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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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사회과학의 위기와 영상기자
    인문사회과학의 위기와 영상기자  인문학의 위기, 사회과학의 위기라고 한다. 순수학문 즉, 취업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학문들은 문과와 이공계를 막론하고 고사 지경에 이르고 있는 것이 지금의 대학현실이다. 20-30년 전만 해도 대학의 중심에 서있던 인문사회과학의 다양한 학과들이 소수의 소위 돈 되고 출세하는 학과만을 남기고는 모두 사라질 위기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학과들은 살아남기 위해 학생들을 손짓할 수 있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과명을 바꾸기도 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대학의 현실은 이미 돈과 편리 중심으로 사고되는, 사회적 대세가 그대로 반영 된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좀 더 근본적이고, 원칙적인 것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복잡하고 귀찮고, 낡은 것이 되어가는 분위기다. 서점을 나가보면 진지한 교양서적 보다는 실용서가 판을 치고, 우리의 삶과 문화, 역사를 담은 소설 보다는 가볍거나 아니면 외국에서 흥행에 성공해 국내시장에서의 실패가능성이 적은 번역서가 판을 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을 어려운 시대 수많은 사회적 현상들 중 하나라고 그냥 넘겨 버리기도 쉽지만, 이 현실이 곰곰이 따져보면 영상기자 우리자신과도 알게 모르게 큰 관련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치 않다.  작년 필자는 보도영상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보도영상의 역사를 정리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인간의 표현, 기록, 소통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따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영상매체가 등장하기까지 인간의 역사가 만들어 온 다양한 표현매체와 그것들이 인간의 삶과 사회에 미친 영향들을 역사적으로 이들을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영상매체가 발전해 오면서 걸어야 했던 질곡과 발전의 길, 그 길을 걸었던 많은 영상전문가들과 영상기자들의 삶의 문제가 글을 써갈 수록 꼬리에 꼬리를 물어, 역사와 사회의 발전 역사 속에서 보도영상의 문제를 고찰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와 고통의 글쓰기를 수행하며 느낀 점들은 이런 작업들이 사회적으로 폭넓은 사람들의 다양한 고민과 관심 속에 이루어진다면 우리 분야의 발전이 좀 더 확고해 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작업을 취재현장과 방송현장에 서있는 영상기자들이 직접 담당한다는 것은 ‘몇 사람의 의지를 통해 일시적으로는 가능하겠지만, 지속적으로 연구 작업을 해나가고, 체계화하기에는 역부족이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이 작업을 체계적으로 해나갈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굴까? 바로 세상의 문제를 학문적 깊이로 연구해낼 수 있는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호기심과 상상력을 가진 학자들과 수많은 동호인들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미 세상은 그런 학문적 호기심과 상상력, 열정을 가진 젊은이들이 그 세계로 발을 디뎌 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소위 ‘취업’이라는 경제적 현실을 통해 막아 놓아 버렸다. 부모나 사회 모두 ‘취업’과 ‘돈’이라는 물질적 주제를 우리의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고, 거기에 이미 아이들은 오염되어 가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대학을 갓 들어오는 신입생들과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인간과 사회 같은 거창한 주제도 어릴 적의 순수하고 진지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영상의 역사나 영상기자, 뉴스영상 한 컷의 사회적 가치가 자신의 인생을 걸어볼 만한 독창적인 연구나 학문의 주제로 보일 리가 없다.  이런 인문사회과학이 붕괴되는 현실이 빠르게 진행되다 보면 어느새 우리 영상기자는 박제된 공룡의 모습으로 남게 될 운명을 갖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밀려온다. 작년 보도영상의 역사를 정리하며 놀란 점 중 하나는 외국의 경우 영상기자들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고, 그들이 보도한 영상과 그 사회적 영향에 대한 기록과 연구도 언론학의 한 분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현실을 만나는 것이었다. 또 어떤 나라에서는 이런 현실들을 정리해 <영상학>이라는 학문적 영역을 개척한 사례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로 눈 돌려보면 어떨까? 40년 영상기자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언론사와 저널리즘 분야에서 공식적으로 기록되고, 연구되어지는 영상기자들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그걸 떠나서라도 오늘 나온 영상의 의미에 대한 사내와 사회의 올바른 비판과 비평, 평가를 받아 보는 영상기자들이 얼마나 있을까하는 ‘불편한 현실’의 문제를 떠올려 보게 된다.  인문학, 사회과학적 상상력과 고민들, 새로운 피의 수혈이 사라져 가는 사회의 슬픈 자화상을 우리 영상기자의 우울한 미래까지 연결시키는 것은 옛날 어느 나라의 노인네가 하던 세상걱정과 같은 기우(杞憂)는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늘어나는 영상기자들의 1인 취재, 제작물들이 잘 다뤄지지 않고 있는 이런 현실들에도 눈높이를 맞추어 보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나준영 / MBC 탐사스포츠영상팀 차장
    2007-07-19
  • Re:노젓는 판사
    아! 그때 핸드폰 정말 잘 사용하였읍니다. 그때 잠시나마 문명에서 벗어난 느낌이었지요. 신발도 없이 가시밭길(?)을 30여분동안 걸어가다가 간신히 전화기를 빌렸지요. 그날 취재 후유증이 심했어요. 발바닥이 아직도 얼얼합니다. 다시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합니다. 안녕히계세요.
    2007-07-11
  • 포토라인 준칙 제정1년, 현장 적용의 현실과 문제점
    포토라인 준칙 제정 1년, 현장 적용의 현실과 문제점  2006년 8월 31일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 한국사진기자협회, 한국인터넷기자협회는 포토라인 시행준칙의 내용을 확정해 선포했다. 이것을 선포한 이유는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과열된 취재현장의 질서를 조정하기에, 1994년에 한국TV카메라기자회와 사진기자회 두 단체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포토라인 운영 선언문>만으로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행 준칙도 현장적용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고, 1년여를 지난 지금 이에 대한 점검과 재정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시행준칙’에 대한 영상기자들의 광범위한 인식 성공  ‘포토라인 시행준칙’이 공식적으로 공표되고, 실시되면서, 이에 대한 영상기자들의 인식은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인지는 부족하더라도 ‘시행준칙’의 제정에 대한 영상기자 개개인의 인지는 광범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취재현장에서 무질서한 경쟁체제가 있을 경우 ‘시행준칙’을 근거로 즉석에서 ‘포토라인’을 적용하고, 실행한 사례가 여러 건 있었다. 현대 정몽구 회장의 항소심공판 취재(2007.3.27), 병역특례법 위반 관련 가수 싸이의 동부지검 출두(2007.6.4) 등이 포토라인이 잘 지켜진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협회 중심의 ‘포토라인’적용은 아직 미흡  하지만, 애초의 ‘시행준칙’ 제정 시의 의도와는 달리 새로운 준칙에 따른 포토라인 제도의 실행은 각 협회가 아닌 기자실을 중심으로 이루이지고 있다는 문제를 갖고 있다. 출입기자단이 중심이 되어 포토라인이 잘 시행되는 것은 좋지만, 이에 대한 협회의 파악과 실상에 대한 자료축적이 불가능하다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다양한 영상제작자들과 취재원에 대한 홍보작업 부족  그리고 ‘시행준칙’이 제정된 이후 세 협회의 홍보작업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지만 아직까지 많은 취재원들이 이에 대해 인지하는 것은 많이 부족한 상태이다. 이런 문제는 포토라인과 관련해 취재현장에서 영상기자에 대한 취재원의 취재거부 사태, 취재 방해로 인한 취재원과의 극한 갈등이 표출되는 경우를 발생시키기도 하고 있다. 이로 인해 취재원보호의 애초 취지를 벗어나는 결과들이 발생하기도 하고 있다.     또한, 세 협회에 소속되지 않은 영상기자나 영상제작자들의 포토라인 시행준칙에 대한 무지로 인해 포토라인이 깨지는 상황도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 5월 29일 있었던 깐느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자 영화배우 전도연의 인천공항 입국 현장에서의 난장스러운 상황이다. 협회 중심의 ‘포토라인’실시와 광범위한 홍보작업 필요  포토라인의 특성상 예고된 상황의 실시가 다수의 경우를 점하고 있다. 따라서 예고된 상황의 ‘포토라인’ 설치와 운영을 협회와 상의하고 기획하고 실시하는 것이 절실하며, 이 제도가 정착하기 위한 협회의 꾸준한 실태파악 작업이 있어야 한다. 또 ‘포토라인 시행준칙’에 대한 회원과 회원이 속한 매체사들, 비회원, 취재원등에 대한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홍보작업도  필요하다고 본다. 정부와 방송언론 유관기관의 재정적 인적 지원 절실  이 제도가 성공하기 위한 관건은 이를 협회와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실행하고 감시할 인원과 그들을 유지할 수 있는 재정적 지원이다. 이를 위해 정부와 방송언론 유관기관들이 각 협회에 새로운 취재질서와 인권보호를 위한 중요한 제도로서 포토라인 제도가 정착되도록 인적으로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하겠다. 영상기자 스스로의 노력이 가장 중요한 관건  지금까지 살펴 본 ‘포토라인 시행준칙’ 제정 1년이 갖는 의미와 현실들에서 얻는 중요한 경험은 이 제도가 시대와 역사의 산물인 만큼 그것을 잘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영상기자들이 가진 방송언론인으로서의 중요한 사명이자 임무라는 것이다. 결국, 영상기자 스스로 포토라인 시행준칙이 필요 없게 되는 상황이 올 수 있도록 취재현장에서 취재원의 보호와 국민의 알권리를 절묘하게 절충시키기 위해 스스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나준영 / MBC 탐사스포츠영상팀 차장
    2007-06-26
  • <줌인> 누구나 찍는 동영상시대의 카메라기자
    누구나 찍는 동영상시대의 카메라기자  요즘 국민의 관심사를 취재하는 취재현장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취재현장에서 취재기자(카메라기자, 사진기자포함)들의 수가 늘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 것은 2000년 이후 케이블TV와 인터넷매체의 수가 늘면서부터였고, 지금은 웬만한 행사장의 참석자보다 취재진이 많아 행사진행에 지장을 줄 정도로 각종 매체와 취재기자의 수가 많아졌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메이저 방송, 신문이나 인지도가 낮은 매체나 똑같은 조건에서 취재를 하고, 각자 차별화된 영상취재를 위해 카메라의 위치를 옮기고, 다양한 앵글로 영상취재를 하고, 취재원에게 다양한 포즈와 인터뷰를 요구하기도 하면서 선의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인 영상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기에 역부족인 것은 좁은 공간에서 너무도 많은 카메라기자들와 사진기자들이 취재에 임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몇몇 신문사의 취재기자나 사진기자들이 기사취재와 사진촬영이 끝나면 자사웹사이트에 동영상콘텐츠 제작을 위한 동영상촬영을 추가적으로 하는 경우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독자들에 대한 서비스차원에서 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취재현장의 분위기와 인터뷰 등을 촬영하고 편집하여 자사사이트에서 동영상 서비스를 하고 있는 것이다. 기사와 동영상서비스가 되는 기사의 히트수가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것을 보면 동영상서비스에 대한 독자들의 선호도가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문에서 한 컷의 사진으로 승부하던 사진기자들이 더 이상 스틸사진에만 전념할 수 없게 만드는 환경이 된 것이다.  신문 1면 사진 1컷을 위해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촬영하던 사진기자들이 사진뿐 아니라 동영상까지 촬영하고 편집해야 하는 멀티플레이어로 역할을 요구받고 있으며, 짧은 취재시간에 본연의 임무에 추가적으로 부여된 동영상촬영을 하느라 이중고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취재기자나 사진기자들의 동영상서비스의 수준이 아직은 UCC동영상 수준이고 앞으로도 보조적인 서비스에 그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카메라기자들에게 그리 크게 위협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취재환경의 변화에 따라 카메라기자들은 본연의 업무인 영상취재를 위해 필요한 피사체와의 적절한 거리유지와 가장 중요한 한 장면에 온갖 신경을 쓰면서 또 한편으로는 여기 저기 불쑥 들이미는 6mm카메라의 돌출행동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취재현장에서의 보다 좋은 화면을 잡기 위해 카메라기자와 사진기자들이 맺었던 신사협정인 PHOTO LINE은 이런 복잡하고 무질서해진 취재현장에서는 애초에 적용되기 힘들어졌고, 각각 경쟁적으로 취재에 임하다보면 모두 함께 좋은 영상을 얻기 어려운 아수라장이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사회적으로 관심이 집중된 취재 현장일수록 피사체에 근접해서 ENG카메라와 스틸카메라, 캠코더를 들이 대다보면 취재원들이 카메라에 부딪쳐 다치기도 하고 취재현장의 분위기는 온갖 몸싸움과 욕설이 난무하기도 한다.  자신만 좋은 영상을 얻고자하는 이기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취재원에 접근하다보면 모두 제대로 된 화면을 얻기 힘들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물론 사건, 사고의 경우 취재진들과의 몸싸움으로 흔들리는 화면이 긴박감을 더해주기도 하지만)  취재현장에 맞게 PHOTO LINE과 POOL을 적절히 활용해서 모두가 최고의 영상을 얻을 수 있어야할 것이다. 보다 나은 취재를 위해 취재현장에서의 취재의 룰과 에티켓이 필요하다고 본다. TV카메라기자회, 사진기자회, 인터넷매체 등과 이러한 현장취재에 있어서의 보다 바람직한 취재를 위한 논의가 이뤄져 취재현장에서의 무질서가 없어져 취재진들도 품위를 지키며 취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러한 취재환경에서 각 방송사별로 다양한 심층취재와 기획취재를 활발히 함으로써 카메라기자와 취재기자의 기량을 신장시킬 수 있고, 자신만의 색깔과 역량을 담은 TV만이 보여줄 수 있는 영상을 시청자들에게 서비스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진기자들의 동영상과 UCC들의 동영상과 비교될 수 없는 카메라기자들의 노하우가 녹아있는 뛰어난 영상미와 감동을 줄 수 있는 고품질의 TV영상으로 승부해야만 할 것이다.
    2007-06-26
  • 남북정상회담 그 날의 감동 - 각본 없는 드라마
    남북정상회담  그 날의 감동 - 각본 없는 드라마  얼마 전 남북철도 시험운행이 있었다. 철마가 그토록 달리고 싶어 했던 그 길을 달린 것이다. 하늘 길, 뱃길 ,육로에 이어 마지막으로 철길이 열린 것이다. 이번 시험운행이 일회성이라는 비난을 피할 순 없겠지만, 56년 만에 민족의 혈맥이 이어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뉴스특보로 생방송되는 남북철도기념식을 보면서 나는 어느새 그 날의 감동을 느끼며 2000년 6월 13일로 돌아가 평양행 특별기에 오르고 있었다. 2000년 6월 13일 오전 9시 30분, 서울공항을 이륙 한지 10분이 채 안됐을 때 기장의 기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이미 북한영공으로 넘어왔습니다. 2시 방향을 보십시오. 저 멀리 보이는 곳이 북녘 땅인 웅진반도의 장산곶입니다“  반세기 만에 남북의 하늘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아 이제 북한이구나!”  우리는 창가에 몰려 북녘의 산하를 내려 보면서 잠시 감회에 젖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 잠시 뒤에 있을 감격적이고 놀라운 장면들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채 특별기는 순안공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나는 공항 활주로에 임시로 마련된 검색대에서 예상보다 간단하게 입국절차를 마치고 공항취재지역으로 이동했다. 취재 준비를 하고 있는데 동원된 군중들이 “와” 하는 함성을 질렀다. 카메라 앵글을 뒤로 돌려 군중 쪽으로 줌 인한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카메라 파인더에 잡힌 인물은 다름 아닌 김정일 위원장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실 그 당시 우리는 남북정상회담 취재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갖고 있지 못했다. 대통령 순방 취재는 출발 전에 공식 일정이 기자단에 전달돼 취재 계획을 짜고 취재팀을 나누는 게 관례인데 청와대측에서 공식적으로 기자단에 통보한 대통령의 일정이 전혀 없었다. 남북정상회담조차도 공개로 해야 할지 비공개로 해야 할지 결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방북에 참여한 합동취재단 카메라기자들은 딜레마에 빠졌었다. 과연 우리가 어떤 그림을 얼마나 찍어서 서울로 보낼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고민은 김정일 위원장의 등장으로 기우에 그치게 됐다. 드디어 비행기 문이 열리고 김대중 대통령이 모습을 나타냈다. 김 대통령은 잠시 감회어린 눈으로 북녘 땅을 바라보다가 손을 흔들었고 김 위원장과 북한 동포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이윽고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뜨거운 악수. 각본 없는 드라마의 두 주인공이 속된 말로 그림을 만들어주기 시작했다. 내 바로 앞에서 남과 북의 두 정상이 분단 50년 만에 얼굴을 맞대고 뜨겁게 악수하는 장면을 담으면서 이러한 역사의 현장을 기록하고 목격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놀라운 장면은 계속 이어졌다. 김 대통령이 북한의 인민군 의장대를 사열한 것이다. 김 위원장은 사열 내내 보행이 불편한 김 대통령의 보조를 맞춰가며 몇 발자국 뒤에서 걸으며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갖춰 눈길을 끌었다. 김 대통령이 적국의 의장대를 사열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다음 장면은 사열을 마치고 공항에서 떠나면서 만들어 졌다. 두 정상이 함께 같은 차에 동승한 것이다. 이런 모습은 공항에서 김일성대학까지 40km에 이르는 연도에 늘어선 수많은 환영인파를 가로지르며 감동으로 이어졌다. 손에 진분홍색 조화를 든 환영인파는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평양시민 전체가 도로에 나온 것 같았다. 동원된 모습에 씁쓸하기도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순박한 모습도 느낄 수 있었다. 남북정상회담 첫날 북측의 이러한 파격적인 의전은 앞으로 있을 회담의 성공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드디어 프레스센터가 있는 고려호텔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할 일은 공항에서부터 취재한 그림을 송출하는 것이었다. 나는 테이프를 걸어놓고 서울로 연락했다 “평양입니다. 그림 잘 들어갑니까” “잘 들어옵니다” 서울과의 직접적인 전화 통화가 금지되어 있어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었지만 서울의 환호하는 분위기는 알 수 있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1인 1실로 배정된 방으로 올라간 시간은 새벽 2시. 호텔에 들어서자 환영한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고 오래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곰팡이 냄새가 났지만 혼자쓰기엔 넓었고 깨끗했다. 나는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평양의 야경을 보고 싶어 커튼을 열어보았다. 멀리 화력발전소의 불빛만 희미하게 비칠 뿐 거리에 가로등 하나 켜있지 않은 적막의 도시 그 자체였다. 북한의 전력난이 얼마나 심각한 지 알 수 있었다.  담배연기 속에 흥분과 감동의 열기를 뒤로 한 채 평양의 첫 날밤은 깊어만 갔다. 6월 14일. 아침방송을 위해 프레스센터에 내려와 보니 나를 맞이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를 담당하는 안내원으로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과 출신인 홍우식이라는 30살의 청년이었다. 민화협에서 일하는 그는 나를 항상 친절하게 안내했다. 나는 그와 어제 감동적인 두 정상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고 서로 이념이나 체제에 관한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 서로에 대해 신뢰가 쌓인 탓인지 이동 중에 거리스케치는 아무런 제재 없이 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이튿날 일정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2차에 걸친 정상회담에서도 김정일 위원장은 거침없고 괄괄한 말투, 호방하지만 때로는 겸손한 모습을 보이면서 회담을 이끌어나가 그동안 괴팍하고, 소심하고, 충동적인 인간형으로만 인식했던 나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예정시간을 훨씬 넘긴 마라톤협상 끝에 합의문이 만들어졌다.  이어서 열린 김 대통령이 주최한 만찬장에서는 남과 북의  두 정상이 합의를 이루어냈다는 것에 고무되어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김 위원장은 이희호 여사가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여기까지 와서 이산가족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이 여사를 김 대통령 옆자리로 옮기게 하고는 “두 분이 떨어져 계셔서 김 대통령이 이산가족 문제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말해 좌중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밤이 깊어가면서 축배가 이어지면서 남북정상회담도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드디어 두 정상의 남북공동합의문 서명이 이어졌고 날짜를 넘겨 15일 새벽에 공식발표가 있었다.  6월 15일. 어제의 성공적인 회담결과 때문인지 아침부터 프레스센터는 술렁거렸다. 북측 안내원들 역시 합의문 기사로 전면을 가득채운 노동신문을 보면서 남과 북의 미래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백화원에서 정상회담 성공을 자축하는 오찬장은 두 정상의 덕담이 오가면서 웃음꽃이 만발했고 손에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김 대통령이 성공적인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순안공항으로 가는 길에도 평양시민들은 또다시 진분홍색 꽃을 흔들며 환송해 주었다. 길고도 짧았던 2박3일간의 각본 없는 드라마의 두 주인공인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은 서로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순안공항에는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김 위원장은 특별기가 이륙할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2000년 6월. 전 세계에 시선이 한반도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남북정상회담 합동취재단 카메라기자들은 그 중심에서 역사의 소명을 갖고 최선을 다해 가감 없이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영상을 취재해 베일에 싸인 김정일의 다른 모습과 50년간 상상 속에만 그려지던 북한의 모습을 전달했다. 이렇게 카메라기자의 눈으로 전달된 영상들이 세계가 한반도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함은 물론, 남북 간의 이질감을 해소하고 우리가 하나임을 확인시켜 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경배 / MBC 보도국 영상취재1팀 차장
    2007-06-25
  • 900 여 일만의 복직, "형, 고마워요!"
    제목 없음 “형, 고마워요!”  “파업까지 치면 900일 정도 되는 기간이에요. 조합원을 100명이라고 치면 90,000일, 4인 가족으로 하면 360,000일이 걸린 셈이죠. 당시에 희망조합원은 180 명이 넘었어요.”  2004년 겨울.......  누비는 곳마다 오랜 설명이 필요했고 내쫓김을 당하면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가야 했어요. 카메라를 들고 다녔던 손엔 휴대용 좌판이 걸려있어요. 영상취재 할 때와 공통점도 있었죠. 사람들은 우리를 경계 했고 우리가 그들의 가게 앞에 오는 것을 꺼려했어요. 그리고 호기심. “붉은 옷을 입은 멀쩡하게 생긴 저 젊은이들은 누구일까.” “형, 우리는 누구였죠?”  “우리는 iTV에서 나온 노동잡니다!” 유인물을 돌리며 우리는 쩌렁쩌렁 외쳤습니다.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방송회관 앞에서 그래요 우리는 노동자였습니다. 적어도 실업급여의 긴 줄 앞에 설 때 까지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사는 쫓겨난 이들과 없는 이들, 수많은 비정규직ㆍ특수ㆍ파견 노동자들과 연대를 시작했어요. 그들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깨닫지 못했지만 그들은 오래전부터 함께 한 내 이웃이었던 거예요. 취재 온 영상 취재기자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더 커졌어요. 형은 그 묘한 기분 아시죠?  그래요 형은 그 가난한 자들의 양심과 때로는 1만 5,000 발기인들 하나하나의 열망이 되어 혹은 활동가들의 신념에 찬 눈빛으로 우리를 응원하셨어요. 하양 눈발에 빨강 점들로 박혀 그렇게 한국 사회에 불편한 질문들을 던지게 했죠. 매우 추웠고 눈도 많았어요. 하지만 서명 용지 위로 내리는 눈만큼은 뜨거웠어요. 잉크 물은 번지기 전에 닦아야 돼요.    형 덕분에 우리 희망조합은 ‘한국TV카메라기자 특별상’, ‘민주언론상’, ‘경기민주언론상’ ‘올해의 프로듀서상’을 받았습니다. 세차장에서, 정수기 회사에서, 통닭을 튀기며, 보험 상품을 설명하며, 일당이 찍힌 통장을 아내에게 내 밀거나 병원에 누워서도 우리는 ‘그날이 오면’이라는 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날이 왔습니다. 아니 그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날을 만들 자격만 주어진 셈입니다. 다시 노동자로 돌아왔을 뿐이니까요.  우리가 겪었던 이 긴 해체와 회복의 과정이 아직 끝나지 않은 방증인가요. 새로운 회사에 여러 고민들이 뒤엉켜 있습니다. 형은 우리들의 협(俠) 앞에 의(義)자를 붙여주셨잖아요. 우리는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뷰 파인더가 안으로 열리고 카메라가 조금 더 무거워진 이유에요. 형, 고마워요. 채종윤 / OBS 경인TV 영상취재팀 기자
    2007-06-25
  • "취재 사업은 잘 되셨습니까?"
    “취재사업은 잘되셨습니까?”   ‘금강산 역’을 출발해 ‘제진 역’으로 향하는 열차 안 북측 마지막 역인 ‘감호 역’에서 통관검사가 있었다. 북한 군인들이 열차를 타고 인원점검을 했다. 하지만 객차를 섞어 탄 사람들이 많아 시간이 걸렸다. 이 때문에 휴전선 통과시간이 예정보다 늦어졌다. 이때 한 여군이 내게 다가와 촬영한 것을 보자고 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어림도 없는 상황. 하지만 여긴 어디인가? 아직 북한이다. 아이피스까지 제거해가며 뒤로 돌려 보여주었다.  이 때 이 여군의 질문. “취재사업은 잘되셨습니까?”  ‘취재사업?’ 무척 생소한 단어. ‘취재+사업’ 하니까 왠지 장난스러운 표현으로 들렸다. 잠시 어색한 단어에 적응하고 “예, 도와주신 덕분에 잘 되었습니다” - 현?문?현?답. 나는 매일 취재를 하지만 항상 기억에 남지는 않는다. 바로 어제 취재 한 것도 잊어버릴 때가 많다. 하지만 이 날의 취재는 단 한 컷도 잊을 수 없는 오래 기억에 남는 ‘취재사업’이었다.  ‘남북 철도 연결’ 취재를 위해 우리는 새벽에 숙소에서 출발했다. MBC 박지민, SBS 이병주 기자와 나로 꾸려진 방송사 pool 기자단, 좌석에 제한이 있어 방송사 취재기자는 동행하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우리 측 CIQ를 통과해 20분쯤 달려 금강산 ‘청년 역’에 도착했다. 금강산을 형상화 했다는 뾰족 지붕의 금강산 ‘청년 역’은 남한에서 지어준 것으로 이미 역 안에는 오와 열을 맞춘 수십 명의 학생들이 환송 나와 있었다. 깨끗하게 정비된 열차 열차는 ‘68년 위대한 김일성 동지가 몸소 탔던 열차’라는 빨간 명패가 붙어 있고, 객차엔 좌석마다 음료수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간단한 환송회가 끝나고 바로 출발하려고 했으나, 경의선 열차와 휴전선 통과시간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30여 분간 기다렸다. 그 동안 참석자들은 북측 여성 안내원과 또는 열차를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했다. 북측 안내원들은 웃거나 인터뷰를 해주지는 않았지만, 사진촬영에 잘 응해주는 등 어색함 가운데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출발, 하지만 기적이 울리고 커다란 팡파레가 있었을 것이었다고 상상하면 금물. 학생들의 손 인사로 출발했다. 아주 천천히 열차는 철로를 달렸다. 아니 달린다고 하기 보다는 살살 미끄러져 나갔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은 한마디로 삭막했다. 바깥의 풍경 촬영하고 싶은 맘이 굴뚝같지만 당연히 금지. 남북 교류가 한창일 때 스포츠취재팀에 있었던 나에게는 첫 북한행, 해야 할 일 보다 하지 말아야 일들을 더 되 뇌였다. 잠시 후에 고운 북한식 한복을 입은 여성접대원들이 과일 접시를 돌렸다. 객차서비스였다. 날이 서지 않은 과도, 이건 정치적 이유 때문인가? 잘 안 깎이기도 했지만, 왠지 무공해 과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껍질째 먹었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팠다. 휴전선에 다가 갈수록 삭막함은 더해갔고, 철로 바로 옆에 포대엔 섬뜩함 마저 느껴졌다.  ‘우린 아직 전쟁 중이구나’  북측의 마지막 역인 ‘감호 역’에 도착했다. 금강산역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남한에서 지어준 역이다. ‘감호 역’이란 표지는 없다. 다만 김일성 주석의 초상화만 크게 붙어 있었다. 이제 슬슬 일을 해야 할 시간, 열차 안에서도 할 일이 너무 많았는데 아무 것도 못한 상태였다. 할 일은 못한 이유는 열차 안에 우리 측 인사뿐 아니라 북측 인사가 많이 탑승을 해, 촬영을 감시하는 사람들 역시 많았기 때문이다. 드디어 우리 측 통문 통과! 하지만 벅찬 감정 보다는 이제부터는 촬영할 수 있다는 해방감이 더 좋았다. 서둘러 열차 안 스케치 탑승객 인터뷰, 물론 북측 탑승객은 인터뷰가 안 되었다. 통문 통과 후 10분도 안 되서 ‘제진 역’에 도착했다. 기차는 아주 천천히 달렸지만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메텔이 인간이냐 기계인간이냐 논란이 아직도 그치지 않는 ‘은하철도 999’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공상과학 만화이면서 왜 은하철도인가? 우주선도 아니고 왜 열차였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열차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이미지 때문이지 않을까? 열차는 ‘꿈’, ‘희망’, ‘낭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등을 상상하게 된다. 2007년 5월 17일, 드디어 남과 북의 열차길이 열렸다. 해로, 항로, 육로에 이어 교통수단으로서는 마지막으로 철로가 열렸다. 수 백 명이 타는 2층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시절이지만, 열차는 아직도 육상 운송으로 큰 역할을 차지한다. 열차는 인류에게 개척과 대량 수송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황무지 개척에서도,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도 철도의 역사는 일본의 수탈 역사와 일치한다. 그래서 어쩌면 통일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 철도일 것이고, 그런 의미로 북한은 철도 연결에 더 소극적이지 않았을까?  한차례 봄바람이 불고 지나갔다. 분명 그 바람은 통일이라는 태풍을 불어줄 것이다. 그래서 훗날 통일특집 방송이 방송될 때 통일의 과정을 보여주는 리포트에서 열차운행은 분명 통일을 위한 작지만 큰 기적으로 표현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줄 것이다. 아빠가 카메라기자로서 저 기차에 타고 있었노라고… 정민욱 / KBS 보도본부 영상취재팀 기자
    2007-06-25
  • "카메라기자의 코너... 그 시작에 대한 책임감 커"
    <미니인터뷰 - YTN 강근배 기자> “카메라기자의 코너… 그 시작에 대한 책임감 커”  지난달 31일, 기자는 YTN 뉴스창의 ‘영상을 말하다’라는 코너에 고정 출연하게 된 강근배 기자를 만나기 위해 YTN으로 향했다. 오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소 더운 날씨였다. 강근배 기자를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누고 바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 주는, 배려가 깊은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 이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 ‘영상을 말하다’라는 코너에 출연하시게 된 계기.  출연 계기에 대해 간단하게 말하자면, ‘제안을 받아서’라고 할 수 있다. 뉴스 창의 앵커이자 뉴스팀장인 노종면 앵커가 제안을 해왔는데, 처음에는 고사를 하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하게 됐다. 생방송에 고정으로 출연을 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것이 나뿐 아니라 카메라기자들에게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화법에 대한 교육이나 경험 없는 사람들이 TV나 라디오에 출연해 이야기 하는 것을 들어보면 굉장히 어색하지 않나? 그런 부분에 있어 나 역시 특별한 능력이 없는 사람이므로,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2. 첫 방송 소감에 대해 한 말씀  첫 방송 날, 스튜디오에 들어갔는데, 눈앞이 깜깜했다. 카메라, 모니터, 프롬프터 등 주위 모든 것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앵커 두 사람만 보일 뿐이었다. 마치 어느 기관의 취조실에 불려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말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났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방송을 끝내고 내려오니 주위 사람들이 첫 방송치고는 잘 했다고 격려를 해주었다. 그러나 내가 직접 녹화 테이프를 보니 말 그대로 가관이었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이 내용 전달인데, 말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보니 목소리는 기어들어가고, 원고에 매달려 진행을 하다 보니 대화체는 안 되고… 거의 국어책 읽는 수준이었다. 녹화 테이프를 보는 내내,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기어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다.    3. ‘영상을 말하다’라는 코너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를 해 주신다면.  ‘영상을 말하다’는 매주 금요일 저녁 7시에 방송되는 ‘뉴스 창’을 구성하고 있는 한 코너로 7시 30분부터 약 7분가량 앵커와의 대담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영상을 말한다’ 역시  카메라기자 인터뷰를 포함하는 금주의 이슈 영상, 렌즈 속 인물, 브릿지 영상, 카메라 줌인, 영상미학 등의 5가지 작은 코너로 구성돼 있다. 현재는 이 정도로 방송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 뉴스 영상과 관련해 더욱 새로운 콘텐츠들을 개발해서 코너에 반영시킬 계획이다. 4. YTN의 경우, 타 방송사에 비해 카메라기자들의 활동 폭이 넓고 다양하다는 느낌을 받는데, 그런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본인의 생각  글쎄… 뉴스 전문 채널로서 타 방송사와는 차별화된 뉴스 콘텐츠를 생산해내야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경영진의 마인드가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된다. 뉴스를 24시간 동안 방송하는 채널인데, 공중파 뉴스에서 볼 수 있는 정형화된 뉴스가 하루 종일 방송된다면 어떤 시청자가 YTN 뉴스에 채널을 고정하겠는가? 새로운 형식의 뉴스와 다양한 콘텐츠를 보여 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YTN이 생존하는 길인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카메라기자 내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끊임없는 시도들이 좋은 결과를 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타사도 마찬가지겠지만, YTN은 여러 방면에 능력을 가진 카메라기자들이 많은 것 같다. 그리고 남달리 일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사람들 역시 많은 듯하다. 이런 이들의 노력이 그런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본다. 6. 방송 출연을 하면서 느낀 점과 앞으로의 계획  방송 출연을 하면서 눈과 귀, 그리고 손가락으로 표현하는데 익숙해졌던 내가 글과 말로 무엇인가 표현하고 정리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온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카메라기자로서 너무 수동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매일 영상취재를 하고 편집을 하는 일에만 몰두했지 전체적인 방송 메커니즘 보려는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나?’하는 자책도 해 보았다.  앞으로는 기회가 되는 한 전체적인 방송에 대한 공부와 경험을 많이 해볼 생각이다. 무엇보다 현재 내가 맡아 하고 있는 ‘영상을 말하다’라는 코너를 더욱 새롭고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해 꾸려 나가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다른 것보다 현재 내게 주어진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하다 보면, 기회는 계속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7. 동료 카메라기자들에게 한 말씀.  ‘영상을 말하다’라는 코너를 맡아 꾸려가고 있는 것은 나지만, 이것이 ‘나만의 코너’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언제까지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카메라기자가 전면에 나서는 새로운 코너의 시작점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 큰 책임감은 느끼고 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런 시도가 계속될 수도, 없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의 애정 어린 관심과 충고를 부탁드리고 싶다. ‘영상을 말하다’가 카메라기자의 코너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나 혼자만의 아이디어로는 부족하다. 여러분들이 머리를 맞대 주고, 한 마디라도거들어 준다면 큰 힘이 될 것이다. 안양수 기자 soo179@hanmail.net  
    2007-06-25
  • 또 다른 눈을 갖게한 특별한 도전
    <제주도 수중촬영 직무연수를 다녀와서> 또 다른 눈을 갖게 한 특별한 도전  제주 공항의 문을 열고 나가자, 길 건너 야자나무 가지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꼭 일 년 전의 기억을 되살리는 풍경 - 비바람을 뚫고 나아가던 그 뱃고동 소리… 가슴 속 깊이 혼자 되뇌던 긴 한숨과 초조함… 그리고 파도 - 암흑과 같았던 모비딕의 바다에 또다시 난 던져지고 있었다.  일렁이는 뱃머리에서 저마다 너스레를 떤다. 누구는 긴장한 듯 누구는 달관한 듯. 그 알 수 없는 말과 모호한 표정들. 바다위에 떠 있는 내 마음을 이 성난 녀석은 알기나 할까? 파도는 계속 거세지고 있었다.  이번이 세 번째. 처음엔 제주도 밤섬의 암흑 속에서, 두 번째는 푸켓의 산호 품에서, 그리고 또 다시 찾은 제주의 바다는 혹시나 하는 나에게 역시나 자유를 베풀지 않았다. 몸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눈은 버디를 찾느라 초점을 못 잡고, 숨은 왜 이렇게 차오르는지 애꿎은 수경 탓을 하며 계속 물을 뿜고 있다. 여기저기서 자신의 미숙함과 자연의 불친절을 성토하고 있다. 내 탓과 네 탓이 아닌 그냥 푸념이다. 이 대자연에서의 자유로움을 갈망하는 푸념.  스쿠버다이빙! 어렵다. 반복적인 장비착용도 혼자 하니 안심이 안 된다. 매번 옆 사람의 동작을 곁눈질로 힐끔 쳐다본다. 서너 번을 점검해야 다음으로 넘어간다. 물속에서는 왜 이리도 굼뜬지… 몸에 안 맞는다고 장비 탓만 할 수 없다. 물속에 들어가면 그냥 ‘사투’라는 표현이 어울릴 법 하다. 이리저리 쓸려 다닌다. 숨 조절이니 중성부력이니 이런 것들은 입문한지 얼마 안 된 초보 다이버에겐 버거운 과제일 수밖에 없다.  앞서가는 동료들이 내 시야에서 사라질까 가쁘게 호흡을 하고, 오리발을 세차게 뻗는다. 그럴수록 뭍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앞당겨지고, 그만큼 동료들의 다이빙 시간도 줄어든다. 미안해야 한다. 그러나 살아야하기에…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많고 투자해야 할 시간이 필요한 만큼 내 몸의 반응은 더딜 수밖에 없다.  체념이란 단어를 떠올리기엔 포기 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다. 선후배와 함께 느끼는 즐거움에서 그 이유를 찾고 또 다른 세상을 접하는 색다름에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무엇보다 더 강한 자력을 느끼게 하는 건 바로 도전이다. 특별한 도전, 세상을 바라보는 눈으로써의 내 직업적 소명이 더욱 더 강한 자극을 발출하게 한다. 다른 눈. 모두가 똑같은 것을 본다면 그 만큼 다른 관점에서 생각 할 수 있는 변화의 기회를 뺏기는 것이다. 진보로 통하는 변화의 기회. 거창하게 말 할 필요도 없다. 분명 특별한 세계의 독특한 이미지들이 내 기억의 주름 속에 이미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좀 버둥거리거나 더디더라도 그 발도 닿지 않는 수평선 위에 떠 있고 싶은 욕구가 바로 이것이다. 바다 속 다이빙! 저 바다의 파도와 바람이 오늘도 그립다. 이형빈 / MBC 보도국 영상취재2팀 기자
    2007-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