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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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브라질 촬영기
    브라질 촬영기 -신영토의 꿈을 좇아...- 이양한/iTV 경인방송 영상제작부 아시아의 끝자락에 매달린 일각의 돌출, 작지만 끝을 모르고 향하는 화살촉 모양으로 반도의 땅 한국은 자리잡고 있다. 그 지리적 생김새와도 같은 한국인의 기상. 극심한 역사의 아픔을 떨치고 꿈을 향해, 행복을 향해 새로운 곳, 더 넓은 땅으로 한국인들은 어김없이 뻗어갔다. 그리고 지금도 그들은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며 살고 있다. 글로벌 21세기를 맞이하며 새로운 개방의 신영토 확장 경쟁이 치열하다. 이 치열한 경쟁 속에 조그마한 반도의 땅덩어리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하여 밖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과거 그들의 행보를 통해 세계 속에 우리민족의 삶과 이억만리 타향살이의 현장을 담기 위하여 우리 촬영팀은 브라질, 쌍파울루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1999년 10월 22일, 프로그램 담당 백승창PD와 촬영을 맡았던 필자 자신… 단촐히 두 식구만이 멀고도 긴 여정의 동반자였다. 김포공항 출발에서부터 두 사람 힘으로는 버거운 장비와의 힘겨운 싸움이 시작됐다. 22시간… 지구상에서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항공기가 가장 멀리 갈 수 있다는 곳. 그곳이 쌍파울루였다. 장시간의 비행 경험이 많았던 필자로써도 이번 비행만큼은 굉장히 지루하고 피곤하게 느껴졌다. 잠을 청해보지만 약간의 긴장 때문인지 애꿎은 몸만 뒤척인다. 어느덧 쌍파울루에 도착했다. 뒤늦은 오전이었다. 몸이 피곤할 때 느껴지는 금속성의 귀곡성이 멍한 뇌리를 강타했다. 우리를 처음 반겨 준 것은 사람 좋게 생긴 현지 한국인 코디의 환한 미소였다. 포르투갈인들이 브라질을 발견했을 때 처음 마주한 인디언의 기분 좋은 웃음, 그것과도 같았다. ‘그들은 붉은 빛을 띤 채로... 자연환경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이들과 나풀대는 검은 머리의 상냥하고 매력적인 젊은 여자였다… 비옥한 땅과 풍부한 강우 그리고 온화한 열대기후…’(포르투갈 연감) 1998년 4월 어름치의 산란과정을 촬영하기 위해 동강으로 출발했다. 물고일주일 내내 이상기후로 비가 내렸는데 우리 촬영팀이 오기 전날 저녁부터 비가 그쳐 이번 촬영팀은 행운이 따르는 것 같다며 사람 좋은 코디는 은연중에 스케쥴 강행을 내비쳤다. 벌써부터 정신력과의 한판이 시작된 것이다. 어느새 우리는 비행기 안에서의 다짐 -도착한 오늘만은 반드시 숙소에서 잠만 잘 것이라는- 은 뒤로한 채 한국산 승합차에 익숙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마음을 굳게 먹어도 봤지만 눈꺼풀은 이미 감겨 졌고 어느새 잠에 빠졌다. “다 왔어요”라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 주섬주섬 장비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쌍파울루 외곽의 드라이브 샷을 빼먹은 내 자신을 힐책하며 재 브라질 한국학교 교장선생님과 교직원들께 인사를 드렸다. 한국학교의 수업은 주말수업제로 이루어진다. 더군다나 지금은 방학중이었다. 하지만 우리 촬영팀을 위하여 학생들이 기꺼이 등교하여 주었고, 나 자신도 그들의 성의에 답하기라도 하듯 열심히 촬영에 임했다. 웅장한 건물과 구조물 그리고 넓은 운동장. 역시 한국인들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교육열에서도 뛰어났다. 브라질 땅에서도 다름이 없다. 2세에 대한 기대와 희망 그리고 그 열정이 마치 못 배운 자신들의 한과도 같았고 그들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오기 같기도 했다. 그 교육열은 브라질 현지의 원주민들에게도 자극이 되었고, 그곳의 원주민 자녀들도 한국인 학교에 입학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국의 땅에서 근면 하나만으로 버텨온 한인들. 그 후예들은 건강했다. 교육받지 못한 이민족, 그들의 정착이 힘겨웠던 것만큼 한인학교는 더 각별한 의미로 기억된다. 다음 날 일찍 우리는 한인들이 가장 많이 종사하고 있다는 의류업에 관한 촬영을 위해 쌍파울루 시내의 봉해찌로(Bom Reitro) 한인 상가 지역으로 향했다. 그 번화한 도심내의 상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한인들은 그 명성에 걸맞게 상점 간판을 한국말과 포르투갈말로 장식해 놓았고, 그것들은 끝없이 도로를 따라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브라질 내의 의류상가의 70% 이상을 한인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말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나라 산업의 특정 분야에서 한 소수 이민계가 70% 이상을 장악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196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시절 농업정책 이민의 일환으로 이곳에 온 농업이민 1세대들이 어떻게 30여년 내에 이러한 엄청난 변화를 이룰 수 있었을까? 그 이유를 현지에 있던 이민 1세대, 지금은 아들에게 의류상가를 물려 준 한 할머니에게서 그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30여년 전 부산에서 배를 타고 한 달 남짓 항해를 한 끝에 처음 발을 내디딘 곳은 싼토스항이었다. 그곳에서 다시 최종 목적지인 싼타마리아 농장으로 옮겨졌고 대농의 부호를 꿈꾸며 희망에 부풀어 있던 그들은 현지에 도착해서 쓰디쓴 좌절을 맛봐야 했고 혹독한 시련을 치르게 된다. 온갖 풍토병과 말라리아 등으로 커다란 희생을 치르며 그들은 무조건 쌍파울루로 향했고, 걸어서 도착한 그곳 쌍파울루에서 당장 민생고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 할 수 없이 한국에서 떠나올 때 가져왔던 옷가지를 내다 팔기 시작했다. 점차 원주민들의 호응이 높자 이젠 한국에서 옷을 사다가 값싸고 질 좋은 옷들을 내다 팔기 시작했고,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브라질 내의 의류산업을 감히 그 어느 이민족도 넘볼 수 없는 핵심산업으로 이루어 놓았던 것이다. 인터뷰 도중 흐르던 할머니의 눈물… 고향에서 고생하시던 평범한 우리네 할머니의 눈물과는 새삼 다른 느낌을 갖게 하였다. 우리는 곧 농업이민 1세대가 처음으로 브라질 땅을 밟았다는 싼토스항으로 이동하였다. 차창 밖으로 광활하고 드넓은 브라질 대륙이 스쳐지나 간다. 우리 나라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거대한 풍요로움이다. 이 풍요를 얻기 위함이었을까.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가 쉽지 않았던 이민족들… 풍요로움 뒤로 다시금 그들의 힘겹게 늙어버린 얼굴이 지나갔다. 붉고 거친 브라질의 이미지에 상반되게 오버랩 되는 영화에서나 봤음직한 지중해풍의 세련되고 고풍스러운 전경, 그 아름다운 싼토스항에서 농업이민 1세대의 입항 흔적을 찾기란 매우 어려웠다. 대신 우리는 싼토스항의 아름다운 시가지를 스케치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백PD의 얼굴이 사색되어 나에게 말을 건넨다. 아까부터 웬 흑인이 우리 일행을 계속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현지 코디 조차도 놀란 기색이다. 옆에 있는 상가에 들어가 원주민들에게 그 수상한 사람에 대해 얘기를 늘어놓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더 이상은 쫓아오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곳 브라질을 다녀간 촬영팀들의 분실사건이 잦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던 터라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쫓기듯 장비를 챙기고 다시 쌍파울루에 있는 숙소로 향했다. 잠시의 두려움으로 인해 도망치듯 떠나왔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다 놀란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우리는 이후 며칠을 쌍파울루 근교의 원주민과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커피농장을 스케치하고, 농업이민 1세대 한국인이 아직도 경작한다는 커피농장을 찾아서 브라질인들이 가장 살고 싶어한다는 도시 론드리나(Rondrina)로 출발했다. 론드리나의 날씨는 작렬하는 태양 아래 습도까지 높아 숨이 막힐 듯 했다. 반가운 마음으로 마중까지 나오신 농업이민 1세대인 송흥채 할아버지를 따라 따뜻한 점심을 대접받은 후 차를 타고 커피농장으로 이동했다. 1시간 남짓을 달렸을까, 눈앞엔 나지막한 둔덕과 그 옆에 끝없이 펼쳐진 평야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은 온통 커피나무 숲이었다. 늙은 노부부와 원주민 일꾼 몇 명만의 일손으로 꾸려나가 진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었다. 1차, 2차, 3차… 계속되는 이민… 그들이 접했던 것은 판잣집 수용소였고 농장이라 해도 그것은 불모지 폐허의 땅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러한 말과 비교한다면 지금은 이곳은 천국이었다. 잘 정돈된 가지런하고 즐비하게 들어선 커피나무숲, 비옥해 보이는 붉은 토양. 이러한 모든 것들을 지금은 주름이 깊게 패인 노부부가 만들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을까? 촬영을 하기 시작했다. 농장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스케치하고 있는데 오늘 여정의 호사다마. 갑자기 카메라 경고램프가 깜박이며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일까. 나를 몹시 불안하게 한다. 카메라가 몹시 뜨거워져 있었다. DVW-700 디지털 카메라인데 기후에 무척 민감하다는 얘기가 머리에 스쳐지나 갔다. 농장의 뜨거운 직사광선과 복사열 때문인 듯 했다. 잠시 나와 카메라는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잠시 후 다시 촬영을 재개하였고 몇 번인가 경고표시가 반복되더니 잠잠해 졌다. 다행이었다. 만약 카메라에 계속적으로 이상이 생겨 촬영을 할 수 없었다면… 아찔하다. 생각하기도 싫다. 다시 싼타마리아의 커피농장으로 이동. 다시 론드리나로 또 다시 쌍파울루로. 이동도 잦고 촬영해야 할 분량도 많았다. 반복되는 빡빡한 일정이 서서히 내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매너리즘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촬영조수가 있었다면 정신적인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었으리라. 버거운 장비의 이동, 촬영을 위한 세팅 등의 소소한 일들이 부담이었고, 촬영 중에 간간이 장비가 모두 제자리에 있는지 분실에 대한 우려로 몇 번씩 뒤돌아보며 오직 나 자신만이 믿을 수 있다는 강박관념에 스스로를 제어할 힘마저 잃게 한다. 담당 PD는 촬영현장에 도착하면 관계자들과 미팅하느라 미처 장비이동을 도와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한 일들을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데 너무 벅찬 것만은 사실이다. 해외촬영 중에는 특히 불협화음이 생길 소지가 많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로 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 입안에선 세치도 안 되는 혀가 독사처럼 날름거리며 치명적인 독을 내뿜으려 하고 원망의 눈빛으로 동행했던 이들의 얼굴을 쳐다본다. … 그들 역시 너무나 지친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기후 탓에 벅찬 작업량까지. 식은땀까지 흘리며 피곤해 하던 어젯밤 백PD의 안쓰러운 얼굴이 생각나 미안한 웃음을 진다. 잠시의 이기적인 생각을 자책하며 이내 뿜었던 독을 스스로 삼켜버리고 이 모든 일은 그 누구도 해 줄 수 없는 나의 일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달랜다. 내 스스로 편협한 마음을 털어 내며 다시 그들에게 미소를 건넨다. 차라리 위안과 격려의 말로 따뜻하게 대해 주었더라면 하는 후회와 함께. 어언 3주간의 브라질 촬영 중에 필자는 이민 1세대의 한이 어린 뜨거운 눈물도 보았고, 성공한 이민 2세대의 넉넉함도 느낄 수 있었으며, 희망에 찬 이민 3세대의 또렷한 눈망울도 보았다. 이들의 삶이 여유롭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자신의 노력과 브라질 특유의 포용, 많은 인종간의 혼혈로 인한 차별 없는 인종적인 관용 덕이라 할 수 있다. 2억의 인구, 포르투갈계, 이탈리아계, 독일계, 아프리카계, 일본계등의 동양인들로 구성된 그들의 인종분포처럼 다양한 문화. 원주민의 민족성을 그대로 이은 듯 밝은 미소와 친절한 사람들. 많은 해외촬영을 해보았지만 브라질이라는 이 나라만큼 정감 넘치는 곳은 없었던 것 같다. 이제 브라질 촬영을 접고 쌍파울루로 다시 향한다. 다음 목적지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르헨티나 촬영을 위해 출발이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또 어떤 역사를 만나 그들을 이해하고 우리 민족의 어떤 모습을 만나게 될까. 브라질의 힘겨운 이민사는 비단 그곳만의 것이 아니었다. 당시 이민 대상국들이 겪었던 어려움을 현재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극복을 했을까하는 궁금증이 피곤한 필자의 촬영을 흥미롭게 한 것도 사실이다. 어느 곳에 있건 어떤 상황에 처하건, 끝내 살아남고야 마는 한국인 특유의 근면성, 동포들이 보여주는 그 근면성은 늘 우리를 자랑스럽게 한다. 그러나 이들의 자랑스러운 삶을 아무리 강조해도 이들이 겪은 상처를 다 씻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화려한 농업이민을 꿈꾸며 고국을 떠나왔던 이들, 이들의 사라진 꿈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까. 슬픔은 끝을 모른다... 행복. 그래!!! 가난한 이들의 행복은 카니발의 거대한 환상 사람들은 일년 내내 일을 한다. 이 짧은 순간의 환상을 위하여 그들은 환상 속에서 왕이 되고 해적이 되고 정원사가 되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수요일에 끝이 나게 된다. 아직도 필자의 집에서는 브라질 커피의 은은한 향이 풍긴다. 그 향기만큼 브라질 촬영은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붉은 빛 광활한 대지, 커피나무 숲… 뮬라토 여인을 찬양하는 이 시에서 필자는 아이러닉하게도 그들의 고통과 아픔의 역사를 느낀다. 아름다운 영토와 인종적인 민주주의 뒤에는 그들의 힘겨운 삶이 숨쉬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정서와도 같은 그들 속에서 오늘도 우리 민족은 힘차게 내일을 준비한다. 환상뿐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들에게는 삶을 지탱하는 큰 힘이 될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우리의 기상을 자랑하듯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을 다시 한번 기억하며……
    2003-02-24
  • 충주 예성여고 인질극
    충주지역은 작년에 구제역으로 전국적인 관심을 끈 지역이기도 하다 올해는 지난 17일 예성여고의 인질사건으로 또 전국적인 이목을 끌었다 TV 카메라 기자를 하면서 1년에 힌번씩 국짓한 뉴스를 경험하는것도 복받은 사람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17일은 토요일 화창한 날씨였다 빨리 일끝내고 여자친구와의 데이트가 있는 날이다 오전 10시쯤 전화가왔다 예성여고 에서 인질극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현장에 도착하여 상황파악하고 주변 그림 촬영하고 우리들은 (방송3사) 시간과의 싸움에 들어갔다. 경찰과 부모 친지 등 많은 사람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범인은 4명의 여학생과 1명의 여교사를 인질로 자신의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 500 백만원을 사기 당했다는 것이고 그를 꼭 잡아달라는 것이었다 현장의 모든사람들은 500백만원 때문에 이런짓은 한 27세의 젊은 청년을 몹씨 미워했고 빨리 상황을 종료하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KBS.MBC는 중계차 까지 출동하여 생방송 준비에 한참이었다 저렇게 까지해도 되는건가 뭐 그리 큰사건이라고 현장에서 상황을 파악하는 우리에게는 너무 민감한 반응이라 생각했다. 더이상의 시간을 지체 할수없다는 경찰 지청장의 지시와 서장의 권유에 따라 경찰 특공대가 급파 현장 상황을 파악하는데 분주했고 인질극 6시간 만에 경찰특공대의 기습에 인질극은 종료하게 됐다 인질극을 벌인 범인은 경찰서로 급히 옴겨 졌고 공포에 떨었던 선생님과 학생들은 부모의 품에 안겨 많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500백 만원 때문에 이같은 일은저지른 청년이 불쌍한 생각이 들었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없었으면 한다 사실 인질극 취재는 상당히 드문일이고 있어서는 안될일이다 다행이 다친 사람없이 잘끝났지만 현장 취재를 경험한 우리 TV 카메라 기자의 입장은 현장 상황이 아닌 그 이면도 심도 있게 집어보는 것 또한 꼭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2003-02-24
  • 롯데호텔 노조원 폭력진압
    한국기자상 취재기-방송영상부문 YTN, 경찰, 롯데호텔 노조원 폭력진압 공권력 남용 고발 통해 인권문제 제기 한원상 YTN 영상취재부 기자 지난해 6월 29일 새벽 4시경 경찰은 3천여명의 공권력을 투입해 20일동안 파업을 벌여온 롯데호텔 노조원 1천여명을 폭력으로 진압하여 강제연행 했다. 경찰은 이날 먼저 롯데호텔2층 크리스털볼룸에 있는 노조원들을 강제로 연행한 뒤 36, 37층 연회장에서 노조원들과 격렬한 공방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노조원들에게 진압봉을 휘두르거나 발길질을 하는 등 폭력을 행사하여 노조원들이 크게 부상당하는 현장을 단독취재 했다. 그날 경찰이 롯데호텔 노조원들을 강제연행 하는 장면을 취재하기 위해 경찰보다 먼저 롯데호텔에 도착했다. 경찰은 지하에 있는 CCTV실을 먼저 점거한후, 2층으로 올라갔다. 뿌연 연기 속에 누군가가 뒤에서 ‘카메라! 카메라!’라는 소리를 외쳤다. 뒤로 돌아보니 윤춘호 매일노동뉴스 기자가 경찰에게 카메라를 빼앗긴 채 목이 졸려 있었다. 그는 소리를 지르며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후, 롯데호텔 노조원들이 손을 뒤로한 채 경찰에 연행되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롯데호텔 건물에는 굉음소리가 울렸고, 거기에 놀란 외국인 투숙객들이 밖으로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지자 조철 민주관광연맹 노조위원장이 36, 37층을 향하여 ‘임신한 여성노조원도 있으니 제발 폭력으로 진압하지 말라고 울먹이며 소리를 외쳤다. 그 목소리를 들은 후 36, 37층까지 걸어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일이 크게 벌어 질것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여기에서 인권이 얼마나 중요한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릎쓰고 36, 37층으로 걸어올라 갔다. 바리케이트를 설치한 가운데 경찰과 노조원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고, 가끔 롯데호텔 여성노조원들이 힘내라는 구호가 바리케이트 밖으로 들리기도 했다. 1시간후, 바리케이트가 뚫리자 경찰은 노조원들을 연행하기 위해서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경찰의 저지로 늦게 들어갔지만, 여성 노조원들은 나를 보자마자 살려 달라는 듯 고함을 질렀다. 당시 시위 현장에는 경찰이 노조원들을 강제진압 하는 과정에서 욕설을 퍼붓고 곤봉으로 내리치고 군화발로 짓밟았다. 카메라 앵글에 비친 그들의 얼굴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경찰은 취재하는 것을 목격하고 취재를 방해하려고 해 한때 경찰과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국내언론과 외신들은 롯데호텔사태에대해일제히보도했다. 당시 취재를 마치고 일본에 갔을 때 특히 일본언론사들은 경찰이 롯데호텔노조원들을 폭력으로 진압하고 강제 해산시킨 현장은 일본에서 지난 60∼70년대 대학 점거 투쟁 현장을 연상케 한다고 했다. 반면 국내 언론은 경찰의 충격적인 진압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사태의 본질에 대한 접근이나 대안 제시에서는 여전히 단발적이고 일회적인 보도에 머물렀다. 그러나 각계 시민단체의 비판의 목소리는 높았다. 폭력적인 경찰에 의존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부의 안이한 태도에 대해 실망을 금치 못한다면서 노조원들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연행한 사실에 대해 국내외 노동계, 시민단체, 네티즌들은 롯데제품 불매운동과 성희롱 문제까지 확산 시켜나갔다. 또 국회에서도 진상조사단을 구성, 롯데호텔 폭력사태에 대한 진상조사를 했다. 이로 인해 롯데측은 800억원 이상의 손실이 발생함으로서 일관성 없는 법집행과 형평성 잃은 공권력투입이 노사간의 엄청난 대란을 몰고왔다. 롯데호텔 노조측은 경찰을 상대로 현장지휘관 등을 살인미수,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독직폭행등의 혐의로 고소하여, 금년 1월 17일 서울지방법원에 당시 취재한 영상이 과잉진압에 대한 사실을 입증 할 수 있는 증거자료로 채택되었고 유일하게 현장 상황을 잘 안다고 해서 증인으로 출석했다. 기자가 법정에서 증인으로 채택되었고, 유일하게 현장상황을 잘 안다고 해서 증인으로 출석했다. 기자가 법정에서 증인으로 출석한다는 것은 취재원칙과 공정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 고민을 해 왔다. 그러나 현장상황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고, 인권문제였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과 상의한 끝에 법정에 출석하게 되었다. 그 덕분일까. 노사와 경찰이 신뢰를 회복하고 민주적이고 인권을 보호하는 새로운 전환의 계기를 만들었다. 지난해 12월 주택은행과 국민은행 합병반대 파업과정에서 경찰과 노조 양측이 무력충돌없이 일단락 시킨 것은 롯데호텔 과잉진압때보다 한층 성숙된 모습이었다. 앞으로 노사는 서로 깊은 상호 이해를 실현하고 신뢰를 회복하여 주인의식을 가진 회사를 만들어 나가는 자세가 필요하고, 경찰은 인권을 보호하는 경찰이 되기를 바란다.
    2003-02-24
  • 대만 지진 취재기3
    오늘은 추석. 이국에서 맞는 추석이라 아침부터 부모님과 사랑하는 마누라에게 안부 전화를 했다. 수시로 공포감을 조성하는 여진에 대한 부분은 빼고 잘먹고 잘잔다는 의례적인 이야기만 하고 수화기를 내려놨다. 그동안 김박사는 타이중에 있는 모든 구조 기관과 단체에 수 십통의 전화를 해대고 있었다. 마침내 119 구조대 발견!!!!!!!!! 그들은 타이중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에서 인명 구조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 무너진 아파트 건물 지하로 들어가니 우리를 최초로 맞이한 것은 시체 썩는 냄새와 무너진 콘크리트 틈새로 뚝뚝 떨어지는 피였다. 오싹 하는 기분과 함께 떠오르는 많은 얼굴들. 특히 쌍둥이 내 아들(그당시 생후 17일 째) 비상 조명 기구만 밝혀진 그곳은 아파트 주차장 이었다. 구조대는 무너진 틈으로 뚫고 들어가 혹시 생존자가 있는지 수색 중이였다. 석 선배도 구멍으로 비집고 들어가 수색 작업을 열심히 촬영하고 있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여진 때문에 대강 취재하고 빨리 밖으로 나가고 싶은 것이 모든 취재진의 솔직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약 30여분간 취재하고 일단 지하실 밖으로 나왔을 때 햇빛과 신선한 공기가 왜 이리도 소중한지. 오늘 취재 아이템은 이국에서 추석을 맞는 119 구조대와 대만 사람들의 우울한 추석이었다. 석종철, 이영진 선배는 현장에 남고 나와 조재익 선배는 지진 피해 현장에서 추석을 맞는 대만 사람들을 취재하기로 하였다. 약 11시 50분경. 근처 절에서 촬영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생존자가 발견되었다는 급보였다. 모든 취재를 물리치고 현장에 도착하니 이미 그곳은 흥분과 긴장감이 감돌았다. 다시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지만 생존자가 있다는 사실은 두려움을 가시게 하였다. 생존자 확인을 위해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가운데 무거운 침묵 속에서 가느다란 음성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이의 목소리 였는데 여자 아이라는 것이다. 생존자 확인이 끝나자 구조 작업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취재진도 뜻밖의 현장을 포착하여 약간 들떠 있었다. 아직 지진 피해 현장에서 생존자가 구출되었다는 뉴스가 없는 가운데 매몰자는 가녀린 여자 아이이고 게다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취재진은 오직 KBS뿐. 특종이다!!!!
    2003-02-24
  • 대만 지진 취재기2
    첫 날 송출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자마자 취재팀은 타이베이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송산호텔'로 향했다. 10층 이나 되는 호텔 건물은 폭삭 주저앉아 있었다. 지진의 위력을 새삼 느낄 수 있는 현장이었다. (그러나 송산 호텔의 붕괴는 이후 보게될 피해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이었다) 호텔 건물의 인명 구조 현장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취재팀의 취재 경쟁이 한창이었다. 말로만 듣던 CNN, BBC, ABC, 로이터 통신도 보였다. 취재를 마치니 밤 12시가 다 되었다. 아침부터 정신없이 뛰어 다니고 계속 긴장을 해서 그랬던지 하루가 일주일 처럼 느껴졌다. 내일부터 피해 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취재가 시작된다. 대만 도착 2일째. 본사에서 헬기 취재를 시도하라는 급보가 전해졌다. 잠시 난감해졌지만 우리가 고용한 가이드(참고로 해외 취재시 가이드의 존재는 대단히 중요하다. 사전 섭외에서 통역까지 취재진의 손발이 된다. 단순한 통역이 아니라 가이드 자신도 취재팀의 일부라는 책임의식이 있는 가이드를 만나면 그 해외 출장의 절반은 성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인 김진오 박사는 공항으로 연락을 취해 어렵게 헬기를 확보했다. 재난 상황이라 임대료가 매우 비쌌지만 회사에서는 강행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러나 헬기가 너무 작아 3명만 탑승할 수 있었다. 부득이 석종철 선배(카메라 기자), 조재익 선배(취재기자), 가이드 3명만 헬기에 탑승하고 나와 이영진 선배는 호텔에 남아 있었다. 헬기팀이 돌아오기로 한 오후 3시가 넘어가자 슬슬 걱정이 되었다. 혹시 사고라도.... 핸드폰이 계속 불통이라 걱정은 더해갔다. 5시가 넘어서야 헬기팀이 돌아왔다. 촬영한 그림을 보니 지진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멀쩡한 고층 아파트가 가운데가 동강나 쓰러져 있는가 하면 사찰은 가운데 부처님 상을 제외한 모든 부속 건물이 폭싹 주저앉아 있었다. 우리가 위성 송출을 청약한 대만의 CTN이라는 방송국도 매일매일 벌어지는 피해 상황 속보를 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헬기 테입이 총 60분이라 원본을 모두 송출하기란 불가능 하였다.(통상 위성 청약 시간은 5-10분, 이것도 매우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60분을 청약하기란 불가능하다. 이 짧은 시간동안 기자의 오디오, 인터뷰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림을 송출한다. 그래서 원래 촬영할 때 거의 편집한다는 개념으로 절제해서 촬영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어쩔 수 없이 완성품을 만들어 송출할 수 밖에 없었다. 편집기는 여유가 없고, 시간은 촉박하고 편집하고 있는 석 선배의 손이 보이지 않았다. 청약된 위성 시간에 맞춰 완성품을 송출할 수 있을지 걱정 되었다. 본사에서는 시간 없으니 미완성품이라도 쏘라고 재촉하였다. 청약된 위성시간을 약 3분 경과해서 석 선배가 뛰어 왔다. -- 임무 완수 -- 헬기에서 본 지진 피해 상황은 한 편의 재난 영화를 보는 듯 했다. 뒤에서 지켜본 CTN 관계자도 그런 헬기 그림은 아직 대만의 어떤 방송국도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헬기 취재를 결정한 데스크의 판단과 석종철, 조재익 선배의 노력 그리고 가이드의 책임감이 조화되어 훌륭한 취재가 되었다. 이날 헬기 취재의 대성공은 앞으로 전개될 지진 취재 성공의 시발점이 되었다.
    2003-02-24
  • 대만지진 취재기1
    좀 지난 취재기이지만 이 보도로 신동곤 기자는 본회가 제정한 한국TV카메라기자상 보도뉴스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9월 21일 대만에서는 강도 7.6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새벽 6시쯤 데스크로부터 출장 준비해서 출근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급하게 하달된 출장이라 모든 것이 정신 없었다. 더군다나 나로서는 첫 해외 출장이었다. 다행히 나와 동행한 석종철 선배는 고베 지진현장의 경험이 있는 베테랑이라 안심은 되었다. 출발부터 우리의 출장은 순탄치 않았다. 12시 오사카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회사에서 출발한 시각은 11시 5분. 통상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 최소한 1시간 전에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밟아야 하는 것이 상식인데, 공항 도착 후 약 15분만에 모든 절차를 완료하고 비행기에 탈 수 있었다. 오사카에서 대만으로 가는 비행기 모니터를 통해서 처음으로 대만 지진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피해는 심각했다. 사망자는 천 명 이상이고, 실종자는 약 7천명 정도였다. 두려운 마음을 안고 대만에 도착한 시각은 19시 20분(대만은 한국보다 1시간 느림) 우리가 도착한 타이베이는 다행히 피해가 적었다. 진앙지가 남부지방이어서 그랬다. 공항에는 회사에서 이미 섭외한 차량과 가이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 첫 날 우리에게 하달된 임무는 지진 현장에서 1보를 송출하는 것. 공항수속 마친 시각은 약 19시 50분. 예약된 위성 송출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약 40분. 이 임무를 완료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40분이 걸린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임무 완수. 렌터카 운전사('까오'라는 친구인데 마지막까지 우리와 동행해서 무척 정이 들었다)의 난폭 운전 덕분에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위성 송출 완료. 대만 지진 현장 취재팀 첫 날 임무완수 완료!!! *** 사건 현장에서 1보를 보내는 것은 뉴스에서 가장 중요한 요구 사항입니다. 아무리 좋은 화면일지라도 다른 방송사에서 1보가 나간 후 뒷북을 치면 그 화면의 가치는 별 볼일 없는 것입니다. 타 방송사보다 1초라도 빨리....
    2003-02-24
  • 끝없는 전쟁
    7년간 지리하게 계속되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평화협상은 제 2당인 리쿠드당 당수 샤론의 팔레스타인의 성지인 엘 락사 사원 무단 강행으로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매일매일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두 민족간의 대립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갔습니다. 엘 락사 사원은 팔레스타인의 성지인데, 샤론의 방문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입니다. 급기야 아랍을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스라엘에 대한 제재방안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전쟁까지 불사하겠다는 이라크 같은 강경파와 이집트나 요르단같은 평화적으로 이 사태를 해결하려는 온건파가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저는 바로 아랍대표 회담을 취재하기 위해 현장에 달려갔고 현장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가로 놓아 높은 장벽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제재가 전쟁으로까지 치달을수 있고 그렇게 되면 또 다른 오일쇼크를 몰고 올 수도 있기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갑작스레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잘못 알고 있었던 이 두 민족간의 분쟁의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먼저 사건의 발단은 미시적으로 보면 샤론 당수의 무력을 앞세운 팔레스타인 성지 방문입니다.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이스라엘에서는 온건파와 강경파가 뚜렷이 구분됩니다. 강경파들은 유대교의 성지인 이스라엘에서는 유대인들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의 입장에서보면 2000년전에 유대인이 떠난 땅에서 살아온 데다가 유대인만 살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논리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팔레스타인의 성지인 엘 락사 사원을 이스라엘 강경파의 우두머리가 우력을 앞세워 침입을 한 것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문제의 엘 락사 사원의 위치를 보면 왜 이 두민족이 몇십년째 싸우고 있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은 유대인 거주지역인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인 거주지역인 동예루살렘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동예루살렘지역안에는 구시가지가 있는데 이 지역 안에는 기독교 성지인 예수 관련 교회들과 유대교의 성지인 통곡의 벽, 이슬람의 성지인 황금사원과 문제의 엘 락사 사원이 벽을 맞대고 있습니다. 즉 각 종교와 민족의 성지를 물리적으로 옮기지 않는 다음에야 해결책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지역을 보면 그 상황은 더욱 심각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곳인 베틀레헴은 팔레스타인 자치 지구인데 이 안에는 유대인의 성지인 라헬의 무덤이 있고 이슬람 과격단체인 하마스의 주 활동무대인 헤브론에는 아브라함의 성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의 변두리 언덕에는 유대인 정착촌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지난 2000년간 살아오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대인의 성지를 차지하고 있고 그 주변의 경비는 이스라엘의 경찰들이 맡고 있고 이스라엘 정착촌들은 차츰차츰 이 지역주변을 파고 들고 있습니다. 어느 한쪽도 양보할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돌멩이를 던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총과 탱크로 맞서는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인의 사상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두 민족간의 감정의 골은 점점 더 깊어만 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돌아오는 그날까지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평화협상은 제개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베들레헴과 라말라 근처의 한 유대인 정착촌, 그 밑 팔레스타인 마을에는 산발적인 총격전이 계속되고 있고 가자지구, 헤브론, 라말라등의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에도 투석전과 총격전이 지루하게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텔레비젼에서 자세히 전해드릴 수 없었던 생생한 분쟁현장을 동영상으로 감상해 보십시오. 이 화면은 목숨을 걸고 취재한 것입니다. MBC홈페이지 뉴스인뉴스
    2003-02-24
  • 구제역 예방접종 허위기재
    그 많은 소·돼지에게 주사를 맞힌 사람은? CJB 청주방송 영상취재부 김준수 충주에 구제역이 발생한 것은 지난 4월11일. 주로 서해안에서만 발생하던 구제역이 내륙 중심지인 충주에서 발생한 것에 대해 방역당국 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카메라기자로서 구제역이 발생한 충주시 신니면 마수리 지역을 빠짐없이 취재했다. 이 과정에서 방역선을 넘었다며 농수산부로부터 고발까지 당할 위기(?)에 처하는 등 우여곡 절이 많았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가슴아파했던 사람들은 바로 축산농민들. 자식같이 기르던 소와 돼지를 산채로 파묻어야만 하는 농민들을 바라보면서 농민의 자식으 로 살아온 나도 속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 이후 구제역 예방 백신접종과 낙인작업 등의 구제역 확산 방지 작업이 계속 이뤄져 농민들 은 그야말로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구제역이 발생한지 4개월 가량 지난 8월18일. 구제역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한 농민으로부터 제보전화가 왔다. 자신이 키우던 염소는 자신이 직접 예방접종을 했는데 면직원이 들고 다니던 예방접종부에 는 수의사가 한 것처럼 기재돼 있다는 내용이었다. 문득, '꺼리'가 되겠다 싶어 취재기자에게 알려주고 본격적인 취재에 들어갔다. 왜냐하면 농민이 직접 접종할 경우 접종비가 없지만 수의사나 접종요원이 접종할 경우 소와 염소 사슴 등은 마리 당 천원, 돼지는 마리 당 5백원의 접종 시술료를 주기 때문이다. 충주시에서 예방접종한 가축은 모두 12만마리. 접종 시술료로 수천만원이 수의사와 접종요원들의 배를 부르게 해준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가 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곧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예방접종 대장은 어렵게 입수했지만 분량이 1, 2차 예방접종대장을 합쳐 3천 쪽이 넘고 농 가에 일일이 확인하지 않는 한 제보한 농민과 같은 사례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틀 밤을 새우며 10여 마리 이상 소와 돼지를 키우는 농민 3백여 명을 골라 전화를 했다.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모두 수의사와 예방접종요원이 직접 농가에 찾아와 했다는 것. 그럼 이 농민만 단순 실수로 잘못 기재한 것일까. 이렇게 싱겁게 끝나는 것인가. 더구나 취재소식을 알고 충주시와 면에서 농민들에게 입단속을 했다는 정보가 들어오기까지 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하는 법. 의외의 곳에서 실마리가 풀렸다. 예방접종대장에 돼지 7천 마리를 접종한 것으로 돼 있는 예방접종요원 성아무개씨와 통화중 "자신은 예방접종에 참여한 적이 없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성씨는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이제 풀렸다.' 그 동안의 피곤함이 한꺼번에 씻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돼지 7천 마리를 실제로 접종한 접종요원 홍아무개씨와 통화를 시도했다. 홍씨는 처음에는 "이 같은 사실을 전혀 모른다"며 부인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성씨의 이름 을 거명하며 다그쳐 묻자 그제서야 진실을 말했다. "시청 직원의 요청에 의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시청직원은 그런 일을 했을까 의문이 생겼다. 취재기자와 함께 충주시 축산과를 찾아가 사실여부를 확인하자 공무원들도 처음에는 완강히 사실을 부인하다 "감사에 적발될 것이 두려워서 그랬다"고 실토했다. 이런 사례가 크고 작은 것을 포함해 수십여 개가 드러났다. 공무원의 조직적 개입이 마침내 드러난 것이다. 또 소와 돼지, 염소 수백여 마리가 농민에 의해 자가 접종됐으나, 수의사와 예방접종요원에 의해 접종된 것처럼 기재된 사실도 이후 3일 동안의 취재에서 추가로 밝혀냈다. 나는 이후 취재기자와 함께 '구제역 예방접종 내역 허위기재', '보조금도 비리의혹', '경찰 본 격수사 착수' 등 7차례에 걸쳐 관련 보도를 내보냈다. 결국 경찰이 본격 수사에 나서 공무원 2명과 접종요원 1명을 사법처리하면서 사건은 마무리 됐다. 이 시리즈 기사로 취재기자와 함께 한국기자협회와 언론재단이 공동으로 주는 제120회 '이 달의 기자상'을 수상했다. 심사위원들은 수억, 수십억원의 돈이 새 나간 것은 아니지만 비록 적은 돈이나마 정부보조 금이 다른 곳으로 유출되는 것을 사전에 막았다는 데 후한 점수를 주셨다. 9월28일 프레스 센터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영상취재 기자로 5년간 일한 보람을 느낄 수 있 어 좋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수상소감도 발표했다. "이 상은 제가 받아야할 상이 아니라 구제역으로 자식같이 기르던 소와 돼지를 눈물을 흘리 며 메마른 땅에 묻어야만 했던 축산농민들에게 주어야할 상입니다." 아직까지 구제역으로 고통받고 있는 농민들이 하루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희망을 찾 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03-02-24
  • 71세 김상일씨의 엄마찾기
    김시현 기자(문화방송 영상취재부) : daytrix@dreamwiz.com 살아계시다면 92세이실 어머니 김태숙씨를 찾는 김상일씨(71세)는 이번에 상봉한 이산가족들이 밉다신다. 당신이 못하신 효도를 그들이 할 수 있어 너무나도 샘이 나신단다. 이제는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는 주위 사람들의 안타까움에 버럭 역정을 내신다. "이제 구십밖에 안됐는데 무슨..." 홀로 걸어내려온 38선을 뒤로 한지 55년. 밀을 절구에 찧어 손바닥 반 만한 밀떡을 해주시며 "오늘이 니 생일이야" 하시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남한에서 배불리 먹으며 지낸 세월이 너무나 송구스럽다. 당신은 오늘 당장 일거리가 없으면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열남매중 혼자 피난 여느 이산가족은 남한과 북한에 조금씩 나뉘어져 있을 법도 한데 그는 혼자다. 그래서 라면 박스에 화선지를 붙여 정성들여 쓴 울긋불긋한 가족의 이름도 다른 사람보다 많다. 그는 아버지 김원식씨(96세)와 어머니 이태숙씨(92세) 사이의 열 남매 중 유일한 남한 식구이다. 더 이상 혼자이기 싫은 김 할아버지의 가족 찾기는 절규에 가깝다. 모든 사람에게 알려 죽기 전에 부모님을 뵙는게 지상 소원이시다. 매스컴에 나간 뒤로 자못 할아버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정작 당신의 소식을 북녘에 전해야 할 북측 기자들은 적십자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고개를 돌려버린다. 이제는 남은 시간이 없다 일흔을 넘긴 나이를 더 이상 믿고 있을 수 만은 없다. 85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상봉자 명단에 올렸지만 번번이 허사. 백만 이산가족이 1년에 100명씩 본다면 10,000년이 걸린다는 현실 앞에서도 할아버지는 좌절하실 수 없다. 그래서 영어도 배우고 인터넷도 배우셨단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의 기자와도 만나보고 알림판에 이메일 주소도 적어본다. 조금이라도 상봉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으신다. 무엇이 할아버지를 그토록 불안하게 만드는 것일까. 아흔을 넘기신 부모님이 살아계실 거라고 굳게 믿어 보지만 더 이상 자신이 없으신 거다. 이제는 당신의 일생도 장담 못하는 상황에서 자꾸만 희미해져 가는 어릴 적 어머니 모습 앞에 조금이라도 젊은 김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으신 거다. 50년 세월 너머로의 절규 너무나 오래 혼자 버텨온 55년. 떼를 써도 받아줄 이 없는 메마른 부대낌 속에서 반세기를 거슬러 엄마를 떠올리는 김상일씨의 통곡은 생일날 밀떡 하나 입에 넣어 주시던 엄마를 찾아 메아리 친다. "엄마 저도 효도하게 해주세요!!!"
    2003-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