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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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하마을 취재기
    “저희 집 안뜰을 돌려주세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하 노전대통령)의 소환에 날짜가 다가오자 봉하마을의 취재 열기는 뜨거워졌다.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수장이었던 한 사람의 비리 의혹과 진실에 대해 궁금했고 이에 부응해 언론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초점을 맞춰 머리기사로 다뤘다. 마당을 산책하면서 찍힌 사진은 ‘수심이 가득한 전 대통령’이라는 꼬리말을 달고 대중에 공개되기도 하였다. 4월의 봄기운이 가득한 어느 날, 기약 없는 출장을 떠났다. 노전대통령이 소환되는 날까지 봉하마을을 지키기로 하였다. 출장의 가장 큰 목적은 노전대통령의 수심 가득한(?) 얼굴 표정을 담는 것이었다. 벌써 몇 일째 바깥 출입을 자제하고 있었고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집안에만 있는 그를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노전대통령을 열렬히 지지하는 주민들에게 언론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마을 내에서의 취재 협조가 쉽지 않았다. 심지어는 노전 대통령 집 정문이 보이는 곳에 진을 치고 있는 취재진들을 트랙터로 쫓기까지 하였다. 주민들의 행동이 못 마땅하게 보였지만 심정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자들은 자연스럽게 높은 곳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사저 뒤쪽 봉하산 꼭대기의 사자바위와 정면으로 보이는 과수원 중턱이 그 대표적인 취재 장소가 되었다. 봉하산 꼭대기는 봉하마을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고 노전대통령 집을 훤하게 볼 수 있는 곳이었다. 한두 번 정도 언론에 공개된 후 커튼 등으로 완벽하게 가려져 집안은 볼 수 없었다. 아침에 올라가서 망원을 장착하고 마치 저격수인양 엄폐한 상태에서 뷰파인더를 보며 하루 종일을 보냈다. 노전대통령의 그림자는 얼씬 거리지도 않았고 그러기를 며칠 동안 반복하였다. 오염되지 않은 맑은 공기를 마시며 세상을 내려다보는 신선놀음을 하는 듯싶었으나 그 무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서울보다 남쪽에 있어서 일까? 태양과 좀 더 가까운 곳에 있어서 일까? 4월의 봄이라고 하기엔 너무 따가운 햇빛과 무더운 날씨였다. 서울과 다르게 가로등이 없는 이곳 시골마을은 해가 반대 산 너머로 사라지면 금방 어두워지기 때문에 하산을 해야만 하고 그 시간이 곧 퇴근 시간이 되었다. 며칠이 지난 뒤 그날도 어김없이 산위에서 뻗치기를 할 때였다. 다른 때와 다름없이 무료하게 퇴근 시간을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였다. 전화를 통해서 노전대통령이 자신의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에 최근 심경을 올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저의 집 안뜰을 돌려주세요’라는 제목으로 기자들이 산위에서 까지 지키고 있어 사적인 생활을 할 수 없고 그런 본인의 집을 감옥에 비유하기 까지 하였다. 기자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산 정상에서 철수하고 내려가서 다른 기자들과 토론을 시작했다. 취재의 목적, 정당성, 인권침해 등등... 취재과정에서 과열 양상이 벌어지면서 취재 대상이 되었던 노전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피해자 아닌 피해자가 된 것이다. 각 언론사의 이해관계도 있으니 각자 이 상황을 회사에 보고하고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토의 결과를 노전대통령 측과 마을 주민에게 통보해주었다. 김경수 비서관을 통해서 신경써줘서 고맙다는 답신이 돌아왔고 대신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마을에서 취재하는데 큰 제약을 주지 않는 선에서 합의했다. 개인의 사생활이 대중에게 공개되는 것은 엄연히 인권침해이다. 인권침해를 판단하는 기준은 애매모호할 수 있지만, 가장 쉬운 방법은 ‘역지사지’이다. ‘내가 싫은 것은 남들도 싫을 것이다’라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면서 주관적 생각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의 사생활이 존중 받고 싶은 만큼 남도 생각해주자는 ‘역지사지’의 방법이야말로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덕목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홍종수 기자 smilinghong@sbs.co.kr
    2009-05-18
  • 노 前 대통령 검찰 소환을 취재하며
    "노"의 퇴장과 현장감독 검찰
    2009-05-18
  • 신입 카메라기자 좌충우돌 취재기-KBS 민창호
    제목 없음 자전거를 처음 타는 아이처럼…   어느새 봄 향기는 한 걸음 물러서고 따뜻한 햇살에 여러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회사 오는 길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운동하는 사람들도 쉽게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인가? 일을 마치고 여의도 공원을 지나가는 길에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날씨가 많이 풀린 덕에 밤에도 운동하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제 눈을 잡는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흔들흔들’ 위태위태한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자전거를 타고 앞으로 가고 있는 아이였습니다. 커브는 틀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페달을 밟는 발은 힘겨운 까치발이었고 핸들을 쥔 두 손은 보기만 해도 땀이 가득 고일만큼 꽉 쥐고 있었습니다. 그런 자전거는 아이에게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이었고, 넘기 힘든 산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이의 얼굴에는 물론 두려움도 있지만 조급함에 시달리는 찌푸린 모습이 아닌 의욕과 기대로 가득 찬 얼굴이었습니다. 가로등 밑으로 지나가는 아이의 모습. 그 위에 제 모습이 오버랩됩니다.   2월 신입사원 교육. 저는 이때 방문객이었습니다. 모든 것들이 신기하기만 했고 구경하러 다니기 바빴습니다. 48명의 동기들과 이곳저곳으로 쏘다니며 수다 떨고 신나게 놀았습니다. 그렇게 잊지 못할 하나의 추억이 쌓이며 또 다른 삶이 만들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3월 부서배치 그리고 교육시작. 아무것도 모르게 놀다가 어느덧 시간이 흘러 부서배치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가고 싶던 곳으로의 이동. 들뜬 마음으로 들어왔습니다. 국에 들어오자마자 반기는 제 이름의 책상들, 관심어린 선배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오랜만에 아이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아. 우리부서는 이렇구나.’ 그 때는 저는 진정 생각 없는 아이였습니다. 앞으로의 일은 상상도 하지 못한 저의 멋모르는 섣부른 감탄이었습니다.   4월 현장출동. ‘공원 찍어와’ 수차례의 촬영시도. 이 며칠 공원에 간 횟수가 제 평생 공원에 간 횟수보다 많습니다. 또한 평상시 공원에 가면 별거 없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단순히 휴식이나 취하러 가는 곳이 공원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공원은 전쟁터라는 것을. 공원에 가면 사람도 있고, 동물도 있고, 꽃도 있고... 공원이 그렇게 넓고 그렇게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왜 그렇게 공원에는 쓸데없는 것들이 많은지... 그래서 지금 제가 보는 공원은 그렇게 밝고 즐겁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저는 이전과는 다르게 조금씩 페달을 밟고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는 아이처럼 저도 거북이보다 느리지만, 쓰러질까 자주 발을 땅에 딛기도 하지만 중심을 잡고 똑바로 나아가려 합니다. 쉽게 커브도 도는 날을 고대합니다. 지금은 비록 불안함과 조급함을 얼굴 가득 담고 있지만 그래도 물 흐르듯 지나가는 다른 자전거들을 보며 가슴 가득 의욕과 기대를 품어봅니다. 아자 아자 파이팅!!   민창호 / KBS 영상취재국 기자
    2009-05-17
  • 신입 카메라기자 좌충우돌 취재기-KBS 윤성욱
    3개월의 수습기간을 마치며… 매우 식상한 표현이지만 수습 3개월이란 시간은 정말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연수원 교육이 끝나고 영상취재국으로 발령받아 왔을 때 저의 걱정과는 달리 가족같이 친절한? 선배들의 모습과 체계적인 교육에 매일 놀랐습니다. 퇴근 후 선배들과 함께하는 술자리는 제가 회사생활에 적응하는데 더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루하루 진정한 KBS의 촬영기자가 되기 위해 담금질을 하고 있었지만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수습이겠습니까?ㅎㅎ  새로 지급 받은 카메라의 백 포커스가 나간 줄도 모르고 촬영해서 방송에 쓸 그림이 없던 적도 있었고, 기자회견장에서 중요인사의 얼굴을 몰라 엉뚱한 사람을 촬영했던 일 등등. 수많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수습”이란 미명 하에 모두 용서가 됐습니다. “5월 1일 이후론 죽음이다” 란 선배의 말과 함께… 첫 시위 취재를 나간 날이었다. 시위대가 내 머리채를 잡아당기고, 카메라가 거친 손에 밀쳐지면서 뷰파인더의 시야도 동시에 흔들린다. “찍지마!!” 라는 고함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이 격렬한 시위 현장에 가니 정신이 없었습니다.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이 일어나는 곳은 무작정 뛰어가서 카메라를 들이대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포커스, 노출 모두 형편없었고, 사다리 위에서 제 다리는 흔들렸습니다. 이렇게 5월 1일 수습딱지를 땐 첫날은 생애 첫 네임 수퍼와 함께 정신없이 지나갔습니다.   이후 불과 몇 번의 취재경험 밖에 없었지만 현장에서 쉽게 흥분하는 저를 발견하곤 합니다. 이성보다 감성에 휘말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거나,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영상취재의 구성을 움직여야하는 것이 “나”의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매번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망설이곤 합니다. 현장의 리얼한 분위기를 온전히 영상에 담아내지 못한 내 능력이 아직 부끄럽기도 합니다. 달라져야 합니다. 노력할 겁니다. 왼쪽 눈도 항상 열고 있을 겁니다. 좀 더 이성적으로 좀 더 차분하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분주히 뛰겠습니다. 선배들이 쌓아온 명성에 누를 끼치지 않고 더 높은 탑을 쌓을 수 있는 KBS의 촬영기자가 되겠습니다! 윤성욱 / KBS 보도국 영상취재국 기자
    2009-05-17
  • 신입 카메라기자 좌충우돌 취재기-MBC 이성재
    첫 ‘뻗치기’가 남겨준 교훈 아무것도 모른 채 현장에 투입된 지 한 달 남짓 되지 않았던 3월 초, 신영철 대법관이 촛불집회 재판 당시 담당판사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재판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보도된 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같이 입사한 취재기자 동기와 함께 신영철 대법관의 아파트 앞에서 무작정 그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나의 첫 ‘뻗치기’였다. 하지만 기자들이 집 앞에서 기다릴 것이라고 예상했었는지 6시 반쯤 퇴근했다던 신 대법관은 시간이 지나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치 범인을 잡기 위해 잠복하는 형사처럼 사무실에서 프린트해간 신 대법관의 사진을 계속 외우며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사진을 보며 모자를 쓴 모습, 마스크를 쓰고 변장한 모습을 상상해보는 등 혼자서 별 쇼를 다한 것 같다. 밤을 새워서라도 단독 그림과 싱크를 확보하겠다는 수습정신으로 무장한 나는 전진무의탁 자세로 카메라의 손잡이를 붙잡고선 당장이라도 들이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정 무렵이 지나서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철수하라는 지시가 야근데스크로부터 내려왔다. 3월의 꽃샘추위에 얼었던 몸을 녹이며 회사로 도착, 그간의 상황을 보고하던 중에 황상욱 선배가 물었다. “그림은 뭐 찍어왔냐?” 아뿔싸... 상황이 없었기에 당연히 영상취재가 불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던 나는 정말 아무런 그림도 담아가지 않았던 것이었다. 단 한 컷도!! “신영철 대법관이 집에 오지 않았더라도 ‘어제 파문으로 인해 신 대법관은 귀가하지 않았다’고 뉴스가 나갈 수 있는 거야, 그러면 그 상황에서 네가 취재해온 그림이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뉴스를 내보낼 거냐? 아무 일 없었던 것 자체도 뉴스가 될 수 있는 거야!” 혼쭐이 난 나는 패닉상태로 피곤에 지친 오디오맨과 차량부 형님을 다시 모시고 같은 길을 되돌아가 신 대법관의 아파트 외경과 분위기를 스케치하고 나서야 회사로 복귀할 수 있었다. 개념 없는 신입 카메라기자 때문에 고생했을 두 사람을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하기만 하다. 정말 그 때 뉴스가 그리 나갔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비록 그 때 일로 외경이 필요 없는 아이템조차 무조건 외경을 찍고 보는 집착 아닌 집착이 생겨버렸지만 그 때 들려주셨던 황상욱 선배의 말은 안이한 생각으로 취재에 임했던 내게 정신이 번쩍 들게 해주었던 귀한 보약이 되었고 취재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바꿔놓은 ‘사건’으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 같다. 이성재 / MBC 보도국 영상취재부 기자
    2009-05-17
  • 신입 카메라기자 좌충우돌 취재기-MBN 이우진
    6개월간의 수습생활, 평생 좋은 술안주감 될 듯 경기도 연쇄살인사건의 가해자인 강호순, 당시 피의자를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쫓아다니며 취재할 때도 사실 피의자의 초상권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그저 강호순은 나쁜X이고 전 국민이 강호순을 TV로 보면서나마 욕이라도 한마디 하게 해준다면 그게 공익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나에게 피의자는 리포트에 필요한 그림의 대상일 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풀 샷, 달리, 붐업… 그러나 이런 나의 피의자관을 돌이켜보게 한 사건이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어떻게든 찍어가야 하는 수습 카메라기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피의자를 촬영할 때는 그냥 리포트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사실 그 피의자는 촬영 전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채팅에서만난 여학생을 3일간 자취방에 감금하고 심하게 폭행까지 한 죄질이 나쁜 청소년이었다. 피의자 촬영을 하기 전에는 경찰서 형님과 피의자를 언급하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한탄을 하기도 했다. 촬영을 위한 세팅은 여느 피의자 스케치와 다를 게 없었다. 담당 형사가 컴퓨터 앞에 앉아 피의자를 취조하는 장면. 화이트를 보고 풀샷을 찍기 위해 삼각대에 카메라를 '철컥' 하고 올려놓자 피의자가 겁먹은 표정으로 담당 형사를 쳐다본다. 그러자 담당 형사가 "뉴스에 죄를 지은 사람들 나오잖아, 너네도 잘못을 했으니까, 뉴스에 나가는 거야"라며 다독인다. 나는 피의자가 촬영을 거부할 권리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속으로 '맞는 말 하네'라는 생각을 했다. 한마디 덧붙이며 "저기요, 얼굴 나올 것 같으니까 모자 좀 더 눌러쓰시죠." 풀샷을 찍고, 다리에서 머리까지 붐업을 하기위해 피의자 옆에 다가가자 죄를 지은 여학생이 눈시울이 젖은 채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아저씨, 저 뉴스에 나가는 거에요?" 피의자와 눈이 마주치자 가슴이 짠해졌다. 뭐랄까…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기분. 카메라를 든 기자라는 이유로 이 학생을 심판하려드는 것은 아닌지. 시커먼 카메라가 한 사람의 마음에 흉기가 되어 상처를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해봤다. 법으로 정해진 벌을 받을 사람에게 내가 불필요한 상처를 더해주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 경험이 있은 후에도 나는 피의자를 카메라에 담아왔다. 하지만 경찰서 취재의 당연한 수순으로 피의자 촬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피의자를 촬영해야하는 목적과 의미에 대해서 스스로 정리를 하는 짧은 시간을 갖는다. 리포트로 나가는 그림이야 달라질게 없겠지만, 최소한 피의자를 꼭 찍어야하는 스스로의 자기합리화 같은 과정이다. 그렇게 하고 싶던 일을 하면서도 생각처럼 일을 잘 못할 때는 자괴감이 들기도 하지만, 하나하나 깨달아가고 배워가는 재미가 있어 여전히 매력적인 직업, 카메라기자. 그러고 보니 순식간에 수습기간 6개월이 지났다. 남자들에게 군대이야기처럼 6개월간의 수습이야기는 비워지지 않을 평생 술안주감으로 남을 것이다. P.S. 글을 쓰고 나니 회사 선배들이 요즘 많이 해주는 말이 생각난다. - "기본이나 잘 찍고 말해라." 이우진 / mbn 보도국 영상취재부 기자
    2009-05-17
  • 아내들의 수다
    제목 없음 <가정의 달 특집 대담>   지난 29일, 홍대 인근 레스토랑에서 ‘아내들의 수다’라는 주제로 대담이 있었다. 이번 대담에는 입사 15년차 내외의 카메라기자 아내들이 참석해 ‘카메라기자의 아내’로 살면서 느낀 점에 대해 허심탄회한 얘기를 나눴다. 이 자리에는 KBS 최연송 기자 아내 현계화 씨, MBC 송록필 기자 아내 이미금 씨, SBS 김대철 기자 아내 유재숙 씨, 그리고 MBC 송록필 기자 아들 송준규 군이 참석했다. 그리고 이 자리의 진행은 KBS 영상취재국 정민욱 기자가 맡았다.   정민욱 : 우선 감사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려야 할 것 같다.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닌데 이런 자리, 선뜻 수락하기 어렵지 않은가? 남편으로부터 이 자리에 초대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현계화 : 각 방송사 카메라기자 아내의 대표로 나가는 것처럼 느껴져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문에 내 사진과 내가 한 이야기가 나올 것을 생각하니 약간 흥분(?)되기도 했다.   이미금 : 처음에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남편의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다녀오라”는 말에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막상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어제 남편에게 나가지 않으면 안 되냐고 했지만, 이미 정해진 것이라 그럴 수 없다고 더 말도 못 붙이게 했다. 그래서 마음 비우고 나왔다. 맛난 것 먹고 이야기나 듣고 오자고…   유재숙 : 나는 마냥 즐거웠던 것 같다. 이런 자리가 만들어졌다는 것이 신기하고 재밌었다. 같은 직업을 가진 남편을 둔 아내들이 만나 이야기한다는 것, 흔치 않은 경험 아닌가? 각각 속해있는 방송사도 다른데 이렇게 만날 기회가 또 있겠는가? 맛있는 것 먹고 수다 많이 떨고, 즐거운 시간 보내다 가리라 마음먹고 왔다.   정민욱 : 생각보다 말씀들을 잘하셔서 놀랐다. 서로 안면이 없는 사이라 어색할 것 같아 걱정했는데, 마음이 놓인다.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인 질문! ‘카메라기자’라는 직업에 대해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뭐라고 생각하나?   이미금 :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고… 너무 ‘힘든 직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 이야기하자면 역사의 현장에서 보통 사람들이 눈으로 보기 어려운 진실을 찾아내 시청자에게 영상으로 확인시켜주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유재숙 : 나는 어깨가 넓어야 할 수 있는 직업, 그리고 눈이 예민해야 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어깨가 넓은 우리 남편에게 딱 맞는 직업이다.   현계화 : ‘영상으로 뉴스를 만드는 직업’이다. 너무 재미없는 말인가? 앞에서 다 말씀하셔서 이 말 외에는 생각이 안 난다.   정민욱 : 그럼, 아내의 입장에서 봤을 때, 카메라기자라는 직업 이점은 안 좋다, 어떤 것이 있을까?   현계화 : 무엇보다 ‘위험’에 노출될 일이 많다는 것이 나쁜 점인 것 같다. 우리 남편의 경우, 6개월 전 ‘쌀 직불금 문제’ 취재를 갔다가 지게차에 다리가 깔려 부상을 당했다. 부장님으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몸이 떨릴 정도의 두려움을 느꼈다. 직접 병원으로 가 눈으로 보고는 오히려 조금 안심은 했지만, 6개월이 지난 지금도 뛰거나 발가락을 굽히거나 하지는 못한다.   유재숙 : 전쟁터나 시위 현장 등에서도 카메라기자는 표적이 될 수 있어 불안하다. 항상 카메라를 가지고 있어 신분이 쉽게 노출되기 때문에 피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나 역시도 그런 점이 가장 나쁜 점인 것 같다.   이미금 : 그렇다. 다른 직업에 비해 ‘위험’에 노출될 일이 많은 것이 가장 아내로서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다. 게다가 항상 무거운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취재를 하기 때문에 신체적으로도 무리가 되는 것 같다. 가끔 어깨가 아프다고 하면 마음이 아프다. 카메라기자라는 직업의 나쁜 점을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다. 항상 긴장되어 있고, 일이 힘들기 때문에 술을 마시며 스트레스를 푸는 것 같긴 한데, 건강을 해치지 않을 정도로 드시면서 집에 일찍 들어오셨으면 좋겠다.   정민욱 : 여러모로 공감이 되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우리 남편이 멋있다고 느꼈을 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어떤 때가 멋있나?   현계화 : 남편이 잠깐 제주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우연히 남편이 취재를 간 현장에 나도 가게 되었는데 남편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멋지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주도적으로 일을 하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사실 우리 남편은 집에서 TV만 본다. 야구와 축구를 오가며 늘어져 있다고 해야 하나? 암튼 그런 모습만 보다가 일하는 모습을 보니 색달랐다.   이미금 : 타 방송 뉴스를 보면 가끔 남편의 일하는 모습이 화면에 잡힐 때가 있다. 그 때 남편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면 왠지 굉장히 자랑스럽고 뿌듯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타 방송사 뉴스도 자주 본다.   유재숙 : 나는 뉴스에 우리 남편 이름이 나올 때, 자랑스러우면서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남편이 내근직을 맡고 있어 뉴스에 이름이 나오는 일이 거의 없지만, 전에는 그랬던 것 같다. 오죽 열심히 봤으면, 이름이 나오지 않아도 영상만 보고 ‘우리 남편이 취재했구나’하고 알 정도였다. 앞서 두 분도 이야기하셨지만, 남편이 가장 멋있게 느껴질 때는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할 때 인 것 같다. 이것은 우리뿐 아니라 많은 아내들이 공감하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민욱 : 다들 열심히 일하는 남편의 모습이 멋지다고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벌어오라는 의미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 한 가지 물어보자. 휴일 근무를 많이 해 수당을 벌어오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수당을 벌지 못하더라도 집에 있었으면 싶은가?   현계화 : 얼마 전까지는 쉬는 것이 더 좋았다. 그런데 요즘 약간 생각이 바뀌려고 한다. 남편이 특집팀에 있다 보니 일찍 퇴근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아침, 저녁을 꼬박꼬박 챙겨주려니 좀 꾀가 난다. 그래서 요즘에는 수당도 벌 겸 가끔 휴일 근무도 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이미금 : 쉬는 날에는 쉬었으면 좋겠다. 주 내내 힘들게 일하는데 휴일만이라도 제대로 쉬어야 재충전이 가능하지 않은가? 그래야 일도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유재숙 :   휴일에는 당연히 가족과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돈은 더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 나는 너무 욕심이 많은 것 같다.   정민욱 : 다들 부부의 정이 돈독하신 것 같다. 남편이 귀찮아 돈이나 벌러 갔으면 하는 사람도 많던데… 그런 마음으로 평생 함께 하시길 바란다. 그럼, 이번에는 내 남편이 가진 직업병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어떤 것이 있나?   이미금 : 매사를 기록하려고 한다. 귀찮지도 않은지… 그것이 남편이 가진 직업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현계화 : 우리 남편도 그렇다. 일단 찍어놓고 본다. 그래서 그것을 저장해 놓은 CD만도 엄청나다. 요즘은 아이들도 아빠에게 배워 찍는데 재미를 붙였다. 직업으로도 하는 일인데 지겹지도 않나 보다.   유재숙 : 그것도 그렇지만, 가족들을 항상 조심시키는 것도 직업병인 것 같다. 너무 무서운 것들을 많이 보다 보니까 불안을 느끼나 보다. 게다가 우리는 딸만 둘이라 남편의 촉각이 곤두세워져 있다. 학원과 집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밖에 안되는데도 꼭 데리러 간다. 나에게까지 그렇게 조심을 시키니 말 다했지 않은가?      정민욱 : 이해가 간다. 나도 이 일을 하면서 최악의 경우를 먼저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나쁜 상황을 너무 많이 접하다 보니 그런 것 같다. 그럼, 혹시 남편의 건강을 위해 특별히 해주는 것이 있나? 아침 식사는 챙겨주시는지?   이미금 : 아침밥은 꼭 해준다. 아들도 아침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술 먹은 다음 날은 해장국을 꼭 끓여준다. 얼마 전부터는  시어머니께서 약을 지어주셔서 아침에 그것을 먹고 출근한다.   현계화 : 나 역시 아침식사는 꼭 챙겨주고 있다. 남편이 아침식사를 꼭 해야 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거를 수가 없다. 밥 외에 건강을 위해 따로 해주는 것은 없다. 밥이 보약 아닌가? 천연 조미료를 가미한 맛있는 식사(?) 그것이 내가 남편 건강을 위해 해주는 전부이다.   유재숙 : 나는 전문가를 믿는다. 일단 아침식사는 간단하게 선식으로 하며, 점심, 저녁은 전문가인 회사 영양사가 잘 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술을 마신 다음날 해장국 역시 전문가인 해장국집 조리장에게 맡긴다. 간단히 말해 아침은 챙겨주지 않는다는 얘기다. 대신 심혈관계 질환을 예방하는 건강식품을 챙겨 먹이고 있다. 고가의 건강식품이니 효과가 좋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함께 수다를 떨며 스트레스를 풀어준다. 앞뒤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 일단 남편 편을 들어주며 같이 흥분해 주는 것이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다른 분들도 한 번 해보시길. 절대적인 내 편이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주는 것 이상 스트레스 해소에 좋은 것은 없다.   정민욱 : 다들 훌륭하신 것 같다. 해장국을 끓여주는 분도 계시고, 꼬박꼬박 아침을 챙겨주는 분도 계시고, 함께 수다를 떨면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는 분도 계시고… 그럼, 마지막으로 남편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현계화 : 몸조심 했으면 좋겠다. 다치고 나니 좀 불안한 것이 사실이다. 취재를 하다보면 다른데 신경 쓸 겨를이 없겠지만, 그래도 좀 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반찬투정 좀 그만했으면 한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이제 그만할 때도 됐다.   유재숙 : 무엇보다 건강했으면 좋겠다. 취재하다 다치셨다는 얘기를 들으니 남의 일 같지 않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덜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흘려버릴 것은 흘려버리고 잊을 것은 잊고, 마음 가볍게 살았으면 한다.   이미금 : 별로 바라는 점은 없다. 뭐 특별히 얘기하자면 요즘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 하는데, 꾸준히 계속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민욱 : 이 자리에 함께한 준규 군에도 한 가지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아빠한테 바라는 것이 있나?   송준규 : 예전엔 나와 함께 놀아 주지 않으시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었다. 그런데 요즘 늦게까지 일하시고 힘든 얼굴로 들어오시는 아빠의 모습을 보면 너무 내 생각만 한 것 같아 죄송하다. 엄마의 바람대로 아빠가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정민욱 : 여러분 이야기 잘 들었다. 매우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여러분에게도 좋은 추억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다시 한 번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이 자리를 마무리 하겠다.    이렇게 ‘아내들의 수다’ 대담은 끝이 났다. 참석자들은 대담을 마무리하며 “생각보다 재미있었다”고 평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젊음의 거리에 나와 좋았다”며 “이런 자리를 마련해준 협회에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이번 대담은 카메라기자 남편을 둔 아내들의 생각을 알아보고 남편의 일에 대한 아내들의 이해를 높이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또 남편에 대한 아내들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뜻 깊은 자리였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잠깐이나마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안양수 기자 soo179@hanmail.net
    2009-05-17
  • 선배님 어떻게 지내시나요? [웰텍코리아 정진철 회장]
    원로선배에게 길을 묻다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듯이 취재하라!” 정진철 회장 프로필 1969년 MBC입사 1980년대 MBC 보도국 영상취재부장, 국장 1993년 강릉MBC 사장 1996년 영동케이블방송 사장 1999년-현재 웰텍코리아 회장 입사경력이 웬만한 회원들이라면 정진철 회장이 우리들의 원로선배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평소 영상기자의 소신과 주체성을 강조하던 그는 방송인생 38년간 스스로의 생각을 현실에서 관철하고자 부단히 고뇌하고 노력함으로써 MBC뉴스의 질과 시청률을 함께 견인한 탁월한 리더십과 공로를 후배들의 마음속으로부터 인정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MBC뉴스의 역사 속에서 고발프로그램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을 지휘하여 영상 실증적인 제작기법으로 머크레이킹(muck-raking) 저널리즘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장본인이자 영상저널리즘의 산 증인이기도 한 그의 근황을 살피고자 MBC 류종현 부장이 다녀왔다. (편집자 註) 1. 요즘 근황은? 내 나이가 이제 74세. 옛날 같으면 늙은이 소릴 들을 때가 되었지요. 그렇지만 아직 마음은 한창 필드를 누빌 때 그대로입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일하고 살면서 건강을 지키려고 합니다. 방송직장을 떠나면서 제조업을 시작했는데 4-5년간은 아주 어려웠습니다. 사업이 어려웠지만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땀 흘려 일하고, 후배들이나 주변에 기여할 수 있는 소일거리를 찾아 나름대로 건강을 지키고 있습니다. 2. 현재 하고 계신 일은? 에너지 절약 자동제어장치를 생산하는 제조업을 하고 있습니다. 주로 관공서에 납품하고 있는데 상품의 신뢰가 구축되면서 경영이 점차 호전되어가고 있습니다. 회사가 어려울 때 사원들의 월급도 제때 주지 못하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 큰 어려움은 벗어났습니다. 3.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잠시 옛날이야기를 해야겠군요. 텔레비전이 아직 보급되기 전인 1961년 공보부에 국가공채로 영상업무를 처음 시작하게 되었지요. 텔레비전이 없을 때이니까 영상뉴스란 대한뉴스와 리버티뉴스가 전부일 때입니다. 4년 후인 1965년에 당시 대한뉴스 소속으로 월남전에 종군기자로 특파되어 전쟁현장의 화면을 전했습니다. 당시 미국의 영상매체들은 월등한 장비와 막강한 재력으로 현장 화면을 신속하고도 손쉽게 본국에 송출하고 있었지만, 내가 찍은 화면은 미국 언론사 편에 홍콩으로 보내져서 홍콩에서 본국으로 다시 릴레이 되는 경로를 거쳐 아주 어렵게 시청자들에게 뉴스가 전달 될 수 있었는데, 당시 전쟁을 취재하는 종군기자로서 과연 국력과 사세(社勢)가 무엇인지를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국내에서 제작한 작품으로는 MBC창사 첫 프로그램을 16미리 필름 무성 흑백으로 제작하여 방영하였던 생각이 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필적 이야기지요. 당시 우리나라 GNP가 80불 정도였으니까... 지금처럼 기술이 급진전하고 경제가 팽창한 시대에서 돌이켜보면 격세지감이 들만도 하지요. 어쨌든 텔레비전은 보는 것이지 듣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바야흐로 영상매체시대에 영상의 주역들이라는 자부심과 주체성을 간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카메라기자 대졸정기입사공채를 시작할 때 이야기인데 내가 대졸공채로 카메라기자를 뽑겠다고 했더니 주변에서 카메라기자를 대졸사원으로 할 필요가 있느냐라는 비웃음 섞인 소리가 들리기도 했습니다. 영상시대가 도래하리라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나로서는 확고한 신념으로 대졸정기공채로 카메라기자를 선발해야 한다는 의지를 관철하는데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주저함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이웃나라 일본만 보더라도 여성 카메라기자가 참 많이 활약하고 있는데, 사실 우리 회사에 여성카메라기자를 공채한 것도 내가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후배들도 더러 알고 있겠지만 그 일도 시작할 때는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카메라기자가 단순한 기능인이 아니라 종합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언론인으로서의 자질을 갖추는데 게으름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특히 인권이 중시되는 현대와 미래시대에는 초상권이나 저작권 등 권리의 갈등에 대한 인식도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4. 협회에 대한 조언의 말씀은? 우선 카메라기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힘 있는 조직으로 성장하길 기대합니다. 아울러 원로선배들과 후배들의 가교의 장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면, 선배들의 좋은 경험을 후배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세미나나 특강도 생각해볼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상부문의 기자들이 서로 협동하고 지혜를 모아 언론인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논하고 권리를 찾는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조직의 구심점으로 가꾸어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오랜만에 다정한 후배를 만나 옛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납니다. 영상취재기자들은 그들이 취재하는 분야가 무엇이든, 취재장소가 어디든 항상 자신의 초상화를 그린다는 심정으로 촬영하고 편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세상의 누구도 자신의 초상화를 아무렇게나 그리려는 사람이 없듯이, 자신의 철학과 소신을 확고히 갖춘 기자로서 꾸준히 연구하는 자세로 취재에 임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직과 개인의 발전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인터뷰 진행 MBC 류종현 부장
    2009-05-17
  • 돌발영상을 다시 시작하며```
    “고통의 6개월을 발판으로 삼겠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있었던 일은 40년 제 인생의 압축판과도 같습니다. 슬픔과 분노, 기쁨과 환희, 희망과 좌절, 누군가에 대한 강한 적개심과 동료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쉴새 없이 교차되고 뒤섞여 때로는 어린애 같은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성숙한 미소를 짓기도 한 시간이었습니다. 돌발영상을 떠났던 지난 6개월이, 돌발영상에만 매달렸던 이전의 4년 반 보다 더 길게 느껴졌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다시 편집기 앞에 앉은 지금, 이전보다 훨씬 두렵고 초조한 마음입니다. ‘부활’이라는 거창한 말에서 나타나는 돌발영상에 대한 관심과 기대감은 ‘공정방송’을 외치며 투쟁했던 지난 시간보다 더 무거운 책임감을 제 어깨에 지우고 있습니다. 이 부담을 이겨내는 방법은 한 가지일 것입니다. 바로 저와 제 선후배들이 온갖 어려움을 감내하고 외쳤던 공정한 방송입니다. 방송인으로서 "공명정대한 시각과 상식을 거스르지 않는 정신"을 지키는 것만이 시청자와 동료들의 큰 기대와 관심, 격려에 부끄럽지 않는 모습일 겁니다. 공자님 말씀처럼 뻔한, 그리고 기자라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다짐이지만 1년 가까이를 그 무언가와 절실히 싸워 온 저희 YTN 기자들에게는 정말 뼈저린 명제입니다.  화면을 검색할 때나 편집기를 다룰 때, 자막을 쓸 때, 이 뼈저린 명제를 결코 잊지 않으려 합니다. 돌발영상은 ‘기사’보다는 ‘영상’으로 먹고사는 프로그램임을 다 아실 겁니다. 때문에 그동안 돌발영상을 제작하면서, 문자화된 기사보다는 당시 상황의 촬영화면에 담긴 등장인물의 표정과 앵글 이동, 포커스 변화에서 더 의미를 찾아 왔습니다. 나아가 돌발영상의 ‘영상’은 저희 YTN 카메라기자들 뿐만 아니라 카메라기자협회 선후배 여러분들의 열정과 노고의 산물이었음도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점 때문에 돌발영상을 제 스스로 매우 자랑스러워합니다. 제가 만드는 돌발영상이 KBS, MBC, SBS 같은 대한민국 대표 방송사들과 YTN의 취재물들을, 뜨겁게 한데 녹여 단일 보도물로 주형해낸, 용광로 같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치열하게 경쟁할 수밖에 없는 방송사들의 여러 화면이 한 프로그램에서 조화를 이루며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은 경우가 대한민국 방송사에 흔한 일이었을까요? 한때 저희의 불찰로 화면 공유(POOL)에 관한 오해와 불편이 있었던 점도 사실이지만 지난 YTN 투쟁 과정에서 보여준 카메라기자협회의 응원과 격려는 우리가 국민의 알권리와 공정한 방송이라는 한 가지 가치만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동지'들이라는 점을 새삼 일깨워줬습니다. 돌발영상을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 없었던 6개월은 고통스러웠습니다. 그 고통의 6개월은 앞으로의 돌발영상에 큰 밑거름일 것입니다. 그 고통의 6개월을 발판삼아 앞으로 ‘동지’들의 화면 하나하나에 담긴 피와 땀과 열정과 가치가 왜곡되지 않도록, 그 피와 땀과 열정과 가치가 온전히 ‘공정방송’으로 발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임장혁 /  YTN 돌발영상팀장      
    2009-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