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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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념의 벽을 넘어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평양 공연를 취재하고   “이념의 벽을 넘어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따르릉” “평양 좀 다녀와라.” ...“네...”  말끝을 흐리며 전화를 끊는 순간 3년 전 평양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설렘과 약간의 긴장, 같은 민족 간의 동질성과 이질감 사이에서 혼란스러웠던, 인터뷰와 관광이 일정의 전부였지만 호텔 문밖조차 나가지 못하는 통제와 촬영한 화면을 지워야하는 황당함에 화가 났던 2005년의 기억. 썩 내키진 않았지만 가야했다. 가라면 갈 수 밖에...  마음이 바뀌면 행동도 변한다. 북미관계 개선을 바라는 북측의 초청에 미국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인 뉴욕 필은 이념의 벽을 넘어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의의로 평양공연을 결정했다. 각국 언론들은 이를 과거 미국과 중국의 핑퐁외교에 견주며 앞 다투어 보도했고 실제 라이스 미 국무장관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만남을 예상하기도 하였다. 북핵문제와 더불어 미국과 남한의 권력구조가 변하는 시기에 열리는 이번행사는 단순한 공연이 아닌 북미관계에 상당한 영향을 가져올 상징적 이벤트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번 출장 팀은 한층 더 긴장 할 수밖에 없었다.     2월 23일 아침 6시 마침내 십 여대의 중계차량과 버스가 평양을 향해 출발했다. 이번 행사의 취재를 위해 보도진은 선발대로 취재기자 3명, 카메라기자와 오디오맨 2명이 육로로 방북하고 취재기자 1명과 카메라기자, 오디오맨 2명은 중국에서 뉴욕필 단원들과 함께 항공편으로 평양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북측 CIQ에 도착하니 CNN 취재팀이 우리를 취재 하기위해 기다리고 있었고 북측의 입국수속도 예상보다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9시30분 개성을 지나 평양에 도착하니 12시 30분. 북녘 땅에도 따스한 봄 햇살이 겨울을 녹이고 있었고 우리를 맞는 북측 안내원들도 친절했다.  그러나 막상 취재에 들어가니 역시나 제한과 통제가 가해졌다. 매일 밤 내일 취재를 위해 북측과 협상과 실랑이를 해야 했고 당초 아무문제 없을 거라던 송출도 이런저런 이유로 자유롭지 못했다. 별도의 취재차량을 확보하지 못한 탓에 북측이 제공한 차량에 일방적인 일정을 따라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당초 기획했던 아이템들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예정된 행사일정에 대한 기본적인 취재마저 쉽지 않았다.  북측의 호의적 태도를 기대했던 우리의 예상은 빗나갔고 역시 북측은 당일 공연행사의 진행에만 관심이 있을 뿐 혹시라도 있을 행사에 부정적 보도를 우려한 탓인지 기자단, 특히 남측 보도진들에 대한 관리와 통제가 무척 심했다. 기본적인 거리스케치도 승인받은 구간에서만 허가되었고 두세 차례에 걸친 촬영화면 검열, 기사 사전제출도 요구받았다. 취재가 끝나면 매일 밤 다음날 아이템을 논의하고 다시 북측과 취재동선과 송출시간을 협의해야 했다. 취재통제에 대한 답답함과 아쉬움이 쌓여갔지만 어떤 상황에도 뉴스는 나가야 했다.  마침내 공연 당일 평양거리는 밤새 내린 눈으로 하얗게 변해있었고 우리 취재팀은 긴장하며 공연장인 동평양 대극장으로 향했다. 공연을 준비하는 남측과 북측 그리고 미국 측의 모든 스텝들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정작 우리 취재팀은 공연장 내부 취재를 승인받질 못했다. 공연을 취재하러 와서 정작 공연장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게 우리 입장에서는 황당한 일이었지만 북측과 미국 측이 이번 공연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두고 있는가에 대한 반증이기도 했다.  마침내 한 시간 반의 공연이 끝나고 공연장을 나서는 관객들의 표정은 모두 조금씩 상기되어 있었다. 입장할 때 하나같이 딱딱하게 굳어있던 이들의 표정을 환하게 변하게 한건 무엇이었을까?    이번 뉴욕필 평양공연은 여러 의미 있는 기록을 만들어 냈다. 단원들과 ABC, CNN등 주요 언론사 기자단, 참관인들을 포함해 269명에 달하는 미국 측 방북단은 역대 최대 규모였고 공연장인 동평양 대극장에 적대국인 북, 미 양국 국기가 내걸리고 양국 국가가 연주되는 공연내용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이번 공연을 위해 MBC는 남북 방송 역사상 최대 규모의 장비와 인력을 모두 육로를 통해 이동시켰고 공연 실황은 HD화질로 조선중앙TV를 통해 북한 전역과 전 세계 15개국에 생중계 되었다. 남한의 방송사를 통해 생중계되는 미국의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는 북한 주민들은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 보고 싶은 것도 많았고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다. 이번 취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 차량을 신기한 듯 바라보던 북측 주민들. 비록 직접 그들을 만나고 취재할 순 없었지만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평양의 모습을 마음속에 담고 평양의 미국인이 아닌 자유롭게 취재하는 평양주재 기자를 꿈꿔본다. 정우영 / MBC 보도국 문화스포츠영상팀 기자
    2008-04-28
  • 숭례문의 마지막을 지키며
    <숭례문 화재 취재기 Ⅰ> 숭례문의 마지막을 지키며  우리가 하는 일, 카메라기자라는 직업은 마음이 굳센 사람이어야 잘 해낼 수 있는 것 같다. 대형 화재나 교통사고와 같은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현장에서도, 또 사건 유가족 취재와 같은 가슴이 무너지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슬픈 현장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스스로 끊임없이 되뇌일 수 있어야 하니 말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의 슬픔이나 커다란 사건사고의 현장을 정신없이 취재하는 동안 마음에 슬그머니 떠오르는 생각, 내가 저 사람들의 슬픔을 이렇게 한 발 물러나서 카메라에 담고, 저렇게 안타까운 사건의 현장을 객관적으로 전달함으로써 내가 나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들도 매순간 떠오르기 때문이다.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너무 큰 비약이지만, 항상 터지는 일들과 각종 사연들 속에서 냉정하고 공정하게 영상취재를 함으로써 우리의 존재가치를 종종 느끼게 되곤 하니 마음이 굳세지 않고는 자칫 회의감에 상습적으로 시달릴 수밖에 없는 일이 바로 우리의 일이다.  설 명절의 끝자락에 주간 근무와 야근이었다. 다행히 연휴 중간에는 근무가 없었기에 고향에 다녀와서 편안한 마음으로 근무를 섰다. 연휴 마지막에 큰 사건이야 있겠냐며 뉴스를 보고 있는데 숭례문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황급히 장비를 챙겨서 나가는 동안에도 숭례문 일대 어딘가에서 그리 크지 않은 불이 났겠거니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서울역에서 숭례문을 향해 올라가는데 정말 숭례문 지붕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어..어.. 하는 동시에 차에서 내려 현장을 영상취재하기 시작했다. 정말 이런 일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그래도 그나마 연기만 나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스케치를 했다. 수많은 소방차들과 소방관들이 쉬지 않고 물을 뿌렸다. 연기가 잠잠해질 즈음 숭례문 안쪽으로 소방관들이 들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진화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에서 생생한 모습을 담기 위해 얼어서 미끄러운 계단을 올라가서 내부 모습을 잠시 스케치했다. 한동안 정신없이 현장이 흘러가더니 이제 불이 곧 잡힐 듯 보였다. 연기도 잦아들고 있었다. 내심 그래도 정말 이만하기를 다행이라며 이후 어떤 그림을 취재해야 좋을지 떠올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근근이 끊이지 않던 연기가 점점 심해지고 결국 크레인에 올라탄 소방관들이 숭례문 현판 앞에서 무언가 작업을 시작했다. 결국 지붕 내부에 있던 불을 잡지 못했던 모양이다. 숭례문의 얼굴과도 같은 현판을 보존하기 위해 떼어내기로 결정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작업하는 소방관들과 현판을 주시했다. 크레인이 좌우로 움직이며 작업한 지 오래지 않아 곧 우당탕 소리와 함께 숭례문 현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일반인들의 현장 접근을 막던 의경들도 깜짝 놀라 떨어진 현판을 쳐다봤다. 나 역시 레코딩 불빛이 들어온 뷰파인더를 보면서도 아- 하는 소리를 낮게나마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나 얼마 후부터 시뻘건 불길이 2층 누각 틈새로 보이기 시작했다. 낼름거리는 뱀의 혀에 비유한 불길의 모습 그대로였다. 흰 연기가 아니라 짙은 회색의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외곽에서 취재를 하면서 정확한 진화 상황을 그때그때 알 수 는 없었지만 일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은 직감할 수 있었다. 숭례문 지붕의 구조를 당시 자세히 알 수 없었기에 그렇게 많은 물을 뿌려대는데도 안쪽의 불길을 잡지 못하는 모습에 의아해 하기도 했다. 그 많은 소방관들의 노력과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의 안타까운 눈빛과 마음 졸이며 현장을 취재하는 기자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결국 거센 불길은 숭례문 2층 누각을 집어삼켰다. 점점 번져가는 불길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정신이 번쩍 들만큼 추운 날씨였지만 이게 정말 현실에서, 내 눈 앞에서 일어나는 일이 맞나 하는 착각도 들었다. 한참을 타던 숭례문은 결국 한 귀퉁이부터 조금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자기의 얼굴 같은 현판을 떼어낸 숭례문이 힘없이 주저앉고 있는 것 같았다.    정신없던 화재현장에서 숭례문 현판이 떨어지는 순간을 포착한 덕분에 회사에 입사한 이 후 가장 큰 칭찬을 받았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많은 선배, 후배들이 격려를 해주시기도 했다. 운이 좋았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과분한 칭찬을 받았음에도 현장에서 화재를 취재할 때도 회사에 들어와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무거움이 조금 남아 있었다. 숭례문이 전소되는 현장을 끝까지 지키고 많은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뉴스를 전달할 수 있었다는 뿌듯함과 동시에 그 아픈 현장을 마음속으로만 걱정하며 지켜봐야 했다는 안타까움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밤 내내 나는 시린 발을 동동 구르며 직분에 충실하고자 하는 단단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오랜 친구를 떠나보내는 아쉬움과 허무함 또한 그 안에 함께 있었다.  나는 내 일을 사랑한다. 슬프고 아쉽고 힘든 현장들을 취재하는 일들이 있기에 항상 마음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의 한가운데에서 오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비록 숭례문은 그렇게 아쉽게 보냈지만 그 마지막 모습을 내가 끝까지 옆에서 지켜줬다는 뿌듯한 마음 때문이다. 숭례문의 현판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비통한 모습을 나의 눈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동환 / SBS 영상취재팀 기자
    2008-04-28
  • 사라진 숭례문, 우리 지성의 현주소를 보여줘
    <숭례문 화재 취재기 Ⅱ> 사라진 숭례문, 우리 지성의 현주소를 보여줘  2008년 2월 10일 밤 8시 50분경. 국보 1호가 불에 타기 시작했다. 내가 숭례문 현장에 도착한 것은 12시가 거의 다 되어서였다. 현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2-3분 간격으로 걸려오는 전화 속 선배의 목소리는 다급함 그 자체였다. “지금 가고 있다니까요, 선배! 곧 도착할 겁니다.” 나의 이유 있는 답변은 선배를 전혀 안정시키지 못했다. 그 이유는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누구라고 그렇지 않았을까.  옥상을 개방해준 YTN 덕분에 나는 불타는 숭례문을 공중에서 취재할 수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밀집한 메트로폴리탄 중의 하나인 서울의 한복판에서, 우리를 상징하고 그뿐 아니라 우리의 역사를 상징하는 숭례문이 붉은색 망토를 뒤집어쓴 채 춤추고 있었다. 5시간이 지나서, 숭례문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치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 내 가정의 처녀가, 폭군의 노리개가 되어 강제로 춤추며 흥을 돋우는 운명에 놓였다가, 삶의 모든 이유를 잃어버린 채 혀를 깨물고 바닥에 쓰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 모습은 슬펐다. 나 뿐 만아니라 불이 날 때, 그리고 불이 꺼지고 난 후 현장을 찾은 많은 사람들의 한결같은 그 슬픔은 무엇에 근거한 것일까?  민족적, 사회적 분노와 허무는 상당히 오래 지속됐다. 그리고 그 감정들은 대부분 우리가 책임이 있다고 믿는 관계당국들 - 소방방재청과 서울시 중구청, 그리고 문화재청 등 - 을 향했다. 물론 그러한 책임추궁은 매우 타당하다. 그러나 주저앉은 국보가 단지 그들만의 문제라고 결론 내버린 사회적 분위기가 썩 개운치만은 않다. 오히려 숭례문 화재가 그동안 우리 사회가 축적해온 지적, 문화적 정신적 수준을 단적으로 드러내주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우리의 민의를 대변한다는 국회가 문화재청에 내준 전체 예산 규모는 4278억 원이다. 이는 정부 전체 예산의 0.19%에 불과하다. 프랑스의 경우 문화재 복원비용으로만 5천 6백억 원을 쓰고 있다. 234개 지자체 중 문화재 전담부서를 두고 있는 곳은 단 4곳밖에 없을 정도로, 우리의 문화재 관리는 허술했다. 그러한 관행과 현실로부터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한명 한명의 시민들이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가 무관심하고 그 중요성을 잊고 있는 동안 우리가 보수하고 후손에 돌려줘야 할 문화는 조금씩 훼손되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한 사회를 평가할 때 국민총생산이나 무역규모, 기업의 투자 같은 것들을 손쉽게 지표로 삼지만, 그러한 것들이 한 사회의 진면목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문화 - 총체적 의미에서의 - 야말로 그 사회의 지적 성숙도, 시민의식, 정신의 깊이를 가늠케 하는 진정한 척도라 할 수 있다. “우리도 최선을 다했다.”는 어느 소방관의 항변은 그야말로 유아적이고 천진난만하다. 그러나 철부지 같은 한 소방관의 말에는 문화적으로 지적으로 그 깊이가 매우 얄팍한 우리의 현실을 정확히 꼬집는 것 같기도 해 씁쓸했다. 적어도 이번 화재를 통해 단지 한 단면만을 보고 또 다른 측면을 보지 못하는 눈은 정확하지 못하다.  불을 끄지 못하고 허둥대는 소방관의 모습에는 적어도 문화의 보수와 질적 성장을 외면해온 대한민국의 모습이 오버랩 돼있다. 사라진 국보는 우리 사회 지성의 현주소를 상징하는 거울인지도 모른다. 화재 관련 당국을 합리적으로 문책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 사회가 저마다의 방기된 책임에 대해서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어쩌면 600년을 산 민족의 선생이 자신을 태우면서 우리에게 남기고 싶은 교훈은 아니었을까. 김정은 / KBS 보도본부 영상취재팀 기자
    2008-04-28
  • 국보에서 잿더미로...
    <숭례문 화재 취재기 Ⅲ> 국보에서 잿더미로...  5일간의 설 연휴 마지막 날 야간근무. 요란한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들린 건 저녁 8시 40분경.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회사라 한밤의 사이렌소리는 그다지 대수롭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날만큼은 대형화재가 났음을 감지할 정도로 요란하고 끊임이 없었다. 곧이어 울리는 전화벨은 남대문에서 연기가 난다는 한통의 전화였다.  장비를 챙겨들고 가면서도 남대문 시장 혹은 남대문 성곽 주변 잔디밭 정도가 탔으려니 했지만 다가가면 갈수록 남대문 누각에서 연기가 피어오름을 알 수 있었다.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하였기에 일단 9시 뉴스에 1보 화면을 쓸 수 있도록 2분가량의 현장스케치를 했고, 과욕을 부린다면 성곽 1층 내부로 접근이 가능한 정도였기에 몇 시간 후 숭례문이 붕괴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서울시내 전 소방서가 출동할 정도로 많은 인원이 투입되었고 불길이 점점 잡혀간다고 생각되었지만 11시경 숭례문 현판이 철거되었고 천장과 기와 사이로 희뿌연 연기가 아닌 불꽃이 보이기 시작했다.  불길을 잡기 위해 대형 장비를 총동원했지만 상황은 점점 극단으로 치달았고 붕괴의 조짐 속에 소방관들 역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었다. 일요일 밤 늦은 시간이었지만 방송을 보고 모여든 시민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현장에서 추위에 떨던 동료 영상기자들도 마찬가지의 감정이었을 것이다.  새벽 1시경 2층 누각의 기왓장이 떨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소방대원들도 달리 방법을 찾지 못하였다. 한 컷 한 컷 600년의 역사가 사라짐을 취재하는 동안 숭례문의 마지막을 보여준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얼어버린 발은 감각을 잃어 느낌이 없었고 마지막 붕괴로 1층 누각까지 잿더미로 변해버린 숭례문은 내 가슴마저 무너지게 하였다.  야근이 끝나고 퇴근하는 길에 다시 본 숭례문의 처참함은 취재 당시 치열하게 영상을 담으며 냉정을 잃지 않으려던 나에게 침울함마저 들게 했다. 이후 허술해서 숭례문을 골랐다는 방화범의 말은 그간 하루에도 몇 번씩 숭례문을 보며 생활했던 내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카메라기자로 살아온 5년, 수많은 취재현장에서 항상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유지하려 했지만 쉽지 않을 때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번 숭례문 취재 역시 마음의 평정을 가지려 했지만 쉽지 않았고 직업을 초월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 북받쳐 오는 감정은 막을 길 없었다.  최근 대형사건사고가 많이 발생하고 카메라기자들의 눈이 수많은 사람들의 시각이 되어야 하는 시점이다. 현장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기 쉽지는 않겠지만 초심을 잃지 않는 모습이   진정 카메라기자의 자세라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 취재였다. 이승준 / YTN 보도국 영상취재팀 기자
    2008-04-28
  • <추천하고픈 책> 성철스님 시봉이야기
    제목 없음 미래의 삶을 위한 화두를 안고 정진하는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이 책은 제가 대학교를 복학하기 전에 우연히 읽게 된 책입니다. 그로부터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이제는 기억 속에서 잊혀질 만도 한데 추천도서로 이 책이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많은 선배님들께서 즐겨 읽으시는 협회보에 추천하기에 이 책이면 손색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고, 여러분들도 이 책을 읽고 나서 남는 여운은 결코 짧은 시간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철스님 시봉이야기. 스님이 주인공인 만큼 난해하고 훈계적인 불교서적이 아닐까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이 책은 절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일기 형식으로 모아놓은 에피소드 집에 가깝습니다. 제목만 보고는 성철스님이 쓴 자서전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곁에서 성철스님을 시봉했던 제자 원택스님이 함께 수행하면서 겪었던 여러 일화들을 3자적 관점에서 관찰하며 써나간 책입니다. 이렇게 성철스님의 곁에서 20여 년을 시봉했던 저자의 눈을 통해 독자들에게 성철스님의 삶과 수행, 가르침과 깨달음을 전달합니다.  암자에 철망을 두르고 10년 동안 눕지도 않고 철저히 수행한 스님. 삼천 배를 하지 않으면 대통령이라고 해도 만나주지 않았던 강직하고 고집스런 스님. 이 책에서 보여주는 성철스님의 모습은 그런 외적인 부분뿐만이 아닙니다. 어디에서도 공개되지 않았던 다양한 사진들까지 본문 사이에 실려 있어 그의 인간적인 모습까지도 느낄 수 있습니다.  올해로 열반에든지 8년. 하지만 그에 대한 관심은 이승을 떠나지 않고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성철스님은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화두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깨달음은 화두를 들고 방에만 틀어 박혀 있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찰나에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라도 수행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책을 읽고는 여러분들도 각자 자신의 현재 삶에서, 나아가 미래의 삶을 위한 화두를 항상 안고서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깨달음을 위해 항상 정진하셨으면 합니다. 강광민 / OBS 보도국 영상취재팀 기자
    2008-04-28
  • <릴레이 인터뷰> mbn 박원용 기자
    <이어지는 인터뷰 시즌2 - mbn 보도국 영상취재부 박원용 기자> "카메라기자 모두가 '진정한 능력'을 갖기 바라며"  지난달 20일, 나는 mbn 박원용 기자와 인터뷰 약속을 하고 국회를 찾았다. 박원용 기자는 현재 국회에 출입하고 있으며, 국회 반장을 맡고 있다. 그 날 국회는 새 대통령 취임식 준비로 매우 분주한 모습이었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박원용 기자 역시 매우 바쁜 일정을 소화해 내고  있었다. 국회 정문에서 만난 박 기자는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다는 말과, 부끄럽다는 말을 연신 반복했다. 매우 친근한 것이 슈퍼마켓 아저씨 같았다. 이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 지난 인터뷰 주자인 YTN 한원상 차장이 박원용 기자를 ‘소신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본인의 일에 대한 ‘소신’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더불어 이어지는 인터뷰 시즌2의 바통을 넘겨받으신 소감이 어떠신지 함께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남다른 ‘소신’을 가지고 일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일에 ‘소신’을 갖고 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내가 생각하는 소신은 특별히 거창한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해 실천에 옮기고,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면 그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한원상 차장이 이번 이어지는 인터뷰 주자로 나를 추천했는데, 사실 매우 겸연쩍다. 내가 뭐 특별히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수상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타의 귀감이 될 만큼 뛰어난 인품을 가진 것도 아닌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많은 고민이 되었다. ‘이어지는 인터뷰 시즌2’의 기획 의도가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는 것이어서 어찌어찌하다 보니 내가 추천이 된 것 같은데, 나 같은 사람보다는 여러 훌륭하신 선배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배우는 코너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 카메라기자로 일을 한 지 몇 년이나 되셨습니까? 일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카메라기자로 일을 한지 올해로 17년이 되었다. 카메라기자를 시작한 때가 엊그제 같은데, 17년 이라는 세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아이러니하게도 17년 이라는 시간을 지내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참사’이다. 나는 성수대교가 붕괴되었을 때도,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도 현장에 취재를 갔었다. 10여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곳에서 내가 촬영했던 장면들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는 퇴근시간 무렵이라 차가 막혀 늦게 도착할까봐 현장에 지하철을 타고 갔다. 가보니 기가 탁 막혔다. 그 큰 백화점이, 그렇게 튼튼해 보이던 백화점이 정말 무너져 있었던 것이다. 내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 때는 참 의욕이 대단했던 것 같다. 그 때 우리 애가 5개월 정도 되었을 때인데 겁도 없이 그 속으로 카메라를 들고 들어갔으니 말이다. 지금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은 일들을 그 때는 했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나이가 들긴 들었나보다. 3. ‘카메라기자’라는 직업이 매우 자랑스러웠을 때나 특별히 보람을 느꼈던 일이 있으시다면.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시청자에게 그들이 직접 보기 어려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을 때이다. 1998년, 북한이 금강산을 처음 개방했을 때, 나는 mbn 대표로 그곳 취재를 갔었다. 금강산에 도착하자마자부터 아직 금강산을 보지 못한 시청자들에게 그곳의 면면을 보여주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기억이 난다. 카메라를 들고 그 높은 봉우리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도 힘든 줄을 몰랐다. 내가 촬영한 영상을 본 시청자들이 ‘금강산이 저렇게 생겼구나!’하고 감탄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카메라기자를 하면서 아마도 그때 가장 보람을 느꼈던 것 같다. 4. 미래에 본인이 카메라기자로서 정년을 맞았을 때, 스스로 어떤 기자였다고 평가받고 싶나?  어떤 기자였다고 평가받고 싶다고 하기 보다는 특정한 뉴스를 떠올렸을 때, 나 ‘박원용’을 단박에 생각해 낼 정도로 인상적인 ‘특종’을 하고 싶다. 특종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나는 아직 특종다운 특종을 해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내 가까이에 있는 특종’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개인적으로 여행을 갈 경우에도 캠코더를 소지하는 편이다. 내 눈 앞에서 사고가 났는데 캠코더가 없어 그것을 촬영하지 못한다면 카메라기자로서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는가? 그렇게 얻은 특종, 그 뉴스로 내가 기억된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5. 2008년 새해가 밝은지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올해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으시다면.  올해는 열심히 공부를 해보고 싶다. 공부와 담을 쌓고 술과 친구한 세월이 길어 잘 될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한 해를 보내고 싶다. 방송 환경이 급변하면서 새롭게 익혀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지금껏 그런 것들을 외면하며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올해는 인터넷 송출 등 앞으로 내 업무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내 것으로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 6. 후배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요즘은 너무도 훌륭한 후배들이 많다. 공부도 많이 하고, 능력도 출중한데다가 다들 외모도 준수하다. 오히려 내가 그들에게 한참 배워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다소 인간적인 면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후배들도 많지만, 어느 집단이건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인간관계’이다. 그리고 그 역시 매우 중요한 능력으로 인정된다. 누군가가 얘기했다. ‘진정한 능력은 타인으로 하여금 본인을 향해 환한 웃음을 짓게 하는 것’이라고… 후배들 모두 진정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6. 협회에 바라는 점이 있으시다면.  협회에서 회원들을 위해 다양한 교육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수중 촬영 교육이나 넌리니어 편집 교육 등 현업과 관련된 교육과 함께 은퇴 후를 대비한 교육도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예를 들면 재테크나 창업에 관련된 교육이 있을 수 있겠다. 나뿐만 아니라 다수의 회원들이 이 부분에 관심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7. 다음 이어지는 인터뷰 주자를 추천해주세요.  다음 인터뷰 주자로는 SBS 김두연 차장을 추천한다. 김두연 차장은 업무 면에서도 물론 출중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진정한 능력’을 가진 분이다. 누구에게나 진심으로 그리고 친절하게 대하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대하면 환하게 웃지 않을 수 없다. 타인으로 하여금 미소 짓게 하는 분, 나는 그를 추천한다. 안양수 기자 soo179@hanmail.net
    2008-04-25
  • 신입 카메라기자 인사말-mbn 보도국 영상취재팀 안석준
    세상을 밝히는 카메라기자가 되겠습니다!  부산 해운대 백사장에 홀로 멍하니 앉아있었습니다. 최종면접 이후 하루하루 긴장하고 살고 있었고, 무엇을 해야 할지 분간하지 못하던 시간이었습니다. 세상이 점차 어두워지면서 노을이 더욱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게 변해가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습니다. “안석준 씨? 월요일부터 출근하시면 됩니다. 축하드립니다.”  세상을 다 가진듯한 행복감에 취해 백사장을 웃으면서 뛰어다녔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함에 흠뻑 젖어있었습니다. 부산에서 짐을 챙겨 급하게 서울로 상경한 후 짧은 시간동안 정말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힘들고 지친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뷰파인더를 통해 바라본 세상은 저 혼자만의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방송을 통하여 시청자들과 함께 하는 순간만큼은 제가 바라본 세상을 시청자들도 곁에서 함께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태안의 기름띠 속에서, 숭례문이 붕괴하는 순간에도 좁은 뷰파인더로 바라본 넓은 세상은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순간순간 변하는 상황 속에서 ‘무엇을’ 찍을 것이냐 보다 ‘어떻게’ 찍을 것인지 고민하는 카메라기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찍을 수 있는 평면적인 그림을 찍어 와 제가 촬영한 현실을 다시 한 번 바라봅니다. 과연 이 세상이 시청자들과 공감할 수 있는 그림인지…  뛰어난 선배님들의 많은 조언과 질책을 통해서 하나씩 배워나가고 있지만 항상 저 자신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Rec'버튼을 누르는데 급급해서 정작 무엇이 중요한지 잊어먹는 날이 태반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뵙게 된 수많은 선배님들은 무지한 후배에게 항상 편안하게 가르쳐 주시고 챙겨 주셨습니다. 그런 선배님들의 조언 하나하나로 제가 조금씩 다듬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카메라기자’라는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큰 오만이고 건방짐이었는지를 깨닫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항상 공부하고 배우는 자세를 견지하지 못하면 저에게 부끄러워 감히 ‘카메라기자’라는 타이틀을 달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도 생겼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채워나가고, 꿈을 위해 걸어 나가는 진정한 ‘카메라 기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 노력의 땀 한 방울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밝혀주었으면 합니다. 안석준 / mbn 보도국 영상취재팀 기자
    2008-04-25
  • 오른쪽 어깨의 무게와 책임감에 대해 생각하며
    <안녕하세요? mbn 신입 카메라기자입니다!> 오른쪽 어깨의 무게와 책임감에 대해 생각하며  “왜 카메라기자가 되고 싶었니?”  질문은 면접 때에만 쏟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지난 3개월간 수습기자 생활을 해오며 선배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왜?”라는 질문은 늘 그렇듯 원인과 본질을 건드린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묻는 것일 수도 있는데 답변이 오히려 너무 거창해질 것 같아 고민하게 만들곤 한다. 실은 대관절 언제부터 카메라기자가 되고자 마음을 먹었는지 그리고 어떠한 계기가 있었는지 명쾌하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저 멋져보였던 선배들의 모습에 대한 치기어린 동경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맞는 이야기이고, 언론인으로서 사회를 한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데 일조하겠다는 거창한 포부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카메라기자라는 직업은 언제부턴가 마음속에 스며들어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스스로의 미래상이 되었고, 마침내는 mbn의 신입으로서 카메라를 짊어지게 되는 행운을 끌어안았다.  불과 입사 3개월짜리 수습이 카메라기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스스로를 회고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 하지만 멋모르는 수습이기에 또한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세상에 대해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던 대학시절,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이제는 구태의연하기까지 한 문구를 입에 달고 지냈다. 그리고 지금도 모든 가치의 원천이고 변화와 행동의 중심이 ‘사람’이라는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삶의 현장 최전선에서 땀 흘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떳떳하고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다. 나는 카메라기자들이야 말로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라 믿는다. 저널리스트로서 사회 곳곳을 누비며 TV뉴스를 생산해내는 최전방의 주인공들이다. 10년, 20년이 지나고 백발이 성성해도 카메라를 메고 현장에서 살아 숨쉬는 내 자신을 상상할 때면 전율이 느껴진다. 이것이 카메라기자가 되고자 했던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지니고 있었다.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처럼 끊임없이 스스로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며 표출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어떠한 방법으로 표출해 나갈지를 비로소 발견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영상을 통한 표현이야 말로 그 무엇보다 힘 있고 매력적인 도구일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나아가 내가 취재한 영상의 힘으로 세상의 부조리한 부분이 치유되고 고통 받던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행복할 수 있다면 그만큼 보람 있는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이 내가 카메라기자를 꿈꿨던 또 다른 이유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지난해 내겐 첫 공채 도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메라기자로서 mbn에 입사할 수 있게 된 것은 특별한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남들에 비해 그리 오랜 시간동안 준비를 한 것도 아니었고, 경험이 풍부하거나 남다른 감각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어찌 보면 ‘하고 싶다’는 열정만으로 도전한 것인데, 이를 기특하게 보아주신 선배들께 너무도 감사할 따름이다. 입사한 지 3개월, 아직도 많은 것이 낯설고 새롭다. 카메라를 다루는 것도 그리고 취재를 하는 것도 어색하고 실수투성이다. 하지만 쌓여가는 실수는 곧 스스로 만들어가는 교과서일터. 더욱 많이 시도하고 도전해보고 싶다. 우리들의 오른쪽 어깨가 무거운 것은 비단 카메라의 무게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뉴스 생산자로서의 책임 그리고 시청자들에 대한 책임이 바로 우리들의 어깨 위에 놓여있다. mbn의 그리고 한국 방송 뉴스의 든든한 ‘어깨’가 되도록 하루하루를 값지게 살아나가야겠다. 전국의 신입 카메라기자들 모두 건승하길 기원한다. 파이팅! 최진영 / mbn 보도국 영상취재팀 기자
    2008-04-25
  • 명예카메라기자 영상 교육을 마치고
    제목 없음 <명예카메라기자 마당> 명예카메라기자 영상교육을 마치고  2008년 2월 28일부터 3월 1일까지 기대하던 첫 대학생 명예카메라기자의 영상교육 일정이 있었습니다. 처음 나온 교육일정에 나는 기대감 반, 궁금함 반, 빨리 교육날짜가 다가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첫 교육이 있었던 28일 항상 머릿속에 그리기만 했었던 3기 명예카메라기자 동기들을 볼 수 있었고, 드디어 무언가를 한다는 생각에 즐겁기만 했습니다. 다들 모여 자리에 앉았고 준비해두신 자료를 받고나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정민환 사무처장님의 간단한 뉴스에 대한 이야기와 영상이야기로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그 이야기 속에는 아이템 선정 후 사전취재와 좋은 영상을 만들기를 위한 끝장토론, 어떻게 보여 줄 것인가? 에 대한 구성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항상 영상을 만들고 기획을 하게 될 때면 해야 되는 고민들이였습니다. “왜?” 라는 의문점을 풀어내기 위해 많은 정보와 지식을 사전 취재해야 된다는 것 이였는데, 예전에 영상물을 기획할 때 ‘이정도면 됐지모.’ 라는 생각을 했던 내가 살짝은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카메라 장비와 기본용어에 대한 설명도 해주셨습니다. 간단하게 3기들과의 스피드퀴즈방식으로 기본용어에 대한 것도 익히며, 따로 장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뷰파인터는 정보창이다.!’ 라는 말이 참 인상 깊기도 했습니다. 항상 카메라를 보면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부분인데 그걸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 하는 사람들은 드물기 때문이였습니다.  둘째 날 29일에는 직접 카메라를 만져보고 간단한 화면사이즈에 대한 이야기와 무빙샷, 그리고 인터뷰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3:3:3:3법칙에 대한 강조와 촬영 시 주의사항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직접 ENG 카메라도 만져보게 되고 카메라 각 부분를 직접 보면서 수업을 듣게 되니 쉽게 이해도 되고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대부분 6mm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촬영해서 그런지 ENG 카메라를 보면 뭔가 거대하고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직접 보게 되니 큰 카메라나 작은 카메라나 어렵기 보다는 굉장히 비슷하고 큰 카메라가 조금 더 단순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지막 날, 3월 1일에는 이틀 동안 배웠던 이론을 기본으로 직접 카메라를 들고 찍어보고, 직접 만든 영상을 다 같이 보는 리뷰 시간도 갖게 되었습니다.  3기들의 직접 만든 영상을 보면서 어떤 부분이 좋고, 더 부족한 점인지 이야기도 하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을 본다는 것이 참 재미있었고, 사람들의 생각과 표현 방법은 다양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만든 영상을 보면서 촬영실습을 같이 하게 됬는데, 촬영을 할 때 꼭 트라이포드를 사용하며, 직접 다가가 찍어보는 방법으로 여러 컷을 찍는 실습을 했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줌인 줌아웃을 쓰면서 찍는 방법을 사용하다가 다리를 사용하고, 줌인 줌아웃 없이 직접 다가가서 찍는 방식은 답답하기도 했고, 불편하기도 했지만 레코딩을 누르기 전에는 어떤 화면구성을 해야 되는지 한번 더 생각을 하게 되고, 다음 화면은 어떤 화면을 보여줘야 될 것인가? 라는 그림을 계속 그리게 되었습니다.  이번 3일간의 교육을 받으면서 카메라와 영상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다시 받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한 컷을 찍는지에 따른 노력이 한 화면을 얼마나 잘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교육에 참여하면서 많은 걸 느끼고 배운 것 같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라면 더욱 더 공부하고 노력해야 된다는 것... 사소한 것이지만 항상 기본을 생각해야 된다는 것...  이런 자리 마련해주신 모든 한국방송카메라협회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지선 / 제3기 대학생명예카메라기자
    2008-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