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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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경영
  • MBN 강두민 - 2010 신입카메라 기자를 소개합니다.
      반드시 촬영기자가 되겠다는 간절한 꿈을 갖고 이를 이루기 위한 발걸음은 고되지만 부푼 기대와 즐거움으로 가벼웠습니다. 하지만 한 달여간 현장에서 부딪히며 제게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대학 4년간 늘 함께했던 6mm카메라와 이제 저의 분신이 된 ENG카메라의 달라진 무게만큼 촬영기자가 가져야 할 강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제가 앞으로 디뎌야 할 발걸음의 무게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선배들의 모습 하나하나는 그 어떤 것으로도 살 수 없는 값진 가르침이었습니다. 자연스레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워졌고, 이것이 제가 촬영기자라는 수식어를 갖게 된 후 가장 크게 변화된 점입니다.   이 변화의 참된 의미를 잊지 않고 선배들이 쌓아 오신 업적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항상 노력하는 후배가 되겠습니다.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이성으로 국민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좋은 창을 열어 줄 수 있는 촬영기자가 되겠습니다. 선배님들의 많은 관심과 충고 부탁드립니다!
    2010-04-09
  • MBN 백재민 - 2010 신입카메라기자를 소개합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미디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다양해진 시청자들은 전문적인 지식 컨텐츠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역할을 요구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요구들을 충족 시켜주기 위한 보다 정확하고 신속한 정보 전달의 중요성에 관심을 가져왔으며, 자연스럽게 신문, 방송의 꽃인 보도국을 알게 되었습니다. 촬영 기자에 의해 전송된 이미지 혹은 영상은 지면, 브라운관을 통해 시민들에게 전달될 때 작게는 시민 한명의 마음을 움직이고 더 나아가 군중, 한 나라까지도 움직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촬영에 대한 저의 생각은 무엇보다 소명의식, 따뜻한 마음, 공정성을 바탕으로 촬영에 임하고자 합니다. 선배님들처럼 곧고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거친 바람에도 흐트러진 모습 없이 최선을 다하는 촬영기자가 되겠습니다.  
    2010-04-09
  • 독립성과 전문성의 지침서 "포토저널리즘"
    독립성과 전문성의 지침서  "포토저널리즘" 샌프란시스코 주립대 포토저널리즘 과정의 디렉터인 케네스 코브레의 역서인 “포토저널리즘”은 몇 년전 출판되었다가 절판된 후 저널리즘 종사자들에게는 교과서로 통해왔다. 이 책은 사진기자에 대한 일종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지만, TV카메라기자에게도 역시 매우 유익한 책이라고 봅니다. 저자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제가 흥미를 가지는 몇 가지 부분을 발취하고 얘기하고자 합니다. *독립성에 대하여 "사진기자와 취재기자는 각기 독립적일 필요가 있는 반면, 또한 두 사람 모두 그 사건을 같은 방향과 주제로 취재하고 있는지 서로 확인하기 위해 시시때때로 접촉해야 한다." 여러분은 취재기자와 어떤 관계이십니까? 저는 수동적이냐 능동적이냐? 라는 개념으로 두 직종의 관계를 보고자합니다. 취재의 시작과 끝에서 취재기자의 지시로만 움직이는 것은 수동적인 자세일 것입니다. 수동적인 자세는 단순히 취재기자의 지시에 수긍하는 종속적인 모습입니다. 물론 고민에 대한 번거러움과 편안함을 추구하려는 목적이겠지만 결코 바람직한 카메라기자의 모습은 아닙니다. 각자 독립적일 필요가 있는 것은 뉴스에 대한 제작자들의 편견을 감쇄하는 기능이라고 봅니다. 궁극적으로 현장의 관찰자들의 다양한 시각들이 시청자에게 이롭다고 봅니다.   무엇보다도 카메라기자는 현장에서 질문하기를 주저해서는 안됩니다. 취재과정에서는 서로 경쟁적으로 사실을 확인하는 치밀함이 필요합니다. 사실확인 과정은 저널리즘의 본질이자 사명감이기 때문입니다. 카메라기자의 현장 취재에 제한은 있을 수 없습니다. 독립성은 편집에서도 적용됩니다. 취재기자가 대략적인 콘티를 구상하지만 그 시각적인 전달의 시작과 끝은 카메라기자의 전문성에서 마무리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 카메라기자의 영상구성의 노력은 각별히 필요합니다. 현장에서 카메라기자만의 시각이 없다면 카메라기자는 저널리즘을 말할 자격이 없다고 봐야겠지요. 그래서 독립성의 필요성은 카메라기자의 존폐를 좌우하는 개념이라고 봅니다. *진부함을 피하라 "대부분 사람들은 앉아서 혹은 서 있는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사진가가 독특한 높이에서 촬영하는 것만으로도 사진에 즉각적인 흥미를 더하게 된다. 170cm의 눈높이 신드롬을 피해야 한다." 진부함의 탈피, 즉 다른 앵글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이 전혀 볼 수 없었던 화면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보수적인 촬영 시각은 흔히 정치뉴스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근원은 우선 정치 기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적당한 양비론과 균형주의식 기사는 카메라기자의 진부한 시각의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적인 균형을 추구하다보면 가장 안전한 앵글을 카메라 기자들은 추구합니다. 진부함의 탈피는 취재기자의 시각변화와 카메라기자의 공동노력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껍질을 깨지 않으려는 부동의 자세가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생각해 봐야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과 탐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서 참신함을 더 할 수 있는 Carol Guzy 의 말을 인용합니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호기심을 가지고 모든 것을 처음 본 것처럼 대하고 정말 열린 마음으로 기다린다." *자체검열 "책임감 있는 사진 기자면 극히 미묘한 편견의 조짐에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만일 편견이 소속 신문사에서 나타나는 사내문화의 한부분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면 세 가지 선택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즉, 그것을 수용하든지, 변화시키든지, 아니면 그만두는 것이다. 각 의견마다 그에 상응하는 대사를 치러야 한다." 카메라기자는 각자의 회사의 방향에 충실한 업무를 이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떨 때는 공익을 위한다는 것이 무책임한 구호일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서로에게 좀 더 솔직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현장취재와 편집에서 우리는 자체검열을 경험하고 인위적인 진실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사회의 통념, 회사, 간부로부터 카메라기자는 검열을 받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기자들은 자신과 소속사의 편견에 대해 반드시 비판적으로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디지털 리터칭은 진실을 조작하는 것인가? "우선 절대주의자들은 사진에 절대로 다시 손을 보거나 조작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원본이 진실이며 어떠한 변화도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온건주의자들은 오직 전체적인 변화만을 시도해야한다고 합니다. 즉 현장에 있는 사진기자들이 카메라의 필터를 바꾸는 것과 같이 사진의 전체적인 것에 대해서만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디지털 리터칭에서 카메라기자도 지금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합의된 표준이 만들어 지지 않았습니다. 사실을 가공하는 과정을 크게 두 가지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카메라기자가 현장에서 사실을 재구성하는 "재현" 과 편집과정에서 "변화주기"입니다. 현장에서 카메라기자가 사실을 재현한 부분에서 우리의 뉴스가 픽션인가 넌 픽션인가를 정의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즉 픽션 속에 넌픽션이 존재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또한 디지털 편집에서 변화주기는 과연 어떤 논란을 야기할 수 있는가? 저 또한 여러분들에게 위와 같은 질문을 드려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카메라기자가 행하는 ‘재현’과 편집 중 ‘변화주기’는 사실에 대한 "훼손" 이라는 질타를 피하기 힘듭니다.
    2010-03-26
  • 선배님 어떻게 지내시나요?  [백승대 톱 프로덕션 대표이사]
    프로정신을 가지고 여전히 현장에 계시는 톱 프로덕션 백승대 대표이사를 만나다 극영화 촬영감독 출신의 카메라기자로서 대한민국 보도영상의 가치를 한껏 끌어올렸던 백승대 전 KBS 카메라기자를 만났다. 서울 목동 방송회관 9층에 위치한 <(주)톱 프로덕션>은 백승대 선배께서 94년도 KBS를 퇴직하시며 설립한 프로덕션 사무실이다. 현재 66세(44년생)를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영상을 제작하는 사업을 계속하시며, ENG 카메라를 놓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카메라기자가 되셨나요? 이십대에 극영화 다섯 편을 찍었다. 그리고 군생활 중 베트남에 종군하여 국방부 제작의 월남전선 문화영화를 제작하던 중, 당시 베트남 종군기자로 참여했던 KBS 취재팀을 만난 인연으로, 1974년에 KBS 보도국에 특채로 입사했다. 입사 당시에는 보도영상만을 담당하는 카메라기자가 따로 없었다. 뉴스, 드라마,다큐멘터리 등 종합적으로 담당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카메라기자 인원이 3~40명 정도 였던걸로 기억된다. 개성 강한 백 선배로 기억하는 후배들이 많습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개성이 있다고 평가를 하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극영화를 하다가 카메라기자가 되었던 만큼 다른 동료들에 비해 시작한 나이가 늦은 감이 있다. 극영화를 하던 사람이라 그런지 뉴스를 보는 시각이 달랐다. 적어도 영상에 대해서는 정통적으로 배웠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방송은 완전히 달랐다. 그래서 보도영상과 극영화를 접목시켜 한 차원 높은 영상세계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상과 녹음을 분리하여 방송하던 시대였다. 필름과 녹음된 테입을 동시에 플레이 하면 말하는 모습(싱크)이 영상에 맞지 않기 때문에 필름과 녹음된 테입에 플레이를 조정하여 방송하면 영상과 소리가 딱 맞아 떨어졌다. 욕심일수도 있고 간과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정확한 뉴스전달을 위한 노력이었다. 영화를 하면서 터득한 것을 뉴스에 접목시켜보게 된 것이다. 또 한편 영화에서 효과라는 것을 배웠기에 보도에서 그것을 사용했다. 모아둔 NG필름을 손으로 만진 소리를 녹음기에 담아 스치는 영상에 믹싱을 시켰다. 때론 너무 잘난체 한다는 눈총을 받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필이 되기도 했다. 피디나 기자들 중 나와 일했던 사람들 중에 프로그램에 애착이 있는사람은 좋아했고, 어떤 사람들은 싫어하기도 했다. 취재차량에 타서는 잠을 자면 카메라기자 자격이 없다. 자는 사이에 놓친 피사체는 다시는 볼 수 없다. 뜨는해를 봐야했고, 지는 해를 봐야만했다. 그래야 양이 차니까 말이다. 뉴스 파노라마 등 KBS의 대표적인 프로그램들을 만들으셨던 기억이 나는데요, 특히 다큐멘터리를 많이 제작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만들었던 유명한 프로그램들은 어떤것이었나요? 뉴스 파노라마가 처음 생겼을 즈음 헬기를 타고 제주도를 촬영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리고 음악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했다. 곡명은 잘 모르지만, 적어도 어떤 음악이 들어가면 좋을지는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시대에는 뉴스에 유행가를 넣을 수는 없었던 상황이었는데도 과감하게 당시 유행하던 혜은이의 <감수광>을 넣었다. 뉴스 파노라마에 관심이 크신 사장께서 보도국에 와서 <감수광>을 듣고는 '바로 저거다’라고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KBS에 근무하면서 약 50여 편을 제작했는데, 내가 잘했다기 보다 시작의 단추가 잘 끼워진 것이었다. 이후 ‘카메라 발길 따라’ 등 뉴스 파노라마 영역들이 발전하게 됐다. 또한 코란도 차량 두 대에 망원렌즈, 방진대 등 당시로서는 회사의 엄청난 취재지원으로 <신왕후천축국전>을 제작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프로듀서와 기자의 벽이 없었다. 보도국에서 많은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졌다. 당시의 <월요기획>이 <일요스페셜>의 전신이다. 지금도 옛날 프로그램을 틀어도 될만큼 괜찮은 영상들이다. <세계를 달린다-북남미대륙 횡단>, <월요기획>, <신라의 신비>, <전쟁과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일대기>, <전승자를 찾아서> 등을 제작했다. 나는 운이 참 좋았다. 지금 프로덕션을 할 수 있는 이유도, 그때 프로듀서 공부를 한 것이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선배님께서 당시에도 멀티기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셨는데요. 특히 <시민정신>을 만드시던 생각이 나네요? 당시 MBC에 <카메라출동>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꽤 인기가 있었다. <카메라출동>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면서 생긴 프로그램인데 <시민정신>의 경우 촬영기자들이 기획부터 촬영, 영상편집까지 참여했었다. KBS에 재직중인 김민수, 이중완 촬영기자 후배들과 함께 만들면서 수많은 고민과 함께 많은 특종을 했던 기억이 난다. 94년에 KBS를 나오셔서 프로덕션을 17년째 운영하고 계신데, 현재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프로덕션을 운영하면서 <한국의 명찰>, <한국의 장인>, <한국의 보물>, <이벤트 인 코리아>, <우리 땅 속살보기>, <우리시대의 장인>등 KBS, MBC, 불교방송 등 공중파 및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을 300여 편을 제작했다. 현재는 직접 촬영해서 TBS?? 에서 목요일마다 방송이 나가고 있다. 재방송도 물론하고 있다. 이젠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백선배께서는 제5대 한국TV카메라기자회 회장을 역임하셨는데 후배 카메라기자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9시 뉴스를 보고 놀라곤 한다. 정말 잘한다. 다만 장비기술의 발달로 하여금 자기 노력이 적어져 프로 정신이 약해질까 우려스럽다. 카메라 기능이 좋아져 취재현장에서 영상을 지우는 그런 상황을 본 적이 있는데 그러면 절대 안 된다. 현장을 그대로 수록해야 한다. 현장은 바로 역사이기 떄문이다. 프로 정신을 가져야 한다. 프로정신이 쇠퇴할 수 있기에 시간을 두고 끈질긴 노력을 해야 한다. 난 지금도 현장에 나가는 것이 행복하다. 주책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나간다. 매일매일 새로움을 느낀다. 백승대 수상경력 국민훈장 수상 (88올림픽 유치), 대통령 표창 (신라의 신비 / 신왕오천축국전) 문공부장관상 (21세기를 겨냥한다) KIPA 촬영상 (2004년 세월이 가면) 대담 : 양용철 협회장 ※ <미디어아이> 제72호에서 이 기사를 확인하세요 미디어아이 PDF보기 바로가기 링크 /bbs/zboard.php?id=media_ey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40
    2010-03-26
  • <;릴레이 인터뷰> KBS 원주 방송국 심상근 부장
      사랑하는 가족에게 빵을 만들어 주고 싶어요 지난 71호 본지의 춘천 MBC 김동욱 부장의 추천사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보다도 훌륭한 선후배가 많이 있는데 김 선배의 추천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김 선배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래 전 지역카메라기자 모임에서 총무를 했었습니다. 그때 선후배 가운데서 분위기를 주도하곤 해서 잘 봐주신 듯합니다. 그 모임은 가족을 동반할 정도로 화기애애했었지요.   김동욱 기자는 어떤 분입니까? 김 선배를 지역카메라기자 모임에서 만났습니다. 같은 강원도에 있다 보니, 춘천에 있을 때는 자주 만나 한잔하기도 했었습니다. 김 선배는 중용과 덕을 실천하고자 항상 노력하는 분으로 느껴지는 분입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아우를 뿐만 아니라, 기자로서 묵묵히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기자생활을 한지 벌서 26년째지만, 현장에서 발로 뛰는 기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기자는 현장에 있을 때 가장 빛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건강을 많이 챙기고 있습니다. 건강을 잃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겠지요. 욕심같아서는 앞으로도 쭉 현장의 일선에서 취재를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건강이 가장 걱정됩니다. 근무하고 계신 KBS 원주 방송국은 어떤 곳인가요? KBS 원주 방송국은 강원도의 중심인 원주시에 위치해 있습니다. 강원 남부지역의 번영과 발전을 선도하는 공영방송으로 거듭나고자 합니다. 따라서 KBS 원주 방송국의 주인인 시청자에게 봉사하는 자세로 전 직원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카메라기자가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는 1985년에 KBS 공채로 입사했습니다. 그리고 강릉방송국에서 카메라기자로서의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주도적으로 영상을 책임지고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카메라를 잡게 되었지요. 카메라기자로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기억에 남는 일은 강원도에 빈번히 찾아오는 폭설 취재입니다. 고립된 마을에서 분유를 먹는 아기가 분유가 떨어졌을 때, 아기를 데리고 시내로 내려오기도 했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지요. 폭설은 제가 첫 발령을 받았던 1992년에 1미터 60센티의 눈이 내렸는데, 사실상 구호까지 하게 되는 취재현장에서 힘겨웠지만 보람을 느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1994년 즈음 무장공비의 침투사건 취재는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전 국민적 관심사안 이었기에 상당한 의무감을 가지고 취재에 나섰던 기억이 있습니다. 카메라기자가 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을 하고 계실까요? 어린 시절 주방장과 빵 굽는 일을 하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 카메라기자가 되지 않았다면 제빵 요리사가 되어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젠 추억 저 편에 있지만 나중에 꼭 다시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당시는 배고프던 시절이라 먹는 문제가 당장 급했던 시대였지요. 그래서 빵을 만들어보겠다는 마음을 가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고맙게도 아내가 다시 빵을 만들어 보겠다는 것을 지지해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제과기술이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실력을 다시 키워서 제가 만든 빵을 사랑하는 가족과 선후배, 동료들과 함께 나눠보고도 싶습니다. "papa"라는 전자우편 주소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회사 전자우편 주소를 만들 당시, 늦게 둔 아들놈이 저한테 첫마디로 “빠빠”라고 하더군요. 자녀를 둔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요. 이러한 작은 계기로 전자우편 주소를 ‘papa’로 하게 됐습니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점수는? 자신이 없습니다. 점수가 나올 수 있을까요? 연고가 전혀 없는 강원도에서 20년 가까이 휴일도 주말도 없이 출근하는 남편을 뒷바라지한 집사람과, 언제 훌쩍 커버린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집사람과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제라도 잘해야겠다는 마음입니다. 그동안 쉬는 날에도 가족과 함께하지 못했던 것이 아쉽지만, 앞으로는 가족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빵을 직접 만들어 주고도 싶고요. 동료와 선배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면? 선배는 넓은 아량과 사랑으로 후배를 이끌고, 후배는 진심으로 선배를 존경하는 마음가짐을 가졌으면 합니다. 이것이 가능할 때 비로소 우리가 몸담고 있는 조직이 활성화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서로가 보완하고 이끌어주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음 릴레이 인터뷰이를 추천해 주세요. 한때 같이 고생했던 춘천 YTN 진민호 차장을 추천합니다. 진민호 차장은 자기 일에 열의와 성실함이 몸에 배어 있으며,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모범적인 카메라기자의 표준입니다. 얼굴보고 소주 한잔하면서 얘기도 나누면 좋을텐데 아쉽네요. 진민호 차장, 한번 만나죠! ※ <미디어아이> 제72호에서 이 기사를 확인하세요 미디어아이 PDF보기 바로가기 링크 /bbs/zboard.php?id=media_ey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40
    2010-03-26
  • -건의-카메라 로고 스티커 제작합시다.
    ytn 윤원식입니다. 예전에 한국방송카메라기자 스티커 제작하지 않았습니까? 소속감도 생기고 좋더군요. p2나 xdcam 으로 바뀌면서 안 붙여져 있는데, 새로이 제작해서 회원들이 붙여서 다닐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 카메라 부착 스티커 제작해주세요. 덧붙여, 배터리에도 붙일 수 있는 작은 크기의 스티커도 제작한다면, 뒤에서 볼때 모든 카메라가 통일성을 가질수도 있을텐데요. 그리고, 스티커는 기존의 두꺼운 비닐 스티커가 아니라 얇으면서 질긴 비닐 스티커이면 좋겠습니다.
    2010-02-26
  • 고단했지만 활력이 된 설악산 빙벽 등반 교육
    고단했지만 활력이 된 설악산 빙벽 등반 교육 고영민 / KBS 보도영상팀   지난 1월 23일부터 7일 간 설악산 일대에서 고산지대 취재능력 향상을 위한 위탁연수를 받았다. 외부 위탁연수여서 KBS 선후배 동료들도 있었지만, 사회에서 각자 다른 일들을 하다가 모인 사람들까지 모두 28명이었다. 위탁 교육을 한 단체는 “한국등산학교” 로 1974년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등산학교로 정규반, 암벽반, 동계반의 크게 세 가지 교육과정을 통해 약 1만 명의 산악인을 배출한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고의 등산학교다. 그 명성에 맞게 정말 훈련은 혹독하게 이루어졌다. 매일 새벽 5시30분 기상하여 6시부터 40분간 비몽사몽간 3km 구보와 팔 벌려 뛰기 300회, 팔굽혀펴기 30회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빙벽 등반 야간 실내 이론교육 등 일주일간 조출하는 것 보다 더 힘들었다.   빙벽 등반을 위해 아이젠, 픽켈, 아이스바일, 8자하강기, 카라비너, 스패츠 등 생소한 단어들의 장비들과 고글, 기능성 내의, 빙벽화 등의 일주일간 필요한 개인 용품을 가방 한 가득 담았다. 그리고 23일 점심 무렵 회사 본관 앞에 모여 이번 연수를 같이 받기로 되어있던 선후배 6명과 회사버스를 탔다. 평소 운동을 좋아하고 등산도 가끔 했었지만 난생 처음 경험해 보는 빙벽 등반에 대한 설렘과 긴장감이 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4시간을 달려 드디어 설악산국립공원 관리공단에 도착해 입소식을 마치고 빙벽 등반에 필요한 장비들을 착용하니 몸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본격적인 훈련(연수였지만 나는 훈련이라고 표현하고 싶다)의 첫날, 평소 같으면 아직 단잠에 빠져 있을 시간인 새벽 5시30분 알람이 울리고 씻는 것도 귀찮아 머리엔 모자를 옷은 설악산의 새벽 찬 바람을 피하기 위한 두꺼운 것으로 입고 운동장에 집합했다. 가벼운 스트레칭 후 3km 구보, ‘이제 끝이겠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강사의 한마디. “팔 벌려 뛰기 100회!” 여기저기서 “아~” 하는 신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힘든 일주일이 시작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훈련 첫날은 실내 이론 교육과 아이젠 착용 후 걷고 하강하는 방법 등을 배웠다. 가벼운 몸 풀기 정도의 교육이었다. 둘째 날 드디어 실전 훈련. 30m의 비룡폭포 빙벽 등반을 시작했다. 안전벨트와 빙벽용 아이젠를 착용하고 양손에 아이스바일을 들고 첫 발을 내디뎠다. 강사들이 시범을 보일 때는 간단해 보였지만 직접 등반을 시작하니 너무 힘들었다. 아이스바일도 얼음에서 빠질 것 같아 양손에 계속 힘이 들어가 있게 되고 아이젠도 얼음에서 미끄러질 것 같아서 얼음을 계속 차게 됐다. 그래서 한 번 타고 내려오면 온몸에 힘이 다 빠지고 발가락에도 통증이 왔다. 그렇게 30m 빙벽을 두 번 오르고 온 몸이 녹초가 되어서 숙소에 복귀 한 후 신발을 벗어보니 왼쪽 발 엄지발톱에 피멍이 들어있었다. 다음 날 아침 운동이 걱정됐다.   또 다시 아침 5시 30분 알람이 울리고 기상, 피 멍이 든 엄지발가락에 통증을 조금 이라도 줄일 수 있을 거라는 바람에 반창고를 둘둘 감고 아침에 운동을 시작했다. 다행히 생각보다 통증은 덜 했다. 이날 빙벽은 미시령터널 건너기 전에 있는 매바위라는 곳이었는데 높이는 전날과 비슷했다. 여전히 이날도 팔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고 아이젠 킥은 여전했다. 힘겨운 8시간의 훈련을 마치고 복귀했는데 어제 피멍이 들었던 발톱에서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졸업 등반은 장수대쪽에 있는 60m 짜리 실폭 등반이었다. 실폭이란 말 그대로 폭이 가느다란 폭포. 아무리 연습동안 발가락에 피가 나고 했어도 졸업 등반을 해내지 못하면 수료증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야말로 4일 간의 고생이 허사가 되는 상황이 발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한 명씩 등반하던 연습 등반과는 달리 졸업등반은 세 명씩 동시에 등반을 해야 했다. 앞 등반자가 30m 정도 등반을 하면 또 다른 사람이 등반을 하기 때문에 앞 등반자가 떨어뜨리는 얼음덩어리에 뒷사람이 부상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말이 60m지 높이로 따지면 건물 20층 정도의 높이였다. 그렇게 등반을 하다가 얼음덩어리에 뒤통수를 한 대 맞았는데 충격이 상당했다. 그래도 자진해 회사의 지원을 받아서 왔는데 수료증을 받지 못하고 돌아갈 수는 없어 마음을 다잡고 등반을 했다. 출발은 나름 좋았다. 바일도 아이젠도 나름 얼음에 잘 박히는 듯 했다. 그런데 절반 정도 지나가는 순간부터 팔도 아파오고 손가락이 얼어오는지 바일을 잡는 손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바일과 아이젠이 얼음에서 빠지면서 땅 밑으로 꺼졌고 30m 높이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상황이 발생했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 강사가 줄을 풀어주고 밑으로 내려줬다면 내려갔을 텐데 내려 주질 않았다. 그래서 다시 내려올 수 있는 방법은 정상에 올라간 후 직접 하강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다시 얼음에 아이젠과 바일을 박고 손을 녹이기 위해서 허벅지에 손을 비비고 팔 근육이 풀릴 때까지 한 10분을 공중에 매달려 있은 후에 다시 빙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등반을 시작한지 얼마가 지난지도 모르겠지만 드디어 60m 빙벽의 정상을 밟았다. 빙벽을 오르는 동안 많이 힘들었지만 정상에 서서 저 멀리 눈 덮인 설악산 정상을 바라보니 속이 시원해지는 듯 했다. 그리고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처음 경험해보는 빙벽 등반을 해냈다는 가슴 벅찬 보람도 있었다. 6박 7일간의 고산지대 취재능력 향상 과정 빙벽 등반을 통해 언제나 새로운 분야와의 접촉은 지루한 일상에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010-02-22
  • 지옥보다 더 끔찍했던 아이티 참사
    지옥보다 더 끔찍했던 아이티 참사 신봉승 / KBS 보도영상팀   아이티는 가는 길도 멀었다. 서울에서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까지 가기 위해서 비행기를 네 번 갈아탔고, 여섯 번의 기내식을 먹어야 했으며 도미니카공화국 공항에서 육로로 10시간을 달려서야 겨우 도착할 수가 있었다. 75시간의 긴 여정으로 온 몸이 지친 상태에서 취재를 시작했다. 지진 발생 5일차에 현장에 겨우 도착한 취재진은 진도 7.3 지진의 참상을 눈이 아닌 코로 먼저 느낄 수가 있었다. 콧속을 밀고 들어오는 비릿한 냄새, 15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를 실감하는 데는 후각 하나면 충분했다. 텐트를 준비하지 못해 프레스룸을 숙소 삼아 잠을 자던 첫날 밤. 아이티 모기들은 처음 맛보는 동양인 피가 그토록 맛있었는지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양말 속으로 바지 밑단을 집어넣어도 보고 수건으로 얼굴을 덮어 신체노출을 최소화해도 덤벼드는 모기들은 피해갈 수 없다. 결국은 프레스룸을 뛰쳐나와 119구조대가 건네준 모기장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지만 모기장과 맞닿는 부분은 여지없이 아이티 모기들에게 헌혈보시를 해야만 했다. 낮에는 무질서와의 싸움이었다. 길거리 한가운데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시신, 그리고 아무도 치울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는 포르토프랭스에서 서울에서처럼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 취재를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UN군이나 경찰이 보이지 않는 변두리의 피해지역은 안전을 위해 섣불리 들어갈 수도 없었다. 외국 대사관, UN군사령부, 외국기업체 주위에는 구호품과 일자리를 얻고 이민을 하려는 난민들이 구름떼처럼 모여서 그들을 달래가면서 취재를 했다. 아이티는 이번 출장팀이 꼽은 최악의 해외출장지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출장을 함께 다녀왔던 윤양균, 송상엽 선배 두 사람 모두 오지 험지 출장이라 하면 남부럽지 않게(?) 다녀봤다고 자부 했지만 아이티를 최악으로 꼽은 데는 순간의 망설임도 없었다. 편안하게 들어가서 잘 숙소가 없어 맨 바닥에 라면박스를 깔고 노숙을 했다. 세수할 물은커녕 마실 물도 부족해서 시내에 취재를 나갈 때면 UN군이 이재민들에게 나눠주는 생수를 챙겨 와야 했다. 우리도 난민이니까. ‘취재난민’ 통상 좋은 그림들만 모아모아 편집을 하는 기존의 편집 룰은 아이티에서만큼은 예외였다. 넘쳐나는 시체들과 처참함 장면들은 골라서 빼냈다. 아무리 기자의 본분이 눈앞에 벌어진 현실을 가감 없이 전해야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뷰파인더로 보기 힘든 장면을 시청자들에게 전해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 그렇게 아이티에서의 악몽 같았던 일주일은 지나갔다. 아이티를 떠나 도미니카에서 만난 황상무 선배는 끔찍했던 일주일을 “이생에서 죄를 많이 지어서 지옥에서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 아마도 지진 후 아이티에서의 일주일간이 지옥이 아닌가 싶다”고 회고했다.
    2010-02-22
  • “백야의 잠못드는 밤 코펜하겐”
    42박 43일간의 세계일주취재,참으로 가슴 벅찬 일정이었다. 3대륙 12개국을 돌아다닌다니 처음엔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난다. 해외취재에 이골이 난 몸이라 자신을 했건만 그 기대는 첫 날 런던에서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급체! 첫날 과식을 한 탓인지 하루종일 어지럽고 식은 땀을 흘려야 했다. 어떻게 촬영을 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게 흐려진 가운데 우리는 이미 벨기에를 치고 덴마크에 와있었다. 또 바뀐 시차속에 몸을 적응하려하니 해가 지지 않는다. 새벽1시가 돼서야 해가 지더니 새벽4시에 해가 뜬다. 잠도 못자고 쳇기도 가시지 않은채 새벽에 뜨는 해를 맞이해야만 했다. 42박43일간의 세계일주취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해지는 라인강에서 물끄러미 숭어떼를 발견했다. 매운탕이 그리웠다. 선배가 매운탕사진을 휴대폰으로 보내왔다. 눈물이 났다. 매일 바뀌는 잠자리와 음식,이틀 단위로 바뀌는 시차. 유럽에서 조금 적응하려니 이번엔 대서양을 건너 플로리다에 와 있다. 또 한번 모든게 뒤집혔다. 이번에는 혹독한 더위와 싸워야 했다. 피부는 벌써 원주민 수준으로 타버렸고 체력은 바닥을 내보였다. 된장찌개가 그리웠다. 미국에서 끝내 된장찌개를 먹지 못하고 우리는 일본,중국,말레이시아를 치고 빠져야 했다. 더위를 먹어서 파인애플을 소금에 찍어 먹은 기억외에는 별로 기억나는게 없다. 편집을 한참하는데 편집실밖에는 낙엽이 떨어졌다. 그렇게 그렇게 다큐3부를 방송하고 나니 12월겨울의 중턱에 와 있다. 한 해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백야의 코펜하겐도 라인강의 숭어떼도 힘들었던 2009년의 추억속에 묻혀버렸다.
    2010-01-13