느긋한 입장으로 일관하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공언도 대표적으로 아시아를 무시하는 일본 외교를 상징한다. 고이즈미 총리는 지난 4월 총리 선거에서 느닷없이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공약으로 들고 나왔다. 야스쿠니 신사는 도조 히테키를 비롯해 전쟁을 일으킨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있는 곳으로 일본 우익의 성역과 같은 곳이며 군국주의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곳이다. 이런 상징성 때문에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은 정치인과 관료의 참배 금지를 요구해 왔고 일본 역시 피해를 입힌 주변국에 대한 최소한의 사죄 의미로 관료들의 공식 참배를 자제해 왔다. 그러나 지난 85년 나카소네 총리의 참배와 96년 하시모토 총리의 참배에 이어 해가 갈수록 관료들과 의원들의 참배는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다. 다만 주변국의 비난을 의식해 이들은 총리나 관료 등 공식적인 자격이 아니라 개인적인 자격의 참배임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새 총리에 취임한 고이즈미 씨는 "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심정으로 국가를 위해 희생한 전몰자에 대한 애도를 표하고 싶다"는 지극히 정서적인 차원의 이유를 대면서 신사참배 강행을 공언하고 있다. 고이즈미의 본질을 흐리는 이런 참배의 변은 논리적으로도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앞서 부시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정의와 관대의 상징 미국이 일본을 구 일본군에서 해방시켜주었다고 했는데 일본을 질곡으로 몰아넣었던 구 일본군을 애도하기 위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겠다니 이 무슨 궤변인가? 고이즈미 총리는 한술 더떠 참의원 선거를 앞둔 지난달 당수간 토론회에서 " 일본인의 감정으로 인간은 죽으면 모두 신이 된다. 전범들도 모두 사형을 받음으로써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닌가, 왜 다른 사망자와 구별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해 파문을 일으켰다. 마이니치 신문은 그의 이런 발언이 일본의 전쟁책임을 부정하고 A급 전범 들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면 신사참배 중지를 요구했다. 야스쿠니 참배의 자제를 통해 일본은 과거 깊은 상처를 안겨 준 수많은 주변국가에 대해 최소한의 사죄를 한다는 의미, 혹은 신사참배가 가져오는 주변국의 분노를 애써 외면하는 고이즈미 총리의 참배 강행은 아시아와의 외교마찰도 불사하겠다는 배짱으로밖에 비쳐지지 않는다. 이밖에도 일본은 한국과 러시아가 국제 법과 관계에 따라 맺은 남 쿠릴 열도의 꽁치잡이 어업협정을 일본의 영토주권을 무시한 행위라며 트집을 잡고 있다. 중국에 대해서는 지난 4월23일 대파와 표고버섯, 다다미 재료 등의 농산물에 대해 고율의 관세를 물리는 세이프 가드를 발동했다. 거듭되는 중국의 재고 요청과 협상 요구에도 철저히 무시로 일관하던 일본은 분노한 중국이 일본산 자동차와 냉장고 휴대전화에 대해 전격 보복관세를 물리자 허둥지둥 협상테이블에 앉겠다고 나서고 있다. 한국산 폴리에스테르와 방울 도마토 등에 대해서도 여차하면 세이프 가드를 발동하겠다고 으름짱을 놓고 있다. 최근 방위청이 내놓은 일본의 방위백서에서는 중국의 미사일 증강과 일본 해역에서의 중국 함정 활동 등을 자세히 적시하면서 중국의 군사적 팽창을 아시아의 안보 위협 요인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미국의 MD 구상이나 미국의 대중국 위협론, 미국의 일본에 대한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촉구 등 일련의 미-일 군사 동맹 강화 역시 중국을 가상 적으로 겨냥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고이즈미 총리가 그의 공언대로 중국과 한국의 요청을 무시하고 8월15일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강행한다면 오는 10월로 예정된 고이즈미 총리의 중국방문도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한국 방문도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방문 이후 두나라 정상은 한해씩 번갈아 가며 상대국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갖고 있으며, 올해는 일본 측에서 방한할 차례이다. 그러나 정작 고이즈미 총리는 취임 석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언급이 없다. 오랜 불황의 늪에 빠진 일본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고이즈미 총리, 성역없는 개혁과 구태의연한 파벌정치의 타파를 외치는 그는 확실히 일본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신선한 지도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고이즈미 총리가 대중들의 인기에 도취돼, 주변국의 존재를 무시한 일방통행식 외교정책을 편다면, 아시아 국가와의 공존공생을 무시하고 친미 일변도의 외교정책을 펼쳐 나간다면 이는 일본을 위해서도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많은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경고하듯 이런 일본의 우경화는 일본의 국제적 고립을 자초할 수 밖에 없고 일본의 고립은 결국 아시아의 불행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110년 전 일본에 불었던 탈아입구의 열풍이 정말 일본에 다시 불 것인가?
    2003-07-08
  • 특집 EBS자연타큐멘터리 2부작 -개미들의 삶을 영상으로 기록
    특집 EBS자연타큐멘터리 2부작 -개미들의 삶을 영상으로 기록 개미 오는 3월 7, 8일 이틀간에 걸쳐 EBS에서 방송 예정인 자연다큐멘터리 ‘개미’는 일반 자연다큐와 달리 아주 작은 피사체를 다루고 있어 일반 렌즈로는 촬영이 불가능 하는 등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촬영작업이 까다롭고 매우 힘들게 제작한 만큼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다. 개미를 촬영하기 위해 문동현 PD를 비롯한 EBS다큐팀은 이에 따른 특수장비 제작과 다양한 촬영방법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 제작후기를 들어본다. 글 | 문동현 EBS TV1국 다큐팀 PD E-mail:dhmoon44@hotmail.com 작년 초, ‘개미’를 자연다큐멘터리로 제작한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는 다양한 반응들이 나왔다. “야, 그거 재미있겠다!”라는 반응부터, “근데, 촬영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고 하거나 “그걸로 자연다큐가 될까?”하는 회의적 반응까지…. 어쨌튼 우리는 주위의 기대와 우려를 무시(?)하고 촬영을 시작했다. 늘 그렇듯 자연다큐에 100퍼센트 확실한 아이템이란 없다. 아무리 쉬워 보이는 아이템이라도 막상 현장에 나가서 부딪쳐보면 ‘아 그게 아니었구나’며 자신의 무지와 무능력에 절망하거나 반대로 ‘한 컷이라도 건지면 다행이겠다’하고 나갔는데 의외의 수확을 건지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자연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하면 할수록 낯설고, 어렵고, 스스로를 끝없는 열등감과 자괴감에 빠뜨리는 존재. 그래서 끝내 포기하고 돌아설라 치면 어느새 살짝 돌아와 저만치 앞에서 얄밉게 손짓하고 있는 그런 존재…. 내가 ‘자연다큐멘터리 제작자’라는 자신에 대한 허울을 먼저 벗어 던져야 가슴을 열고 만날 수 있는 존재(말로는 알고 있는데, 진정 가슴으로 체득할 수 있는 날은 언제쯤 일지…). 개미를 촬영하기 시작하면서 우리가 맞닥뜨린 첫 번째 문제는 역시 ‘SIZE’였다. 피사체가 너무 작아 일반 렌즈로는 그야말로 풀샷(F.S)으로 촬영할 수밖에 없었다. 클로즈업 필터나 접사렌즈를 써야했는데, 문제는 개미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부지런한 동물이라는 데 있었다. 포커스 맞추기도 힘들 정도로 아주 작은 데다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뽈뽈대며 움직이는(그것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그런 피사체라니! 생태를 담는 것은 그 다음 문제였다. 뭔가 특수한 렌즈가 필요했다. 작은 개미촬영용 장비 준비 촬영팀끼리 머리를 맞대고 고민과 상의를 거듭한 끝에 우리는 청계천으로 달려갔다. 청계천?. 이상한 생각을 할지도 모르지만, 청계천에는 우리가 잘 아는 특수공구상가가 있다. 거기서 우리는 개미를 촬영할 수 있는 특수렌즈를 직접 깎아 만들 작정이었던 것이다. 즉, 스틸카메라용 렌즈를 우리가 쓰고 있는 베타캠 카메라에 맞게 깎아 붙이려는 야심찬 계획!! 두 세 번 더 손을 보기는 했지만 결과는 만족할만 했다. 50mm 스틸렌즈와 기존 줌렌즈, 벨로우즈, 그리고 클로즈업 컨버터(close-up converter). 이 세 가지가 우리의 ‘청계천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이었고, 향후 개미촬영의 핵심 장비가 되었다 .이에 따라 개미들의 그룹샷(G.S)부터 얼굴 클로즈업까지 다양한 사이즈를 촬영할 수 있는 기본렌즈 문제는 해결된 것이다. 물론 사이즈를 바꿀 때마다 렌즈도 바꿔 끼워야 하는 불편함은 있었지만 그 정도는 행복하게(?)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행복도 잠시, 우리는 바로 두 번째 벽에 부딪치게 됐다. 바로 개미가 주로 사는 곳이었다. 형광등을 조명으로 사용. 일본왕개미나 곰개미, 불개미류는 대개 햇볕이 잘 드는 탁 트인 곳에 살기 때문에 광량(光量)에는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보다 작은 종들, 예컨데 고동털개미나 꼬리치레개미, 주름개미 등은 나무줄기 등에 살고, 갈색발왕개미나 침개미류는 아예 침엽수림이나 낙엽 밑에서만 산다. 이 녀석들을 촬영할 때는 늘 그늘이 져 있기 때문에 사이즈가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광량조차 제공되지 않는 것이다. 부족한 광량으로 인해 기껏 찍어봐야 심도가 얕아 포커스가 뭉개지기 일쑤였다. 조명해결이 급선무였다. 우리가 야외촬영 시에 일반적으로 쓰는 쥬피터(Jupiter Light)나 휴대용 썬건(Sun Gun)은 열이 발생하기 때문에, 그걸 개미들한테 갖다 대는 것은 바로 뜨거운 열로 고문하는 행위, 그 자체였다. 열이 안 나면서도 안정적인 광량을 확보할 수 있는 조명기구가 필요했다. 열이 안나는 조명기구?, 쿨라이트(cool light)?…. 그래 쿨라이트!! 다행히도 영상팀에 쿨라이트(Cool Light ; Tungsten)가 있었다. 휴대하기도 좋게 사이즈도 작았다. 가을 이후엔 한 대 더 받아 두 대나 쓸 수 있었다. 덕분에 우리 조명감독(베스트 조명의 김모씨)은 참 편했다. 조명기구라고 해봐야 겨우 한 손에 들 수 있는 라디오만 한 쿨라이트가 전부였으니. 아, 그 대신 쿨라이트는 전원공급을 따로 해야하는 불편이 따랐다. 휴대용 발전기를 들고 다녔는데, 발전기에서 나는 소음이 굉장했다. 최소한 50미터 이상 떨어트려야 하는데 그게 현장에서는 뜻대로 안된다. 그래서 우리가 촬영한 테이프의 현장음(S.O.T;Sound of track)은 거의 다 발전기 소음이다. 결국 오디오를 편집해야 하는 나만 죽을 일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촬영은 하고 봐야 되니까.자연다큐 촬영은 늘 그렇듯이 산 넘어 또 산이다. 하나 해결되면 또 다음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그게 자연다큐의 매력(늘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이라고들 하지만, 참 괴로운 매력이다. 쿨라이트 하나로 조명이 해결됐다고 좋아했더니,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했다. 쿨라이트는 작은 크기만큼이나 조명범위가 매우 좁다. 불과 수 센티미터…. 개미 그룹샷 밖에 안된다. 게다가 빛이 텅스텐이라는 단점도 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텅스텐은 자연광과 다르다. 약간 더 누렇게 나온다. 클로즈업이야 그렇다 쳐도 풀샷용 조명이 필요했다. 그늘진 곳에서의 풀샷용 조명은 열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어야 했다. 우리 카메라맨 부사수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많고, 사람을 웃기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아쉽게도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그 친구 덕분에 촬영기간 내내 모두들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풀샷용 조명 문제 역시 그 친구가 해결을 했다. 아이디어를 내고 직접 제작도 했다. 답은 형광등이었다. 형광등은 열도 안나고 색온도 역시 자연광(Day Light)과 비슷했다. 형광등을 다섯 개씩 이어 붙여서 큰 조명판을 만들었다. 그걸 두 개 만들어 양쪽에서 비추면 완벽한 조명기구가 되는 것이다. 고정으로 세팅해 놓거나 급할 땐 하나씩 떼서 들고 나갈 수도 있다. 조금 무겁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쓸만하다. 이와 같이 기본 조명에 덧붙여 필요할 때마다 이노비젼 라이트(Innovision Light)를 활용함으로써 조명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개미촬영용 크레인 제작 내친 김에 우리는 개미 촬영용 크레인을 만들기로 했다. 일반 크레인은 너무 커서 개미같이 작은 피사체엔 접근하기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이른바 미니크레인을 제작하는 것!. 이 정도는 몸으로 때우는 데 익숙해져 있는 우리 EBS 자연다큐팀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굳이 청계천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철물점이면 충분했다. 지면 관계상 상세한 설계도를 첨부할 순 없지만, 대충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다. 우선 몸체(Body)는 전부 앵글(철물점에 가면 쌓여있다)로 만든다. 기본축은 5∼6자 정도. 각 연결부위는 베어링 너트를 사용하고 약간씩 기름칠을 해주면 좋다. 가장 어려운 부위는 카메라를 얹는 부분인데, 카메라 발바닥을 이용하면 된다. 약간의 용접이 필요하고, 카메라 손잡이에 발바닥을 붙이는 게 중요하다. 기본 삼각대는 고장났거나 못쓰는 것을 이용하면 되고(카메라의 무게가 꽤 있는 관계로 가능한 튼튼해야 한다) 삼각대 헤드는 두 개가 필요하다. 삼각대와 몸체를 잇는 부분하고 카메라가 실리는 부분까지 헤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무게와 평형을 잡아주는 도구로는 역기의 추를 사용했다. 이것도 두 개 정도면 충분하다(재료는 체육관련 용품점 등에 가면 많이 있다). 이것으로 OK. 무게가 많이 나가기 때문에 이동할 때 휴대하려면 분해와 조립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로인해 너트를 풀 수 있는 공구를 늘 갖고 다녀야 한다. 크레인 제작에 대한 내용이 조금 장황하고 설명이 미흡한 부분이 있지만, 카메라를 접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충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팬 콤마 촬영기법 사용 개미라는 특수한 아이템인 만큼 특수한 장비도 많이 썼고, 특수한 촬영기법도 다 동원했다. 이 중에서 팬-콤마(Pan-comma) 촬영기법을 사용했다. 일반적인 콤마촬영(미속촬영)은 이제 어느 정도 일반화됐기 때문에, 팬(Pan)이나 달리(Dolly)를 하면서 콤마촬영이 되는 기법을 쓰기도 했다. 처음 시도라 완전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신선한 영상이 만들어졌다. 열흘 이상이 걸리는 불개미탑 건설과정이나 나무기둥에 집을 붙여 올리는 고동털개미의 집짓기 장면 등은 콤마촬영만이 담아낼 수 있는 탁월한 영상이다. 다큐제작에 따른 서로간의 정보교환이 중요 작년에도 VIDEO PLUS에 글을 게재한 적이 있었는데 그 기사를 보고 모 방송사에서 장비 사용에 대해 문의 전화를 해온 일이 있었다. Finger cam(흔히 ‘꼬마카메라’라고 부름)의 구입처와 사용법 등에 대해서였다. 그래서 우리 영상팀에 연결해 줬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는 나름대로 상세하게 썼다고 생각하지만 궁금한 게 있다면 직접 찾아오는 것도 대환영이다. 국내 자연다큐의 발전을 위해서 장비 뿐 아니라 다양한 정보교환이 서로간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개미는 일반 곤충들보다도 촬영이 훨씬 어렵다. 눈으로 보이는 부분도 힘들지만, 녀석들이 땅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정말 암담하다. 정말 중요한 속내는 그 속에 다 있는데…. 내시경 카메라도 사용해 보고 개미의 굴을 교묘하게 절단하는 등 여러 방법을 동원해 찍어내기는 했지만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외국의 선진 자연다큐 제작물 중 개미의 굴속까지 따라 들어가 찍은 장면을 본적이 있다. 그들은 어떻게 찍었을까? 어떤 장비를 사용했을까?. 기회가 주어지면 한번 가서 보고 싶기도 한데, 마음만 급할 뿐이다. 우리는 오늘 당장 찍어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이러한 여건 내에서도 우리는 최선을 다 기울였다. 자연다큐멘터리 2부작 <개미>는 3월 7일, 8일 이틀간에 걸쳐 방송 됐다. 이 프로그램은 개미의 신비한 생태, 인간사회와 너무나 비슷한 그들의 사회생활 등이 담겨져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아울러 영상적인 측면에서 더 많은 가치를 두고 싶은 작품이기도 하다. 다양한 방법과 새로운 촬영기법들이 동원되는 등 촬영작업이 까다롭고 매우 힘들게 제작한 만큼 심혈을 기울였다. 촬영이 끝나고 마무리 편집 작업을 하고 있는 요즘, 새삼스레 촬영 때의 일들이 떠오른다. 촬영은 제쳐두고 렌즈 깎는다고 청계천의 어디로 정신없이 뛰어 다니던 모습, 철공소 직원들처럼 하루종일 장비만 만들다가 “우리 카메라맨 맞어?”하며 웃던 모습들, 쇳덩어리 같은 장비 두서너 개씩 짊어 매고도 씩씩거리며 올라가는 우리 촬영팀을 바라보던 등산객들의 경이로운 눈빛들, 개미를 찍고 있는 우리를 빙 둘러싸고 신기해하며 구경하던 사람들(모니터는 아예 그사람들 차지였다) 등…. 그런 모습들 속에서 자연다큐 제작자로서 자괴감과 보람을 동시에 느끼기도 했다. 자연다큐 제작 현장에서 발생하는 의외의 상황들에 대해 제작팀이 직접 몸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장비나 기술적인 부분이라도 지원이 좀더 이루어졌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해마다 아쉬움은 남지만 그래도 자연다큐멘터리 작품들은 해마다 제작되고 있다. 모두가 힘들게 고생해 가면서 만들어내는 작품들이다. 애정을 갖고 따뜻한 눈으로 지켜봐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로 격려도 해가면서….
    2003-07-08
  • 인도 홍등가의 작은 반란
    인도 캘커타의 ‘소나가치’라는 홍등가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 인도 홍등가의 작은 반란 도 규 만 | (에센스21 PD) ‘인도 홍등가의 작은 반란’은 도규만 PD가 모 일간지의 외신란에 난 기사를 보고 기획했다. 촬영장소는 소나가치였는데 이곳은 한국의 미아리, 청량리, 영등포와 같은 창녀촌으로, 창녀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조합을 만들어 캠페인을 하는 등 작은 반란을 벌이고 있는 곳이다. ‘인도 홍등가의 작은 반란’은 작년 5월 촬영한 것으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아시아리포트>에서 방송한 바 있다. 언제나 그렇듯 아이템은 ‘우연히’ 찾아온다. 인도의 소나가치라는 지명을 본 것 역시 그랬다. 모 일간지의 외신란에 난 작은 기사가 그 발단이었다. <인도 홍등가의 작은 반란>. ‘홍등가’라는 장소가 주는 야릇함과 ‘반란’이라는 단어와의 묘한 부조화. 프로그램이 갖춰야할 요소들은 두루 갖추고 있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다. 신문이나 잡지 같은 활자화된 정보에 한 두 번 속은 것이 아니라서, 이번에는 차분히 마음을 먹고 자료조사부터 시작했다. 인도에 관한 한 가장 많은 정보량을 제공하는 BBC 홈페이지에 들어가 ‘Sonagachi’라는 단어를 두드리니 꽤 많은 양의 정보가 모니터에 떴다. 대부분의 기사는 1995년도에 일어난 캘커타(참고로 소나가치는 테레사 수녀의 도시 캘커타의 대표적인 홍등가가 위치한 곳으로, 서울의 영등포나 청량리쯤 되는 곳이다)의 섹스워커(제3세계에서는 창녀들에 대한 명칭으로 Sex-Worker라는 용어를 쓴다/이하 ‘매춘여성’이라 씀)들의 공개시위 이후의 활발한 활동들에 대해 연도별로 리포트하고 있었다. 그리고 뉴스위크에서도 특집으로 다룰 정도여서 거의 매춘 여성들의 ‘해방구’처럼 보였다. 현지 상황이 이 정도로라면 취재가 그리 어렵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경찰과 포주들에 대항해서 몸싸움도 벌이고 가두캠페인도 할 정도라면 하고 싶은 만큼 취재할 수 있겠다는 일종의 ‘자신감’도 생겼다. 적어도 캘커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1999년 4월 26일, 설레는 마음으로 캘커타에 도착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인도의 중심이었던 캘커타의 첫 인상은 회색이었다. 대부분 100여 년이 넘은 건물들. 도시의 일부분처럼 분간이 안 되는 검은 얼굴의 사람들. 너무나 자연스럽게 옆구리 쿡 찌르며 구걸하는 사람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땀방울. 첫 눈에 들어온 인도는 그런 이미지였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곧장 도착한 곳은 MSC(Mahila Sammanya Commitee:여성협력위원회)본부. 캘커타 뒷골목 허름한 건물 지하에 들어있는 사무실에는 수십 명의 매춘여성들과 자원봉사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우리가 도착하자 MSC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스마라지트 자나 박사(전염병 전문의)가 반갑게 맞았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곧장 프로그램에 대한 협의에 들어갔다. 마침 취재기간이 메이데이(노동절)와 제2회 벵갈주 매춘여성대회와 겹쳐 있어서 행사도 많고 각종 언론기관의 취재도 많아 경황이 없을 듯 보였지만, 아시아 동쪽 끝의 작은 나라에서 ‘일부러’ 취재하러 왔다는 것이 고맙다며, 차분히 일정을 일러주고 각 행사와 자신들의 구체적 활동, 그리고 그 의미와 성과들에 대해 조목조목 짚어주어 취재포인트를 잡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 두 시간쯤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면서 사람들이 우루루 사무실 밖으로 몰려나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부랴부랴 뒤따라갔더니 일행은 두 대의 트럭에 나눠 타고 캘커타 시내 중심부 광장으로 향하면서 각종의 구호와 전단지를 뿌리고 있었다. 거리캠페인이 시작된 것이다. 이제는 익숙해진 모습들이어서 그런지 시민들의 반응도 자연스러웠다. 구호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트럭에 걸린 플랭카드의 영문구호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Sex-Work is real work. We demand worker’s right(매춘노동도 노동이다. 우리는 노동자의 권리를 요구한다)” 그들 중 한 명이 마이크를 잡는다. “우리들이 요구하는 것은 안전한 노동이다. 우리들은 에이즈의 공포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 우리들은 당신(남자)들에게 콘돔착용을 정당하게 요구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경찰과 포주들의 부당한 억압에 대해서도 단호히 반대한다. 우리는 노동자로서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공정하게 나눌 것을 요구한다”. 노동자로서의 권리. 이들의 요구는 우리나라처럼 매춘금지가 아니다. 인도 역시 매춘은 불법이지만, 관계당국의 묵인하에 이루어지고 있다. 불법과 묵인의 굴레에서 자행되는 비인격적인 처우개선, 에이즈 확산방지를 위한 공개적인 요구들이 현재 소나가치에서 벌어지는 권익운동의 주류이다. 캠페인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의견도 동조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인도에서의 에이즈 문제는 심각한 지경이며, 이를 기반으로 해 시민사회에서의 보건문제에 대한 공감대 확산이 그녀들의 정당한 노동의 권리 요구로 진전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소나가치의 매춘여성들의 권익운동은 1992년에 시작된 세계보건기구의 에이즈 실태조사연구의 책임자였던 스마라지트 자나 박사로부터 시작됐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캘커타 홍등가에 유입되는 매춘여성들은 인도 및 인근 국가(네팔, 방글라데시 등)의 빈곤층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여전히 계급적 굴레에 강하게 결박돼 있는 인도사회에서 매춘여성들의 존재는 카스트 체계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최하위 카스트(out-cast)이다. 이들을 찾는 손님들 역시 릭샤(인력거)꾼과 같은 인도사회 최하층의 남성들이다. 오로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흘러 들어온 여성들과 단순한 성적인 욕구를 잔돈푼으로 해소하려는 손님들간의 밀거래에는 당연히 경찰과 포주의 비호가 뒤를 받치고 있다. 그리고 남존여비의 관념이 지배적인 사회분위기에서 비롯되는 폭력적이고도 비위생적인 성 관계의 일반화. 그 현실은 처참한 것이었다. 1992년 가을, 에이즈 실태 조사연구가 끝나자 캘커타 보건담당이었던 자나 박사는 캘커타市 및 웨스트벵갈州 인근의 에이즈 확산 실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주위의 동료의사들과 지역유지들을 규합해 매춘여성들의 보건을 책임지는 일명 ‘소나가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고 생소한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자나 박사는 우선적으로 당사자들인 매춘여성들과 연대를 결심한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자나 박사는 지역단체들과 권력기관들과의 조화를 모색했지만 정작 저항은 그 여자들로부터 비롯됐다. 그녀들은 욕설을 퍼부으며 우리들을 거부했다”(아니마 바너지/MSC회원). “우리는 점차 홍등가가 그 자체의 문화를 가지고 있고, 의사소통법도 다른 사회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캠페인의 방법도 일반적인 에이즈 예방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매춘여성 스스로 권리를 자각하고 스스로 그 권리를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식했으며, 그들 스스로의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판단하게 됐다”(스마라지트 자나 박사). 소나가치 프로젝트라는 자원봉사단체에서 매춘여성들이 주체가 되는 조직인 MSC가 창설된 것은 1995년이다. 우연한 사건이 그 발단이 됐다. “기달불이라는 동네에서 4∼5명의 남자들이 여자아이들을 방에 가두고 채찍으로 때리고 담뱃불로 지지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죠. 이 소식을 듣고 약 1,200여명이 몰려가 몸싸움을 하고 그 남자들을 감금하고 경찰을 불러 우리 앞에서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는 공개사과를 받아냈지요. 그 일이 MSC 결성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사드나 무헤르지/MSC회원/아시아태평양여성기구 의장). 비합리적인 폭력에 대항하는 대응폭력에서의 자그마한 승리로 소나가치의 여성들은 조합을 결성하기에 이르고, 그해 11월에는 캘커타를 포함한 벵갈주전역의 매춘여성들의 공개집회를 개최했다. 캘커타대학 강당에서 치뤄진 1회 대회 후 5,000여명에 이르는 매춘여성들은 캘커타 시내를 행진했다. 이것이 외부에 공개된 최초의 매춘여성들의 집회로 기록된다. 현재 MSC의 활동은 크게 보건분야와 매춘여성들을 위한 각종의 활동으로 구분된다. 그 중에서 외부로 드러나는 것은 보건분야의 활동인데, 자나 박사를 중심으로 전문적인 의료봉사자들과 캘커타 일대 12개 장소를 거점으로 진행된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소나가치 및 캘커타의 군소 홍등가 내부에 위치한 보건소에서 매춘여성은 물론 그 가족, 그리고 홍등가에 들리는 손님들까지 각종의 성병과 기타 질병들을 무료로 진료해주고 치료해주는 활동들을 통해 MSC는 홍등가에 필수 불가결한 조직으로 자리잡는다. 매일 이 시간이 되면 MSC 회원들은 녹색가운을 입고 홍등가 곳곳을 돌아다니며 환자들을 돌보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보건캠페인을 벌인다. 녹색가운 자체가 스스로 매춘여성임을 드러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나는 사람들이나 MSC회원 자체도 아무런 거리낌없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이러한 활동은 놀라운 결과로 드러난다. “소나가치에서 콘돔 사용자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1992년 당시 콘돔 사용자가 2∼3%였던 것이 1998년에는 무려 78%를 차지했고, 에이즈 감염률도 28%에서 12%로 격감했다”(스마라지트 자나 박사). 해외취재에서 긴장의 끈을 놓으면 항상 치명적인 결과가 발생한다. 취재원과의 원활한 협조관계가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언제 어디서 돌발상황이 벌어질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취재 사흘째 MSC활동의 본거지인 소나가치의 본격 취재에 들어갔다. 도착해서 두 시간 가량 소나가치에 있는 그들의 사무실에서 전반적인 현황과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상을 인터뷰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코디가 너무 마음을 놓지 말고 항상 회원들 가운데에 있으라고 여러 차례 경고했건만, 취재진 주위에 MSC회원들이 4∼5명씩 항상 둘러싸고 있어서 촬영에 지장을 느낀 나는 슬그머니 무리에서 이탈해서 홍등가의 다른 모습을 찍는 도중, 시커먼 남자들 5∼6명이 순식간에 나를 에워싸고 카메라를 뺐으려고 했다. 처음에는 그들 말로 시끌시끌하더니 어느새 옆구리로 차가운 금속성의 물체가 감지되고...아찔했다. 첫날부터 코디하던 친구가 조심하라고 했는데, MSC회원들과 같이 다니던 며칠 동안 경계심이 사라지고, 그들(MSC)의 힘을 너무 과신했던 것 같다. 잠시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녹색가운(녹색가운은 MSC회원의 상징이다)을 입은 MSC회원 10여명이 달려와 그 남자들을 몸으로 밀어내고 재빨리 나를 그들의 무리 가운데에 쏙 집어넣는 것이 아닌가? 그후로도 몸싸움은 30여분간 계속되고 그 남자들은 후퇴했다. 그날의 취재는 그걸로 끝나고 MSC사무실로 돌아와서야 경위를 알 수 있었다. 소나가치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9년이 흘렀고, MSC가 결성된지도 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들은 소수였다. 오후 2시까지의 캠페인이 끝나면 그들은 다시 그들의 일터인 홍등가로 돌아가야 하고, 여전히 홍등가는 견고한 요새였다. 아직까지는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보건캠페인으로 대표되는 무료진료...), 홍등가 전체의 영업에 지장이 없기 때문에 포주나 깡패들이 그들의 활동을 묵인해주는 정전상태가 지속되고 있을 뿐 여전히 그곳에는 폭력과 억압이 횡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까지 인도 내부의 방송은 물론, 외국의 방송사도 비디오카메라로 취재한 적이 없는 험한 곳에 아무 생각 없이 카메라를 휘둘러 댔으니... 그래도 그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담아야 한다는 생각에 몇 번이고 자나 박사와 MSC측에 부탁을 했지만, 그들의 마지막 말에 더 이상의 무리를 감행하지 않기로 했다. 이러한 결정은 수 시간 동안의 대화의 마지막에 들은 자나 박사의 말 한 마디 때문이었다. “어쩌면 당신은 프로그램을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그 그림을 찍어갈 수 있다. 우리들 몰래 찍어 가는 것까지 우리가 통제할 길은 없다. 당신이 그렇게 하고 싶다면 우리도 당신의 생명을 보호해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신이 떠나고 난 후에 우리들의 활동은 크게 위축될 것이다. 지금과 같은 우호적인 관계로 되돌리려면 상당한 시간이 흐를 것이다. 당신이 판단해주길 바란다”. 취재를 하다보면 어쩔 수 없는 욕심이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욕심은 PD로서 프로그램을 대하는 일종의 스테레오타입에서 요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홍등가의 매춘여성들이 활발한 권익보호투쟁을 한다...이들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수많은 어두운 삶의 편린들이 흩어져 있다...이들의 밝은 오늘은 짙은 어둠과 대비되어야만 더 빛을 발할 수 있다’는 등의 드라마 스토리가 머리 속에 박혀있는 것이고, 그 모든 것들을 비디오로 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현장에서 무리를 감행하게 하는 것이다. 그 당시 그들이 막무가내로 촬영을 중지시켰다면 나도 감정적으로 몰래카메라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촬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말대로 내가 떠난 후 그들의 활동이 어려움에 처한다면 프로그램이 어떠한 의미인가? 나는 왜 굳이 그 먼 곳까지 찾아갔을까?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무엇보다도 그 현장이 있어야만 프로그램의 메시지가 전달되는가? 현장에 맞닥뜨려 있는 PD는, 특히나 <아시아리포트>와 같이 PD 혼자 현장에서 모든 판단과 결정을 해야 하는 작업에서는 예상치 못했던 돌발상황에서 순간적인 결정은 프로그램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이번의 경우 소나가치 홍등가 여성들의 생생한 삶은 인터뷰로 처리했다. 실제 그들의 삶을 밀착 취재하는 대신 그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내게 신뢰를 가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때때로 현장에서는 취재원과의 우연한 의기투합이 되어 의외의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생기는데, 나의 경우 프로그램의 논리보다는 현장의 논리를 신뢰하는 편으로 결정을 내릴 경우 예상치 않은 도움의 손길이 벌어진다. 더 이상 홍등가의 삶에 대해 밀착 취재하거나 몰래 찍어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자, MSC측에서는 전날 밤 긴급회의를 열어 그들의 남은 활동에 대한 상세한 스케줄을 숙소로 통보해왔다. 스케줄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그들의 배려가 숨막히는 일정표에그득했기 때문이다. 취재 4일째. 우선 그들의 보건활동을 따라갔다. 소나가치 뒷골목에 허름하게 자리한 빈집을 개조해 임시보건소로 쓰고 있었는데, 환자들과 자원봉사자들로 가득했다. 섭씨 35도를 웃도는 살인적인 폭염을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 하나로 간신히 버텨내며, 싫증내지 않고 성실히 환자들을 진료하고 약을 조제해주며 주의사항을 하나하나 웃는 얼굴로 일러주는 자원봉사자들 중에는 외국인도 더러 눈에 띄었다. 두 시간 여의 취재가 끝나자 이번에는 우리들을 또 다른 거리캠페인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비합리적인 폭력에 대항하는 대응폭력에서의 자그마한 승리로 소나가치의 여성들은 조합을 결성하기에 이르고, 그해 11월에는 캘 커타를 포함한 벵갈주 전역의 매춘여성들의 공개집회를 개최했다. 캘커타대학 강당에서 치뤄진 1회 대회 후 5,000여명에 이르는 매춘여성들은 캘커타 시내를 행진했다. 이것이 외부에 공개된 최초의 매춘여성들의 집회로 기록된다. 현재 MSC의 활동은 크게 보건분야와 매춘여성들을 위한 각종의 활동으로 구분된다. 그 중에서 외부로 드러나는 것은 보건분야의 활동인데, 자나 박사를 중심으로 전문적인 의료봉사자들과 캘커타 일대 12개 장소를 거점으로 진행된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소나가치 및 캘커타의 군소 홍등가 내부에 위치한 보건소에서 매춘여성은 물론 그 가족, 그리고 홍등가에 들리는 손님들까지 각종의 성병과 기타 질병들을 무료로 진료해주고 치료해주는 활동들을 통해 MSC는 홍등가에 필수 불가결한 조직으로 자리잡는다. 매일 이 시간이 되면 MSC 회원들은 녹색가운을 입고 홍등가 곳곳을 돌아다니며 환자들을 돌보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보건캠페인을 벌인다. 녹색가운 자체가 스스로 매춘여성임을 드러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나는 사람들이나 MSC회원 자체도 아무런 거리낌없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이러한 활동은 놀라운 결과로 드러난다. “소나가치에서 콘돔 사용자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1992년 당시 콘돔 사용자가 2∼3%였던 것이 1998년에는 무려 78%를 차지했고, 에이즈 감염률도 28%에서 12%로 격감했다”(스마라지트 자나 박사). 해외취재에서 긴장의 끈을 놓으면 항상 치명적인 결과가 발생한다. 취재원과의 원활한 협조관계가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언제 어디서 돌발상황이 벌어질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취재 사흘째 MSC활동의 본거지인 소나가치의 본격 취재에 들어갔다. 도착해서 두 시간 가량 소나가치에 있는 그들의 사무실에서 전반적인 현황과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상을 인터뷰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코디가 너무 마음을 놓지 말고 항상 회원들 가운데에 있으라고 여러 차례 경고했건만, 취재진 주위에 MSC회원들이 4∼5명씩 항상 둘러싸고 있어서 촬영에 지장을 느낀 나는 슬그머니 무리에서 이탈해서 홍등가의 다른 모습을 찍는 도중, 시커먼 남자들 5∼6명이 순식간에 나를 에워싸고 카메라를 뺐으려고 했다. 처음에는 그들 말로 시끌시끌하더니 어느새 옆구리로 차가운 금속성의 물체가 감지되고...아찔했다. 첫날부터 코디하던 친구가 조심하라고 했는데, MSC회원들과 같이 다니던 며칠 동안 경계심이 사라지고, 그들(MSC)의 힘을 너무 과신했던 것 같다. 잠시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녹색가운(녹색가운은 MSC회원의 상징이다)을 입은 MSC회원 10여명이 달려와 그 남자들을 몸으로 밀어내고 재빨리 나를 그들의 무리 가운데에 쏙 집어넣는 것이 아닌가? 그후로도 몸싸움은 30여분간 계속되고 그 남자들은 후퇴했다. 그날의 취재는 그걸로 끝나고 MSC사무실로 돌아와서야 경위를 알 수 있었다. 소나가치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9년이 흘렀고, MSC가 결성된지도 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들은 소수였다. 오후 2시까지의 캠페인이 끝나면 그들은 다시 그들의 일터인 홍등가로 돌아가야 하고, 여전히 홍등가는 견고한 요새였다. 아직까지는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보건캠페인으로 대표되는 무료진료...), 홍등가 전체의 영업에 지장이 없기 때문에 포주나 깡패들이 그들의 활동을 묵인해주는 정전상태가 지속되고 있을 뿐 여전히 그곳에는 폭력과 억압이 횡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까지 인도 내부의 방송은 물론, 외국의 방송사도 비디오카메라로 취재한 적이 없는 험한 곳에 아무 생각 없이 카메라를 휘둘러 댔으니... 그래도 그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담아야 한다는 생각에 몇 번이고 자나 박사와 MSC측에 부탁을 했지만, 그들의 마지막 말에 더 이상의 무리를 감행하지 않기로 했다. 이러한 결정은 수 시간 동안의 대화의 마지막에 들은 자나 박사의 말 한 마디 때문이었다. “어쩌면 당신은 프로그램을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그 그림을 찍어갈 수 있다. 우리들 몰래 찍어 가는 것까지 우리가 통제할 길은 없다. 당신이 그렇게 하고 싶다면 우리도 당신의 생명을 보호해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신이 떠나고 난 후에 우리들의 활동은 크게 위축될 것이다. 지금과 같은 우호적인 관계로 되돌리려면 상당한 시간이 흐를 것이다. 당신이 판단해주길 바란다”. 취재를 하다보면 어쩔 수 없는 욕심이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욕심은 PD로서 프로그램을 대하는 일종의 스테레오타입에서 요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홍등가의 매춘여성들이 활발한 권익보호투쟁을 한다...이들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수많은 어두운 삶의 편린들이 흩어져 있다...이들의 밝은 오늘은 짙은 어둠과 대비되어야만 더 빛을 발할 수 있다’는 등의 드라마 스토리가 머리 속에 박혀있는 것이고, 그 모든 것들을 비디오로 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현장에서 무리를 감행하게 하는 것이다. 그 당시 그들이 막무가내로 촬영을 중지시켰다면 나도 감정적으로 몰래카메라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촬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말대로 내가 떠난 후 그들의 활동이 어려움에 처한다면 프로그램이 어떠한 의미인가? 나는 왜 굳이 그 먼 곳까지 찾아갔을까?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무엇보다도 그 현장이 있어야만 프로그램의 메시지가 전달되는가? 현장에 맞닥뜨려 있는 PD는, 특히나 <아시아리포트>와 같이 PD 혼자 현장에서 모든 판단과 결정을 해야 하는 작업에서는 예상치 못했던 돌발상황에서 순간적인 결정은 프로그램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이번의 경우 소나가치 홍등가 여성들의 생생한 삶은 인터뷰로 처리했다. 실제 그들의 삶을 밀착 취재하는 대신 그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내게 신뢰를 가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때때로 현장에서는 취재원과의 우연한 의기투합이 되어 의외의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생기는데, 나의 경우 프로그램의 논리보다는 현장의 논리를 신뢰하는 편으로 결정을 내릴 경우 예상치 않은 도움의 손길이 벌어진다. 더 이상 홍등가의 삶에 대해 밀착 취재하거나 몰래 찍어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자, MSC측에서는 전날 밤 긴급회의를 열어 그들의 남은 활동에 대한 상세한 스케줄을 숙소로 통보해왔다. 스케줄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그들의 배려가 숨막히는 일정표에그득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거리캠페인은 소나가치를 지역별로 나눠 10명 단위로 조를 짜서 가가호호 방문하여 콘돔을 나누어주며 성병 및 에이즈예방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이다. 거리캠페인 역시 소나가치의 거리에서 하는 일이라 전날의 경험도 있고 해서, 불필요한 의심을 살 행동은 아예 하지 않았다. 카메라를 들고 그들이 찍어도 좋다는 사인이 왔을 때 버튼을 누르고, 곤란하다는 표시를 해주면 즉시 카메라를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몇 번을 그러다 보니 어제의 그 깡패들과 포주들도 먼발치에서만 지켜볼 뿐 접근하거나 더 이상의 시비를 걸지 않았다. 오히려 그 중의 일부가 다가와 웃으면서 무엇을 취재하는지 물어도 보고 예상치 않게 즉석 인터뷰도 했다. 이들과 2시간 가량 취재하고 취재진이 도착한 곳은 허름한 집의 옥탑 방. 영문도 모르고 들어선 그곳에서는 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대부분 문맹인 매춘여성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자각하는 가장 빠른 길은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그들의 눈으로 정확히 보는 것이다. 이를 위한 가장 적절한 방법은 글자를 깨우치는 일이기 때문에 일종의 야학 같은 이곳에서, 자원봉사자들과 매춘여성 중에서 글자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 자원해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이런 종류의 교육은 매우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다. 이곳에서 글을 가르치는 매춘여성이자 교사인 미투 닷의 말이다. “교육을 받기 전까지 우리들은 아무 것도 몰랐다. 때리면 맞고 돈 안주고 도망가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들은 읽고 쓸 수 있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자신을 깨우쳐가고 있다”. 다음날 아침 취재진이 도착한 곳은 홍등가에 사는 아이들의 작은 학교였다. 가난은 대물림되고 아버지도 모르는 채로 태어나 빈민계층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과 그들의 어머니들에게 교육이란 꿈도 꿀 수 없는 사치품이었다. MSC가 주목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어머니들의 교육 못지 않게 아이들의 교육도 중요하다는 것. 골목길을 들어서자 낭랑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2평 남짓한 공간에 바글바글한 아이들. 초롱한 그들의 눈망울들. 그들의 희망을 물어봤다. 아직 세상의 굴곡을 모르는 아이들의 천진한 꿈이 오롯하다. 하지만 그들의 희망에는 어쩔 수 없이 홍등가의 삶이 배어있다. “경찰이 되어 우리 엄마 못살게 구는 깡패들을 잡을 거예요”, “의사가 되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줄 거예요”, “선생님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싶어요”... 세상의 부조리함과 그 부조리함을 바꾸려는 동네아줌마들의 삶이 아이들의 꿈으로 투영된 게 아닐까? 이제 취재의 마지막이다. 4월 30일 메이데이 전날 캘커타대학 강당에서는 제2회 벵갈주 매춘여성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1995년 1회 대회 이후 4년 만이다. 아침부터 후끈 달아 오른 캘커타의 열기는 계속되었고 강당 안으로 들어서자 캘커타 인근에서 모인 3,000여명의 매춘여성들로 가득하고, 그간의 경과와 성과들이 발표될 때마다 박수와 환호가 가득하다. 대회 마지막 순서로 소나 가치프로젝트 깃발을 선두로 MSC 본부깃발, 각 지부의 깃발들이 연단을 가득 메우고, 연단에 있는 사람들과 강당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손을 맞잡고 부르는 “We shall overcome (우리 승리하리라)”가 울려 퍼지자 곳곳에서 감격의 눈물이 흐른다. 대회장을 나선 이들은 각종의 구호를 적은 플랭카드와 깃발을 들고 캘커타 시내를 가로질러 MSC 본부와 그 인근도로에 삼삼오오 모여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저녁 7시가 되자 마치 그림자가 살아나오 듯 사람들이 소나가치 한복판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메이데이 노동절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이들을 옭아매었던 삶의 현장에서 목청껏 그들의 요구를 외친다. 소나가치를 빠져 나와 캘커타 중심부를 지나면서 어느새 준비된 횃불에 불을 붙이고 가로등 하나 없는 캘커타의 어둠을 밝히는 등신불의 모습에서 그들의 과거와 빛으로 나아가는 지난한 발걸음을 본다. 가슴 한 구석 묵직한 무언가가 내려온다. 캘커타를 떠나면서, 그리고 1년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나는 이 한마디의 말을 건졌다. “(지난 5년간) 많은 것을 얻었지요. 세상에 돈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인간을 존중하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배운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제가 당신 앞에 앉아있을 수 있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이제야 눈을 떴습니다. 전에는 어두움에 버려져 있었고, 아직도 그 어두움 속에 갇혀있는 자매들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그들에게 빛을 주려고 합니다. 그 소중함을 알기 때문이지요(만주 비스와스/MSC회원).”
    2003-07-08
  • EBS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뉴스’
    EBS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뉴스’ 서로 돕고 함께 나누는 푸른학교 편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뉴스 - 서로 돕고 함께 나누는 푸른학교’편은 EBS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이다. 이 글을 쓴 구재모씨는 제5회 인권영화제에서 공식 상영된 다큐멘터리 ‘평화의 시대’를 제작한 감독이다. 현재 한국영상방송아카데미 비디오저널리스트 특강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는 편견없는 시선으로 푸른학교에 맡겨진 아이들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글 | 구재모(Korea Art Center 영상팀 PD) E-mail: rockspider@netsgo.com 다큐멘터리는 무엇인가? 그리고 다큐멘터리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다큐’라는 것에 대해서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 밑줄 그으며 읽었던 책들에서 ‘다큐는 이런 것이다’ 라고 내려진 정의들은 많았지만, 난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 때마다 위의 질문들을 다시 한 번 던져보고 곰곰이 생각을 해 보곤 한다. 거창한 사명의식은 아니지만 내 카메라 앞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인생에 대한 나의 어설픈 이해로 인해, 그들에게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저지를 수 있는 실수들을 하지 않으려고 난 항상 고민한다. 어쩌면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것이지만, 촬영 현장에서 겪게 되는 카메라를 든 사람과 카메라 앞에 선 사람들과의 관계는 항상 가장 큰 고민이면서 어려운 점이다. 더군다나 매우 짧은 시간 안에, 그것도 카메라에 대해서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대할 때면 더더욱 그렇다. 갑자기 잡힌 촬영 일정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술 한잔을 하고 밤 12시가 넘어서 집으로 향하고 있는데, 학교 선배로부터 내일, 아니 오늘 촬영을 좀 해 줄 수 있겠냐는 전화가 왔다. 특별한 일이 없었던 터라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했고, 소개를 받았다는 담당CP로부터 전화가 왔다. 다시 작가로부터 간단히 설명 받고 자세한 내용의 구성안을 메일로 받았다. 프로그램은 EBS에서 매일 방송되는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뉴스’라는 15분물 다큐멘터리였다.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작은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이번에는 용인에 있는 작은 학교를 소개한다고 한다. 구성안을 받아 들고서 다시 작가와 전화통화를 해 보니, 이건 촬영만 하는 것이 아니라 편집, 성우 더빙과 믹싱까지 모두 책임져야하는 ‘연출’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프로그램은 6mm 디지털로 촬영하는, 우리가 요즘 흔히 말하는 VJ형식의 프로그램이지만, 다른 프로그램의 꼭지물이 아닌, 한 아이템이 독립프로그램이 되는 형식의 프로그램이다. 요즘은 PD들도 6mm 촬영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VJ라는 이름이 정확한 것일까, 아니면 PD라는 이름이 정확한 것일까? ‘비디오저널리스트’라는 직업이 아직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못했기에 여전히 조금은 헛갈리는 부분이다. 어쨌든, 이 프로그램에서는 ‘VJ 구재모’가 아닌 ‘연출 구재모’라는 이름으로 나가는 방송이니 그렇게 정리를 해 두자. 남은 시간은 불과 12시간 정도? 일을 그냥 덜컥 맡아 버린것에 대한 후회가 약간 들었다. 이미 시간은 새벽 두시를 넘었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 할 수도 없고.... 정신을 차리고서 구성안과 약간의 자료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날은 밝아 오고, 다시 한번 구성안 훑어보면서 촬영 순서를 정리하고, PD-150을 어깨에 둘러메고 용인으로 향했다. 촬영을 준비하면서 촬영 약속은 오후 두시로 잡혀있다고 했다. 초행길이고 또 내가 현장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지 못한 터라 조금 일찍 도착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경부고속도로로 향했다. 학교의 정확한 위치를 알기 위해 대표분께 전화를 드렸는데, 왠지 목소리가 그리 탐탁지 않은 듯한 느낌이다. 약속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학교 위치를 확인하고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학교 주변 동네 스케치 촬영을 몇 컷 하고서 다시 구성안 검토. 푸른학교라는 이름의 그곳은 정식 학교는 아니고, 실직자 가정의 자녀들을 방과후에 데려다가 무료로 공부를 가르치고 식사를 해결해 주는 일종의 공부방이라고 한다. 약속시간 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학교에 도착해서 통화했던 주경희 대표를 찾았다. 마침 주부 컴퓨터 교실 수업중이라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만날 수 있었다. 프로그램에 대해 이런 저런 소개를 하고 푸른학교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리며, 수업 중에는 인터뷰가 어려울 것 같아 미리 인터뷰를 부탁했는데, 뜻밖에 약간의 짜증까지 내는 것이 아닌가? 물론 많은 상황에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의외의 반응에 조금 당황했다. 선생님들도 모두 자원봉사자들이고 학교 운영도 후원금으로 유지된다는 곳인데, 이런 곳이 방송에 나간다면 학교 입장에서도 그리 나쁘지 않을 듯 한데 도리어 귀찮아하는 반응에 잠시 생각을 정리해 봐야만 했다. 담당 구성작가가 자료수집을 위한 전화 인터뷰를 하면서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했었겠지만, 이럴 때는 다시 한번 내가 직접 프로그램에 관한 설명을 ‘공손히’ 드리는 것이 필요하다. 어떠한 의도로 만들어지는 것이며, 어떤 내용들을 담고자 한다는 내용의 설명을 푸른학교 대표께 충분히 드렸다. 그제야 잠시나마 짜증을 냈던 이유를 설명하는 대표의 얘기를 듣고 난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다. 내가 그곳 푸른학교로 취재를 가기 얼마 전 타 공중파 방송사 1곳과 지역 케이블 방송사에서 그곳 푸른학교를 취재해 갔었다고 한다. 그런데 푸른학교 대표님은 그렇게 나간 방송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것이었다. 촬영을 하면서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 요구를 하다 보니 카메라 앞에 선 사람들은 피곤에 지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그 방송에서 그렸던 그곳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모습이 사실과는 조금 다르게 나갔던 모양이었다. 푸른학교에는 매일 평균 40여명의 아이들이 온다. 대부분 부모님들이 IMF때 실직을 한 가정의 아이들로서, 경제적인 형편이 좋지 않은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또래의 다른 아이들이 피아노 학원, 태권도 학원에 갈 때, 갈 곳도 없이 또 함께 놀 친구도 없이 그냥 골목길을 배회하는 아이들을 보고서 그냥 놔둘 수가 없어서 만든 것이 푸른학교이다. 가난은 단지 불편한 것일 뿐이며 시대적인 문제이지 그 아이들 개개인의 잘못으로 인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 가난이라는 것조차도 서로 돕고 함께 나누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고,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세운 푸른학교를 통해서 새로운 작은 공동체의 의미를 만들어 가고 싶은 것이 주경희 대표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전에 나간 방송에서는 내가 직접 보지 않아서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주경희 대표의 말에 따르면, 그 아이들의 ‘가난한 모습’에 포커스가 많이 맞추어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촬영 시간에 정확히 도착을 해서 정해진 구성안 대로의 촬영만을 했다면 아마 나 또한 그러한 실수를 범했을 지도 모른다. 단지 몇 시간 동안 습득한 십 수 개의 정보들만 가지고서, 그것도 15분이라는 시간 내에 취재 대상의 무언가를 말한다는 것에 다시 한번 조심스러워짐을 느끼게 되었다. 물론 어떠한 주어진 조건이라도 깔끔하게 만들어 내는 것이 기획/구성력, 연출력이고 그것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이 지녀야 할 당연한 요소들이지만, 간혹 프로그램을 위한 제작이 되는 경우는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경우는 더욱 더 그럴 것이고. 그렇게 얘기를 나누면서 제작 방향을 다시 검토하고 가다듬을 수 있었다. 촬영은 시작되고 언제나 그렇지만 아이들을 촬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카메라를 향해 소리 지르고 달려들고... 아이들과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만 한다. 그런데 이곳 푸른학교 아이들은 유난히 더 심했다. 이미 카메라를 몇 번 본 탓인지, 어떤 아이는 PD-150 카메라의 LCD 모니터를 열어달라는 황당한 부탁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오후 4시부터 시작되는 수업을 위해서 3시에 푸른학교에서 봉고차가 출발한다. 아이들 데리러 가는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함께 차에 올랐다. 한 두 명씩 아이들이 차에 타고 갑자기 만난 카메라에 어리둥절해 하더니만 이내 장난은 시작되었다. 짓궂은 아이들의 장난들이지만 일부러 무섭게 보이거나 야단을 쳐서 얌전히 ‘촬영하기 좋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저녁 한 끼를 집이 아닌 푸른학교에서 해결해야만 하는, 가난한 환경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아이들이지만 아이들의 눈동자는 너무도 맑고 밝았기 때문에, 그냥 있는 그대로 촬영하기로 하고 마이크 녹음 레벨만 신경쓰며 아이들 모습을 담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얼굴은 가난으로 인한 어두운 그림자들로만 가득찬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또래의 아이들보다도 더 맑고 밝은 모습들이었다. 저녁 6시부터는 저녁시간이다. 근처에 있는 용인대학교 구내식당에서 아이들을 위한 식사를 매일 준비해 주는 덕분에 아이들은 저녁을 굶지 않을 수 있었다. 촬영을 다니다 보면 어려운 상황 중에 하나가 바로 밥 먹는 모습을 촬영하는 것이다. 식사하는 모습을 촬영하려하니 푸른학교 대표와 선생님들이 나도 함께 밥을 먹으라고 한사코 권유를 하시는 것이 아닌가? 촬영을 해야 했기에 어렵게 거절을 하고(사실 나도 배는 무지 고팠지만) 아이들 얼굴을 담기 시작했다. 한 입 가득히 비빔밥을 먹는 모습들이 너무도 귀엽고 예뻤다. 햄버거와 피자에 입이 길들여진 요즘의 일부 아이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김치와 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은 이곳의 아이들에게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하는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밥을 다 먹고서 스스로 치우는 모습까지, 그리고 하늘이 어두워서야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뒷모습까지 카메라에 담았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봉고차 안에 있던 한 아이가 내게 “아저씨, 찍어 줘서 고마워요!”라는 말을 했다. 뭐가 고맙다는 건지, 하지만 그 아이의 말이 왠지 정감있게 들리는 건 왜일까? 편집에서 마지막 부분에 그 아이의 말을 넣었다. 보는 사람들이 그 아이의 말에 작은 미소를 짓게 만들고 싶었고 그대로 효과를 발휘했다. 무엇이 고맙다는 것인지는 뭐 여러 가지로 답을 내릴 수 있겠지만, 굳이 해석하고 싶지는 않았다. 넉넉지 못한 환경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그냥 느낌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밝은 아이들과 그렇게 밝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푸른학교’ 선생님들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 촬영에 협조해 줘서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덜 어둡게 만들려고 하는 그 분들의 노력에 대해서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
    2003-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