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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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故 김선일씨를 취재하고…
    故 김선일씨를 취재하고… 6월임에도 불구하고 폭염이 내리쬐던 6월의 아침… 한국청년 한 명이 이라크의 무장단체에 둘러싸여 눈물로 하소연하는 모습을 보면서 걱정과 안타까움을 느끼며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출근길에 나섰다. 그로부터 몇 분 후 부산으로 출장을 가라는 데스크의 취재지시를 받는 순간, 피랍된 한국인 김선일씨에 관련된 취재임을 직감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의 일정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장비를 챙기고 수원에서 부산까지 고속도로로 내려갔다. 점심도 대충 휴게실에서 먹고 서두른 덕분에 오후 3시경에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김선일씨의 집 앞은 취재진들과 중계장비들로 좁은 골목이 더욱 더 비좁게 되었고, 평소 조용했던 동네도 낯선 이방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뤄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첫날은 부산의 습한 새벽공기를 맞으며 밤을 꼬박 샜다. 주위의 다른 기자들도 나와 마찬가지였는데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자리를 뜰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장단체가 제시했던 24시간의 시간이 그렇게 조금씩 지나가고 있었다. 다시 골목에서 대기하는 상황이 연 이틀 이어졌다. 옷은 점점 더러워져가고 땀에 젖은 속옷은 몸에 착 달라붙어 불쾌했다. 출장준비를 할 틈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단벌신사(?)’의 처지였다. 힘든 몸을 가누며 골목에서 다른 기자들과 같이 대기하던 무렵… 무장단체가 예고한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자 낙관적인 전망이 각 방송사에서 쏟아졌다. ‘이제 곧 돌아갈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에 힘든 줄도 모르고 취재를 계속할 수 있었다. 기뻐하는 김선일씨의 식구들 모습을 보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뉴스에서는 계속해서 기뻐하는 김선일씨의 부모님들의 모습이 방영되었고, 그때까지 그가 피살되리라고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평온하게 지날 것 같았던 상황은 언론사들에게 ‘오보’라는 불명예를 씌우는 상황으로 급변했고, 대한민국의 한 청년은 낯선 이국 땅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사라졌다. 소식을 접한 가족들의 오열의 순간을 취재하면서 나의 가슴속에는 분노와 안타까움이 교차하였고, 어느덧 그들을 바라보던 뷰파인더는 땀과 눈물로 얼룩져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취재는 끝났다. 힘들었던 취재였지만, 느낀 점도 많았고 카메라기자로서 조금은 성장한 기분이다. 끝으로, 언론사들의 치열한 취재경쟁에 상처 입은 유가족들에게는 사과의 말을 전하고 싶고, 고인이 된 김선일씨의 명복을 빈다. 또, 부산에서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부산지역 카메라기자 선배님들께도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경인방송 영상취재팀 양태환 기자
    2004-08-09
  • <영상취재 가이드> 이렇게 해결하세요
    <TV카메라기자 13호> 5면 보충 설명 기사 얼굴이 하얗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ꋮ경력이 오래된 카메라기자도 실수 많아 뉴스 인터뷰 화면 중 가끔 얼굴이 하얗게 보이는 경우가 가끔 있다. 경력이 오래된 카메라기자라도 예외없이 실수하는 일이 많다. 한마디로 설명하면 Knee-Point가 너무 낮게 셋팅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재 대부분의 방송사에서는 Digital SX카메라를 뉴스취재용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비디오카메라는 보다 폭 넓은 유효비디오 범위로 촬영되도록 입사 광량에 따라 Knee-Point가 자동적으로 변화되도록 하는 회로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효비디오의 범위는 100IRE로 규정하고 있다. 우리가 화면에서 얼굴이 하얗게 되는 화면을 보게 되는 것도 이러한 비디오 신호와 관련이 있다. 100IRE를 초과하는 비디오신호에서 하이라이트를 차단하는 비디오회로를 Clipping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이라이트의 비디오레벨을 단순히 어떤 수준으로 제한하기 때문에 화상의 디테일이 밝은 부분에서는 재현이 안 된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Knee-Correction회로가 사용되는 것이다. Knee-Correction회로는 Knee-Point 비디오레벨을 초과하는 신호를 압축한다. 문제는 전기적으로 하이라이트의 비디오레벨을 화상모니터에 재현할 수 있는 레벨로 제한(limit)하는 데서 발생한다. Digital SX카메라는 공장에서 약 85IRE로 셋팅되어 출고된다. 이 과정에서 사용자는 자신들의 특성에 맞게 Knee-Point를 재조정하여 사용해야 하는데 출고 당시 셋팅 된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Clipping현상이 심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니 포인트가 85IRE라는 것은 빛이 100%의 수치로 들어올 때 85%정도로 압축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되면 85~100사이의 빛의 명암이 디테일하게 나타날 수는 있지만,비디오레벨이 저하된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조리개를 더 개방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ꋮ비디오레벨이 저하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조리개를 더 개방 이렇게 비디오레벨이 저하된 것처럼 카메라가 자동으로 인식하면 조리개가 자동으로 더 개방되어지기 때??얼굴의 일정 부분이 하얗게 변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카메라기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얼굴이 하얗게 날랐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카메라기자들이 현재 Digital SX를 사용하면서 아마도 DCC ON/OFF를 DCC OFF로 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이 경우에는 Knee-Point가 100IRE로 셋팅되어 있기 때문에 밝은 빛에 대해 보상을 하지 못하고 역광이나 하레이션 현상이 나는 장소에서 인토뷰나 인물촬영을 할 경우 얼굴이 하얗게 날라 보이게 된다. 이럴 경우 DCC ON을 해 사용하면 Knee-Point가 초기 셋팅 값인 85%로 되어 있기 때문에 노출이 다소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Knee-Point 85IRE는 명암을 디테일하게 보이게 할 수는 있지만 밝은 부분이 탁하게 보일 수도 있고 Chroma가 빠져 색감이 다소 떨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SX로 형광등을 촬영해보면 DCC OFF의 경우 Knee-Point가 100IRE이기 때문에 형광등의 써있는 상표의 글을 읽을 수 없을 만큼 밝은 부분이 과장되어 보는 말리는 현상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DCC ON의 경우 85IRE로 명암의 디테일이 강화돼 상표의 글씨를 읽을 수 있지만 형광등의 색이 다소 탁하게 느껴지고 비디오 레벨이 저하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현상을 막기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해 볼 것을 권한다. 먼저 DCC ON을 사용해야 한다. 대부분의 카메라기자가 사용하고 있는 Digital SX카메라는 현재의 Knee-Point 85IRE를 96~98까지 재조정해 사용하면 얼굴이 하얗게 되는 고민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다. 특히 명암의 디테일을 살리려고 할 경우 역광, 하레이션, 창문 밖의 풍경을 촬영할 경우 반드시 DCC ON을 사용할 것을 권하고 싶다. Knee-Point가 낮게 셋팅되어 있는 경우 색이 빠져 탁하게 보이는 현상을 보상하기 위해 HDW-750은 Saturation 보상회로를 채택하고 있으나 Disital SX는 그와 같은 기능이 없다. 참고로 SP 400A는 98%, HD카메라는 95%로 Knee-Point를 재조정해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ꋮ지금 당장 Knee-Point를 재조정해야 자동노출은 화면의 밝기가 감지되어 Iris로 즉시 feedback되어 렌즈의 F Stop을 조정하게 된다. 화면의 밝기를 평균으로 계산하여 기준치 보다 낮으면 조리개를 더 열고 기준치 보다 높으면 조리개를 닫는다. 수동노출의 경우에도 노출이 변하지 않아야 되는데 실제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특히 Clipping 현상은 자동노출시 자주 발생한다. 이는 자동노출회로의 문제가 있거나, 현장취재시 카메라기자의 카메라 조작이나 장소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일어나기도 한다. 이렇게 화면이 하얗게 되는 현상은 일단 Viewfinder를 통해서 육안으로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노출을 수동으로 전환하고 노출을 조정하거나 인터뷰를 위한 조명 이외에 외부에서 들어오는 강한 직사광을 최대한 피할 수 있는 장소로 이동해 촬영하면 얼굴 화면이 하얗게 되는 현상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또 Zebra 노출표시기를 이용해도 좋다. 제브라 패턴은 화면에서 어떤 부분이 일정한 신호레벨에 도달한 것을 하고 Viewfinder에 영상으로 표시해 주는 역할을 한다. Digital SX의 경우 Face Tone에 맞추어져 있는데 노출의 70%, 또는 100%에서 zebra가 뜨는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카메라기자가 서둘러서 해결해야 할 일은 지금 당장 Knee-Point의 레벨을 재조정해 사용하는 것이다. 이정남 기자
    2004-08-05
  • 해파리의 침공 제작기
    해파리의 침공 제작기 '해파리의 침공' 그것은 촬영기자인 나에게 대상이라는 영광을 안겨준 작품이었다. 하지만 말못할 문제점과 아쉬움이 다수 남는 작품이기도 하다. 처음 취재기자와 프로그램에 대해 논의를 하다 보니 대부분의 촬영스케줄이 수중촬영이었다 10년 전에 스쿠버를 배운 뒤 그동안 한번도 바다에 들어가 보지도 들어갈 생각도 하지 않았던 나에게 수중촬영이라는 부담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오직 나의 머릿속에는 프로그램에 대한 욕심으로만 가득했다. 해서 스쿠버를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고 해운대에 위치한 아쿠아리움의 수족관에서 체험 다이빙이라는 프로그램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수족관속에는 무시무시한 상어 떼들과 고기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전문가와의 동행이라 조금 안심이 되었지만 수족관에 들어가기 전 주의 사항에서 상어가 공격 할 수도 있다는 말에 긴장을 한 탓인지 중성부력과 호흡 조절등 아무것도 잘 되는 것이 없었다. 3일정도 연습을 하고 나니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겨 실전에 돌입했다. 첫 수중촬영은 수심이 나의 키 보다 낮은 곳에서 시작 됐다. 그런데 여기서 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6mm카메라의 하우징으로 촬영을 하려니 파도에 견디기가 무척 힘들었다 이리 저리 넘실대는 파도 속에 해파리란 놈을 고정해서 촬영하기란 이만 저만 힘들지 않았다. 또한, view finder가 카메라 옆쪽에 달려 있어 finder가 아닌 하우징 안의 finder를 거울로 봐야 하는 것이라 설명하기란 좀 힘들지만 중요한 것은 거울이 상하 좌우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종류) 마산만과 시화호에서의 촬영은 들어가는 순간 냄새가 토할정도로 지독하고 시야도 1미터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많은 해파리를 보여 주고 싶어 조명의 광도도 높여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한번이라도 수중촬영을 해본 사람만이 나의 심정을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해파리가 움직이는 대로 나의 몸도 같이 춤을 추었다 해파리를 따라 가다보니 물도 먹게 되고 지나가는 해파리의 촉수에 쏘이기도 했다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하루하루 촬영한 그림들이 테이프에 차곡차고 쌓여갔다. 해파리가 다 독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식용 해파리는 머리부분만 먹고 촉수 부분은 버린다. 참고로 해파리는 중국,베트남등 여러 나라의 해파리가 있지만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태국 해파리가 제일 이라고 했다 먹어보면 쫄깃쫄깃 하고 단백한 맛이 나는 것이 태국산이라고 한다 우리는 해파리의 천국이라 불리는 호주로 가기로 했다. 호주에서의 상황은 아주 악 조건이었다 우선, 장비 대여 문제가 걸림돌로 나타났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산이 문제였다, 헬기 촬영도 해야하고, 수중장비등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해결책은 경비를 절감하는 것 뿐, 해서 우리일행은 경비 절감을 위해 호텔이 아닌 방갈로나 콘도 형식의 숙소에서 직접 우리 손으로 밥을 지어 먹어야 했다, 이 결과 호주, 일본, 그리고 태국까지 갈 수 있었다. 물론 일본 출장에서도 허리띠를 졸라 맨 결과이다. 미국, 중국등 해파리가 있는 나라라면 다 가보고 싶은 욕심은 끝이 없었지만 아무리 아껴쓴다 해도한계가 있었다, 아! 지역방송의 한계인가? 나의 만용인가? 1부는 여기서 막을 내리고 2부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새해에도 복 많이 받으세요. PSB 하호영.
    2004-02-25
  • 르포 2003” 취재기/그곳에 “북한 가려면...
    이재영 기자는 2003년 2월 17일부터 25일까지 "남북공동 일제 강제징용에 대한 전시회와 세미나" 취재차 중국의 북경을 거쳐 평양을 다녀왔다. 취재기는 젊은(?)기자가 바라 본 또 다른 북녘의 모습을 흥미있게 적어가고 있다. 르포 2003” 취재기/그곳에 “북한 가려면... 그곳에 가려면... “♬♬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요금 이 만원. 소련도 가고 달나라도 가고 못 가는 곳 없는데.....” 대학생 때 이 노래를 즐겨 부른 기억이 있다. 그런데 나는 평양은커녕 중국 비자 만드는데 벌써 이 만원을 다 써버렸으니 이거 뭔가 문제도 한참 문제다. 평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육로, 직항로등 몇 가지 방법이 있지만 흔히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노선이 중국을 경유하는 방법이다. 보통 하루 전에 중국에서 1박하면서, 주중 북한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아 다음날 고려항공을 타고 평양에 들어가게 된다. 중국비자는 나중에 평양에서 나올 때도 중국을 통해야 하기 때문에 -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고려항공과 중국공항은 연계가 되어있지 않아서 공항 내에서 TRANSIT이 안됨 - 꼭 복수비자를 받아야한다. 중국은 (내가 알기론) 취재비자 받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공항에서 ENG카메라를 갖고 나가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설령 무사히 공항을 빠져 나간다 하더라도 나중에 또 갖고 나갈 것을 생각하면 애초에 공항에서 신고를 하는 편이 낫다. 내가 들어간 곳은 북경공항이었는데, 1층 도착하는 곳 가운데쯤에 보면 “신보”라고 써있는 곳에 가서 내가 이러이러한 장비를 들고 왔다고 신고하면 된다. 중국공항 직원들은 대부분 영어가 잘 안되기 때문에 중국말이 안되면 손짓 발짓을 동원해야 한다. 카메라와 부수 장비를 서울에서 준비해간 장비 리스트와 함께 넘겨 주면 그쪽에서 뭔가를 열심히 써서 얇은 종이한장을 찢어서 준다. 나중에 2층 출발하는 곳 가운데쯤 가면 비슷한 곳(중국인들이 세관신고하는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받았던 종이를 건네주면 직접 갖다준다. 주중 북조선대사관에 가면 비자를 만들어주는데 다른 나라와 달리 비자를 여권에 직접 찍어주는게 아니라 따로 사증을 한 장 만들어준다. 때문에 잃어버리기가 쉬워서 특별히 관리를 잘해야한다. 그 사증은 나중에 평양을 떠날 때 북쪽에서 가지기 때문에 결국 내여권에는 북쪽에 갖다온 흔적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그곳에 가면... 배단물 한잔 마시고 잠시 눈을 부쳤다 떼니 고려항공은 이미 북쪽상공을 낮게 날고있었다. “평양공항” 멀리 보이는 김일성 주석의 사진아래 드디어 나는 평양에 난생 처음 첫발을 디뎠다. 이렇게 쉬운 것을, 이까짓 별것도 아닌 것을... 뭐가 그리도 힘들고, 뭐가 그렇게 어려웠는지... 평양은 생각보다 활기가 넘쳤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 넘쳤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웃는 얼굴로 나를 반겼다. 상점 판매원동무들은 남쪽의 백화점직원들보다 더더욱 매상 올리기에(환율을 현실화한 작년 경제개혁이후로 성과급제도 또한 도입했다 한다.) 열심이었고, 식당 의례원 동무들은 우리의 짓궂은 농담에도 수줍게 웃으면서 받아넘겼다. 거리의 아이들은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남쪽아이들과 다르게, 바위며 풀밭이며 할 것 없이 개구지게 놀고있었다. 하지만 최근 어려워진 전력상황때문인지 밤이 되면 도시는 적막에 빠졌다. 가로등하나 안 켜져 깜깜한 인도위로 뜨문뜨문 사람들이 무언가 한 짐씩 지고 들고 소리 없이 걸어다녔다. 음식은 대체로 정갈하고 담백했다. 특히 김치는 한 공장에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식당마다 비슷했다. 한겨울에 냉면을 네끼 연속으로 먹고 거기에 얼음 보숭이(요즘엔 에스키모라고도 한다)를 디저트로 먹으니 아무리 옥류관냉면 이라고 해도 고개가 절로 흔들어질 수밖에... 나중엔 다들 온반으로 메뉴를 바꾸었다. 묘향산의 칠색송어, 대동강의 숭어, 개성의 십첩반상, 평양의 단고기정식, 털게요리등등 맛난 음식들은 많았으나 먹을 때까지 뜨거움을 유지시켜주지 못하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평양에서 남북공동 일제 강제징용에 대한 전시회와 세미나가 있었다. 애초에 그 행사때문에 북쪽에 왔던지라 송출을 해야했다. 송출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위성청약을 해야하는데 Intelpax로부터 확정서가 도착해야 한다. PAL카메라를 휴대하고 갔기에 편집기 사용여부를 계속 타진했고, 잠깐은 사용해도 좋다는 말을 전해듣고는 위성시간을 10분간만 잡았다. 6시에 송출시간을 잡아놓고, 오디오 2개와 밑그림을 송출해줘야 했다. 그런데 데스크를 보고 스탠딩을 하고 조선중앙TV에 도착한 시간이 5시 40분이었다. “내가 평양까지 와서 초치기를 해야하다니(투덜투덜)...” 겨우겨우 오디오편집 2개를 하고 나니 6시, 바로 송출, 오디오2개 4분, 밑그림 겨우겨우 6분...그나마 조선중앙TV에는 남쪽으로 바로 국제전화를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더군다나 눈에 불을 켜고 “저 그림은 빼라우”를 외치는 안내원 동무의 방해공작을 조선중앙TV에서 근무하는 리광철 동무가 “그림 고를 시간이 없어, 그냥 보내게 하라우”하며 겨우겨우 막아주는 덕분에 무사히 송출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어찌나 고맙던지... 조선중앙TV에 내야하는 송출료는 1분에 40달러, 10분에 400달러였다. 편집기 사용료는 받지 않는걸 보니 역시 한민족은 한민족인가보다. 그 날 저녁에 손가락이 탈골됐다. 손가락이 빠진 사연이야 기구하나 여기서는 열심히 일하다가 다친 걸로 넘어가기로 하고, 어쨌거나 처음으로 전혀 교육받지 않은 북쪽사람들을 병원에서 만나게 되었다. 밤 10시쯤이라서 그랬는지 외래환자는 전혀 없었고, 응급실도 없어 보였다. 병원에 도착해서 뢴크겐사진(우리말로 X-Ray)을 찍는 데까지 1시간이 걸렸다. 뢴트겐 기사를 집으로 부르러갔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말만 들으면서... 어쨌든 환자 1명에 모인 의사가 5명, 간호사가 2명, 이렇게 황송할 데가...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아서 치료는 금방 끝났지만, 그 후가 더 유쾌했다. 김창학 외과과장은 치료비가 너무 비싸게 나와서(나는 그곳에서 외국인적용대상 치료비로 40유로를 냈다.) 어떻게든 깍아줄려고 내앞에서 고민하고 있었고, 담당의는 환자기록부 국적란에 어떻게 써야될지 몰라 고민 고민하다 결국 조심스럽게 “남조선이라고 적으면 되갔지요?”라고 물었으며, 간호사는 혈압을 재고 올라간 내셔츠를 조심스럽게 내려주고 심지어 단추까지 채워주고 있었다. 어쨌든 평양친선병원 개원이래 환자기록부에 이름을 올린 첫 남쪽사람이라하니 이일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개성은 평양보다 한층 더 인간적인 도시였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우리 나라 1970년대 말에서 딱 멈춰버린듯했다. 하지만 문화재는 아무래도 사람 손이 덜타서 그런지 원형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송악산을 보았다. 날씨 좋은날 남산에 오르면 개성 송악산이 보인다. 나도 2번 정도 촬영한 기억이 나는데 바로 그 송악산이 눈앞에서 펼쳐지니 감개가 무량... 송악산은 여인네가 누운 모습같이 선이 참 고왔다. 앞으로 개성공단이 들어설 자리에 가보니 그곳에서 판문점이 불과 4Km이었다. 개성에서는 날 좋은 밤이면 일산 신도시의 불빛이 한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또다시 북경공항을 경유해서 가느니 그냥 이대로 이길 따라 버스 타고 집에 가고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곳에서 나오며> 떠나는 날 아침엔 안개가 심했다. 보통강변의 나뭇가지들은 하얀 서리꽃을 피웠고, 그 아래 봇짐을 지고 걷는 이는 내누이 같았다. 모든 것이 똑같았고,,, 모든 이가 똑같았다... “그곳엔 사람이 살고있었다...” 자료출처: http://www.sbsnewstech.co.kr/kor/k-main.htm
    2003-07-15
  • 전통다큐멘터리의 톱을 지킨다
    전통다큐멘터리의 톱을 지킨다 톱프로덕션 톱프로덕션은 세계 최초, 세계 최고, 범세계적 영상을 추구하는 프로덕션이다. 불교TV에 방영된 한국의 명찰 100편을 비롯, MBC 거대한 유통의 바다, KBS 자동차 천만대 시대 등 굵직한 기획 프로그램을 제작한 이 회사는 최근 전통 한국 장인을 다룬 ‘한국의 장인’을 제작 방영중이다. 글| 김대영기자 자료출처: 비디오플러스 다큐멘터리 분야는 저렴한 비용으로도 제작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많은 프로덕션이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정통 다큐멘터리를 고집하고 있는 프로덕션은 많지 않다. 톱프로덕션은 영상미를 강조한 정통다큐멘터리를 전문으로 제작해 주목을 끄는 프로덕션이다. 서울 양천구 방송회관에 위치한 톱프로덕션을 찾았다. 톱프로덕션은 20년간 KBS 보도국 카메라기자 생활을 한 백승대 사장이 운영하는 다큐멘터리 전문 프로덕션이다. 지난 1994년 9월 설립된 이 회사는 불교TV에 약 3년에 걸쳐 ‘한국의 명찰’ 100편를 제작 방영한 것을 비롯, MBC IMF특집 ‘거대한 유통의 바다’, KBS ‘자동차 천만대시대’ 20편, 수요기획-‘청백리 박수량 백비에 부는 바람’, ‘장애를 이긴 주니어 골퍼 제임스 명’ 등을 제작했으며 최근에는 KBS ‘한국의 장인’과 보도 프로그램인 뉴스라인에 ‘더불어 사는 세상’을 제작, 방영하고 있다. 정통 다큐멘터리의 맥을 잇는다 “저는 74년 KBS 카메라기자로 입사해 꼭 20년을 채운 1994년에 회사를 그만두고 톱프로덕션을 차리게 됐어요. 제가 KBS에서 근무할 때만 해도 정통 다큐멘터리는 교양파트에서 다루지 못하고 보도국에서 다뤘죠. 당시 제가 촬영한 것이 ‘실크로드’, ‘신왕오천축국전’ 등이었어요.” 백승대 사장. 그는 26세 나이에 최연소 한국영화 촬영기사로 수편의 극영화를 촬영하고 월남에 종군하여 국방부 제작의 월남전선 문화영화를 제작하는 등 다양한 촬영경험을 가지고 있다. 1974년 KBS 보도국 카메라기자로 입사하며 본격 방송생활을 시작한 그는 다양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접하면서 다큐멘터리 장르에 매료됐다. 백승대 사장이 특히 정통 다큐멘터리 제작에 관심을 갖는 것은 ‘실크로드’, ‘신왕오천축국전’ 등 취재를 위해 인도에 4개월여 머물면서, 불교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공부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후 1988년 미국 특파원 생활을 하며 백사장이 느낀 것은 진정한 프로는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분야든 최고의 자리라면 주변 여건에 관계없이 홀로 설 수 있다는 것이다. 백승대 사장이 본격 프로덕션 설립을 생각한 것은 1994년. 직장에서 승진을 하며 일선직이 아닌 관리직으로 자리를 옮긴 백승대 사장은 현장에서 뛰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힘이 닿는 한 영원한 장인으로 살고 싶었어요. 관리직으로 내려앉아 일선 기자들이 촬영해 오는 영상물이나 보는 것은 체질에 맞지 않아요. 특히 제가 사직을 결심한 것은 불교방송으로 자리를 옮긴 선배의 권유 때문이었어요. 당시 불교방송은 일본의 ‘명찰순례‘를 본뜬 ‘한국의 명찰’을 기획프로그램으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선배가 제게 일을 맡아달라고 부탁한 거죠.” 이미 ‘신왕오천축국전’ 등으로 불교에 관심이 있던 터라 일을 맡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백사장은 최고의 영상미를 구현하는 수준 높은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결심으로 현재의 톱프로덕션을 설립했다. ‘한국의 명찰’은 국내 1천8백여 사찰 가운데 100개를 선정, 제작에 들어갔다. 3년간의 제작기간 동안 심혈을 기울여 100편을 완성했지만 백승대 사장이 느낀 것은 프로덕션의 열악한 현실이었다. “당시만해도 공중파 방송은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케이블 방송국이 재정적으로 어려워지며 프로그램의 질은 큰 문제가 아니었어요. 말 그대로 방송에는 일류가 필요없다는 것이죠. 그저 질은 다소 떨어져도 저예산의 프로그램이면 만족하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방송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최고의 영상을 보여주어야 하는 서비스 아닙니까” 약삭빠르게 시류를 타지 못하다 보니 직원 봉급 줄 수 있을 때가 제일 좋다고 할 정도로 회사의 재정상태는 좋은 편이 아니다. 그러나 톱프로덕션은 ‘한국의 다큐멘터리 영상은 이렇게 가야 한다’는 전형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에 그 흔한 6mm카메라 한 대 쓰지 않는다. “요즘 6mm가 좋다고 말을 하는데 사실 6mm는 심도가 낮아 방송화질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거기다 혼자서 찍다보니 화질이 더욱 떨어지는 게 자명한 일 아닙니까” 톱프로덕션에는 6mm카메라를 쓰지 않는다. 아무리 방송국의 제작비가 낮게 책정돼도 제대로 된 영상이 나오지 않으면 헛일이다. 특히 영상을 아는 사람에게 이러한 영상물은 스스로 격을 떨어뜨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영상은 정확한 연출가의 연출이 중요 “한 때 우리도 프로그램을 외국에 수출하고 싶어 깐느에서 열리는 프로그램 마켓에 나가봤어요. 그 때 하루동안 둘러보고 얼른 가방을 닫았어요. 흔히 프로그램 수출 이야기를 하는데 실제 외국시장에 나가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어요. 이 시장에 나온 프로그램들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공을 들여 제작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어요.” 백승대 사장은 아직 한국 프로덕션이 외국시장을 겨냥해 제작한 작품은 없다고 단언한다. 적어도 그 시장에서 팔기 위해서는 자연다큐멘터리 정도의 제작기간과 정성을 쏟아야 한다는게 백사장의 설명이다. 그러나 현재 프로덕션의 현실은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낮은 제작비에 맞추려면 제작기간을 단축해야 하고 비용을 줄여야 한다. 이것은 저급한 품질을 양산하는 주요인이다. 또 해외에서 팔릴 수 있는 상품은 세계적인 공감대를 가질 수 있는 콘텐츠이어야 한다. 주로 해외시장 진출을 노리는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도 세계시장에서 공감대를 얻기 어렵다.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숙련된 연출가의 정확하고 계산된 연출이 필수요건이다. 더욱이 주제는 범세계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제작되는 모든 프로그램은 국내용 정도다. 기껏 수출한다 해도 우리보다 떨어지는 동남아나 중국 정도다. 특히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6mm 프로그램의 경우 백사장은 더욱 우려를 나타낸다. 저예산에 근거해 6mm 프로그램이 많이 등장하고 있지만 사실 6mm의 최대 장점인 비용절감이라야 AD 등 2명 정도의 절약 효과밖에 없다. 그러나 영상의 질은 방송용 ENG의 수준을 따라오지 못한다. 더구나 일부 VJ들은 영상구도조차 제대로 잡지 못해 단지 질 낮은 프로그램의 양산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물론 6mm는 취재원의 거부감을 줄일 수 있다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장기간 촬영에 용이하다는 것은 ENG 장비로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로 6mm가 주역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게 백승대 사장의 생각이다. 촬영 용역 등 각종 수익사업도 병행 프로덕션이나 방송국이 6mm 프로그램을 선호하는 것은 저예산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백승대 사장은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요즘 프로덕션 중에 잘된다는 이야기 들어 보셨어요. 아마 없을 겁니다. 정부가 프로덕션을 문화산업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지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한 예로 저는 수년전 한국을 대표하는 영상을 만들겠다고 벤처허가를 냈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금 규모로는 제작 자체가 안돼요. 그래서 아직 손도 못대고 있는 현실입니다.” 백승대 사장이 기획한 것은 한국 고궁의 사계였다. 그러나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다는 백승대 사장은 언젠가는 꼭 한국을 대표하는 영상물을 제작하겠다는 결심이다. 톱프로덕션은 모두 3개 팀이 운영되고 있다. 현재 KBS 위성 2TV로 방영되는 ‘한국의 장인’을 전담할 2개 제작팀과 뉴스라인 ‘더불어사는 세상’을 제작하는 1개팀 등 10명이 뛰고 있다. 이와함께 운영중이 것이 카메라 용역이다. KBS 등 방송사의 카메라맨이 부족할 때 카메라맨을 지원하거나 미국과 일본의 협력회사의 촬영의뢰에 따라 촬영을 대행해 주는 일 등이다. 리스프로의 이동석 사장과 함께 제작한 현대그룹 홍보물 ‘아산 정주영’이나 LG의 ‘우리들의 성’, Q채널의 ‘한국인의 화장’, KBS ‘체험 삶의 현장’, ‘스프츠 파노라마’ 등이 그동안 촬영용역을 통해 만들어온 작품이다. 이밖에도 각종 홍보물이나 광고, 비디오 제작도 톱프로덕션의 주 사업이다. 정동호 의원 등 국회의원 홍보물이나 삼성전자 ‘비전 21C 3부작, 25주년 특집 3부작 등의 홍보물이 톱프로덕션을 통해 제작됐다. 또 중원산업의 ‘매직캡’, 한국코트랑의 ‘코트랑골드’ 등 CF나, LA현지 제작한 드라마 2편과 가수 소호의 뮤직비디오도 톱프로덕션이 제작했다. 그러나 이 회사의 주력은 역시 방송용 다큐멘터리다. 특히 1999년 KBS 수요기획으로 방영된 ‘청백리 박수량 백비에 부는 바람’이나 지난해 방영된 ‘장애를 이긴 주니어 골퍼 제임스 명’ 등은 프로그램 질과 함께 시청자들의 주목을 끈 작품이다. ‘장애를 이긴 주니어 골퍼 제임스 명’은 장래가 촉망되는 재미 골퍼 제임스 명을 다룬 작품으로 그는 한쪽 다리를 잃어 골퍼의 꿈을 접었지만 의족을 달고 다시 골프를 시작한 의지의 한국인이었다. 이밖에 KBS 위성 2TV를 통해 방영되고 있는 ‘한국의 장인’은 한국의 인간문화재 20명을 선정, 그들의 제작과정 등을 집착 취재하는 작품으로 현재 톱 프로덕션이 가장 힘을 기울이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장사꾼이 아니니 돈은 더 들어갑니다. 그러나 영원한 장인정신으로 정통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하는데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미·니·인·터·뷰 윤정현 PD ■ 자신을 소개한다면 톱프로덕션에 프리랜서로 참여, ‘한국의 장인’을 제작하고 있다. 불교TV에서 6년간 PD 생활을 하며 쇼, 교양,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당시 직접 제작한 프로그램은 94년 휴먼다큐 ‘우리 부처님 같이’ 등이 있다. 이후 프리랜서로 독립, EBS의 ‘수학으로 보는 세상’, KBS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등을 제작했다. 한 때 인터넷방송국에서도 근무했지만 현재는 뜻맞는 동료와 솔프로덕션에 소속돼 있다. ■ ‘한국의 장인’은 어떤 프로그램인가 총 20편이 기획중인 프로그램이다. 현재 7편이 제작완료된 상태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중요무형문화재급 장인들을 찾아 그들의 제작과정과 삶의 이야기를 내용으로 한다. 일주일 중 4일간 2명이 제작을 완료해야 하기 때문에 힘들다. ■ 에피소드는 역시 힘든 만큼 에피소드도 많다. 그들을 취재하기 위해서 현장에서 공부하랴, 프로그램 제작하랴 이래저래 바쁘다. 더구나 취재원 가운데는 취재에 적극 응해주지 않는 분들도 있어 선정작업 자체부터 어려움이 있다. 한 예로 한참 촬영중에 이제 그만 하자며 돌아가 버리는 경우도 있고 겨울에 작업해야 하는 것을 여름에 찍을 수밖에 없어 난감한 경우도 있다. ■ 앞으로 계획은 특별한 것은 없다. 현재 제작중인 ‘한국의 장인’이 20편 모두 무사히 제작되길 바랄 뿐이다. 단지 앞으로도 기회가 있다면 수준 높은 휴먼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보고 싶다.
    2003-07-08
  • 방북 촬영장비 준비
    방북 촬영장비 준비 ■ 강의제목에 대한 소고 먼저 이 방북 취재기의 제목에 대해서 잠깐 설명을 할까 합니다.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이것이 이번 연강의 제목인데 제가 평양에 7박 8일 동안 머무르면서 본 수많은 구호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시다시피 평양은 구호의 도시라 할만큼 각종 구호들이 온 거리를 뒤덮고 있습니다. 몇 가지 생각나는 걸 들어보면 "위대한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다"는 소위, 영생구호가 가장 많이 눈에 띄고 다음으로는 "혁명의 심장부를 목숨으로 사수하자",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 등등... 그 중에서도 특히 제 시선을 사로잡은 구호가 바로 이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였습니다. 최근의 북한의 어려운 경제사정과 집단주의적 성격을 잘 나타낸 구호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딱딱하고 강성일변도의 구호들 중에서 유독 그 구호만이 여유가 있어 보여서 눈길을 끌었던 겁니다. 그런데 아마 그 구호의 효험을 가장 크게 본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북한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취재팀일겁니다. 사실 평양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별의 별 생각이 다 들만큼 일이 잘 안 풀려서 고전을 했거든요. 일이 꽉 막혀서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갑자기 그 구호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는 "그래, 가는 길 험해도 이들처럼 웃으며 가자, 그러다 보면 뭔가 돌파구가 보이겠지... 정말 겉으로는 희망이란 하나도 없어 보이는 이들이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지금까지 이렇게 꾸려가고 있지를 않은가"하는 생각이 들고 그러면 마음을 좀 편하게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서울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그 구호는 그들의 자존심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북한사람들의 자존심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자존심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한번 생각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고르바쵸프의 등장과 소련의 개방정책, 그리고 그로 인한 사회주의 맹주인 구 소련의 붕괴, 그리고 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시작된 동구 공산권의 붕괴에도 굳건히 사회주의 체제를 굳건히 고수하고 있다는데서 오는 자존심입니다. 중국마저도 시장경제체제로 편입되고있는 이 시점에서는 북한이 사회주의 국가로서 가지는 자존심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평양에서 일을 할 때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은 피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선물을 주거나 금전적인 지원을 할 때도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방법을 잘 찾아서 해야지 잘못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이 다 그렇기는 하지만 특히 남북간의 일은 상대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아주 자존심 강하고 어떨 때는 막무가내며 또 까다롭기까지 한 상대 말이죠. 같은 말을 사용하면서도 전혀 다른 사고구조를 가진 사람들하고의 일에는 "이해와 인내" 말고는 달리 무기가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방북취재를 계획하는 방송인들에게 이 말,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는 말은 꼭 해주고 싶었기에 이번 강좌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 ENG카메라 기종 선택 이제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장비, 특히 그 중에서도 카메라 준비 이야기부터 해야지요. 우선 제가 실패한 경험담부터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물론 이건 작년 8월의 상황입니다만 아마도 그사이 북한의 사정이 크게 변하지는 않은 것 같으니 그 때의 경험이 아직 유효할 것입니다. 작년 8월에 MBC에서는 이미 DIGITAL BETACAM ENG를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취재팀도 당연히 일본 SONY사의 NTSC방식 DIGI-BETA CAMERA를 주 카메라로 챙겼습니다. 그런데 정작 평양에서 일이 생겼습니다. 북한에서 촬영한 모든 화면은 그날그날 북측 안내원의 검열을 받아야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불편해 하는 장면은 아예 삭제를 하고 돌려줍니다. 주로 삭제 당하는 화면의 종류와 또 우리가 촬영한 화면을 일일이 검열을 해야하는 그들 나름의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어떤 때는 해도 정말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30분 TAPE 한 권이 몽땅 다 지워져 돌아올 경우도 있다하니 알만 하시겠지요. 그만큼 남쪽에서 촬영한 화면에 대해서 평양사람들은 민감하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평양에는 DIGITAL BETACAM ENG장비가 없다는 겁니다. 즉 우리가 촬영한 화면을 그들이 전혀 검열할 수 없었던 겁니다. 이런 상황은 그들에게는 상상도 못하는 일인데 그게 바로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진 겁니다. 안내원들이 매우 당황해한 것은 물론이고 당장 우리 취재팀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디지털 ENG카메라가 북측 안내원들과 취재팀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신을 조장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 대가는 고스란히 취재팀의 몫으로 돌아왔지요. 곧바로 취재에 비협조적인 태도로 돌아선 안내원들에게서 그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북한의 사정상 가끔 한번씩 있는 남쪽 취재팀 검열을 위해 그런 고가의 장비를 구입한다는 게 무리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팀이 디지털 ENG를 최초로 평양에 가지고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도 아무런 준비를 못했던 겁니다. 화질에 대한 작은 욕심만 앞섰지 상대방의 사정을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했던 겁니다.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에서부터 신뢰가 시작된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평양 갈 때는 반드시 아날로그 베타캄 ENG를 가지고 가시라는 말씀! 아니면 사전에 장비에 대해서 충분한 협의를 거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혹시 그 사이에 평양에서 디지털 장비를 마련했는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그리고 예비로 6MM디지털 카메라도 SONY사의 PD150으로 한 대를 준비했습니다. 6MM카메라는 북경공항을 통과하기가 쉽기 때문에 중국 공항에서 촬영거리가 생기면 요긴합니다. 또 평양에서도 여러 가지로 요긴하게 쓰입니다. ■ 북경공항 장비 통과 이제 북경공항에서의 ENG카메라 처리문제입니다. 당연히 관광비자를 소지하고서는 ENG CAMERA를 가지고 북경 공항을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북경 공항을 통해서 중국에 들어갈 때 공항 세관원에게 평양으로 출국할 때 찾아가겠다고 말하고 ENG를 맡기면 됩니다. 다행히 서울에서 도착하는 비행기와 평양의 고려민항이 같은 청사에 있어서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리고 확실한 보관증을 받아두는 일과 보관을 하는 담당세관원의 이름 정도는 만약을 위해 반드시 알아 두어야합니다. 그리고 평양으로 떠날 때 공항으로 미리 여유 있게 나와서 공항세관원에게 보관증을 제시하고 카메라를 찾으면 됩니다. 이때 출국하는 비행기 티켓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평양행 고려민항을 미리 티켓팅을 해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카메라를 다시 돌려 받는 시간은 약 15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이 어디입니까? 중국 아닙니까? 그건 우리 취재팀의 경우였고 또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까 그 시간도 충분히 여유 있게 계산해서 공항에 미리 도착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카메라를 돌려 받은 즉시 그 현장에서 파워를 켜서 작동여부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마셔야합니다. 나머지 장비는 여타의 다른 해외출장과 같이 챙기시면 됩니다. 단지 소모품들은 조금 더 여유 있게 챙겨두시는 게 좋습니다. 가령 마이크용 건전지 같은 경우도 급하게 아무 곳에서나 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오지를 간다고 생각하고 장비를 준비하시면 됩니다. ■ 평양사람들은 까뮈XO와 던힐, 그리고 사진을 좋아한다 이제는 선물이야긴데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선물은 일반 평양사람들을 위한 선물이야기는 아닙니다. 취재진과 항상 접촉하는 북측 안내원을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취재도중에 직접 평양의 인민을 만나서 선물은 주고받고 할 경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북측에서도 남쪽 취재진이 인민을 집적 접촉하거나 남쪽의 선물을 전달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안내원들에게 전달하는 선물은 물론 그들이 다 차지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의 상급자에게 대부분이 전달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물은 북한의 고위인사들이 좋아하는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 거죠. 그게 바로 꼬냑인데요, 꼬냑 중에서도 특히 까뮈를 좋아하고 또 XO급의 최고급만을 찾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XO급이라면 반드시 까뮈가 아니더라도 상관은 없는 듯했습니다. 그래도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금방 알 수 있는 유명 상표여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담배 이야기인데요, 양담배는 던힐을 특히 좋아합니다. 우리가 평양에 도착해서 안내원들과 첫 대면을 했을 때 그들은 당당하게 우리 앞에서 던힐 담배 새 것을 꺼내서 취재팀에게 권했습니다. 아마 이런 것쯤은 우리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줄려면 이런걸 달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물어봤더니 실제로도 던힐을 가장 좋아들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지고 간 선물은 한번에 다 주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머무는 기간이 8일이니까 적당히 두어번에 걸쳐 나누어주는 것이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우리가 만찬을 주최해야하기에 그때 헤어질 때도 적당한 선물이 필요합니다. 아, 그리고 평양사람들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 까다롭고 사사건건 우리 행동에 제약을 가하던 안내원들도 사진이라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좋아하는 바람에 나는 사진을 찍어주고 카메라맨은 그 사이 슬쩍 촬영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즉석에서 사진이 나오는 폴라로이드형이 더 좋습니다. 가끔은 길거리에서 만난 평양사람들과도 사진을 찍을 기회가 있는데 바로 뽑아서 주어야지 언제 우리가 다시 가서 사진을 전해줄 기회가 있겠습니까? 서글프게도 말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폴라로이드 필름은 서울에서 출국할 때 공항 면세점에서 충분히 여유 있게 구입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도 10통을 가져갔는데 3일만에 동이나버렸습니다. 그 대부분은 안내원들이 찍었지요.(여기서 말하는 안내원은 민화협 소속 사람들을 말하는데 실제로는 북한 보위부 소속 공작원들입니다) 그래서 폴라로이드 필름을 구하느라 덤으로 평양의 백화점을 두 곳이나 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파는데 필름을 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외국인 상점에서 서울보다 서너 배는 비싸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반 카메라의 필름도 충분히 가져가셔야 합니다. 쓰다가 남으면 나중에 가벼운 선물로도 요긴하게 쓰이기 때문이지요.
    2003-07-08
  • 방북취재를 위한 국내의 서류절차들
    방북취재를 위한 국내의 서류절차들 이번에는 북한 방문 취재를 허가 받기 위한 국내의 구비 서류들과 그 절차에 대해서 알아본다. 북한을 방문하는 경로는 물론 판문점을 통과하는 육로도 있고 인천과 남포를 오가는 화물선, 그리고 금강산을 통하는 방법 등이 있으나 여기서는 가장 일반적인 경우인 "북경을 경유하는 항공편"을 모델로 해서 알아보자. 1. 북한 주민 접촉승인 신청서 접수 방송사의 방북취재를 관장하는 주무부서는 통일부 교류 2과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취재진이 북한 주민과 접촉하는 것에 대해서 허가를 받아내는 일이다. 통일부 교류 2과에서 신청서 양식을 받을 수 있다. 어떤 목적으로, 어떤 경로를 통해서 누구와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접촉을 할 것인가를 미리 밝혀야 한다. 그리고 만나려는 사람의 소속기관과 직위 등에 대해서도 기록해야 한다. 하지만 사전에 이 모든 사항들을 다 알 수는 물론 없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 알고있는 상황에 대해서 만이라도 충실하게 기록하고 담당자에게 그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면 별 문제없이 승인이 나온다. 그리고 일을 진행하다보면 미리 접촉승인을 받지도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북측 인사와 연락이 이루어질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때는 접촉 후 곧바로 통일부 담당자에게 그 상황을 알려주고 '북한 주민 접촉 결과보고서'를 상세히 작성해서 통일부 교류 2과에 제출하면 된다. 2. 북측의 초청장 북측의 유관 기관에서 보내온 초청장 원본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초청장에는 누구누구를 어떤 목적으로 언제부터 언제까지 북한 방문을 초청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어야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초청하는 사람들이 북한에 체류하는 동안 그들의 '신변안전을 보장'한다는 내용이다. 말하자면 초청장은 신변안전 보장각서의 성격을 가진다. 그리고 우리측에서 인정하는 유관기관은 '민족화해협의회(약칭 민화협)' 나 '아태평화위원회'정도이다. 그 단체의 위상이 초청한 남측인사의 신변안전을 보장 할 만한 위치에 있느냐가 그 기준이다. 이 초청장만 손에 넣으면 이제 본격적인 방북 절차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을 위해 초청장 등 주요 서류는 복사본을 보관해 두어야 한다. 3. 방북신청 북측에서 보내온 초청장과 통일부에서 요구하는 서류들(사업계획서, 신원진술서등)을 통일부 교류 2과에 접수시킨다. 방북 희망일보다 공무원 근무일수 기준으로 최소 20일 전에 접수시켜야한다. 처음하면서 한번에 모든 요건을 충족시키기는 어려우니 몇 번은 통일부를 들락거릴 각오를 해야한다. 그런데 방북 경험자나 특별한 사유가 인정되는 경우에는 보다 빠른 시간내에 방북허가가 나기도 한다. 그리고 방북 예정 기간은 실제보다는 약간 여유있게 잡아두는 것이 안전하다. 이는 입북이 실제로 이루어지기까지는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물론 신청한 기간 내에 방북이 이루어지지 못할 경우에는 기간 연장의 방법도 있긴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초청장 등의 서류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그리고 신청서가 처리되는 과정에는 방송위원회의 동의 절차도 들어있다. 통일부에서 방송사의 상급기관인 방송위원회에 방북취재에 대한 의견을 구하는 공문을 발송하기 때문이다. 사전에 방송위원회 담당자에게도 그 내용을 통보해 두는 것이 일을 빨리 진행시키는 방법이긴 하지만 방북 취재의 성격상 드러내놓고 공개적으로 일을 진행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때 그때의 상황에 순발력 있게 대처하는 것 말고는 뭐 달리 길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을 미리 예상하고 있으면 최소한 당황하진 않을 것이다. 4. 방북 사전교육 통일 교육원 (서울 4.19 묘지부근 수유리 소재 통일문제연구소 내에 위치하고 있음)에서 매주 화요일마다 실시하는 방북 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교육시간은 약 4시간 정도이며 오후 1시부터 시작하기에 많이 졸린다. 그 주된 내용은 최근 남북한관계나 북한정세, 북한에서의 행동요령 등인데 들어보면 실제로 도움이 되는 내용들도 많이 있다. 내 경험으로는 방북경험자가 하는 강의는 특히 귀담아 들을 만 했다. 교육을 마치면 교육 수료증을 그 자리에서 교부하고 수료자 명단은 통일부로도 자동으로 통보된다. 그리고 교육 신청은 통일부에서 대신 해 준다. 하지만 매주 한 차례뿐이기 때문에 사전에 시간을 잘 잡아야한다. 이런 절차가 끝나면 통일부에서 방문 목적과 기간등이 명기된 "방문증명서"를 발급해 준다. 이 증명서를 손에 넣으면 이제 일이 다 되어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북경을 거쳐서 비행기로 북한을 다녀 올 경우에는 한번도 이 증명서를 요구하는 곳은 없다. 이상하게도... 하지만 이 증명서는 일이 다 끝난뒤에 통일부에 반납해야하는 중요서류다. 5. 중국 복수비자 중국 비자를 복수비자로 받아 두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중국비자는 단수로 발급되는데 반드시 복수비자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평양으로 가기 위해서 한번 중국에 들어 가야하고, 다시 북한에서 나올 때도 중국을 통과해야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행사에서 중국 비자 발급을 대신해 주지만 역시 시간을 가지고 사전에 미리미리 해 두어야 할 일이다. 이때 취재비자를 신청할 것인지 아니면 그냥 관광비자를 신청할 것인지가 상당히 고민스럽다. 중국의 경우엔 취재비자는 매우 까다롭다. 그리고 시간도 많이 걸리고 비용도 발생한다. 그리고 한번 취재비자를 발급받고 나면 그 이후로도 관광비자는 나오지 않는다. 매번 취재비자를 신청해야하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그냥 관광비자를 신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리고 이때는 중국에서의 취재는 포기해야한다. 굳이 북경 공항에서 출발하는 장면이 필요하면 6mm카메라로 처리해야한다. 하지만 관광비자를 신청할 때도 복병은 있다. 무엇인가 하면 바로 미국취재비자다. 예전에 받았던 미국취재비자가 여권에 남아있는 경우에는 중국 관광비자발급이 거부되기도 한다. 그런 일이 내겐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 뭐 달리 방법도 없다. 이런 여러 변수를 감안해서 사전에 미리 충분한 시간을 두고 중국비자문제를 해결해야한다. 6. 입북비자 이제는 북경주재 북한 대사관 영사과에서 발급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비자를 받는 일이 남았다. 먼저 북경으로 가야 하는데 입북 예정일보다는 최소한 2일정도 미리 북경에 도착하는 것이 안전하다. 고려민항은 북경공항에서 매주 화요일 오전과 토요일 오전에 출발한다. 일주일에 단 두차례 뿐이니 놓치면 3-4일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고려민항의 이런 비행 스케줄은 국제 항공시간표에는 나오지도 않는다. 아무리 사전에 북측 인사들과 약속이 되어 있더라도 비자발급에는 변수가 많다. "평양 가는 일은 기다림이다" "고려민항기가 북경공항을 이륙해봐야 그때야 정말 평양을 가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 팀을 이끌고 가는 김윤영 국장의 말이다. 김국장은 이번 평양행이 두 번째였다. 처음 그 말을 김국장으로부터 들었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는데 그 말은 정말이었다. 사실 북측의 초청장도 다 받고 통일부의 방북허가도 다 마친 상태에서 북경까지 와서 입북 비자를 못 받아서 북경에서 몇 주를 기다린 사람도 있고, 결국은 그냥 서울로 돌아간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비자도 받았는데 고려민항기를 못 타서 방북 계획이 수포로 돌아 가 버린 경우까지 있다고 하니.... 이쯤 되면 원, '평양이 뭐라고...'하는 생각까지도 든다. 입북비자는 호텔을 미리 정하고 연락을 취하면 그들이 여권을 가지고 가서 다음날 별지로 된 비자를 가지고 온다. 우리 여권에는 물론 아무런 표시도 없다. 어떤 경우에는 이 때 비자와 함께 고려민항 티켓도 그들이 직접 가지고 온다. 사진 이야기가 빠졌다. 방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권용 사진이 최소 10장은 들어간다. 미리 사진을 여유 있게 현상해서 가지고 다녀야 한다. 입북 비자를 받을 때도 사진 2장이 필요하다. 북경 갈 때 사진을 몇 장 반드시 챙겨가야 한다. 7. 고려 민항 탑승 드디어 모든 수속이 완료되면 고려민항을 타는 일만 남았다. 북경공항 신청사에 수속 라운지가 있는데 나머지 절차는 고려민항이라고 해서 별 다르지는 않다. 먼저 예약 여부를 확인하는 여직원의 말투가 방송에서 듣던 바로 그 이북 말씨다. 반갑기도 하고 마음은 벌써 평양공항에 도착한 듯한 착각에 잠시 빠지기도 한다. 그리고 짐 부치고 좌석배정을 받고.... 이런 절차를 마치면 중국 관리들의 출국심사를 마치고 고려민항에 오른다고 한다. 여기서 갑자기 오른다고 한다라고 말이 바뀌는 것은 우리는 고려민항기 바로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북경에서 가 아니라 심양을 통해서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 복잡한 사정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자.
    2003-07-08
  •  북한관련 프로그램의 기획요령과
    북한관련 프로그램의 기획요령과 북측인사 접촉과정 북한 관련 프로그램의 기획은 당연히 일반적인 경우와는 큰 차이가 난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에도 여러가지 변수가 많이 발생하는 것이 방송프로그램의 기획이지만, 특히 북한과 관련된 기획은 아직도 어렵다.여기서 아직도란 말은 김대중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고 돌아온 지가 벌써 일년이 다 되어가는 이시점 까지도 라는 말이다. 하기야 그게 애시당초 하루이틀만에 해결 될 문제가 아니었다고 자위하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분단의 시대에서 방송의 사명을 남북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상호 신뢰를 이루어 내는데 기여해야한다고 믿고있는 우리로서는 참으로 답답한 심정일 것이다. 북한관련 프로그램 기획요령이란 단적으로 말하면 돈의 문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이 불확실한 계획에 얼마나 많은 돈을 지불 할 용의가 있느냐가 방북취재의 큰 틀을 결정한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북측과의 대부분의 관계가 경제적인 문제가 주된 관건이 된건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건 민간접촉도 마찬가지며, 정부 차원의 대북 협상도 다르지 않을것이다. 식량지원, 비료지원, 경수로 문제, 금강산 관광 입장료 협상 등등...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방송도 예외일 수가 없는것이다. 남북간의 방송교류분야에서는 그런 경제문제가 개입되지 않을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사실 방송을 이해하는 남북간의 시각차이에서 발생하는 문제이기도하다. 우리는 방송의 공익성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서 남북간의 동질성회복에 기여하는 방송이라면 멀리보면 우리 민족전체의 문제이지 남북한, 어느 일방의 문제이거나 어느 한쪽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사안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있다. 그렇기 때문에 돈과는 별개의 문제로 접근하려한다. 하지만 평양에서 볼 때는 사정이 다르다. 우리의 이런 접근은 평양사람들에겐 통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방송교류 역시 하나의 대남사업일 뿐이다. 사업이란게 뭔가? 이익을 남기자는게 아닌가? 돈을 벌자는 말이다. 그래도 북한이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만 남북간의 방송교류를 열어 두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냉전적인 사고일 것이다. 물론 그들 나름으로는 민족의 장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을 것이고 방송교류도 그런 차원의 속깊은 계산도 있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에겐 돈, 즉 달러가 필요한것은 사실이다. 최근의 악화된 경제사정과 군비, 식량난등의 산적한 경제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달러를 벌어들이는 것 뿐이다. 알다시피 북한은 극히 폐쇄적인 경제다. 즉 대외교역이 별로 없는 자족자급형 경제를 운용해 왔기에 국내 경제기반이 붕괴되었을 경우 외부에서 자금을 끌어 들일 방법이 없다. 그래서 외화벌이꾼들이니 하는 말들이 생겨났다. 그것은 비 정상적인 방법으로 달러를 번다는 뜻이다. 러시아 벌목공들의 마약밀매사건, 심지어는 북한의 대외주재 외교관들까지도 마약거래를 한다고 한때 의심받았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을 길게 설명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북측의 인사를 접촉했을 때 그들이 자본주의 시장경제 아래 살고있는 우리보다 더 돈 문제에 집착하는 배경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들과 터놓고 대화를 할 수 있다. "우리는 달러가 필요해요" "아, 달러가 있어야 인민을 먹여 살릴 수 있잖아요? 안그래요?" "어차피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하는 동포 아닙니까? 그러니 돈 많은 남쪽에서 미리 도와주시라구요" 그들이 이렇게 당당하게 말해 올때 당황하지 말아야 한다. 아마도 이건 그들의 진심일 것이다. 그리고 일의 순서가 좀 바뀌었는데, 어떻게 북측 인사와 접촉하는가가 문제다. 우선 통일부를 두드려야 한다. 통일부 교류 2과에서 언론사의 대북 교류를 관장한다. 먼저 "북한 주민 접촉 신고서"를 내서 사전 신고를 해야 한다. 시간이 없으면 사후 보고도 가능하지만 통일부와의 신뢰 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 사전 신고가 더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접촉 대상을 찾느냐하는 문제인데... 그건 좀 사실 까다롭다. 일반적으로 정해진 통로가 없다는 뜻이다. 즉 그때그때 방송사마다, 담당자 마다 각자가 루트를 개척해야 한다. 하지만 애초의 길은 대게 두 세 가지가 아닐까 한다. 먼저 한가지는 북한과의 다른 교류사업을 하고 있던 사업자가 북한을 왕래하는 과정에서 그쪽의 인사와 신뢰가 두터워지다보면 자연히 대북관련 다른 분야로의 영역 확장을 꿈꾸게 된다. 이때 그들 사업자가 우리 언론사들의 북한현지 제작에 대한 갈증을 알고서 먼저 자신이 중간에서 이 일을 성사 시키겠노라고 제의를 해 오는 경우다. 실제로 북한 관련 프로그램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으면 심심찮게 주변에서 이런 저런 제의를 해 오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이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다 믿으면 안된다. 그들은 사업가들이기 때문이다. 사업하는 사람들의 일하는 자세에 대해서 뭐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확실성 보다는 가능성에서 일을 출발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중 팔구는 성사가 어렵다. 하지만 출발은 다 그런 모양이다. 그들을 박대하지말고 양쪽의 조건을 타진하고 협상을 진행하다보면 자연히 길이 생겨나지 않을까? 옛말에 어느 구름에 비올지 모른다고 했던가? 대북관련 일에서는 끈기가와 인내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덕목일것이다. 다음 하나는 활발히 민간차원에서 북측과 인도적인 교류를 하고 있는 단체의 도움을 받는 길이다. 이들은 이미 상호신뢰가 확보되어있기에 일을 성사시키는 빠른 방법 중의 한가지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공동사업을 한다면 비용도 일정부분 절감되기도 한다. 가령 '우리민족 서로돕기운동본부' 또는 '어께동무' 그리고 각종 의료지원 사업단체나 식량지원단체들이 그들이다. 그리고 이런 방법들도 있다. 이미 방송교류를 하고있는 팀으로부터 매개인을 소개받는다든지 아니면 통일부 담당자에게 접촉방법을 직접문의 해 보는것도 역시 길을 찾는 방법들 중 한가지일 것이다. 자, 이제는 북측에서 부담없어하는 프로그램과 열어주기를 꺼려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물론 그런 부분들이 항상 일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시의 남북관계 그리고 북한 내부의 사정등 매우 복잡한 함수관계속에서 일이 결정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공통점은 있는 듯 하다. 우선 정치적인 문제 즉, 북한의 지도체제를 언급하는 것은 당연히 거절한다. 다음은 아마도 이산가족문제일것이다. 이건 나도 의외였다. 상상 밖으로 강하게 거부하는 데서 무척 놀라기도 했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거기에도 이유는 있을 법하다. 뭔고하니 바로 이산가족의 문제는 그 이산의 책임으로 연결되고 이는 곧 한국전쟁의 책임론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이산가족이 서로 껴안고 울고불고 하는 모습에서 당연히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이 연상되는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부담 없어 하는 분야는 단연 비정치적인 것들로 자연다큐멘타리나 명승지 기행, 역사 관련프로그램들이 아닌가 한다. 우선 첫 강좌는 부족하지만 이것으로 마치고 다음 강좌에서는 "방북을 위한 국내서류 절차와 준비과정"을 이야기 할까 합니다.
    2003-07-08
  • 고이즈미 내각의 신 탈아입구(脫亞入毆)론
    임병걸 도쿄 특파원 1.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의 탈아론(脫亞論)과 고이즈미의 개혁론(개혁론) " 오늘날 우리나라는 이웃 나라의 문명개화를 기다려 함께 아세아를 부흥시키려하지 말고 아시아를 벗어나 서양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 해야 한다. 나쁜 벗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함께 악명을 면하기 불가하니 우리들은 마음가짐부터 아세아 동방의 나쁜 벗을 사절(謝絶)해야 할 것이다." 1885년(메이지 18년) 3월16일 시사신보 후쿠자와 유기치 1853년 요코하마에 도착한 당시 미국의 동인도 함대 사령관 페리는 4척의 함선을 거느리고 미국 대통령 필모어의 국서를 제출하고 일본의 개국을 요구한다. 이미 쇠락한 도쿠가와 바쿠후는 전함의 위력에 주눅이 들어 이듬해인 1854년 이른바 미-일 화친조약을 맺고 시모다와 하코다테 항을 개항하고 이어 1858년 미일 통상조약을 맺게 된다. 미-일 화친조약을 조약을 계기로 외부로부터의 개혁을 강요당한 일본은 안으로 존황양이(尊皇攘夷)와 화혼양재(和魂洋才)를 기치로 내걸고 막부 타도와 천황중심의 근대입헌 국가로의 변신을 추구한다. 이 과정에서 후쿠자와 유기치와 니시 아마네, 가토 히로유키,니시무라 시게키 등 이른바 일본의 선각자들은 단순히 정부조직과 법률의 서구화 뿐만 아니라 문화와 생활관습, 사고방식 까지도 서양화 할 것을 촉구하는 이른바 '문명개화'를 주창하고 나섰다. 그러나 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후쿠자와의 서구화에 대한 추종은 도를 지나쳐 일본은 아예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화 한 몸이 되야 한다는 탈아입구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이런 주장은 후일 일본이 청일전쟁과 한일합방 등을 통해 아시아를 동반자가 아닌 침략과 수탈의 대상으로 삼고 대륙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게 된다. 당시의 외무장관을 역임한 이노우에 가오루 역시 제도뿐 아니라 국민들의 생활과 문화까지 철저히 서구식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이른바 구화주의(歐化主義)를 주창해 저 유명한 로쿠메이칸(鹿鳴館) 이라는 서양식 무도관이 도쿄 황궁 바로 옆 히비야 거리에 등장하게 된다. 서양식 드레스와 모자를 쓴 일본의 귀부인이 요한 스트라우스의 왈츠에 맞추어 무도회를 즐기는 모습은 서구화의 상징인 동시에 피폐한 백성들에게는 비아냥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어쨌던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근대화, 서구화에 성공했고 팽창의 에너지를 아시아로 분출해 주변국을 무차별 집어삼키는 탐욕스런 제국주의 국가가 돼 갔다. 그러나 2차 대전을 계기로 일본은 근대화의 모델이자 은인이었던 미국과 식민지를 둘러싼 이해관계의 충돌로 한바탕 격전을 치르게 됐고, 그 와중에서 아시아 국가들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후쿠자와 유기치가 탈아입구의 열변을 토했던 때로부터 116년, 일본에 다시 탈아입구론의 기치가 서서히 올라가고 있다. 쇠락해 가는 집권 자민당의 발복색원을 기치로 들고 나온 고이즈미는 도쿠가와 바쿠후를 타도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후쿠자와처럼 자민당을 개혁하고 매너리즘에 빠진 관료와 거대공룡 공기업 집단을 개혁해 일본을 새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메이지 유신에 버금가는 신 유신을 주장하는 고이즈미는 오랜 불황과 정치적 무능에 신물이 난 일본인들에게는 신천지의 복음을 전하는 메신저로 다가왔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일본열도는 열광하고 있다. 역대 총리 가운데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고이즈미는 과연 한세기 만에 부활한 후쿠자와 유키치인가? 공교롭게도 4월27일 취임한 이후 그의 석달 간의 행적은 아시아를 멀리하고 미국과 유럽에 다가가는 '탈아입구'의 묘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2. 친미외교로 일관한 고이즈미의 첫 미-일 정상회담 지난 6월30일 미국 매릴랜드 주에 있는 부시대통령의 별장 캠프데이비드. 부시 대통령이 선물로 준 가죽 점퍼를 입고 부시대통령과 야구공을 주고 받으며 파안대소하는 고이즈미 총리의 모습이 일본 텔레비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취임 이후 처음 미국을 방문하는데다 외교무대에서의 능력을 검증받은 바 없는 고이즈미 총리여서인지 일본언론들은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스포트라이트를 맞추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모두(冒頭)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 60년 미-일 안보조약개정 때 당시 외무위원장이었던 아버지가 이를 반대하던 데모대 앞에서 조약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새롭게 생겼다. 이후 나는 일관되게 일본에 있어서 미국과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해 왔다. 일-미관계가 다소 악화돼도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 보전되면 되지 않나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있을 수 없다. 일-미 관계가 좋으면 좋을수록 다른 나라와의 관계도 좋아질 것이다." 아무리 미국과의 친근감을 과시하려 했다고 이해하려 해도 일국의 총리로서는 낯 간지러운 언사가 아닐 수 없다. 미국과의 관계가 좋으면 좋을수록 다른 나라와의 관계도 좋다니, 마치 미국은 자국의 이해에 따라 움직이는 나라가 아니고 무오류의 전지전능한 국가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고이즈미는 한술 더 떠 1854년 미-일 화친조약과 제2차 세계대전을 언급했다. " 일본은 최초에는 외국으로부터 영향에 반발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잘 받아들였다"." 미국이 관대함과 정의감을 가지고 일본에 접근한 것이 일본인의 친미관의 근저를 이루고 있다 ". " 전쟁에서 패한 후 일본국민은 미국의 노예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은 관대하게 대접해 주었고 식량도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일본국민들은 미국이 일본을 구 일본군에서 해방시켰다는 감정이 강하다 " 고이즈미의 이런 발언이 알려지자 일본 언론들은 지나친 친미, 사대적 발언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아사히 신문은 7월2일자 워싱턴발 기사에서 솔직성이 지나친 친미관의 표명이라고 지적하고 고이즈미 류의 외교에 위험성을 보여주었다고 비판했다. 야당도 비판에 가세해 간 나오토 민주당 간사장은 일본에 있어서 미국은 여전히 성역으로 남아있으며 구 자민당과 전혀 변한 것이 없는 셈이라고 혹평했다. 시이가즈오 공산당 위원장도 미국 추종외교로 시종일관 했다고 비난했고, 도이 다카코 사민당 당수도 일본이 미국의 종속변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재삼 확인한 회담이었다고 폄하했다. 미국에 지나치게 유화적인 모습을 보인 현안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교토의정서 비준문제다. 지난 6월30일 캠프데이비드에서 있는 부시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이 미국의 의사를 무시하고 교토 기후협약 발효에 앞장서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교토협약은 1997년 168개국의 서명으로 일본 교토에서 체결된 국제 기후협약이다. 선진국의 과도한 에너지 사용과 유해 가스 배출로 지구 온난화 현상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지구촌 곳곳에서 기상이변이 일어나는가 하면 오존층의 파괴 등으로 전지구적인 생태계의 위협이 일어나자 전 세계국가들이 유해가스 배출을 줄이자고 합의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 협약의 이행 시기가 다가오자 미국의 막강한 석유재벌과 대기업의 압력을 받은 부시 정권은 이 조약을 보완해야 한다며 전격 탈퇴를 선언했다.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 이산화탄소이고 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기준으로 보면 미국은 1999년 현재 15억2천만톤으로 단연 1위를 차지하고 있다. 2위인 중국의 두배, 3위인 러시아의 4배나 배출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탈퇴를 선언할 경우 이 조약은 사실상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교토 의정서는 온난화 유발가스의 55%를 방출하는 55개국 이상이 비준할 경우 법적 구속력을 갖기 때문에 일본이 러시아와 유럽 국가들과 보조를 맞춘다면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협략은 효력을 발휘한다. 따라서 협약의 발효에 있어서 일본의 입장은 매우 중요하다. 일본내 여론과 유럽 등 다른 선진국의 입장을 고려해 협약 비준에 전향적이었던 일본 정부였으나 막상 고이즈미 총리는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탈퇴 입장을 이해한다 쪽으로 선회했다 출국전 기자회견에서 " 미국을 설득하지 못하다면 발효를 위한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고 사뭇 비장한 태도를 보이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공해 문제에 대한 규제라면 둘째가 서러운 일본이 개도국의 수입품에 대해서는 가혹한 기준을 적용하면서 미국의 으름짱에는 순순히 장단을 맞추는 꼴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지구상의 온갖 자원과 에너지를 가장 헤프게 쓰며 인류 사상 최대의 풍요를 구가하고 있는 미국이 에너지 사용과 이에 따른 유해가스 배출을 줄이지 않는다는 것은 지구 경찰을 자처하는 엉클 샘으로서는 비신사적이고 이기적인 행위다. 부시 대통령의 교토의정서 탈퇴선언 직후 일본의 국회의원들이 연명으로 미국의 주요일간지에 의견광고를 내 미국정부를 비판했던 당당함과, 교토 회의의 의장국으로서 환경 친화적인 선진국의 모습을 과시했던 일본의 입장을 떠올려 보면 고이즈미의 외교 행보는 친미 사대라는 비판도 나올법 하다. 3. 한국과 중국에는 오만한 일본 고이즈미의 대미 정책이 지나칠 정도로 유화적이고 우호적이라면 그의 등장 이후 한국과 중국 등 이웃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정책은 지나칠 정도로 오만하고 강경하다. 지난달 초 일본의 문부과학성은 한국과 중국 정부가 공식 요청한 후소샤의 역사교과서를 비롯한 역사교과서의 재수정 요구에 대해 사실상 전면 거부의사를 밝혔다. 표면적인 이유는 한국과 중국이 지적한 부분이 사실의 오류가 아닌 역사 해석의 문제이고 역사관이나 해석의 다양성에 대해서 일본정부는 집필자에게 수정을 강요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도오야마 문부과학성 장관은 동일한 항목에 대해서 만일 중국과 한국이 재수정을 요구해 온다면 더 이상은 응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고, 고이즈미 총리 역시 재수정 의향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여러 가지를 생각해서 결론을 내린 것인 만큼 더 이상의 수정은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른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라는 우익 아마추어 학자와 만화가 등이 만든 교과서는 철저히 일본 우월주의와 황국사관에 입각해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일본의 식민통치와 아시아 침략을 미화하고 군국주의가 저지른 범죄를 은폐하는가 하면 일본의 재무장을 공공연히 주장하는 위험한 교과서다. 이런 교과서가 버젓이 일본 정부의 검정을 통과하고 전례가 없었던 일반인 상대의 대대적인 시중 판매를 하는가 하면 교육일선에서 이 교과서를 채택시키기 위한 대 의회 청원과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한 압력과 로비 활동도 벌어지고 있다. 이 교과서의 위험성을 감지한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와 지식인, 시민단체와 교사 학부모들조차 교과서의 오류를 지적하고 불채택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점만 보아도 이 교과서의 검정 통과와 재수정 거부라는 일본 정부의 결정이 얼마나 아시아를 무시하는 행위인지를 짐작케 한다. 이 교과서의 등장은 지난 94년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범죄를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 이후 일본 정부의 과거사에 대한 공식입장을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고, 2차 교과서 파동이후 일본이 막대한 피해를 입힌 아시아 국가에 약속한 이른바 교과서 기술에서의 '근린조항'을 사문화 하는 무책임한 행위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재수정 거부 이후 비등하는 한국과 중국의 분노와 잇단 제재조치 발표에 대해 대수롭지 않다는 듯, 8.15 신사참배 이후 관계 개선을 모색하겠다는 느긋한 입장으로 일관하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공언도 대표적으로 아시아를 무시하는 일본 외교를 상징한다. 고이즈미 총리는 지난 4월 총리 선거에서 느닷없이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공약으로 들고 나왔다. 야스쿠니 신사는 도조 히테키를 비롯해 전쟁을 일으킨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있는 곳으로 일본 우익의 성역과 같은 곳이며 군국주의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곳이다. 이런 상징성 때문에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은 정치인과 관료의 참배 금지를 요구해 왔고 일본 역시 피해를 입힌 주변국에 대한 최소한의 사죄 의미로 관료들의 공식 참배를 자제해 왔다. 그러나 지난 85년 나카소네 총리의 참배와 96년 하시모토 총리의 참배에 이어 해가 갈수록 관료들과 의원들의 참배는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다. 다만 주변국의 비난을 의식해 이들은 총리나 관료 등 공식적인 자격이 아니라 개인적인 자격의 참배임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새 총리에 취임한 고이즈미 씨는 "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심정으로 국가를 위해 희생한 전몰자에 대한 애도를 표하고 싶다"는 지극히 정서적인 차원의 이유를 대면서 신사참배 강행을 공언하고 있다. 고이즈미의 본질을 흐리는 이런 참배의 변은 논리적으로도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앞서 부시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정의와 관대의 상징 미국이 일본을 구 일본군에서 해방시켜주었다고 했는데 일본을 질곡으로 몰아넣었던 구 일본군을 애도하기 위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겠다니 이 무슨 궤변인가? 고이즈미 총리는 한술 더떠 참의원 선거를 앞둔 지난달 당수간 토론회에서 " 일본인의 감정으로 인간은 죽으면 모두 신이 된다. 전범들도 모두 사형을 받음으로써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닌가, 왜 다른 사망자와 구별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해 파문을 일으켰다. 마이니치 신문은 그의 이런 발언이 일본의 전쟁책임을 부정하고 A급 전범 들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면 신사참배 중지를 요구했다. 야스쿠니 참배의 자제를 통해 일본은 과거 깊은 상처를 안겨 준 수많은 주변국가에 대해 최소한의 사죄를 한다는 의미, 혹은 신사참배가 가져오는 주변국의 분노를 애써 외면하는 고이즈미 총리의 참배 강행은 아시아와의 외교마찰도 불사하겠다는 배짱으로밖에 비쳐지지 않는다. 이밖에도 일본은 한국과 러시아가 국제 법과 관계에 따라 맺은 남 쿠릴 열도의 꽁치잡이 어업협정을 일본의 영토주권을 무시한 행위라며 트집을 잡고 있다. 중국에 대해서는 지난 4월23일 대파와 표고버섯, 다다미 재료 등의 농산물에 대해 고율의 관세를 물리는 세이프 가드를 발동했다. 거듭되는 중국의 재고 요청과 협상 요구에도 철저히 무시로 일관하던 일본은 분노한 중국이 일본산 자동차와 냉장고 휴대전화에 대해 전격 보복관세를 물리자 허둥지둥 협상테이블에 앉겠다고 나서고 있다. 한국산 폴리에스테르와 방울 도마토 등에 대해서도 여차하면 세이프 가드를 발동하겠다고 으름짱을 놓고 있다. 최근 방위청이 내놓은 일본의 방위백서에서는 중국의 미사일 증강과 일본 해역에서의 중국 함정 활동 등을 자세히 적시하면서 중국의 군사적 팽창을 아시아의 안보 위협 요인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미국의 MD 구상이나 미국의 대중국 위협론, 미국의 일본에 대한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촉구 등 일련의 미-일 군사 동맹 강화 역시 중국을 가상 적으로 겨냥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고이즈미 총리가 그의 공언대로 중국과 한국의 요청을 무시하고 8월15일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강행한다면 오는 10월로 예정된 고이즈미 총리의 중국방문도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한국 방문도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방문 이후 두나라 정상은 한해씩 번갈아 가며 상대국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갖고 있으며, 올해는 일본 측에서 방한할 차례이다. 그러나 정작 고이즈미 총리는 취임 석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언급이 없다. 오랜 불황의 늪에 빠진 일본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고이즈미 총리, 성역없는 개혁과 구태의연한 파벌정치의 타파를 외치는 그는 확실히 일본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신선한 지도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고이즈미 총리가 대중들의 인기에 도취돼, 주변국의 존재를 무시한 일방통행식 외교정책을 편다면, 아시아 국가와의 공존공생을 무시하고 친미 일변도의 외교정책을 펼쳐 나간다면 이는 일본을 위해서도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많은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경고하듯 이런 일본의 우경화는 일본의 국제적 고립을 자초할 수 밖에 없고 일본의 고립은 결국 아시아의 불행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110년 전 일본에 불었던 탈아입구의 열풍이 정말 일본에 다시 불 것인가?
    2003-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