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기자협회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영상기자 협회보

NEWS

지속가능경영
  • 축하드립니다!
    카메라기자에 최종 합격한 두분 신입 기자님의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2007-11-14
  • [re] 홈피 바뀐건 환영하는데...
    >올만에 들어와 보니 홈피가 많이 바뀌었네요.. > >좋긴 한데, 어째 댓글이 안써지죠? 각 게시판에 말이죠. > >설문조사도 저만 그런가, 등록이 안되죠.험. 글쓰기가 안나오거나 로그인이 안되는 경우의 문제해결 방법입니다. 익스플로러가 6버젼 이상으로 버젼업 되면서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보안니 강화되면서 생긴 문제 같습니다. 해결방법 : 인터넷 익스플로러 실행 - 도구 - 인터넷옵션 에서 "일반"탭에서 쿠키삭제, 파일삭제 실행 (컴에 따라 다소 시간이 걸림) - "개인정보" 탭으로 이동 - 설정부분 '고급' 실행 -   자동 쿠키처리 덮어쓰기, 항상세션에 쿠키허용 에 체크 하신후 "확인", "확인" 클릭후  모든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종료후 재실행 하시면 됩니다.
    2007-10-22
  • 홈피 바뀐건 환영하는데...
    올만에 들어와 보니 홈피가 많이 바뀌었네요.. 좋긴 한데, 어째 댓글이 안써지죠? 각 게시판에 말이죠. 설문조사도 저만 그런가, 등록이 안되죠.험.
    2007-10-19
  • <줌인> 정신과에 가보셨나요? 외상 후 스트레스증후군
    <줌 인> 정신과에 가보셨나요? 외상 후 스트레스증후군  더운 열기가 미간을 스치고 지나가고 있지만 내 살갗은 돋아난 소름으로 덮혀 있다. 손은 뒤로 묶이고 눈은 무언가로 가려져있다. 등에 바짝 붙은 총구는 목적지를 알 수 없는 길을 재촉한다. 얼마를 걸어갔는지 가늠할 수 없게 되었을 때쯤 그들은 나를 멈추게 했다. 무릎이 꿇리고 등 뒤에 있던 총구는 어느새 관자놀이로 와있다. 사막의 열기에 달구어진 총구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를 조롱한다. 30년이 조금 넘는 내 삶이 10프레임씩 지나간다. 나는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장면들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때 지나치게 강한 이펙트와 함께 겨우 10년을 넘기고 있는 내 삶의 영상들이 끊기며 페이드 아웃된다.  다행스럽게 꿈일 뿐이었다. 몇 년 전에 이라크에 출장을 갔었다. 바그다드가 미군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소식이 요르단에 있었던 취재팀에게 날아왔다. 각국의 취재팀과 한국의 취재팀은 일렬로 바그다드를 향해갔다. 곳곳이 화염에 휩싸인 바그다드 시내가 눈에 들어오자 긴장감이 감돌았다. 바그다드 시내로 진입하면서 소형화기를 어깨에 메고 죽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촬영을 하면서도 어디서 다가올지 모르는 위협에 내가 레코드 버튼을 눌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조금 더 깊숙하게 시내에 진입하자 쇠몽둥이와 커다란 돌을 든 군중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열해서 지나가는 차량에게 쇠몽둥이와 돌이 날아들었다. 우리 차도 예외가 되지못했다. 몸을 차 바닥으로 최대한 웅크리며 그들 옆을 지나가는 순간 와장창하며 커다란 돌이 조수석으로 날아들었다. 돌이 아니라 바위란 표현이 맞을 만큼 컸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폭도로 돌변한 그들에게서 벗어나긴 했지만 얼마못가서 도로에 떨어져있는 파편 때문에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 총을 든 사람들이 주위에서 우리를 보고 있었지만 다가오지는 않았다. 제발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났으면... 한없이 여유롭게 보이던 요르단 운전기사도 이때만큼은 식은땀을 흘리며 타이어를 교체하고 우리는 차 안에서 ‘혹시나 이라크 사람들이 폭도로 돌변해서 우리에게 오면 어쩌나’하고 걱정하며 맘을 졸였다. 타이어를 교체하는 그 몇 분이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다행이도 숙소까지 무사히 도착해 출장 기간 동안 별 탈 없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나는 출장을 다녀온 후, 몇 개월 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만사가 귀찮고 의욕도 떨어지고 회사에 출근해도 생활이 예전 같지 않았다. 내가 다녀온 전쟁지역과 관련된 보도는 지금도 피하게 된다.  얼마 전에 캄보디아에서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있었다. 그곳으로 취재를 간 기자들은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헬기를 타고 사고현장에 들어가 참혹한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주인을 알 수 없는 소지품들, 종이조각처럼 찢겨진 비행기 잔해들 그리고 정말 외면하고 싶은 희생자들. 앵글에 신경 쓸 틈은 없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집중해서 뷰파인더를 바라본다. 사고현장에서 나와 촬영한 영상을 무사히 송출하고 한숨을 돌리지만 현장의 참혹한 모습들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사고현장을 취재하고 막 회사로 돌아온 후배는 몹시 지쳐보였다. 며칠 전, 그 후배와 술자리를 같이 했다. 사고를 예견한 듯한 메모와 눅눅하고 습한 비닐에 싸인 희생자들의 모습들을 얘기하던 후배는 그 순간을 잊고 싶었는지 연신 술잔을 입에 갔다댔다. 출장을 다녀온 후 바로 정신과 상담을 받고 왔다고 한다. 다행이다 싶었다. 쉽게 치유될 수는 없겠지만 정신과 상담은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전쟁, 천재지변, 화재, 신체적 폭행, 강간, 자동차·비행기·기차 등에 의한 사고에 의해 발생한다. 신체적인 손상이나 생명을 위협하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한 후 나타나는 정신적인 장애가 일정기간동안 지속되는 질병을 말한다.  카메라기자는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해서 끔찍한 순간들을 목격한다. 현장에서는 속보 경쟁에 내던져져 정신없이 취재를 한다. 내가 취재하고 있는 ‘무엇’에 대해 생각해 볼 여유조차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취재를 하면서 하나씩 만들어진 기억의 상처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분쟁지역을 전문적으로 취재하는 외신기자들은 취재가 끝나면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고 한다. 이제 우리도 회사 차원에서든 협회 차원에서든 이러한 마음의 상처에 관심을 갖고, 이에 대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전쟁, 사고, 재난, 재해 등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동료들의 마음을 치유해 줄 정신과 병원을 지정해 관리하는 노력이 필요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번 캄보디아 사고 현장에서 고생하고 취재경쟁에 내몰렸던 우리 동료들부터 관심을 가져볼 일이다.
    2007-07-23
  • 캄보디아 여객기 참사 취재 현장에서
    캄보디아 여객기 참사 취재 현장에서  사건사고를 급박하게 취재하다보면 여러 가지 고민할 상황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특히 이번 캄보디아 여객기 추락사고 취재현장에서는 극단적인 여러 상황만큼이나 많은 고민을 준 출장이었습니다. 보름이 훨씬 지난 지금 극단적인 여러 상황에서 한 그 고민과 선택 그리고 결정의 순간들 ... 어떤 선택이 올바르고 또 어떤 결정이 합리적이었을까요? 여러 고민들 중에서 현장으로 향하는 헬기와 추락 항공기 잔해가 발견된 밀림 속에서 한 고민들을 적었습니다. #1. “헬기를 사수하라”  500달러를 주고 올라탄 시신운송헬기. 이미 경쟁사는 구조대헬기를 타고 현장에 갔다 왔다. 그런데 같이 갔던 사진기자가 현장에 내리자마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단다. 더구나 상공에서도 자신은 현장이 보이질 않았단다. 시신을 싣기 위해 좌석을 떼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군인들이 들이 닥친다. 한국인이 4명 있었는데 모두 내리란다. 일단 외부에 있던 대승이(기재담당)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6mm 장비를 가져와 달라고 한다. 기장이 오더니 받았던 돈을 몰래 돌려준다. 헬기는 시동이 걸린 상태. ‘에이 버티자’ (조금만 버티면 이륙하겠지.)    내리라며 총으로 밀어내는 군인에게 웃으며 “릴렉스, 저스트 원 미니트”를 외친다. 그때 입구의 상사가 인상을 쓰며 뭐라 지시를 한다. 갑자기 흥분한 군인이 바닥에 있던 ENG카메라와 위성인터넷 장비를 뺏어들고 앞문으로 내린다. “호찬아(취재기자)! 6mm 잘 챙기고 무조건 버텨”(ENG없이 현장에 간다는 것이 내내 찜찜하다. 일단 시간을 끌어보자)   하는 수 없이 내려 보니 내 장비는 이미 저만치 군인들이 들고 가고 있다. 아 이대로 끝인가? 어라 근데 웬일? 헬기 이륙 스텝이 나를 잡아끈다. 빈손으로 현장에 있던 나를 보고 뭔가 착각이 있었나 보다. 그의 안내를 받아 헬기 뒷문(탈출 헤치)으로 가서 자연스럽게 올랐다. 남아있던 한국 취재진과 실랑이를 벌이던 군인들이 나를 쳐다본다. 당당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어 캡틴 ... 퍼미트.” (에이 될 대로 되라. 어떻게든 되겠지.)  이내 헬기는 바로 이륙했고, 밀림상공에서 구석에 있던 상사와 눈이 맞았다. 나를 째려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손가락으로 머리 위를 살짝 찌른 후 웃어줬다.  밀림을 지나던 헬기는 암반으로 이뤄진 보꼬산 정상부근에 착륙준비를 한다. “나 먼저 간다.” (그대로 있다가 상사한테 잡혀서 아무것도 못하고 다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잖아) 6mm장비를 챙긴 후 헬기가 착륙하기 전에 뒷문으로 뛰어내렸다. 헬기 앞에서 내리는 군인들을 조금 스케치하다가 저만치 앞에서 밀림으로 들어가는 군인을 따라 무조건 뛰었다. 와이어리스 마이크를 취재기자에게 준다. “기자는 지금 어두운 밀림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취재기자는 우리가 들어가는 모습 등을 찬찬히 채널 1에 담는다. (특보나 속보를 위해서다. 우리는 캄보디아로 향하는 비행기에서부터 이런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대략의 시나리오를 짰다.) 물구덩이와 밀림을 뛰기 시작한지 10여분 드디어 현장이 눈앞에 들어오고 내 앞에는 아무 기자도 없다. #2. “1보를 전하라”  갈갈이 찢겨진 비행기잔해. 그리고 곳곳에 흩어진 유품들. 비행기 밖과 속에서 뒤엉킨 희생자들. 말 그대로 참상이고 아수라장이다. 담담하게 현장을 카메라에 담는다. 취재기자의 목소리도 계속해서 들려온다. 급하게 챙긴 6mm 장비에는 테이프가 달랑2개. 현실적으로 1보를 보내면 더 이상의 속보는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현장에서 20분정도 지난 후 취재기자에게 테이프를 뽑아준다.  “호찬아! 최대한 빨리 가서 아무헬기나 타고 어디든 가서 전화해서 위성잡고 송출해. 빨리 가”(현지 방송사도 없고 외신도 없다. 속보를 못하더라도 무조건 1보만 하면 된다.)  10여분 지난 후 APTN로고가 있는 ENG가 들어온다. “호찬아! 빨리 뛰어” 들리는지 모르지만 큰소리로 밀림을 향해 소리 지른다. (지금 나가면 무조건 1보다. 외국에서 일어난 사고현장에서 우리가 1보를 하는 것이다.) #3. 디카 메모리  희생자들의 시신 수습이 시작된다. 항공기 사고치고는 온전한 모습이라지만 망자들의 시신을 똑바로 쳐다보기엔 머리가 너무 망가져있어 어지럽다. 간간히 희생자들의 여권이나 유품들이 나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현장에 부서진 디지털 카메라들이 많았는데 어느 것 하나도 메모리를 찾을 수 없었다. 비행기 내부에서 외장하드 가방에서 외장하드를 자신의 주머니에 넣는 군인을 보고서야 궁금증을 털어낼 수 있었다. (나중에 그 외장하드는 먼저 나간 취재기자가 군인들에게 돈을 주고 다시 샀단다.) 그러던 중 우연히 발견한 망가진 똑딱이 디카. 메모리가 있기는 한데 외형이 찌그러져 도저히 빼낼 수가 없다. (아 ... 어떻게든 빼야 하는데 ... ) 갑자기 현지 군인이 쳐다본다. 그냥 발아래에 내버려둔다. 현장에 있던 교민에게 부탁한다. 교민은 1시간이 지난 후 나에게 그 메모리를 가지고 왔다. 현장에 있던 연합뉴스 사진기자의 카메라에 넣으니 사진들이 나타난다. 다정한 모녀의 관광 사진이다. 사고기 앞에서, 사고기 트랩에서, 사고기 안에서 그들은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삼켜버린 밀림과 비구름들을 찍은 내용이다. 아마도 그 사진이 마지막 사진이었을 것이다. “어쩌지” (사진의 내용을 촬영할까? 그래도 되나? 유족들이 심하게 반발 하겠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사진에 대한 사용을 허락 받지도 못했고 ... ...)  “천천히 한 장씩 보여 주세요.”(에이 모르겠다. 판단이 서지 않으니 일단 찍고 나중에 유족의 동의를 구해야지. 데스크들이 고민하겠지.)  그렇게 촬영하고 메모리를 의료팀 교민에게 돌려주니 대사관을 통해서 유족들에게 전달하겠단다. (며칠 뒤 캄보디아 현지에서 취재팀이 입수한 유품을 유족들에게 보여준 후 몇 장의 사진을 동의를 구해 방송으로 전했다.) #4. 대한민국 사람 아닙니까? -시신 이송용 헬기 안에서  밀림에서 수습된 희생자들의 시신은 들것에 들려 헬기 안으로 올려졌다. 헬기 안에는 시신들을 이송하기위해 좌석들이 모두 제거된 상태. 그런데 문제는 군인들이 시신을 헬기 내에 어지럽게 놓다보니 공간이 모자라게 된 것이다. 현지 교민이 비를 피하던 나에게 손짓한다. “이리와 보이소, 다 대한민국 사람 아닙니까?” “네” (그래 한국 사람들이 희생되지 않았다면 여기 올 일도 없었겠지. 조금만 도와줘도  빨리 일이 마무리 되는데... 어차피 다른 경쟁사도 없는데 ... ...) 헬기에 올라 시신을 이리 저리 옮긴다. (조금 전까지 이들의 시신을 취재하지 않았던가? 촬영의 대상이 된 그들에게 이 정도는 예의겠지.) 그리고 다음번에는 연합뉴스의 서명곤 사진기자가 헬기에 올라 시신 정리를 했다. 그런 우리를 보고 현지 교민들은 이곳까지 온 것도 대단한데 이런 도움을 줘 고맙단다. 그리고 한참 후 헬기가 수도 프놈펜으로 이동하 때 현지 의료팀 교민과 함께 헬기에 오를 수 있었다.  벌써 보름이 지났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캄보디아 여객기 참사는 이제 먼 이야기가 된 것 같다. 나 역시도 한국에 돌아온 후 이런 저런 현장을 다니다 보니 그때의 기억은 저 멀리 흘러 지나는 듯하다. 하지만 그때의 상황과 고민들, 그리고 순간의 결정들은 언제나 현장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권혁용 / MBC 보도국 영상취재2팀 기자  
    2007-07-23
  • 가족처럼 슬펐다!
    <캄보디아 여객기 추락사고 취재기> 가족처럼 슬펐다!  캄보디아를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 속에서도 나는 실종자 가족들의 걱정과 두려움을 가슴으로 느끼지 못했다. 내게 일어난 일이 아니고, 더군다나 이런 사건사고를 취재해 온 것이 어언 7년 아니던가. 게다가 그 비행기 속에서는 ‘희생자’ 가족이 아니라, ‘실종자’이었다. 실종자들이 생존해 있을 걸 기대한다면 한없이 걱정에만 휩싸여 있을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 턱턱 막히도록 후텁지근한 프놈펜의 공기를 들이키며 내 몸이 온통 땀에 젖었을 때에도, 사망 소식 보다는 ‘어떻게 하면 생존자 소식을 누구보다 신속하게 잘 취재하여 송출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날아든 날벼락 같은 소식. ‘유가족’이라는 호칭으로 그들을 서슴없이 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하고 말았다. 도착 다음 날 아침, 전원 사망이라는 절망적인 메시지를 들어야만 했던 가족들. 하루 더 수색을 했더라면 그 하루만이라도 가슴에 희망을 품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소식을 너무나 허무하게 들어버리고 말았다.  무거운 분위기 속의 취재, 카메라를 들이대기가 겁이 났다. 같은 호텔에 묵으며 이래저래 유가족들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내가 그들의 심정을 어찌 알리요. 상상만으로 그들을 측은(惻隱)해 할 뿐, 내 할 일은 그들을 촬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참 할 짓이 못 되었다. 그래도 그들이 영정사진을 보며 울부짖을 때 나는 뷰파인더 너머로 무심히 그 모습을 촬영하며, 아무 감정 없는 차가운 카메라 속에 영상을 저장해야했다.  그런데, 내 눈과 가슴에서도 무엇인가 울컥 솟구쳐 올랐다. 만(滿) 이틀 만에 자신의 수족(手足)의 영정을 보러 달려가는 유족들의 갑작스런 행동에 미처 촬영할 새도 없어 당황해서 일까? 목이 메어 꺼이꺼이 울어 대는 한 유가족의 모습이 뷰파인더 속에서 살아 나와 내 가슴 역시 미어지게 만든 것인가? “왜 네가 먼저 갔어. 애미는 어쩌라고~” 절규하며 외쳐대는 어머니의 한 맺힌 목소리가 10m는 족히 떨어진 포토라인까지 들려와 내 가슴을 쿵쾅쿵쾅 방망이질 해댔다.  이러면 안 되는데……. 사고로 죽은 1살짜리 아기의 일이 마치 내 아이 일인 양 느껴져도, 저 사람이 어루만지는 영정 사진 속 여자가 내 여동생 같고, 내 친구 같은 사람이 죽었어도 나는 냉철한 눈과 가슴으로 취재에 임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께 슬퍼할 여유가 없는데, 유가족들의 눈물과 오열이 내 눈에 눈물을 내 손가락에는 떨림을 가져왔다.  그들의 슬픔의 무게가 느껴져서일까? 나는 뷰파인더에서 눈을 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카메라는 그들을 향하고 있었지만, 나는 무심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없이 빠져드는 슬픈 감정 속에서 헤어나려고 애쓰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내 가족의 일인 것처럼 슬펐다. 지금이라도 살아 돌아올 것만 같은 소중한 가족, 사랑했던 자식을 그렇게 허무하게, 마음의 준비도 없이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이 그 얼마나 비참하고, 찢어지는 고통이 아니란 말인가.  비운(悲運)의 땅 캄보디아. 그들은 이곳에 즐거운 마음으로 놀러와 어제까지도 들려주었던 그 생생한 목소리까지 모두 묻어둔 채, 차가운 시신이 되어 돌아가야만 했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상황이라 출장 내내 힘들고, 느려 터진 인터넷 송출에 애를 먹기도 했지만, 유가족들을 생각하면 한없는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이 자리를 빌어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들이 한시라도 빨리 깊은 슬픔에서 헤어나기를 바란다. 윤원식 / YTN 보도국 영상취재팀 기자
    2007-07-23
  • 故 조종옥 기자와 함께 한 5일
    故 조종옥 기자와 함께한 5일  ‘속보 - 한국인 13명 탑승한 항공기 캄보디아에 추락’  나는 갑작스러운 출장 명령을 받고 캄보디아를 향하는 밤 비행기에 피곤한 몸을 싣는다. 탑승자 명단에 포함된 입사동기 조종옥 기자와 아내 그리고 두 아들, 이들을 생각하니 가는 내내 마음이 무겁다.    ‘종옥아 내가 지금 가니까 조금만 힘내라. 우리 함께 같은 비행기로 돌아가야지.’  아침에 수도 프놈펜에 도착해 차로 3시간 떨어진 캄포트로 향했다. 한국에서의 보도내용과 현지상황은 차이가 있었다. 아직 사고위치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고 탑승자의 생사도 불확실했다. 기상도 좋지 않아 수색도 중단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현지교민들의 분위기는 희망적이었다. 밀림지역에 추락했으니 완충작용으로 큰 충격 없이 떨어졌을 것이라고들 생각해 탑승자의 생존가능성 역시 높게 보고 있었다. 헬기를 이용해 약품, 식량, 담요 등이 담긴 생존키트를 추락예상지역에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뜨릴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한줄기 희망이 보이는듯했다.  “기체가 발견 됐대요.”    취재기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헬기장이 있는 곳으로 무조건 달렸다. 분주히 움직이는 군 병력들,  요란한 헬기 프로펠러 소리로 주변은 어수선했다. 현장에 들어갔다 온 교민자원봉사자에게 생존자가 있는지 묻자 기체파손이 심하다는 말뿐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닐, 알코올, 들것 등이 헬기에 실리는 것으로 보아 현장상황이 좋지 않은 듯 했다.  오후에서야 헬기를 섭외, 현장에 접근했다. 헬기를 타고 20분정도 가서 다시 길도 없는 밀림을 헤치고 25분정도를 걸었을 때, 참혹한 현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현장을 확인하는 순간 마지막 희망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기체는 절반이 꺾인 채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있었고 신발, 안경, 모자 등 주인 잃은 소지품은 이곳저곳 진흙탕 속에 나뒹굴고 있었다. 기체 앞쪽으로 다가가자 미처 수습되지 못한 시신이 비행기 잔해와 어지럽게 엉켜있었다. 작업 중이던 한 교민은 아직 수습되지 못한 조 기자의 큰아들과 부인 시신의 위치를 알려주었고, 조종옥 기자가 마지막까지 자신의 몸으로 아들을 감싸 안고 있었다는 사실도 전해주었다. 나는 그 현장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힘없이 현장을 걸어 나오는데 한 캄보디아 경찰간부가 취재진에게 가족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그 사진 속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조 기자 내외와 세 아들이 있었다.  눈물을 참으며 사진 속 행복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것, 그것 말고 현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수습된 사고유해는 프놈펜에 있는 깔멧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열세개의 영정이 나란히 세워져있는 분향소 앞에서 유족들은 가족 잃은 슬픔을 억누르며 빈소를 지켰고 빈소 뒤편의 컨테이너 안에는 유해가 안치되어있었다. 그리고 마치 생과 사를 갈라놓은 듯 그 사이에는 흰 천이 높게 가로막고 있었다. 망자의 눈물인 듯 굵은 비는 하루 종일 내렸다. 조 기자의 아버지는 영정사진에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연신 손수건으로 닦으셨다. 차마 위로의 말씀도 드릴 수 없는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희생자들의 유해와 유가족 그리고 취재진을 태운 대한항공 특별기는 프놈펜공항을 이륙해 인천공항을 향했다. 한국을 떠나올 때 조 기자와 함께 같은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기를 그토록 바랬는데, 나는 살아서 또 그는 죽어서 같은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종옥아 미안하다. 이런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캄보디아까지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네 사진 앞에 꽃 올리고 고개 숙이는 것뿐이구나. 하지만 너의 남은 아들에게 꼭 말해줄게. 너의 아버지는 모두가 인정하는 훌륭한 기자였고 좋은 사람이었다고…”  故 조종옥 기자와 나는 98년 3월 KBS에 함께 입사한 동기이다. 이번 출장은 사고 현장 취재라기보다 동료가 떠나간 곳을 찾아가 수습된 동료의 시신과 함께 귀국하여, 그를 먼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의식과 같은 여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캄보디아 항공기 추락사고 희생자 여러분의 명복을 빕니다.” 이영재 / KBS 보도본부 영상취재팀 기자
    2007-07-23
  • <대담> 우리는 입사 10년 차
    <대담> 우리는 입사 10년 차  지난 6일, 여의도에서 1997년 입사한 카메라기자 동기들이 모여 허심탄회한 이야기의 장을 마련했다. ‘우리는 입사 10년 차’를 주제로 진행된 이번 대담에는 KBS 박진경, 오범석, MBC 이세훈, SBS 주 범, 박진호, YTN 김 민, OBS 김재춘, 채종윤 그리고 MBC 장재현 기자가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는 입사하여 10년이 된 현 시점에서 카메라기자로 지내오면서 느꼈던 점과 기억에 남는 일 그리고 현재의 자신에 대해 본인이 생각하는 점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그럼,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장재현 : 10년 전과 지금, 카메라기자로 일을 함에 있어 어떤 변화가 있었나? 여러분의 자유로운 이야기를 듣고 싶다. 박진호 : 단편적인 예로 요즘은 경찰서에서 피의자 취재 시, 자정을 넘으면 절대 피의자를 꺼내주지 않는다. 피의자도 취재원이므로 ‘취재원의 인권 보호’를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취재의 제약으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김재춘 : 우리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렇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취재원의 인권이 완벽하게 보호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피의자 취재만 해도 그렇다. 피의자라 함은 법정판결이 나기 전, 그러니까 ‘범죄의 혐의가 있어서 수사 기관의 수사 대상이 되었으나, 아직 공소 제기가 되지 아니한 사람’인데, 혐의만 가지고 촬영을 하는 것은 명백한 프라이버시권 침해인 것이다. 주  범 : 그렇다. 피의자를 혐의만가지고 촬영하는 것, 그것도 확실히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나는 검찰이 더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소환자체가 취재대상이 되면서 소환취재가 여론재판이 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이런 나라는 없다. 김  민 : 많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나 역시 아직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변화들이 취재에 제약이 된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이는 근본적으로 하면 안 되는 일들을 우리가 해왔던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이런 변화가 취재에 제약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겸허히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취재에 제약이 생기면 카메라기자의 역할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것을 우리가 하기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좀 더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뛰어다니는 노력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주  범 : 나는 조금 다른 면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카메라기자에게 취재의 제약은 ‘풀 취재’의 필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요즘 카메라기자 자체 노력으로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풀 취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취재의 제약이 자꾸만 커지다 보면, ‘풀 취재’의 가능성 역시 커지게 된다. 그리고 ‘풀 취재’야말로 카메라기자의 위상과 입지를 위협할 수 있는 것이다. 공항에서 SBS가 특종을 한 경우가 있었다. 타사 취재기자들이 그림이 필요하다며 요청을 해왔다. 그러나 타사 선배이신 서태경 부장께서 “특종은 받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준다고 해도 받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문화가 정착이 되어야 카메라기자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세훈 : 요즘은 그림(영상) 나누기, 즉 카피하는 문화도 사라지고 있다. 취재기자도 물먹으면 으레 타사에서 그림(영상) 얻어다 달라고 요청했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이 많이 사라졌다. 김  민 : 검찰 취재와 같은 특수한 경우, 포지션 풀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굳이 필요하지도 않는 상황에서의 풀은 없어져야 한다. 또 야간에 각 사가 시간을 분배해서 취재를 하는 ‘시간 풀’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 채종윤 : 요즘 6mm 카메라를 들고 취재하는 사람들이 많아 졌다. 특히 공항에서 6mm 취재진은 취재원과 가까워야만 질문과 녹취가 가능하기 때문에 근접촬영을 선호하는데, ENG취재는 그렇지 않지 때문에 난감한 경우가 많다. 취재는 갈수록 힘들어지고,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모르겠다. 이제 인터넷뉴스팀이 6mm카메라를 들고 청와대까지 들어가는 상황이다.  취재 환경 개선을 위해 그에 대한 해결 방안을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봐야할 것이다. 박진호 : 지금까지 우리는 1분 30초에 매몰되어서 살아왔다. 뉴스 생산자로서 주체적이지 못한 면이 많았던 것 같다. 주  범 : 방송환경 면에서 지금이 과도기라고 생각한다. 인터넷의 등장이 우리 카메라기자에게는 오히려 위상 강화를 가져올 수 있다. 기존의 뉴스에서는 한계가 있었지만, 인터넷에서는 기사 없이 영상만으로도 충분히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은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 매체인 것이다. 장재현 : 입사 시험을 볼 때, 카메라기자로서 선택의 문제에 관해 질문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이가 물에 빠진 상황에서 취재를 먼저 하겠나? 아니면 아이를 먼저 구하겠나?)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 질문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나? 김  민 : 지금 생각해 보니 질문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그때는 아이를 구한다음에 촬영을 하겠다고 대답했고, 지금 누가 나에게 그렇게 물어본다고 해도 내 대답은 같다. 박진호 : 그런데 아이를 구한 다음에 촬영할 것이 무엇이 있나? 김  민 : 인공 호흡하는 거라도 찍을 수 있다. 박진호 : 그럼 촬영을 제쳐두고 인공호흡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세훈 : 입사 시험 볼 때 나는 오디오맨한테 구하라고 하고 촬영하겠다고 대답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답은 없는 것 같다. 채종윤 : 나는 그때도 지금도 절대적으로 아이를 먼저 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 무엇과도 생명은 그 중요성을 비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  범 : 나도 그 질문에 정답이 있다면, 그것은 아이를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있기 때문에 기자도 있는 것이지, 사람이 없다면 기자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채종윤 : 그렇다. 비록 낙종을 하더라도 사람을 구하는 게 우선이다. 예전에 한양대 근처에서 시위가 있었는데 전경이 바로 내 앞에서 쓰러졌다. 처음에는 본능적으로 촬영을 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촬영중지 버튼을 눌렀다. 주변에 시민, 학생들이 몰려들긴 했는데 당장 병원에 연락할 휴대전화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전화를 그들 중 한 명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나 결국 전경은 운명을 달리했다. 나는 회사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촬영을 계속했어야 했던 걸까? 과연 내가 어떤 행동했어야 했어야 옳은 것일까? 만일 내가 촬영을 중지하지 않았다면, 특종은 둘째치고라도 그 때 일어났던 상황 상황을 모두 영상으로 기록할 수 있었을 텐데…’ 등등. 여러분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박진호 : 내 앞에서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나는 죽어가는 전경을 찍었을 것이다. 그것을 뉴스로 내보냄으로서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견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카메라기자로서 우리의 운명 아닐까? 김재춘 : 생사가 엇갈리는 상황이지만, 내가 그 사람의 생명을 구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나는 촬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  민 : 예전에 한 선배가 조계사 사태 때 전경이 추락하는 모습을 촬영해서 그 해 상을 많이 받았는데, 그 선배가 하는 말이 “상을 받았는데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그 떨어지는 상황을 찍을 때는 “낚시를 하는데 물고기가 낚시 바늘에 걸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을 쇳덩이가 짓누르는 것 같다”고 말이다. 나는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은 없으나 그 말이 매우 가슴에 와 닿았다. 박진호 :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가 카메라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한 순간 그런 운명의 배를 탄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눈에 보이는 것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채종윤 : 나는 완전한 객관은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가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한다면 위험에 처한 자, 약한 자를 선택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 김  민 : 예를 들어, 재개발 지역 취재를 갔다고 하자. 세입자와 개발업자가 고용한 사설경호원들이 대치를 하고 있는 상황과 맞닥뜨렸을 때, 우리가 과연 약자인 세입자편을 들어 함께 싸워줘야 할까? 채종윤 : 물론 반드시 모든 상황에서 그래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조금 모호하긴 하지만, 아이가 물에 빠졌다거나, 할머니가 교통사고가 나 사경을 헤매고 있다거나 하는 경우에는 도와주는 것이 당연히 먼저 아닐까? 박진호 : 우리는 기자이기 때문에 누구의 편도 들 수 없다.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왜곡됨이 없이 취재하는 것이 우리 본연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박진경 : 우리가 감정에 치우쳐 실수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진실에 관한 문제이다. 보통은 약자가 진실이고, 강자가 거짓이라는 식으로 인식을 한다. 이것은 큰 오류이며, 실수이다. 앞에서 박진호 기자가 말했듯이 카메라기자는 현상자체를 객관적인 눈으로 가감 없이 표현해야한다.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 그 자체가 굉장한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김  민 : 우리가 객관적으로 촬영한다고 해도 편집하는 과정에서 많이 왜곡되는 것이 사실이다. 과거에는 카메라기자가 직접 촬영하고 편집도 하는 경우가 많아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편집은 편집요원이 맡는 경우가 다반사기 때문에 그런 면이 우려가 된다. 장재현 : 카메라기자로서 10년을 보내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에 대해 한 가지 씩만 이야기해보자. 이세훈 : 입사하고 얼마 안 되서 3년 연속으로 물난리가 났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젖은 반바지를 3일이나 입고 있었더니 사타구니가 헐어서 무지 고생을 했었다. 박진호 : 나도 그 즈음에 파주에 물난리 난 것을 취재하러 간 적이 있다. 보트를 타고 나오는 수재민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촬영을 했는데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넌 왜 똑같은 앵글로만 찍냐?”면서 말이다. 내 생각에는 보트를 타고 나오는 가족마다 다 사연이 있을 것 같아서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촬영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꾸지람을 들을 것이다. 그 때는 내가 왜 혼이 나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부끄럽기도 하고 우습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다. 박진경 : 입사하자마자 괌에서 비행기가 추락해 해외 출장을 갔다. 사고 현장에서 유족들이 국화를 던지며 오열하는 장면을 로우앵글로 촬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뷰파인더가 흐릿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내 눈물이 떨어져 뷰파인더가 눈물이 꽉 찬 것이다. 그래서 결국 촬영을 하지 못하고 그냥 왔다. 그때 타사선배가 어깨를 툭툭 치며 담배를 하나 주었다. 정말 그 당시에는 심각하게 ‘내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했었다. 그래서인지 그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세훈 : 씨랜드 화재 때도 취재하던 모든 기자들이 울면서 촬영했다. 그때 마음이 너무 아팠다. 다행히 나는 로우앵글로 촬영하지 않아서 뷰파인더에 눈물은 들어가지 않았다. (모두웃음) 주  범 : 2002년 월드컵도 빼놓을 수 없다. 이세훈 : 취재하다 타사 기자하고 만났는데, 너무 좋아서 카메라 놓고 껴안고 울었다. 그 때는 취재경쟁이고 뭐고 없었던 것 같다. 채종윤 : 나는 상암 월드컵 경기장 삽질 시작하면서부터 취재했는데, 결국 월드컵 때는 경기장에 가보지도 못해 아쉬웠다. 장재현 : 97년 동기들이 다른 기수에 비해 매우 돈독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얼마나 자주 만나나? 박진경 : 자주 모이지는 못한다. 같은 회사를 다녀도 시간 맞추기가 어려운데, 회사들이 다르다 보니 더욱 어려운 것 같다. 예전에 한 번 97년 입사 카메라기자 전 동기가 모인 적이 있다. 그것이 10년 전 일이다. 그 때 우리 동기들이 모인다니까 경찰캡이었던 이희엽 선배가 금일봉을 주셔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주  범 : 이희엽 선배는 정말 멋진 분이다. 바가지 머리에서 옆 가르마로 바꾸신 날, 취재현장에서 선배를 만났다. 내가 “어? 선배, 머리 바꾸셨네요?” 하니까 “어제 까지는 자료화면이야!”해서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난다. 장재현 : 그럼, 입사를 하고 10년이 지난 지금의 ‘본인’에 대해 한 마디 씩 이야기를 하고 이 자리를 가름할까 한다. 카메라기자로서의 마음 자세나 앞으로의 목표 등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해 보자. 이세훈 : 1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고 나니, 초심에 빛이 바랜 것 같다.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나를 본다. 입사 초기에는 기자로서 많은 고민을 했었는데,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는 듯하다. 예전에 영화하는 선배가 한 말이 기억난다. “한국영화는 관객이 40만 명만 들면 대박인데, 뉴스데스크는 몇 백 만 명이 보지 않느냐? 너 함부로 일하면 안 된다!”하고 말이다. 그때 난 그 말을 금과옥조처럼 생각했다. 지금이 바로 그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재춘 : 10년 동안 남은 것은 사람밖에 없다. 이렇게 모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좋다. 우리 동기들의 위치를 사람에 비유하자면 딱 ‘허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선배들과 후배들을 이어주는 위치말이다. 그 ‘허리’로서의 역할에 대해 함께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김  민 : 난 예순이 될 때까지 사건 사고 취재를 하는 것이 꿈이다. 흰 머리, 흰 수염 날 때까지 사건 사고 현장에서 뛰는 카메라기자가 되고 싶다. 채종윤 : iTV를 떠나고 보니 카메라기자만한 직업이 없더라. 우리도 입사 10년 차가 된  현 시점에서 직접 기획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려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다. 현장 경험도 10년 동안 했고, 아이디어도 살아있는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한다. 주  범 : 카메라기자가 각 사별 위상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사회에서 위상은 분명히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특히 출입처에서 카메라기자의 위상이 많이 올라갔고, 카메라기자라는 직업이 일반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졌다. 그러면 지금부터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하나? 우리 아이들이 자라서 카메라기자라는 아빠의 직업을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으면 한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직업, 멋진 직업인 ‘카메라기자’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박진호 : 나 역시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것 같다. 그래서 흐트러지지 않은 마음가짐으로 추진력 있게 일하는 후배들을 보고 각성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박진경 : 역사를 기록하는 지성인으로서 ‘카메라기자’가 멋있어 이 직업을 택했다. 지금은 여러 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고 있지만, 그 와중에 우리는 우리만의 경쟁력을 키워 대체할 수 없는 인력이 돼야한다. 나도 채종윤 기자의 의견에 공감한다. 지금까지는 현상을 전달해주는 역할만 해왔다면, 이제는 그 현상들을 모아서 메시지를 담아낼 수 있는 기획력을 키워야한다. 그리고 또 하나 덧붙인다면, 전문성이 필요하다. 어떤 분야든 상관없다. 역사를 기록하는 영상 지성인으로서 명실공히 자리매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범석 : 시대의 양심이 되었으면 한다. 10년 동안 많은 경험을 했지만 어떤 상황에 내던져져도 양심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우리는 입사 10년 차’를 주제로 진행된 대담은 끝이 났다. 10년 동안 카메라기자로서 일을 하면서 본인들이 느껴왔던 것, 변화한 점, 앞으로의 포부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오랜만에 모여서인지 술자리는 3시간이 넘게 이어졌고, 얘기꽃이 만발했다. 카메라기자 10년 차, 선배와 후배들을 잇는 교량이자 허리인 그들, 앞으로 그들의 활약을 기대해 본다. 안양수 기자 soo179@hanmail.net
    2007-07-23
  • 소리의 울림이 온 몸을 타고 전해지는...
    제목 없음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법Ⅰ> 소리의 울림이 온 몸을 타고 전해지는… 그것이 첼로의 매력 “선생님, 제가 지금 첼로를 배워도 될까요??” “바이올린이라면 조금 힘들겠지만, 첼로는 어렵지 않아요. 걱정하지 말고 한번 해 봐요.” 현악기 제작자인 김동인 선생의 작업실에서 농담처럼 주고받던 말이 인연이 되어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다. 취재하고 쉬기도 바쁜 생활에 그것도 혼자 할 수 있는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한 번도 접하지 않았던 현악기를 배운다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선생님까지 소개해 준 마당에 못한다고 뺄 수가 없었다. ‘어쩌지......? 어쩔까......? 할 수 있을까......?’ ‘그래, 한번 배워보지 뭐!’ 3년 전 처음 첼로 수업을 받던 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다리와 가슴으로 악기를 안고, 송진을 바른 활을 첼로의 현위에 놓고 천천히 당겼다. 온몸으로 퍼지는 현의 울림. 악기에서 난 소리는 몸으로 스며들어 온 몸에 소름을 돋게 했다. 싸구려 악기고, 거칠고 제멋대로인 소리였지만, 소리가 몸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첫 만남의 기억 때문에 아직도 첼로 수업을 받고 있지만, 일주일에 1번씩 받는 수업을 한 달이면 반도 채우지 못해 첼로 실력은 작년이나 올해나 조금의 변화도 없이 그대로다. 그래도 첼로를 배우고 즐기는 이유는 뭘까? 첫째, 첼로는 인간의 목소리와 가장 비슷한 소리를 내는 현악기다. 화려하지도, 단조롭지도 않은 깊은 음색은 듣는 사람이나 연주하는 사람 모두를 묘한 매력 속에 빠져들게 한다. 이런 음색 때문에 실내악에서의 첼로는 다른 악기의 소리를 조용히 받쳐주기도 한다. 와인 같은 가벼운 술을 마시면서 들으면 더없이 좋은 소리가 첼로의 선율이다. 둘째, 첼로는 다리와 가슴으로 악기를 안고 연주한다. 이로 인해 소리의 울림이 온몸을 타고 전해진다. 이 울림이 아주 오묘하다. 소리가 몸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고나 할까. 셋째, 첼로가 내는 음색은 참으로 독특하다. 중저음의 음색은 첼로의 가장 커다란 매력이다. 고음도 장조의 밝은 분위기보단 단조의 애달픈 소리가 더 잘 어울린다. 악기라는 것이 일주일에 적어도 2번 정도는 연습을 해야 간신히 따라갈 수 있는데, 회사 다니면서 한주에 2번 정도 시간을 낸다는 게 그리 쉽지가 않다. 어떤 곡은 3개월을 끌었던 적도 있다. 곡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수업을 한 달에 한 번밖에 못하면서 세 달을 보낸 것이다(물론 연습도 거의 못했지만). 나중에는 선생님이 그냥 다음 곡으로 넘어가자고 포기하고서야 끝났다. 얼마나 창피하던지…… 매번 진도도 제대로 못 따라가는 제자리걸음이다. 그러나 실력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도, 즐겁게 하는 이유는 내가 만들어가는 소리를 몸으로 들을 수 있고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게 나 자신에게 신선함을 선물하기 때문이다. 몇 년 했으면 그래도 웬만큼은 하지 않을까 생각들 하시겠지만 천만의 말씀. 나는 아직도 어린 아이들이 늦어도 1년 정도면 할 수 있다는 첼로 기초 연습모음곡을 2년째 하고 있다. 바쁘다고 피곤하다고 혹은 나이가 너무 많다고 하면서 너무도 무미건조한 삶을 살지는 않으십니까? 비록 작심삼일이 될지라도 오늘 당장 스스로에게 신선한 바람을 일으켜 보시지요. 처음엔 어색하고 어렵지만 바람도 잘만타면 행복하답니다. 이창순 / MBC 보도제작국 시사영상부 기자
    2007-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